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잘 믿어서 복을 받았는가?

조회 수 1982 추천 수 74 2009.03.18 18:42:32
유대인들은 잘 믿어서 복을 받았는가?


[질문]


우리 목사님께서 유태인에 대해 말씀 하시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느 다른 종족보다 크므로 오늘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재물의 복을 받았고 문화, 과학 등 요소, 요소에 그들의 힘이 막강하다고 하시며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을 잘 믿어 복을 누리며 살자고 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없는 그들의 믿음으로 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어지는데 .... 잘못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 되어 집니다.

[답변]

질문자님께서 이미 정답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없는 믿음으로 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는 (단연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지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 받은 특별한 민족으로서 우월적인 지위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왜곡된 선민주의(選民主義 Zionism)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목사님들이 이스라엘의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합니다. 만약 그런 설교가 합당하려면 예수를 믿지 않는 믿음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현실적 축복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기 민족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열정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구약성경을 암송하고 자식들에게도 쉐마(신6:5)를 가르치며 엄격한 도덕 교육을 시킵니다. 안식일과 구약의 계명들을 철저히 준수하며 금식과 구제와 기도에 능합니다.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말입니다.

그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22:3)고, 또 심지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5)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의 뜻마저 “큰 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비방하면서 교회를 핍박하기에 정말 열심이었고 스데반이 순교하는 현장의 막후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행7:58)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삼일 간 실명(失明)을 하여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한 후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로 자처하며 낮아질 대로 낮아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전부 배설물로 여기면서 어떤 핍박과 위험에도 생명을 무릅쓰고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 이름도 “작은 자”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가 사울이었을 때는 정말 하나님을 최고 열심히 믿었지만 예수를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최악의 반대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유대교 울타리 안에서 자기들 민족 신인 여호와를 믿은 것뿐입니다. 십자가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이었습니다. 현재 유대인들의 믿음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일방적이고도, 독선적인 짝사랑일 뿐입니다.  

교회 강단에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선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만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히12:2) 다른 말로 목사님들이 유대인을 좋은 믿음의 본보기로 가르쳐선 안 됩니다. 그들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에 현실적으로 아무리 풍요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설교와 성경공부가 너무나 성행하고 있고 신자들마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 질문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선 몇 가지 과제도 함께 따져봐야 합니다. 유대인이 가진 신앙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는 복이 무엇인지, 유대인들을 하나님은 왜 택했는지, 그 택한 결과는 당신의 뜻대로 이뤄졌는지, 그렇지 않다면 현재 유대인들이 누리는 현실적 풍요의 원인은 무엇인지 등을 순서대로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에 그들의 믿음은 본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현실적 풍요도 성경의 하나님과 연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신자들이 나머지 과제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해 예의 설교에도 아무 의심 없이 아멘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에 제기한 과제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답변에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는 복은 현실적 풍요와 안락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결과 내지 목표로 현실적 축복을 전부, 최우선, 강조하는 가르침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 쪽에선 그런 류의 가르침이라고 인식되면 일단 거리를 두고 곰곰이 따져보셔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아무리 믿음의 훈련을 권면, 강조하려는 선한 의도라 해도 믿음의 본질을 오해 내지 호도시킬 우려가 있기에 더욱 삼가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풍요케 되는 것은 믿는 자가 복을 받은 결과적 모습 중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것도 받은 물질로 이웃을 도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세상 앞에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그럴만한 사람만 하나님이 택하여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나눠주십니다. 신자가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성질이 절대 아닙니다. 잘 믿는 것과, 사실은 대개 교회 활동에 성실한 것과 혼동이 되어 있지만, 비례해서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과적 모습 중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은 발생 빈도(頻度)가 아주 드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정작 증거해야 할 것은 죄에서의 십자가 구원과 구원 이후의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죄악과 사단을 멀리한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된 모습이 불신자들 앞에 드러나야 합니다. 또 인간적 수단과 세상 물질에 구애 받지 않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모습이 주된 증거가 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간구한 내용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혹’ 위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주로 환난 가운데 있고 위로는 아주 가끔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가끔 받는 위로도 사실은 환난 중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케 하려는 목적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현실적 풍요와 안락보다는 환난과 핍박에 처할 때가 훨씬 많다는 뜻입니다. 당시 기독교가 핍박 받는 중이라 고린도 교회도 환난을 더 많이 겪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될 AD 55년 당시는 아직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강론하신 신자가 받을 복의 내용이 풍요가 아닌 환난이 주였지 않습니까? 팔복 강화에서 신자가 받을 복이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천국과 위로와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는 것 등이었지 않습니까? 세 번째로 마음이 온유해서 받는 복인 땅의 기업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지 땅 부자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복들을 받을 수 있는 통로도 우리 상식과는 다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청결하되 의에 주려야 하고 이웃과 화평하여 긍휼을 베풀어야 하며 심지어 주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생활에 열심을 내면 현실적 풍요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눈을 닦고 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더할 나위 없는 지고(至高)의 복입니다. 신자가 누릴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를 대상으로 그런 복을 가르쳤습니까? 방금 전까지 모든 병과 약한 것에서 고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현실적 복을 받을 만큼 받은 자입니다. 그런 복과 비교도 안 되는 최고의 복에 관해 말씀하셨으므로 현실적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원문이 감탄조의 운문 형식이기에 예수님은 기쁨에 겨워 흥분하면서 천국을 누리며 보는 복을 주겠다고 소리친 셈입니다. 한마디로 암이 낫는 것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복이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팔복강화’ 사이트의 글들을 참조 바랍니다.)

