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요?(3-完)

조회 수 1011 추천 수 31 2011.01.23 00:27:59
5.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성경말씀이라면 어떻게 바울시대의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다르게 알고 있었을까요? 그 부패한 유대교를 깨기 위해서 바울사도가 기독교 교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지요? 신앙심은 점점 떨어지고 이런 의심만이 자라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단순히 부패한 유대교를 깨기 위해서 바울이 기독교 교리를 만들었다는, 그래서 바울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은 틀렸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그간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과 연구가 있었습니다. 또 수많은 책과 논문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일일이 그 내용을 신학적으로 열거 비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논의가 있게 된 이유부터 따져 들어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전혀 선행을 하지도 않고 또 성품도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교리를 예수님이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산상수훈 같은 윤리적 가르침을 주시고, 또 병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고, 천국에 관해서만 강론하신 후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은 주님 가르침의 핵심은 놓치고 자신의 종교 사상에 바탕을 둔 특유한 기독교 교리를 창안했다는 것입니다.

논쟁의 초점은 바울이 가장 강조했고 또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모입니다. 따라서 과연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전혀 없는지, 또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라서 그분의 가르침을 몰랐던 것인지 살펴보면 그런 주장의 타당성을 쉽게 검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답변을 얻지 못한 니고데모

유대인 관원이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밤중에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주님의 답변을 들었지만 그로선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요3:1-9) 당시로선 가장 경건한 종교인이자 합리적 지식인으로 불편부당(不偏不黨)했음에도(요19:39)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요한복음서 기록이나 다른 세 복음서를 언뜻 보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예수님은 온전히 설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서 당신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구원의 길 즉,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 대해 부연 설명했습니다. 선행하라, 회개하라, 죄 짓지 말아야 천국 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이미 심판받은 것이라고도 했습니다.(요3:18)

무엇보다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 즉, 구원의 의미를 아주 간단명료하게 밝혔습니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또 성령이 오셔서 바로 그 죄를 책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 죄 사함 받는 것이 구원이기에,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 죄로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셔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했습니다. 또 성령은 세상 사람은 받지 못하고 저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은 저를 알 뿐만 아니라 성령이 그들과 함께 그 속에 영원토록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요14:16,17)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십자가 구원에 대해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구원의 길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론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자기들을 가르친 내용, 사람들을 섬겼던 사역,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오자 그들은 인간적 선행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성령의 권능을 입어 담대히 전하게 된 것입니다.
    
- 예수님의 이신칭의 가르침

그런데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처럼 간접적으로 가르친 것만  아닙니다. 실제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직접 가르쳤습니다. 우선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비유(눅18:9-14)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의를 자랑해보였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통회 자복했습니다. 이 중에 세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당시로선 도덕적으로 가장 선하고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했던 바리새인, 율법사, 제사장들을 저주하면서까지 정죄했습니다. 그들의 의가 위선적, 가식적, 형식적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유전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선행 구제를 많이 하고 여호와께 성실히 예배, 금식 기도했어도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같은 의인보다 세리 같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는 예수님과 삼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면서 주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평범한 유대인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도 알고 믿었습니다. 인간적 의로나 믿음에 대한 열정으로나 수제자로 불릴 만했습니다. 전혀 무죄한 스승을 유대인들 모두가 나무에 매달고자 할 때에 그 사태를 적극 나서서 막으려 했으며, 다른 모든 제자들이 겁이나 도망갔지만 그래도 빌라도 법정까지 쫓아갔습니다.

말하자면 당시로선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따져 세상에서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 부인하게 되자 너무나 비참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고선 통곡했습니다. 세상 최고의 의인도 스스로의 의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했고 또 그가 세 번 부인하여 닭이 울자 그를 아무 말 없이 그윽이 쳐다봤습니다. 단순히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고 또 베드로의 연약함을 드러낸 것만이 아닙니다. 의신칭의의 교리를 구태여 어려운 신학적 용어나 설명 없이  가장 완벽하고도 알기 쉽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단 당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이 교리를 정확히 깨달은 자가 아직 아무도 없었고, 성경의 기록도 그 때까지 미뤄진 것입니다.  

