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조사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성경의문 1)

조회 수 2478 추천 수 89 2009.01.12 14:35:31
인구조사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성경의문 1)

[질문]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들이 있어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대충 정리를 한 것도 있지만 아직 명확한 것이 아니라서 목사님의 견해로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역대상 21장 1절에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나와 있지만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 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다윗 인구조사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보통 목사님들은 사단이 범죄케 했고 다윗이 교만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요..)

[답변]

동일한 사건을 두고 성경의 한 구절은 사단이, 다른 구절은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누가 그 행위의 주체인지 혼동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답은 두 가지 측면을 잘 따져 보면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인구조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의사결정, 사단의 영향, 하나님의 주권 셋의 상호 역학관계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의 배경

고대 왕국들이 인구 조사를 하는 주된 목적은 세금을 거두고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아구스도 항제 때부터 식민지의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호구조사를 한 것이 그 예입니다.(눅2:1,2)

이스라엘의 경우는 조금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전후로 이뤄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을 수행할 인원을 점검하고 또 정복한 가나안 땅을 지파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할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쟁이든 인구 조사든 둘 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그렇게 하라고 명했기에 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해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신17:16)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현실적 필요에 의해 왕정제도를 허락했지만 그 제도의 모든 운용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정주의 정신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두는 것 즉, 군사 숫자를 늘리는 것 같은 인간적 무력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인구조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여부였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지 않는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이므로 그분께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현명했던 왕 솔로몬은 하나님이 왕에게 명시적으로 금지한 금령 세 가지를 다 어겼습니다. 말의 숫자를 늘리고, 아내를 많이 두었고, 은금을 쌓아두었습니다. 군사력과 정치력과 경제력을 늘려서 나라를 부국강병 시키긴 했지만 전부 자신의 인간적 능력에만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인격에 하자가 있으며 싸움만 잘하는 요압 장군마저 말리는데도 강행했습니다.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상23:3) 전쟁을 잘 치를 만큼 인구가 늘어나게 해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역대하의 기록에 의하면 요압은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대하21:3)라고 아예 왕을 야단쳐가며 말렸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려 했던 때는 바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삼상22:1)하시고 또 “가드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던”(대상20:8) 이후였습니다. 한 마디로 당면한 전쟁이 하나도 없는 태평성대에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그럼 그에게는 두 가지 목적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 큰 전쟁을 준비하거나, 자신의 위업을 대내외에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기로 한 가나안 전역 즉, 단에서 바엘세바까지를 이미 다 차지했습니다.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면 하나님이 주시기로 정하지 않은 다른 민족을 침범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스라엘의 무력을 대내외에 과시해서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자신의 지략과 군대로 이겼다고 스스로 자랑하려는 뜻이 됩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골리앗과 싸울 때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소년시절의 순수하고도 굳건한 믿음이 도리어 변질 된 꼴입니다. 분명 그는 스스로 교만해져 하나님을 잠시 외면 거역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24:10)

사단과 하나님 누구의 책임인가?

이처럼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행동의 주체를 왜 사단 또는 하나님이라고 다르게 표현했을까요? 만약 하나님이 주체라면 당신을 따르는 왕을 범죄에 빠트렸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먼저 알아야할 것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 성경이 다르게 기록한 것을 두고 각 저자의 저작목적과 주안점이 다르다고 간단히 해석하고 치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칫 각각의 진술 중에 한 쪽만 진리이거나 혹은 진리에 더 가깝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의 직접적 저자가 인간이고 또 각 인간 저자가 갖고 있는 체험, 지성, 영성, 신학 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기록되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모든 진술은 인간을 통해 계시된 그분의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간혹 상호 모순 내지 상충되어 보이는 표현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오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성경의 기록 그대로 다윗은 사단이 격동시키고 또 하나님이 감동시켰기에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사단과 하나님이 마치 경쟁 내지 협력하듯이 인간더러 동일한 행위, 그것도 죄를 범하게 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절대로 사단과 의도적으로 협력해서 인간더러 악을 행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욥이 겪는 연단과 아담의 타락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사단의 일을 묵인 내지 허락은 하되 사단의 뜻보다 더 넓고 깊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뿐입니다.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하여 당신이 의도하신 선으로 이끄십니다. 세상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단은 단순히 욥을 망하게 해서 하나님을 부인케 하려 했고 또 아담을 타락에 빠트려 자기 종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용인하신 후에 욥을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켰고, 아담은 가죽 옷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시키는 승리를 예비해 놓으셨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욥과 아담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성경이 사단이 격동시키고 또 하나님이 감동시켰다고 동시에 진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진술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눅4:1,2)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에게, 그것도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까? 마귀의 의도를 다 알고도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이루시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한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단은 이제 사방의 대적을 다 무찌르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굳건한 바탕 위에 세워서 의로운 통치를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그 주역인 다윗을 넘어뜨리려는 목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의 그런 정도 의도는 다 아시고 그대로 되도록 두시되 다윗과 이스라엘 국민들을 다시 온전한 믿음 위에 세워서 당신께 더욱 헌신하도록 만드실 목적이었습니다.

