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전에 택함이란?

조회 수 3277 추천 수 27 2011.05.26 00:59:47
창세전에 택함이란?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정순태

2011.05.28 00:46:00
*.75.152.54

목사님께서 아주 조심스럽게 시작하시는군요!
댓글 다는 것에도 아주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논쟁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위안 삼아 한번만 댓글을 달겠습니다). ^^

솔직히 이 주제는 "아주 무거운 주제"일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할 수 있는 주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논리적이고 단정적으로 주장(설명, 확신)하더라도 모두가 지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수 백 년 간, 머리좋은 신학자들이 첨예하게 논쟁하였으나 결론은커녕 더욱 혼미해지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일 것입니다.

저는, 예지예정론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예정론 또한 무수한 미비점을 노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논점을 밝히면 자칫 논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고
결론을 이끌어 낼 도리가 없기에,
그냥 그렇다는 정도로만 밝히고 그만 두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평신도들에게 있어서,
이해도 쉽지 않고 공감 표하기도 심히 난처한
인간구원론에 관한 두 신학이론 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은,
어쩌면 "이분법적 대립"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보충" 개념으로 수용해야 할 기독신앙의 힘든 사상(인간의 이해)일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올

2011.05.29 13:50:29
*.187.10.103

예정론이 또 모순을 보이네요.
예정론은 잘 나가다가 결국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냐'로 끝맺습니다.
어떤 이론을 만들어 놓고, 그 이론이 증명도 안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용납이 된다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론을 펼치는 게 예정론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결국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못박습니다. 종교적인 힘을 빌어서요.
그게 마치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도저히 생각 못하시겠습니까?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버려지고...
선택된 자는 축복과 잔치입니다. 그럼 버려진 자는 뭡니까? 그러면서 내가 바로 버려진 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어도 안 합니다. 왜냐면 교회 다니고 주여주여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무수한, 정말 무수한 모순을 갖고 있지만 위의 질문 하나만도 해결 못하는 것이 바로 예정론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요.
이 시대의 진정한 이단은 바로 예정론입니다.
무수한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이론이 바로 예정론입니다.
이 이론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혹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고상해 보이고 하나님도 높이는 것 같아 보여 더더욱 받아들이려 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교만과 자기 중심적 사고는 교묘하게 감추고 말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에서 가장 개혁할 부분은 바로 예정론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절대 양심에서도 분명 틀리다고 알려주고 있는 이 예정론을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더 자세히, 더 세밀히 보고, 이들이 분명 주장하게 될 '행위'니, '공로'니 하는 말에 절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데나, 심지어 '믿음'에까지도 '행위'와 '공로'를 갖다 붙여서 이 예정론이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가장 큰 수단이니까 말입니다.

Jae K Kim

2011.05.29 15:51:15
*.90.33.143

지옥을 왜 만드셨을까요?
지옥에 가야될 사람들은 지옥에 가야 예수님께 영광릉
돌려 드리고
또 주님을 주님답게 한다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나요?

우리들 모두가 이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하신 분이시지요.

에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기 백성만을 구하려 오셨기에
자기 백성만을(창세 전에 생명책에 기록됭 자만) 구하시고
나머지는 지옥에 가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 집니다.

이건 예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게 아니지요.
미워할 자는 미워 하시고 사랑할 자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세우신 언약만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안중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기 백성만 인정 하십니다.

운영자

2011.05.30 15:14:33
*.108.161.206

포올님
반갑습니다. 주님 안에서 환영합니다.
혹시 처음으로 방문하셨는지요? 아니면 계속 방문은 하셨는데 댓글은 처음 다시는지요?

홈피 운영자로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저로서 상기 댓글에 대해서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선 님의 생각을 나눠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하다는 것과,

아무쪼록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 제 글을 살펴보시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언제든 성경적 반론을 제시해 달라는 당부뿐입니다.
(논쟁은 지양하되, 서로 다른 생각은 함께 나누자는 뜻입니다.)

작년에 어떤 청년이 이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질문을 주셨는데
그 때는 제 홈피에서의 논쟁을 피하려고 예정론에 대한 책을 한권 읽어보도록
개인적으로 권해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의 한 집사님이 이멜로 질문을 주셨기에
언젠가는 한 번 다뤄야 하는 주제이기에 답변글을 올렸습니다.
또 이 주제를 다각도로 조명해보는 글들을 기회가 닿는대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지켜봐주십사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귀한 나눔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포올

2011.05.30 17:29:50
*.243.60.141

운영자님, 나름 장황한 글을 적어 등록을 눌렀는데 '사용권한이 없다'고 나와 다시 적게 됩니다.
조금 짧게 요약해서 씁니다. 허탈하고 기운이 조금 빠지네요..

