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육의 문제가 아닌가요?

조회 수 1068 추천 수 28 2012.02.21 15:48:47

천국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육의 문제가 아닌가요?


[질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성경 말씀을 “먼저 너의 마음 그릇을 닦아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도 되는지요? 예를 들어 말로써 남에게 상처 주는 일 같은 제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제 마음의 그릇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종교 혹은 무종교에서의 마음 닦기와 기독교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스스로 수양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에 의지 하는 것의 차이인가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육의 문제는 금방 와 닿는데 영의 문제는 솔직히 막연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육의 문제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없다는 천국을 가본 적이 없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구하는 것은 영의 문제라기보다 육의 문제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요? 영혼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그 무엇보다 신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늘어나면 성령은 역사하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이 가신 좁고 협착한 의의 길을 따라가고 있으면 성령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역사하는 모습을 살피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다보면 도착하는 종착점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멸망으로 향하는 넓고 쉬운 길과는 정반대 방향의 길로 확실히 들어선 것입니다. 신자 인생의 종착점, 도착지는 이미 완전히 정해졌고 이 땅에서의 일생은 천국으로 가는 여정(旅程)입니다.  

천국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이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도착하느냐만 남았습니다. 지치고 고달픈 모습으로, 혹은 활기차고 기쁜 모습으로 도착할 지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렸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얼마나 성실히 했느냐, 불쌍한 이웃을 어떻게 섬겼느냐, 불신자에게 얼마나 자주 복음을 전했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평소 이 땅의 일상적인 육의 문제에 대해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그 마지막 모습에서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참으로 심각한 주제입니다. 천국은 분명 모든 신자가 향할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면 자연적으로 도착되는 곳이라고 해서 공간적 차원의 단순한 어떤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은 신자 인생의 목적지(目的地)가 아니라 목적(目的)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KTX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갔습니다. 부산에 도착했으니 다시 서울로 KTX로 돌아가면 부산은 단순히 목적지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기차에서 창밖의 경치를 구경하며 먹고 마시며 즐겁게 가는 것만이 그 여행의 목적이 됩니다. 기차와 역 바깥에 나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런 식의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목적지인 천국까지 가는 동안 즉, 이 땅에서의 인생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됩니다.

반면에 부산이 여행의 목적인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자갈치 시장에 가서 싱싱한 회도 먹고 태종대 바닷가 구경도 하고 해운대 신세계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는 등 곳곳의 명소에 들러서 관광, 체험, 쇼핑할 것입니다. 그럼 서울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 안에선 부산에서의 탐방 계획을 꼼꼼히 점검하고 또 여러 곳을 다니려면 피곤할 테니 휴식을 취하면서 체력도 비축할 것입니다. 부산에 도착만 하는 것보다 부산에서 신나게 이곳저곳 다니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국도 모든 신자의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 대해 자칫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천국이 목적이라고 해서 신자가 천국의 세세한 면모를 다 알아서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계획을 짜서 대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도 천국의 구체적 상황은 모릅니다. 성경에도 묵시적으로만 표현되어 있지 사실적 구체적 묘사는 없습니다.

천국이 목적지로만 그치면 신앙과 천국은 별다른 연관이 없어집니다. 어차피 도착할 곳인데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믿음을 동원해 이 땅에서 형통하는 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됩니다. 반면에 천국이 목적이 되면 반드시 자신의 믿음을 천국과 연관해서 확립하고 또 그대로 이 땅에서부터 적용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천국에서 주님과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할 때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겠다는 확고한 인식이 서있으면 이 땅에서도 그에 맞추어 준비, 연습,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준비가 분명하게 되어 있는 자는 이 땅에서 제대로 사는 준비도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신자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천국에 도착하게 되어 있기에 문제는 도착하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따라서 천국 이해와 연관해 신자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땅의 육의 문제와 연관해 자기 신앙으로 반응해왔던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럼 천국과 무관하게 이 땅의 육의 문제에만 자기 신앙을 연결 시켜 살다가 죽는 신자와, 이 땅의 육의 문제도 천국 개념과 연결해서 반응하다 죽는 신자 둘입니다.