행동의 진짜 주체는 다윗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비록 사단과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었다 해도 행동의 실제 주체는 다윗 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단의 일을 도모한다는 야단을 맞은 사건을 따져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을 듣자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께서 예수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렸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3,24)

예수님이 그렇게 야단을 쳤지만 물론 베드로가 사단일 리는 없습니다. 사단의 격동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에서 베드로 본인은 사단의 격동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리 또한 전혀 없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그 반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고는 여겼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단지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주 의로운 생각에서 발단된 말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지정의 범위 내에서 그로선 최선을 다한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행동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베드로 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에선 사단과 하나님의 엄청나고도 신령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투라고 해서 하나님이 질 때도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절대적 주권 아래에서 때로는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인간에게 보이게 해주실 때도 있을 뿐입니다.

만약 베드로의 이 행동을 성경이 아니고 일반적 책이나 다른 종교의 경전에 실렸다면 그 저자는 분명히 아주 의롭고 본받을 행위라고 표현했을 것 아닙니까? 인간으로선 오직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며 또 인간 행위의 의로움만 따져서 저작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밝혀 놓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런 의로운 행위도 사단의 악행, 그것도 구세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아주 큰 죄악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고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진리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니고는 베드로의 이 말을 두고 사단의 악이라고 규정, 아니 야단칠 수는 절대로 없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방금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마 약간 흥분했을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영적 수준에 대해 흡족해 하며 순간적으로 교만에 빠졌을 수 있습니다. 내친 김에 예수님의 칭찬을 더 듣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의도적으로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그런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인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입니다.

사단은 그 틈을 노렸습니다. 자기의 대적인 예수님의 수제자의 영적 수준을 떨어트리고 또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의도하는 무슨 일이든 막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인간적 의리와 영적인 교만에 편승하여 그를 더욱 의롭게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일에 즉, 예수님을 도우려는 열정에 더욱 사로잡히게 만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도 따지고 보면 그의 영적인 수준이, 쉽게 말해 믿음의 세기가 그리 굳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동안 스승을 따르며 보고 배운 것을 자신의 지정의를 다 동원해서 분석하고 판단했던 결과를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 고백의 행동의 주체 또한 확실히 베드로였지만 그가 동시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것도 분명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결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해보고 결정한 것인지는 불명합니다만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위대한 고백을 한 직후에도 사단에게 넘어갔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기도하는 가운데도 사단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여 얻은 해결책에도 사단의 방해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실수와 죄악과 사단의 방해마저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목적은 분명 함께 합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아니 최소한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도만 있으면 말입니다.  