이 사이트가 깨어있고 개혁적이라서 좋습니다.
하지만 운영자님의 글에 그러지 않아도 예정론적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글도 살펴보려고 하다가, 마침 이 글이 메인에 올라와서 읽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예정론은 이 시대에 하도 추앙받고 있어 많은 글들과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정론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더욱 예정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모순이 보여지지 않은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로는 받아들이려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 운영자님 글에서도 또 느꼈구요. (개인적으로 조금 기분 나쁘셨어도 용서 바랍니다.)
이 예정론을 접하게 될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좇아가는 분들을 볼 때마다 그냥 안타까운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예정론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신학을 칼빈이 집대성한 것은 좋았지만, 제가 보기엔 성경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접근한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신학도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문제가 있는 부분도 많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경보다 신학을 좋아하는 분들이 흔히 이 예정론에 빠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신학이 성경보다,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이나 예정론자들도 이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말씀을 잘라서 그 신학이론을 만들고, 그 다음 그것이 성경에 기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정론을 옹호하고 신봉하는 분들이 결국 변호하고 변론하시는 글들을 보면, '말꼬리 잡기'나, 이론을 위한 이론, 결국 예정론을 맹목적으로 좋아가는데서 나오는, 그래서 빙빙 돌려가며 말하다가 결론이 안나고, 그것은 하나님 차원의 일이다라고 끝맺는 것을 항상 보아왔습니다.
다른 신학 이론은 모두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대려고 하면서도, 이 예정론만큼은 흐릿하게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아가고, 그것이 감히 우리가 접근할 수 있겠냐는 식으로 끝납니다.
그럼 결국 그 이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절대 인정을 안 합니다.
아니, 그 차원에서는 생각조차 안 하려고 합니다.

예정론의 근본이고 기초가 되고 있는 튤립의 5대 이론을 말씀을 깨닫고 다시 접하게 됐을 때, 분노 마저 일어날 정도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이론인데다,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이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면밀히 따져 보십시오. 그 이론은 하나님을 높이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왜곡하고 그 형상에 먹칠을 하는 이론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문맥적으로' 보지 않는데서 오는 심각한 오류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장자교단인 장로교에서 신학을 하시고,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교와 칼빈신학의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하나님보다, 성경보다 신학이, 이론이 앞선다는 것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도 제발 그 장로교에서 신학을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마 세속적 원리 때문일 텐데요, 기왕이면 큰 데서, 기왕이면 많이 가는데서, 기왕이면 인정받는 데서 공부를 하시고 싶어서 들어가시다가, 결국 칼빈신학을 접하게 되고, 결국 그런 영향 가운데 빼도 박도 못하는 이론으로 자리 잡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그렇게 장로교에서 공부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그 예정론을 좇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분들 나름대로 나중에라도 신학의 이해가 달라져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제가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그냥 그쪽이 크고 좋아보이고 멋있어보여 그런 것처럼 보여,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바른 기회가 주어졌는데 말입니다.

자, 제 글에 반기를 드실 분들이 무수할 것입니다. 숫자적인 느낌으로 최소 10000:1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틀린 것을 맞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정론에 빠져있고, 자칫 그리로 갈 자들이 제발 거기서 빠져나오길 하는 간절한 바램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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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K Kim님 안녕하신지요.
쓰신 글에 몇가지 말씀을 적겠습니다.