- 바울도 예수님께 직접 배웠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이하게도 당사자인 베드로나 직접 제자가 아닌 바울이 바로 그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도 사실은 예수님께 직접 배웠고 또 진리의 영인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서 십자가 진리를 정확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입장에선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정확히 설명할 인물로 바울을 택해서 미리 준비, 훈련시켰고 또 그 사명을 직접 맡겼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가 아닌 바울더러 성경을 가장 많이 저작케 한 사실이 바로 당신의 가르침을 성령이 오신 후에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 입증된 생생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5,6)였습니다.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으니 율법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예수와 그 제자들을 제일 먼저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스데반을 최초로 순교시키는 일을 주도했으며,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서 다마섹까지 신자들을 잔해하러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밝은 빛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간 봉사가 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매단 젊은 랍비처럼 그도 삼일 간 완전히 죽었던 셈입니다. 거기다 전혀 일면식 없는 한 무명의 예수 믿는 신자가 기도해주자 눈을 다시 떨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멀리서 기도 중에 성령으로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자가 자기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찾아와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 때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세속의 모든 지성, 교양, 사상, 철학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졌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자랑하던 자신의 의도 정말 쓰레기였음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로선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자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믿음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갖지 못했던 훨씬 높은 차원의 믿음이었습니다. 신자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까닭도 네가 옳은지 내가 맞는지 끝까지 따져 보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리 선행, 제사, 기도, 금식 등으로 찾으려 했던 영혼의 평강이 예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자신의 내면에 역사하여서 하나님께 자신이 완전히 용납 받았다는 확신을 비로소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던, 아니 핍박까지 했던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백이 저절로 새어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자기 온 몸으로 체험하고서 깨달았기에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주님으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세상의 군왕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할 사도로 직접 세움 받았습니다. 그는 구원에서 “율법의 무용함”과 “복음의 생명 됨”을 대비해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적극적인 훼방꾼이 이제 가장 열렬한 옹호자, 선포자,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해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2:11, 12:3)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가장 심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의 지난 생애, 사상, 믿음과 대조 비교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 사동행전을 그가 기록한 서신서들과 비교 검토한다면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거나, 또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기 사상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창안했다는 주장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예정론,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등에 관해서도 예수님이 가르친 그대로 바울이 설명하고 있음도 이처럼 변증 가능합니다.)  

- 이신칭의와 유대교의 관계

물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복음을 순전히 전하는 데에 서신의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위에 어떤 무엇이라도, 그것이 율법이나 할례 같이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고자 하는 경건하고도 선한 의도라도, 인간의 공적을 더 보태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는 유대교의 부패를 바로 잡으려 교리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오직 십자가 복음만 바로 전하려 하니까 유대교의 잘못을 대표적 장애물로 질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의 교인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교의 경건한 제사, 선행, 구제, 할례 등은 사람들로 자칫 복음에 장애가 되는 줄도 모른 채 쉽게 열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성경말씀이라면 어떻게 바울시대의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다르게 알고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의 답도 우선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상호 연결 조화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처음에 곤혹스러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에 대한 계시가 역사 속에 점진적으로 이뤄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당사자들로선 골고다가 구원이 완성된 장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로 성취된 결과와 의미와 장래 보장될 영광에 대해 기록한 신약 성경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선택 받은 백성이자 율법을 따르니 구원은 보장된 것으로 믿었으니 구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맨 첫 번 질문에 답한 것처럼 구약성경이 인간의 창조와 타락만 다루어서 인간이 처한 문제와 증상만 설명한 책인 줄, 예컨대 율법도 죄를 깨닫는 용도였지 그 해결책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람은 얼마든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행하여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조차 자기들은 의롭다고 떳떳이 고개를 쳐든 바리새인들이 정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구약에 메시아가 온다고 그렇게 많이 예언되었지만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능력자만 기다렸기에 비천하게 수난 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천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신약 성경을 믿으면 수천 년간 열방 앞에 자랑해 온 유대교 신앙체계를 스스로 완전히 부인해야만 합니다. 민족적 자존심으로 가득 차서 조상의 유전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긴 그들로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이신칭의의 교리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강화했고, 그들더러 체험케 했고, 무엇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달릴 자는 바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자는 이 세상에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롬1-3장)