베드로처럼 다윗도 하나님이 사방 대적을 물리쳐 주자 잠시 흥분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일을 다 이루게 되자 부지불식간에 자기 믿음이 대단하다는 영적인 교만에 빠졌을 수 있습니다. 또 이참에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벌리자는 열정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다시 잡고 국토를 더욱 넓히려는 의도이므로 인간적으로만 보면 베드로처럼 아주 의로운 결단이었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 틈을 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 묵인하되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당신께 겸비하도록 만들려 했습니다. 이 사건이, 비록 중간에 이스라엘이 큰 징계를 받았지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다윗이 왕인데도 값을 주고 사서 여호와께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결론 난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사단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동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 하나님의 의도대로, 때로는 그 중 일방을 때로는 둘 다에, 따른 결과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가 개입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여부일 뿐입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결단과 사단의 조종만으로 일생을 끝냅니다. 반면에 신자는 자신의 행동과 사단의 방해와 하나님의 인도 셋을 다 경험하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생을 살게 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영역 아래선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자신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선 불신자는 사단의 격동을, 신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사는 자입니다. 불신자는 심지어 그런 사실조차 모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물질계 영역 안에서만 묶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른 자이며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참 신자라면 최종적인 승리는 항상 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사안이나 존재는 사단을 포함하여 이 땅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방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나 다윗의 경우처럼 아주 집요하게 평생을 두고 따릅니다. 불신자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이미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기에 사단이 구태여 별다른 시험이나 유혹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단이 항상 노리는 먹이 감은 신자뿐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유혹이 가장 잘 먹히는 경우는 오히려 선하고 의로운 일과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하고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이미 신자가 된 입장에선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사단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사단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시키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무리 모든 행동의 주체가 자기일지라도 자신의 모든 생각, 말, 행동이 사단 아니면 하나님 한쪽의 영향 아래 들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순간적으로 넘어갈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승리케 해준다는 사실 또한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요컨대 신자는 사단에게 유혹과 시험은 당해도 절대로 사단의 종으로는 다시 전락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권세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지간한 신자라도 사실은 베드로나 다윗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만큼 의롭지도 않습니다. 그들보다 더 큰 죄악에 수시로 빠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일만, 그것도 의로운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되기 더 쉽습니다.

사단에게 격동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지적처럼 하나님의 일을,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일인지 판단할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지 여부입니다. 또 현실적으로는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되고 교회에 덕이 세워지는지 여부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 업적이 크게 드러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지면 거꾸로 사단의 일에 넘어간 것이 아닌지 반드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행동의 주체는 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사단의 격동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감동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사무엘서 저자는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감동까지 분별했던 것입니다. 각자의 영적인 수준이 그렇게 달랐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에 각기 다르게 기록하도록 한 것입니다. 둘 다 진리임을 즉, 사단이 의도한 바가 일시적으로는 달성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후대 사람이 깨닫게 말입니다. 요컨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서로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2/2009

운영자

2009.01.12 14:56:12
*.108.164.34

질문을 주신 분이 신학생인지라 위에 기술한 부분들을 이미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방문자님들도 함께 참조하시라고 간단히 답변하지 않고 상술했습니다. ^^

아가페

2009.01.18 11:02:25
*.216.87.225

명료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임마누엘!!!

사라의 웃음

2013.01.29 22:33:03
*.109.85.156

믿음의 고백을 한 후 인간적 의리로서 예수님을 만류했던 베드로의 야단 맞는 모습을 보며 베드로가 얼마나 머슥했을까?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미를 제대로 알 수도 없었을 터인데 얼마나 무색했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해 봅니다. 때론 인간의 의리로 말하고 행동하였던 것들이 잘못이라 지적 받을 때, 쉬이 인정되지 않고 그저 섭섭할 때가 무척이도 많았습니다. 아주 오래 오래 지난 후에야 아, 십자가가 실종되어진 생각과 말과 행동이였구나~~ 하며 회개하게 됩니다만... 혹여 인간적 생각일까 보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쥐, 하면서 입을 다물어 버릴 때도 자주 있고요~~ㅠㅠ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도 희한하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넓고 크시기에 그러하신가 봅니다. 사단의 훼방까지도 또 커다란 원을 그리시며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심은, 자신을 섬세하게 바라보며 십자가가 실종되어진 생각과 말들이였음을 깨닫도록 도우시며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사단의 훼방으로 인한 잘못들까지도 커다란 원으로 껴안으시며 자꾸만 십자가 사랑을 가르쳐 주시고프시어 그리하시는 것을 배웁니다. 나의 연약함 무능함 어리석음 보다 그 분의 크심과 넓으심이 덮으시며 또 덮어주시며 알려주시는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인지 또 배우며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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