그럼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예컨대 신명기 28장의, 복들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선 당시의 이스라엘은 지금의 신자와는 형편이 달랐습니다.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오기 전이었습니다. 또 당시는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 이스라엘을 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이 유일한 자기 백성들에게 당신께서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주고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을 확고하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현실적인 복락을 믿음의 보상으로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지 않아 그런 복을 사실상 제대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뜻은 그들로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었고 복은 그 결과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복 자체가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일차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성경문답 사이트 #4 “성경에 ‘그리하면 ...하리라’고 표현된 하나님은 조건부 하나님인가?”라는 글을 참조 바람)

신자가 환난을 주로 받고 혹 위로를 받으면 대체 믿은 보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를 믿어 영생을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자녀가 되어 그분 뜻대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존재가 거룩하게 바뀌며, 죄악으로 썩어가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결국은 한 알의 섞는 밀알의 인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그들의 방식은 틀렸다고 가르쳐야, 명시적이 아니라도 그들로 깨닫게 하여 찔림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살면 세상의 핍박은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신자의 믿음을 연단시키려 환난을 더 많이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 안에 살기에 자연히 세상의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모습이야말로 참 인간이 살아야만 할 완전한 본이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너무나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지적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그분을 따라 머리도 둘 곳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재물의 복도 함께 따라올 수는 결코 없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물론 때로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위로도 주십니다. 다메섹 도상 사건 이후로 그 수많은 환난을 겪었던 바울도 혹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성도들의 성숙과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만 살았기에 풍부도 그 목적에 부합되는 방향으로만 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실 뿐입니다. 잘 믿으면 재물의 복을 넘치도록 얻는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과 그 결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목적을 성경은 아주 명료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유대교와 기독교, 심지어 이슬람교까지 포함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이루어서 행하실 목적을 밝힌 것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삼아, 지나가는 통로라는 의미임, 모든 민족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 복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당신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도록 해서 그 일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 힘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따르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약속을 모세에게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즉, 다른 나라의 죄를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받은 은혜를 나눠주라고 명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방 족속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만드는 책무를 맡은 것입니다. 또 그런 직무를 잘 수행하려면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답게 거룩해져야 하기에 율법을 수여 받았습니다. 나아가 그 율법대로 잘 준행하면, 신명기 28장의 내용처럼, 현실적 풍요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더러 열심히 잘 믿으면 복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게 자신들을 가꾸어 제사장 나라의 임무를 잘 수행하면 복이 따라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그들은 이 소명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방족속을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이방신을 좇아갔습니다. 결국은 바벨론 포로가 되는 징벌을 받았고 4백 년간이나 계시가 끊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정말로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마저 실패하신 것입니까? 먼저 알 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따로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때부터(창3:15), 아니 그 이전부터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 계획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오직 만유의 충만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창조하였고 또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도록 하셨습니다.(골1:15-20)  

