일상에서 접하는 우상숭배 문제들에 관한 보충

조회 수 5585 추천 수 93 2008.10.16 14:06:17
일상에서 접하는 우상숭배 문제들에 관한 보충
(박정란님과의 의견 차이에 관해)


본 사이트 #131 글 “일상에서 접하는 우상숭배 문제들”이라는 글에 대해서 멀리 독일에 계신 박정란 자매님께서 댓글을 길게 달아 주셨습니다. 특별히 “전반적인 흐름에는 저도 근본적으로 별 이의가 없지만 항상 구체화되면 제가 많은 부분과 충돌”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글이 대체로 긴 편인데다 마침 유사한 주제의 질문을 몇 번 다룬 적이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해선 가능한 짧게 쓰려다 보니까 충분히 오해를 살만했습니다. 또 다시 보니 제 문재(文才)가 모자라 진의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자매님 뿐 아니라 방문자님들에게도 더 자세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매님의 댓글의 초점은 대별하면 두 개로 모여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신자는 세속적 행사의 형식보다는 그 내용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과 또 오히려 교회 안에도 형식은 기독교적이지만 내용은 우상숭배적(기복적)인 것이 성행하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의견에는 저도 절대적으로 동의하며 또 항상 그런 부분을 이런저런 글을 통해 강조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구체화되는 부분에서 오해 내지 상충되는 의견을 드러내었으므로 지적하신 개별 문제별로 저의 보충의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댓글 1)

예를 들어 요가가 힌두교문화에서 나왔지 힌두교에서 나온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 일단 해산 후에 요가를 통해 몸 근육전체의 긴장과 스트레칭을 위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힌두교적인 명상을 하는 이는 힌두교의 종교인들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명 1)

이 문제는 우선 본 사이트# 124 “신자가 요가를 배우면 안 되나요?”에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꼭 함께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가라는 명칭이 힌두교 신 이름에서 나왔고, 그 출발도 신과 접신하려는 목적이며, 그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비우는 과정에서 요가 동작도 고안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동부 기독교사이트 아멘넷(www.usaamen.net)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일부 미국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체육과목에서 요가수련을 시켰는데 명상 시간이 포함되었다고 기독교 학부모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요가는 분명히 힌두교에서 나왔고 또 그 내용 일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힌두교와 힌두교 문화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선 예배 시간에 현대전자 악기를 동원해서 빠른 템포의 가스펠 송을 부르며 박수치고 춤도 춥니다. 그래서 요즘 불교도 비슷한 방식으로 찬불가를 작곡 연주하여 예불 드리는 중이나 포교 활동에 응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복음 찬송가 자체를 불교가 따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타 종교인이 기독교에서 배워 인용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는 단순히 예배 중에 전자악기를 사용하여 현대 음악을 연주하고 박수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복음 찬송가 자체는 기독교이지 기독교 문화가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힌두교적 내용이 명시적으로 엄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은, 즉 요가라는 명칭으로 정식으로 학원에서 가르치면 그것은 힌두교문화가 아니라 힌두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요가 선생에게서 요가 스트레칭 동작 한두 개를 직접 배워 지금도 아침마다 집에서 혼자 하고 있습니다. 즉 요가 운동에 건강상의 장점은 분명히 있기에 그 장점만 따로 떼서 자기 운동에 응용하는 것은 힌두교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임산부로서 몸을 회복하는 운동 교습소가 자기 동네에 마침 요가뿐이고 꼭 그것을 해야겠다면 가서 하셔도 됩니다. 단 요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은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또 엄격히 따지면 요가의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경우에 처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넘어뜨리거나 또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평생을 두고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재 요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습소든 요가가 힌두교에서 유래했고 힌두교 명상도 겸한다는 사실을 아는 불신자가 한 명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못합니다. 그렇기에 명시적으로 요가를 가르치는 곳에서 기독교인이 명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댓글 2)

그리고 전 진심으로 우리 독일교회와 한인교회에서 "상"을 당했을 때 함께 하는 조용히 고인을 생각하며 '묵념'하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제가 고인과의 교회 안에서의 교제의 상태 점검 과 부활과 죽음을 다시 하나님 안에서 정리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묵념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라기 보다는요.

(해명 2)

저는 묵념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모든 행사에서 사회자가 묵념을 인도하면서 주로 어떻게 말합니까? “고인을 위해서 (혹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지금부터 잠깐 묵념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장례식이든 행사에서 서서 기도를 할 때도 자연히 조금 고개를 숙여지기에 외견상 나타나는  형식에선 묵념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묵념과 기도의 내용적 차이는 무엇입니까? 신자의 기도에는 절대로 이미 죽은 망자에 대해 명복을 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자매님의 말씀대로 고인과의 생전의 관계를 회상하며 잘못을 회개하고 또 천국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키우는 기도를 합니다.(본 사이트의 # 129 “장례식과 우상숭배에 관하여”의 글도 함께 참조 바랍니다.)