지옥 갈 사람이 지옥에 가야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저는 예수 안 믿고 지옥 가겠습니다.
Jae K Kim님도 혹시 그러실 수 있으신 것 맞는 것인지요.
지옥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론도 아닙니다.
혹 예정론자나 칼빈주의자들이 이러한 주장으로 지옥의 개념이 흐려지고, 심지어는 지옥은 없고 소멸된다는 이론까지 내놓는 것을 봤습니다. 한번 틀어지니까, 한번 누수되었는데 그것을 고치지 않고 막지 않으니까, 계속 틀어지고 성경과도 명백히 위배되고 말도 안되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지옥이 없고 소멸된다면, 저는 예수 안 믿고 그냥 이 세상 즐기다가 그렇게 되고 말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결국 천국갈 자들만을 위해 수고 많으셨습니다"고 하겠습니다.
그 누구든 지옥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일입니다. 가슴을 찢으시는 일입니다. 얼마나 그 지옥가는 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옥 보내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원리를 사랑과 공의에 기초해서 만들었기에,(이것이 바로 예정에 가깝습니다) 당신께서도 어쩔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그 누구도 믿음의 법에 의해 지옥 가지 않고 구원받게 하셨던 것이고, 지금도 간절히 구원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단이다'라는 말씀이, 죄송합니다만, 자칫 멋있어 보일 수 있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르게 주님을 알고 믿기를 바라시는데,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고 부족함이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하기를 바라시고 바르게 주님을 따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이라는 말씀, 예정론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주장입니다. 즉 '절대 주권'.
저는 그 말에 벌써 용어부터도 '절대 군주'라는 느낌을 받지만, 그보다 하나님을 왜곡해도 그렇게 왜곡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생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냥 공의의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독재자입니다. 인간은 로보트이고요.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세상을 만드시고 복잡하게 구원받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으셨을까요?
그냥 처음부터 당신의 로보트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끝내시지요.
그리고 지금의 우리 삶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분명 우리는 이 한 평생을 이 땅에서 살고,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주장과 이론은 지금 우리의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 존재하는데 자신이 존재 안 한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순이 어디있습니까?

로마서의 '토기장이 비유'도 제발 잘 보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선택받기로 예정된 자들의 선택과 버림받기로 예정된 자들의 유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앞장에서부터 전체 문맥을 보십시요.
이방인의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들만 예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한 섭리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예정과 선택과 유기를 반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쓰다보니 글이 또 길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제발 이제는 유행이고, 다수고, 학문이고를 다 떠나서, 정말 양심적으로 이 예정론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그리고 혹 댓글을 다시더라도, 말꼬리 잡기나, 빙빙 돌리기나,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와 같은 댓글은 안 달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그런 글을 하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운영자

2011.05.31 17:04:38
*.108.161.206

포올님
글을 오픈한 상태에서 댓글을 기안하다가 시간이 오래 경과되면
가끔 사용권한이 없다는 메시지가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로그인 상태가 중간에 끊어졌을 수 있습니다만...)
저희가 블락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양지 바랍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처럼 짧은 댓글은 바로 기안해서 올리지만
긴 댓글은 한글에서 따로 기안해서 카피해서 붙이는 식으로 합니다.

토기장이 비유에 대해선 제가 따로 글을 하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어떤 유행, 사조, 다수, 신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예정을 반대하는 자가 오히려 유행이자 다수가 된 것 같습니다만...)
오로지 성경만 믿고 따르려고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로 간에 다른 의견들은 차츰 시간을 두고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정양호

2011.06.02 18:51:24
*.54.202.195

이 예정론은
신학적 난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왈가 왈부할 성질이 아닌것 같은데
한가지만 코멘트 하려고 합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을 파괴하라"

1. 인간의 전적 타락 (Total Hereditary Depravity)
2. 성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성자 하나님의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
4.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소위 "TULIP" 알려진 이 신학적 교리를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교리를 고등학교 때 노회에서 실시하는 동기 성경학교에서 접했고,
엄청난
감사함과
큰 확신으로
충격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로만 카톨릭을 비롯한 자유주의 입장의 신학계에서
이 교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야말로 사면초과 총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 성경적 교리만 무너뜨리면
사실상 개신교를 쉽게 공략하여
종교 통합의 고속도로를 만들수 있다는
어두운 영의
전략적 계산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
어떤 자들의
"Unfair, Unjustice" 라고
대단히 대단히 불쾌 과민 반응,
신경질적으로 볼멘소리를 한다해도
성경은 "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에베소서 1:5)
쉽게 말해
" It's My pleasure!!!!!!!!!!!!!" 라고 클리어하게 말씀합니다.
들을 귀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포올

2011.06.03 04:04:10
*.187.10.103

운영자님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그만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치면 또 오해가 생기고 예정론을 좇아가는 분들이, 다시 ‘그럼 그렇지’라는 식으로 넘어갈까봐, 안타깝고 우려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글을 남깁니다.