다른 말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도 아시고 그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실패토록 유도 내지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이스라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선택되었고 또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들만 세상에서 최고 높여 주리라는 착각 내지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의적(恣意的) 타락까지도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안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면 그 선택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또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신 7:7,8)

이스라엘이 가장 수효가 적기에 택했다고 합니다. 외적으로는 강대해질 조건이 없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가장 약한 민족이므로 하나님은 정말 큰 은혜와 권능으로 그들을 인도 보호했습니다. 세상 어느 민족도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신묘한 간섭과 이적을 직접 받은 경우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실적 축복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사랑을 너무 과신하여 도가 지나치게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현실적 축복을 받고도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뜻은 한마디로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영적 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실패할 줄 아시고도 하나님이 택한 또 다른 뜻은 달성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류 구속을 위해 십자가를 향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한걸음씩 신실하게 전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야에서 배역한 벌로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케 만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출8:2)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환경에 따라 믿음이 바뀌어선 안 된다는 즉, 환경과 전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잘 믿었다고 환경이 풍요로워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선 믿음의 보상이나  비례로 환경이 유복해지면 더 풍부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동원합니다. 다른 말로 환경에 따라 믿음이 변질되는 셈입니다. 신자의 자발적 순종을 시험하기 가장 좋은 길은 척박한 환경에 두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대로 환난이 주고 혹 위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조건 손해보고 가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또한 자칫 어쩔 수 없어서 하나님을 억지로 찾게 만드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출8:4) 광야 40년 동안에 도적, 강도, 질병, 독종, 맹수 등의 피해를 하나님이 다 막아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먹고 마실 필요는 채워준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풍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신다면 하나님을 억지로 찾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또 세상 안락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을 염려도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물질과 비교해서 더 귀하고 소중한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모로 따져도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복은 오히려 물질의 풍요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실패할 줄 아시고도 선택했다는 것을 역으로 따지면 실패할 민족으로 골랐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교만했거나 타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어떤 민족이 택해졌어도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실패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럼에도 완벽한 구원 계획대로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역사를 진행시켰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패할 민족이라면 그 실패 가운데도 하나님의 더 특별한 뜻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11,12,25,26)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고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을 얻고 맨 나중에는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마20:16)고 말씀하신 뜻과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에서부터 표적, 기적, 인도, 보호, 계시, 언약, 율법 등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직접적 권능에 붙잡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으로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역설적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대신에 그들로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성경문답 사이트 # 28 “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마20:16)의 의미와 그 적용은?”의 글을 참조 바람)  

이스라엘이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 민족의 신으로 믿는 데는 성공했고 하고 있지만(?) 성경의 삼위일체의 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선 아직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실패에는 앞에서 살펴 본 몇 가지 중요한 사항 외에도 쉽게 간과하는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심어놓고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듯이, 하나님은 인간이 여러 어려운 제약조건 가운데서도 반드시 당신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찾기 원하십니다. 가장 약한 민족이라 택했지만 단순히 최고로 약하기만 하면 그 또한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외부의 강제적 요인이 됩니다.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뛰어난 머리와 비교적 높은 도덕성과 굳은 의지력 같은 내면의 장점들을 허락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갈 바 모르지만 순종하며 떠날 수 있었던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우선 죄악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우르의 실상에 분명 양심의 가책과 영적 찔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력으로는 결행할 수 없는 생사를 건 모험이었습니다. 나아가 가나안과 애굽에서 그가 행한 여러 행적을 보면 아주 영민했던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삶을 사는 지혜와 도덕성과 종교성 등이 당시로선 분명 어느 민족보다 출중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가장 머리가 뛰어난 종족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가장 수효가 적으니까 지적 능력이라도 좋아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이겨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방 족속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면 그들 사이에 끼어 살아야만 하는데 수효가 적으면 다른 민족보다 지혜라도 앞서야 할 것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은 가장 먼저 이스라엘이 그 뛰어난 지혜로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잘 이루어 당신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셨습니다. 또 당시로선 수준 높은 도덕성과 종교성을 통해 당신을 진심으로 경외하기를 바랐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내면의 바탕은 충분히 마려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담이 그러했듯이 그 좋은 머리만 믿고 더 교만해졌습니다.