제가 묵념보다는 서서 기도를 하라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묵념에 참여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비기독교들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국군의 날에 참석해 기도해도 된다고 말한 것은 제 답변에서 밝힌 대로 행사 자체가 우상숭배의식과는 다르며 나아가 군인들 전체의 수고와 희생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지 개인적으로 망자에 대해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견상 보이는 행동은 묵념과 같기에 자매님의 말씀처럼 장례식에서 묵상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거리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의 답변은 불신자들이 그렇게까지 세밀히 알지 못하는 데도 너무 세분했다는 점에서 조금 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맡은 목사 입장에서 인터넷의 공식 사이트에 공개적으로 올리는 글에는 오류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고 또 엄격하고도 정밀하게 구명해서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질문하신 분도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맞도록 구분해서 답변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댓글 3)

개천절하면서 단군의 자손이다 라고 하면 속으로 아! 맞어! 한 3500년전 쯤에 야벳의 후손들이나 함의 후손들이 동으로 동으로 말타고 달려갔지.. (독일 학자들에 의해 추정되는 내용이니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해명 3)

개천절은 한국 민족이 단일 민족으로 보존되어 온 것을 경축하는 날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가 건국된 것을 기념하는 날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독립전쟁에서 영국이 패전을 선언하고 식민지에서 해방시켜준 날을 기념하는 미국의 독립기념일과는 다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로 치자면 사실은 광복절입니다.

개천절은 분명히 신화에 불과한 단군을 기념 숭배하는 날입니다. 동물이 천사와 관계를 맺어 인간이 태어났다는 설화는 분명히 비성경적으로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진리와 위배 됩니다. 나아가 단군교라는 우상 숭배 종교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이 일부러 단군 흉상을 파괴시킬 필요는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군교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순전히 역으로 따지면 타종교인이 교회에 찾아와 십자가 형상을 파괴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참하는, 혹은 부득이 참여하더라도 성경적으로 위배되지 않는 방안을 찾아보지도 않고 개천절 행사에 참여해 모든 절차대로 따르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질문자님이 궁금해 하신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댓글 4)

제게 애통하고 너무나 힘든 것들은 불교, 유교, 문화적 전통, 관상 그 자체보다 이들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인간의 약한 체질과 악함에서 나오는 그 관계성 그 운동성을 교회 안으로 가져오며 이에 대해 전혀 문제성을 느끼지 못하고 나중엔 그것을 오히려 발전시켜서 교회 안에서 사실은 악랄하도록 교회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많은 현상들입니다.

전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하던 기본 속성 즉 모든 잡신에게 아양을 떨어 (나의 선조는 나를 보호하겠지) 등등은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져와 하나님께 마치 무당에게 돈을 주어서 나의 안위를 구하자 라는 것처럼 하나님(정확히는 수복과 안위죠?)을 돈으로 사려는 시스템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설교와 목회에 적용되어 말씀 '하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라'를 악용하여 그리스도를 팔아먹으며 온갖 신자들을 우려먹고 신자들로부터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며 멀게 하는 작금의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해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명 4)

한 가지 언급만 빼고는, 비록 구체적으로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자매님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 의도에는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 또한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으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했었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문제의 언급은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만 만들었음”이라는 부분입니다. 저도 제사 거부가 순전히 외적 측면에선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너무 포용성이 없다는 점을 보였다는 점은 그런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사 거부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설명함에 부족했고 제사가 나름대로 갖는 일부 장점마저 무조건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제사 거부는 앞으로도 계속 주장되어져야 합니다. 진리를 타협하면서까지 전도하거나 기독교 이미지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제사 거부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설명을 해줄 필요는 있어도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본 사이트 # 49 “왜 제사를 지내면 안 되는가?”의 글을 함께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사를 지내게 하는 천주교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5)

전 한국 신자들이 오히려 밖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라기 보다는 민족성자체가 다른 사람의 보는 관점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보다 중요한 만큼 철저히 밖에서 들어온 우리가 정말로 헤어나기 힘든 사회적 문화적 속성이 얼마만큼 교회로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해명 5)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바로는 교회 안에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 신자가 밖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는 문제보다 더 혹은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더더욱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현재 기독교 및 신자가 대내외적으로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복음의 변질 때문이라고 봅니다. 소위 개독교가 기독교로 다시 환원되기 위한 방안도 대외적인 이미지 제고 작업보다는 복음이 바로 그리고 굳게 서는 것뿐이라고 여러 글에서 밝혀왔습니다. 복음이 바로서고 또 모든 신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지엽적인 여러 문제들에서 자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영적 분별력도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이 어떤 상황에 있든 간에 신자는 세상에서 항상 정말로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서있어야 하며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고 이타적인 희생을 감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타종교인 아니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세상 사람들과 사는 방식이 정반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 목표와 세상사는 가치관이 불신자들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을 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최소한 성삼위 하나님이 모욕되거나 그 이름이 망령되이 알려지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타종교의 우상 숭배 의식이나 세속 문화에 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온당하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꽉꽉 막힌 고리타분한 기독교 신자 혹은 광신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기독교나 예수님이  오해 받도록 행동해선 안 됩니다. 쉽게 말해 “기독교가 힌두교 불교 등 타 종교를 인정 하는가보다.”라는 평을 듣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종교인과 교제는 해야 하고 전도하기 위해 더더욱 사랑으로 섬겨야 하지만 타종교의 가르침, 그 중에서 특별히 구원 교리는 절대 인정해선 안 됩니다. 요컨대 신자가 세상에서 비방과 멸시를 받고 또 기독교가 편협하고 배타적이라는 평을 받더라도 진리를 끝까지 수호해야 합니다.