바울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성령의 깨우침으로 십자가 진리를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복음을 풀어 설명할 자로 부름 받아서 그간 하나님께 훈련 받았던 자기 재능을 충분히 사용하여서, 이미 주님을 통해 가르쳐졌고 천하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십자가 진리가 단순히 유대교 부패상을 고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가장 먼저 깨닫고, 그 앞에 항복하고, 그대로 살아야만 할 절대적 진리이자 생명입니다.  


6. 제가 유대교를 쫓아가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구약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뜻만으로는 유대교를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만 인정 내지 중시하는 경우는 유대교, 이슬람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언, 여호와의 증인, 제7안식교 등등 상당히 많습니다. 무엇보다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성전 제사를 드리며(현재 제4성전을 건축하려 시도하고 있음)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아로 결코 인정치 않고 지금도 자기 민족만 세계 열방 앞에 가장 으뜸 되게 세워줄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질문자께선 틀림없이 이런 믿음과는 무관할 것이므로 유대교를 쫓아간다는 염려는 조금 부적절합니다. 대신에 질문의 요지는 당신의 보혈의 공로를 온전히 믿는 자를 그 사람의 선행, 자격, 능력, 회개 여부와 무관하게 구원해주신다는 예수님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거듭남의 체험으로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아직 없든지, 아니면 있었어도 그 첫사랑의 감격이 시들었거나, 잠시 잊어버린 경우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이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뀌어서 그분의 일에 평생토록 온전히 쓰임 받는 단계 까지 가지 못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단계에 머문 정도일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스스로 선하게 되는 일에만 믿음을 동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기복주의, 후자는 도덕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둘 다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신자에게 둘의 모습이 다 드러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여서 이 땅의 것보다 위엣 것을 먼저 생각하고 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 삶, 인생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유대교를 쫓아가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정말 성경 말씀을 신구약 공히 열심히  묵상하면서 공부하셔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깨우침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온전히 깨달아 그 안에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소원, 실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1/22/2011

믿은 지 2년 밖에 안 된 분이 남들이 쉽게 생각 못하고 또 생각했어도 감히 묻지도 못했던 아주 중요한 질문들을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답변에 연결하여 추가로 또 새로운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 질문 주시기 바랍니다.    

정순태

2011.01.23 09:11:40
*.216.63.190

후배는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존재라 했습니다(後生可畏).
이제 갓 2년된 성도가
오랜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날카로운 질문을 드렸고
목사님께서 자세히 풀어 주시니 감사하고 또 보기 좋습니다.
후배에게 마냥 압박만 당하는 선배가 아니 되도록 분발해야겠습니다. ^^
나날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일군이 되시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김순희

2011.01.23 13:00:37
*.161.91.154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대교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한 멧시야 대망사상이 저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연스레 이 땅에서 자존심 세울만한 일들을 평생토록 만들어 주는 종교인 줄 알았거든요.
시골처녀를 사랑한 왕이 그 처녀에게 구애하였는데 그 처녀는 그저 어서 어서 궁궐에 들어가서 호사스런
삶을 살고팠던게지요.ㅋㅋ 그 궁궐이 이 세상의 궁궐인 줄만 알았습니다.
에~~휴!! 부끄러버라!! ^^

이선우

2011.01.24 16:57:12
*.187.110.141

기복주의도 도덕주의도 기독신앙이 아니다.(아멘!)
평상시의 제 의문이 많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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