또 그 교만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기까지 하늘 높은 줄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인 빌라도 총독마저 예수를 무죄라고 변호했음에도,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마27:24) 하면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그 외침대로 피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나라에 다시 흩어졌으며, 이천 년 후에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터 참극마저 겪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랍 열방에 둘러싸여 나라의 존속을 걱정할 형편에 있으며, 본토에 있는 자보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진짜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나그네 같은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에선 끝까지 환난 중에 두는 것입니다. 최초 선조들 아브라함, 야곱, 요셉은 이방 족속들 사이에 우거하면서 지냈으며, 그 후손은 민족 전체가 사백 년간 이국땅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태평성대는 다윗의 말년과 솔로몬 때 잠시뿐이었고 남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거쳐서 로마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없어지자 이천 년간 유리했습니다. 광야 40년 방황의 50 배의 기간을 나라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믿고 또 가장 큰 은혜를 입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가장 큰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님의 또 다른 표상으로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믿음의 초점은 오직 “저희가 너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6절)에 모여 있지 않습니까? 모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것”(26절)이 믿음의 요체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믿음의 위인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본질이 애굽의 모든 보화는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을수록 재물 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주신다고 말한 셈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혹 위로 받지만 환난을 주로 받는다고 했으며,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는 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을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대신에 하늘에 소망을 두는 믿음이 바로 신자가 받는 근본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지금 현재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민족이 된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분께 받은 축복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수천 년간이나 세상 어느 지역에 버려 놓아도 나그네로 사는데 이골이 났던 것입니다. 거기다 머리가 아주 좋고 근검절약하며 가족끼리 민족끼리 화합하여 서로 자조하는 데 최고의 기량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생존의 전문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녀에게 반드시 손을 움직여 즉, 노동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을 하나씩 익히게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고급 직종을 해도 만에 하나 굶어죽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 실제로 좋은 가문에 부러울 것 없었던 바울도 장막 만드는 기술자로서 그 일을 하며 자비량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지 않습니까? 좋은 머리에, 강인한 의지력에, 민족끼리 단결력에, 근검절약하는 도덕성에, 모두 돈 버는 기술 하나씩 가졌으니 돈 벌고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잘 믿으면 돈 벌게 해준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돈은 돈을 벌려고 밝히는 사람이 가장 잘 법니다. “네 보물 잇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생존에 현실적으로 일차 필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돈입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에 즉, 돈 버는데 전문가였지 하나님 믿는 전문가라서 복 받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평안한 가운데선 하나님을 진정으로 또 절실하게 찾는 자가 없습니다. 돈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데 제일 큰 방해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믿음에 방해되는 일을 하시겠습니까? 재물과 자식을 한순간에 다 잃고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은 순전한 믿음의 사람 욥이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하게 주심이니라.”(욥12:6) 돈독이 오른 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벌도록 하나님이 묵인하셨는데 사실은 그분을 진노케 하는 강도의 장막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부를 누린 지혜의 사람 솔로몬이 죽기 전에 달라고 간구한 두 가지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순전한 마음을 주시고 재물로 시험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재물이 너무 없어도 죄를 범하게 되기에 순전한 믿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순전한 믿음의 근본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일용할 양식만으로 자족하는 지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돈 버는 전문가라서 돈을 잘 버는 것입니다. 그들과 언약한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인데도 그들 스스로 민족의수호신 정도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외면 거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재물의 축복을 주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로마서 11장의 기술대로, 종교적 율법과 현실의 축복에 매여 마지막까지 복음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표본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마지막 때에 상당한 구원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와 방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대신에 그들은 아직도 배교의 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습니다.