제가 10000:1로 표현한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예정론은 많은 사람들이 좇아가기 쉬운 이론입니다.
혹 지금 예정론이 아닌 듯 보이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예정론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만큼 매력 있고, 자신도 신앙 있어 보이고, 신앙이 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은 직접 자신들이 안 하겠지만,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뭐 좀 신앙생활 하다가 안 되면 그냥 하나님께 모두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잠재적인 예정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예정론이 왜 틀렸는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성경에 어떻게 위배되는지를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구하고 확인하지 않는 이상, 시간이 흐르면 결국 예정론에 타협해 버리고, 그 예정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그 안에서 축배를 들고 말지요.
제가 더 한심한 분들이라고 하여 장로교가 아닌 다른 교단 분들을 말씀드린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혹,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예정론을 반대하신 것을 보시고, 그것이 각인되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신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표적으로 신천지나 또 다른 이단들에서 칼빈을 반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관찰하고 둘러본 결과로는 엄청난 사람들이 예정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툭하면,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는 식의 설교라든가, ‘인간적인 복’을 내세우는 설교자들이 모두 그런 부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얼마나 예정론이 하나님을 왜곡하고, 그래서 결국 신앙을 왜곡하는지, 저는 충분히 관찰해 왔고, 그래서 늘 그것에 대해 분노가 생기며, 또 앞서 말씀드린 이유들로, 앞으로도 분명 이 예정론의 이론이 흥왕해 가면 갔지, 절대 축소되거나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본성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잘 신앙하는 것처럼 보여 신앙이 좋아보이게 만드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운영자님, 이 사이트를 만드신 것 훌륭하시고,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운영자님 정도라면 칼빈신학이나 성경을 조금 더 세밀하고 면밀히 연구, 검토하시고 제발 이 예정론만 버리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바램입니다.

이 예정론은 절대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이 예정론으로 인해 모든 신학과 성경의 방향이 틀어지게 되는 아주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물론 조직신학 책에서는 마치 구원론의 어떤 한 부분인양 슬그머니 숨어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예정론에 의해 신학의 출발이자 끝이 달라지고, 색깔이 전혀 다른 신학이 되는 아주 중요한 이론입니다.
깨어있는 장로교 목사님들도, 그분들이 성경을 겸허히 보시고 말씀을 전하시기에 평상시에는 마치 예정론의 반대 입장에서 설교하시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꼭 이 이론 앞에서는 굴복하는 것을 많이 목격합니다. 제발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장로교단을 탈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에 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다시 한 번 얹짢고 기분이 나쁘실지 모르지만, 분명 이해 못하시는 것도 아닐테고, 제가 지금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스스로도 양심의 울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절대 제가 1:10000으로 표현한 그 10000에 들어가지 않으시길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

정양호님, 반갑습니다.

신학적인 말씀을 또 하셨군요.
튤립이론에 대해 하필 로만카톨릭이나 자유주의에서 무너뜨리려 한 것인 참 안 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잘못된 사람들이 무너뜨리려 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즉 그들이 반대했기에 이 이론이 옳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자들이 마침 '불공정, 불공평'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그 말을 귀담아 들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앞 글에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드렸는데, 그 '하나님의 공의'도 절대 불공평가운데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것이 성립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공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기장이의 비유에 이어, 또 다른 예정론의 대표적인 구절인 에베소서 1장,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와 '주 안에서'가 3-14절까지 거의 매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 그 앞절인 4절에도 나오고, 그 5절에도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전혀 눈에 들어오시지 않는지요. 지금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찬양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뜻과 계획 안에 에베소 교인들과 바울인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지금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더 자세히 말씀은 못드리지만, 1장을 다시 여러번 읽어보십시오.
절대 문맥과 흐름을 끊지 마시고 말입니다.

그럼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임희철

2011.06.03 16:29:21
*.121.111.99

포올님, 만나됩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포올님처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신 분들이 존재하기에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걸음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포올님께서 보시고 아시는 것처럼, 이 사이트를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이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시는 분들입니다.
포올님의 견해처럼, "그럼 다시 한 번 절대 제가 1:10000으로 표현한 그 10000에 들어가지 않으시길 하는 간절한 바램"이 진심 있으시다면,
'왜 예정론이 틀렸는지', 또 '예정론의 무엇이 성경을 왜곡시키는지'를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저는 '예정론을 반박'하다 '칼빈주의'를 아끼게된 사람입니다.
반박하기 위해서 공부하다 포올님의 표현처럼 예정론의 매력에(제 표현대로 하자면 그 깊은 은혜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칼빈주의 성경을 왜곡한다'는 포올님의 견해에 '반박'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정론' 하나 밖에 모르기에 좀 부족합니다. ^_^;;
'왜 칼빈주의 예정론은 안되는가'에 대한 포올님의 설명은 '포올님의 바램'을 진심으로 표현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자유 게시판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친절한 설명,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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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님..
절대 신학적 논쟁을 기대하며 포올님께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올바른 표현'은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성숙한 방법'임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직 모르는게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 인 저라서 함께 배우고 공부하며 알아가는 좋은 시간이 되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본 사이트의 개설 목적도 동일하다 믿습니다..
언제나 바른 생각, 좋은 글, 분명한 표현으로써 많은 유익 주셔서 감사합니다.. ^_^

정순태

2011.06.03 23:20:01
*.75.152.84

제가 첫 댓글을 잘못 달아서 소모적인 논쟁을 촉발한 것이 아닌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미 첫 댓글에 표현된 대로, 예정론과 예정예지론은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결코 결론에 이를 수 없는 신학이론입니다.