(댓글 6)

한국 고전음악을 이용한 많은 좋은 찬양들이 나온답니다. 물론 서양적인 기술을 적용하지만~~~

(해명 6)

인간이 하나님의 진선미를 재현할 수 있는 일반 은총은 반드시 질서가 있고 규칙적입니다. 제가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은 숫자로 대체해도 아주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모습입니다. 음악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이, 심지어 과학도 그러합니다. 과학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현상과 그 운행법칙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것인데 하나님이 피조세계 자체를 질서 있게 만드셨기에 과학도 질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 고전음악을 이용한 찬양들이 많이 나오는 줄 압니다. 또 그런 찬양이 한국인의 정서에 호소하는 친근감도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고전음악의 음계 자체는 불규칙적입니다. (그 자체로 음악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한과 슬픔을 표현해 내는데 아주 적합했고 또 당연히 무속 의식에 응용된 부분이 상당히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초적 지식을 갖고 한국 고전 음악을 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국 고전 음악이 찬양에 이용되어선 안 된다는 뜻도 결코 아닙니다. 찬송가란 우선적으로는 하나님 그분을 찬양 경배 감사하는 것이어야 하며 부차적으로 그분의 위로를 구하며 기도하는 내용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찬송에 그분께 기도하기 위해 인간의 고뇌를 표현하는 내용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식 찬양 곡조라고 구태여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농악 같이 흥겹고도 귀에 익은 전통 가락과 박자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곡조나 가사의 찬송가도 결국은 신자가 불러 줌에 따라 좋고 나쁨이 판별됩니다. 정말로 영혼에 감동이 넘치는 은혜를 느끼면 계속해서 널리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은혜가 없다면 금방 도태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오직 그 내용에 따라 오랜 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찬송가의 경우는 거기다 신자들이 예배 때에 사용하기 위해 선곡하는데  따지고 보면 성령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셈입니다. 한국 고전 음악으로 만든 찬양도 아직까지는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실험적 시도라는 측면이 더 강하기에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예배에 정말로 은혜를 끼치는지 여부는 성도들이 알아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인정된 찬양이라면 어떤 전통 곡조를 응용했던 관계없이 하나의 훌륭한 찬양으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댓글 7)

저도 전적으로 기본적인 흐름과 말씀하시며 권면하시는 방향은 동일하게 봅니다. 제가 보기엔 결론적으로 오히려 한국에서는 종묘제악은 죽도록 거부하되 (제겐 이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종묘제악의 의도는 교회로 가지고 들어 온다입니다.

(해명 7)

종묘 제례악의 경우는 제 답변에서도 밝혔지만 제사를 위한 목적으로 작곡되었을 것이므로 아무리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종묘 제례악만 따로 모아 연주한다면 신자가 참석해선 안 됩니다. 물론 신자라도 전문가적 입장에서 비교 검토하려는 목적으로 참석하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대신에 다른 전통 음악과 함께 제례악 한두 개가 섞인 레퍼토리라면 구태여 그것 때문에 참석하지 말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세속의 문화에 접근할 때의 원칙은 바울의 것과 동일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분의 나라를 더 확장할 수 있는 관점으로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4-13)

그리고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절대로 양보, 타협, 왜곡, 조정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바울이 빌립보 신자에게 권면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8,9)  


이렇게 해명하고 보니 사실은 자매님의 의견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전번 답변 글이  세밀하지 못했던 제 불찰 탓입니다. 자매님께서 구체적으로 댓글을 달아주시는 바람에 오히려 서로 간에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샬롬!

10/15/2008

사라의 웃음

2013.01.20 21:47:10
*.109.85.156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타협되거나 양보될 일이 아니기에 여러 오해들과 여러 비난도 함께 받아야하는가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저 하는 그 의미를 점점 더 깨달아가고 그리할 때 십자가의 진리가 새록 새록, 그 아름다움이 그 선하심이 그 귀하심의 깊이와 너비의 어떠함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또 깨닫고 그러하기에 십자가 앞에 점점 더 엎드릴 수 밖에 없게되는 성도가 되어지길 기도하게 됩니다.

배승형

2013.01.21 02:42:33
*.233.119.247

타협과 양보를 하였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았겠죠
십자가 복음 진리 때문에 받는 미움이라면 그 미움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 될 것입니다.

이주연

2014.04.01 09:03:24
*.144.222.191

기독교 문화에 대해서 혹 자료가 있을까 싶어 검색하다 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많은 스트레칭 동작중에 왜 요가스트레칭을 하시는지 이해할수 없으며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중도적 입장도 많으시고 어떠한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말씀해주시면서 신자들이 스스로 선택케하는 글들도 종종 보게 됩니다.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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