대표적 예로 미국 할리우드를 주도하는 이가 유대인들로서 자유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사조를 앞장서서 퍼트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동성애 결혼이나 낙태 허용 의견을 대중에게 가장 강력히 어필하는 곳이 할리우드인데  그 할리우드를 주도하는 이가 유대인들입니다.    

노파심에서 붙인 첨언

한 가지 첨언 할 것이 있습니다. 한국을 제 2의 이스라엘이라고 흔히들 칭합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비교적 보수 복음주의 신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선교사도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파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실질적 열매는 한국 선교사들이 더 많이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확하신 뜻과 계획은 감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한민족이 현 세대에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한국 민족의 Community가 형성되어있는 나라의 숫자가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특별히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정신적 영적으로 이끌어야 할 교민 교회가 과연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자기들 민족의 신 즉, 잘 믿으면 복 받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바람에 그 형벌마저 한민족이 세계 각처에서 계속 유리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주 동기가 주로 돈벌이와 자녀교육인지라 교민 교회도 그 두 가지를 집중 격려하면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한 아브라함 꼴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어 재물의 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본받자고 가르치면 대체 어떻게 됩니까?  

진정으로 제 2의 이스라엘이 되고자 하면, 수효가 적기에 택함을 받아서 이방인들 사이에 두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아주 진지하게 그리고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돈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은 나그네 같은 삶이므로 천국 소망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결국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인생으로 끝나야 합니다. 나아가 후손들도 현실적으로 출세시키기보다는 반드시 동일한 믿음의 근원으로 키워야 합니다.

한민족 또한 이스라엘처럼 좋은 머리, 비교적 높은 도덕성, 강인한 의지력, 근검절약하는 정신, 상부상조하는 관습 등을 갖추었기에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생존과 번영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유대인들이 했던 비즈니스를 물러 받아서 성공적 이민 사례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통이 잘 믿어서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오해하거나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치면, 이 또한 이스라엘의 실패 전철을 따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믿어서 하나님께 받는 온전한 복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말고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팔복을 두고 다른 데서 복을 찾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거나 아예 무시한 것입니다. 한국 민족이 팔복강화를 제대로 이해하여 지킬 때만이 온전한 제 2의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3/18/2009

운영자

2009.03.18 18:45:39
*.104.238.244

이멜로 개인적으로 들어온 질문입니다.
정답은 질문에 이미 나와있고 또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세부적으로 정확히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

김광찬

2009.03.19 12:32:15
*.169.140.231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3.02.07 22:57:53
*.109.85.156

오래도록 강단으로부터 배워온 말씀들은 정말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기에 세계를 휘두를만한 물질의 축북을 받았고 또 그 나라에 예수님이 오셨다고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대로 복의 근원이 되어진 민족이기에 세상에서 형통한 복을 수북히 받았다라는 설교가 정말이지 아주 세뇌되어진 듯 합니다. 그러하니 예수님은 간곳없고 아니, 어쩌면 강대상 너머의 상징처럼 십자가만 세워지면 되고. 설교 가운데 살짝 살짝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이제 죄도 말끔히 사라졌으니 이스라엘처럼 열심히 하나님 말씀 의지 동원하여 잘 지키면 이 세상에서 형통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으니 열심히 종교생활하고 열심히 교회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고~~하고, 하고... 하고...

빛과 소금이라는 것을 세상형통과 동일하게 여겨지게끔 살그머니 머리속에 침투되어 심겨진 이런 야릇한 설교가 아직도 교회들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빛과 소금을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의미를 그저 썩어지는 밀알은 문자적으로 교회다는 것, 그리고 이런 저런 자신의 잘못으로 기안한 불편함, 죄의 열매들...까지도 모두 썩어지는 밀일이라 여기며 스스로 위로하는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아주 오래도록 그리 물들어 살아왔드랬습니다. )

예수님께서 작은 산위에서 기뻐 어쩔 줄을 모르시며 가르치셨을 그 팔복, 암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복도 아닌 진짜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 어떠한 길인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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