몇몇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예정론 예찬은 이미 경험한 영역에 속합니다.
무수한 책들, 인터넷 자료들, 그 중의 약 90% 이상이 예정 예찬론입니다.
그러나 예정론 또한 성경의 전부, 나아가 하나님의 전체를 망라하는 완벽한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부분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전부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지성활동의 결과입니다.

이는 예지예정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지예정론에 많은 미비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거기에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면이 일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글에서 상호보충적 보완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인간구원의 방법론에 대한 교리적 논쟁은 이미 교부시대부터 시작되었고(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
종교개혁 시기에 재론되었으며(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
이후 수백년 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난해한 주제입니다.

이처럼 어렵고 결론 맺기 거의 불가능한 인간의 사유(신학, 교리)를 더 이상 논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운영자님의 견해가 무엇이고 방문자들의 견해가 다르다 한들,
이것 때문에 이곳에서의 교제가 방해받는 것은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다 같이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에(성경해석 능력 포함),
나와 다른 견해일지라도 일정부분 용납하고 수용하는 슬기가 필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정론도 예지예정론도, 일부 부족한 면이 있고 또 일부 타당한 면도 있지만,
양 이론 모두 수용가능한 인간이해라고 믿습니다.
어느 하나는 사탄의 속임수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은 대립이 아닌 보완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신학이론이라는 개인적 소신을 다시 밝히며 마칩니다................

임희철

2011.06.03 23:43:37
*.121.111.99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J. I. Packer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서로 반대 입장에 서있다고 그의 책에서 설명하였습니다. “ 이 단어는 대칭으로 정의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기독교인들도 어느 한쪽만을 취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J I Packer , Arminanism in through christ's word p&r 1985, p121).

그리고 Robert A Peterson은 그의 책 " Why I am not an Arminian" 서문에서 "우리가 승인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쪽은 받아들인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을 다른 한쪽은 부인한다. 그러기에 목소리는 사랑에 의해서 포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용만큼은 공개적으로 분명한 어조로 반대 의사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두 가지 사상의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신학자들은 두 신학 사상이 '서로의 견해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상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는 100% 하나님의 영광을 또 하나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광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싸한 합의점'을 찾아서 논쟁을 식히고 사랑으로 포장하는 행위가 '아름답고 슬기로운 행동'처럼 보여진다 할지라도,
결국 그러한 합의점을 찾는 노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행위'가 된다는 개인적 소신을 저도 밝혀 봅니다.....

+ 참고로 위에 참고한 글은 Henderson New York Campus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민제환

2011.06.04 10:21:22
*.207.233.143

(몇일 사이에 리플들이 많이 달렸네요)

너무 길어서 나중에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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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도 믿으라고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반박하라고 주신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순은 사람에게 있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지식 내 논리 내 경험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번에 다 믿어지지 않는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붙들고 자기부인을 하며 좁은길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할 책임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할 마음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판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나무십자가

2011.06.30 13:45:23
*.56.171.141

간단하게 말해.. 구원은 우리들이 결단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예정론을 부정하면 구원을 자신의 결심이나 행위로 쟁취할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도 성령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입니다.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없으면 그림자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비참함과 죄된 본성과 부패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더 의지하게 됩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우리들 자신에게서 무엇을 바랄수 있단 말입니까? 삶의 책임은 당연히 자신에게 있지만 구원은 우리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운영자님의 의견에 공감하며 ..지지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3.06.10 22:00:23
*.109.85.156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택함이라, 아니라 논쟁함 보다 더더욱 중요한 일은 우리를 그렇게나 사랑하시어 천국보좌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 대신 죽으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음이 너무도 귀하고 감사한 일이기에 그 감격속에서 이끄심을 또 감사하고 그 감격 속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또 감격하며 살아감이 중요한 일임을 섬세하신 설명으로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모루두개

2024.03.07 02:16:27
*.230.44.2

요즘은 플랜팅가의 반사실적 영향력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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