바꿔 말해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자의 인생 목적 즉, 신앙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일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목적인 신자는 천국 입성 준비인 반면에 천국이 목적지에 불과한 신자는 이 땅의 육의 문제의 형통에 머뭅니다.    

천국에 대한 두 가지 개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6,17)

천국을 목적지로만 인식하는 자는 천국을 단순히 슬픔과 고난이 없는 유토피아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가 본 천국의 모습도 눈물과 한숨이 없는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배경이나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그것들을 다 없애주셨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천국이 갖는 가장 큰 특징, 아니 본질은 죄와 악의 실체는 물론 그 영향력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와 연관시켜 삼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어 구원 얻는 칭의는 죄의 형벌(penalty)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화를 이루는 과정은 죄의 권세(power)에서 자유케 되려는 평생에 걸친 싸움입니다. 마지막 천국에서의 영화는 죄와의 공존(presence)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온전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와는 결코 공존하지 못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과 죄악은 동일한 시공간에 한 시라도 함께 존재하지 못합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면 살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추한 죄에 찌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멸절(滅絶)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 땅에서의 모든 슬픔과 고난의 궁극적 원인도 알다시피 죄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죄 하에 하나님과 원수진 상태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이 땅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일만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사는 문제로 서로 시기, 경쟁, 다툼을 벌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다른 모든 도덕적 죄악도 파생되고 인간끼리 서로 상처도 주고받게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눈물과 한숨이 멈추게 된 이유도 먹고 마시고 입을 걱정 전혀 없도록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마련해 주거나, 아예 그런 문제를 초월한 영적 존재로 바뀌어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간 스스로 높아져서 다른 인간들과 쟁투하는 죄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요한계시록의 천국을 설명하는 구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내용이 그런 상태의 원인 내지 배경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3,14절)  

하나님 보좌를 향해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찬양하는 흰 옷 입은 성도들은 큰 환난을 견뎌낸 신자라고 합니다. 또 그럴 수 있었던 근거는 어린 양의 피로 죄에서 구원 받아 깨끗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아서 그분의 뜻에 순종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세상의 어떤 환난, 고난, 핍박도 다 이겨낸 자들입니다.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어떠하든, 또 그 걸어가는 길이 좁고 협착하고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오직 주님과만 아름답고 거룩하게 인생길을 동행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육의 문제를 쫓는데 영적인 문제를 결부시킨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령하고 자유로워지는데 육의 문제로 전혀 방해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천국으로 도피하는가? 천국을 소망하는가?  

결국 신자의 천국관은 슬픔과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로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 보좌가 있어 죄와 전혀 무관한 거룩한 곳을 소망하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전자가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천국에 그런 모습이 있으나 피상적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후자의 천국 모습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후자의 천국관은 전자의 천국 모습도 포함됩니다. 설명 드린 대로 죄가 없기에 당연히 슬픔과 고통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적 천국관은 따지고 보면 이 땅의 고난과 연계됩니다. 신자가 되면 아무래도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합니다. 그렇다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물질을 탐욕스럽게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먹고 마시는 문제에 신앙이 쏠리는 까닭은 그것들이 결핍하면 고통이 따르니까 그것이 싫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땅에서 육으로 사는 것에 파생하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어서 빨리 이 땅의 모든 고난에서의 탈출을 하고 싶어 천국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천국관은 자칫 그릇된 종말주의자가 되기 싶습니다. 이 땅을 벗어나고픈 욕심이 너무 세어서 이 땅에선 염세 비관적으로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자연히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느냐 그 시기와 방법에 유독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괴로운 현실을 도피해 천국으로 피난가고 싶은 것입니다. 마라나타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예수님 재림에 대한 소망도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고달프다는 뜻이 가장 핵심적 근거입니다.  .  

그런데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이 땅에서 소유를 초월하여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또 유토피아적 천국관도 갖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영은 불멸이라 죽으면 고통 없는 천당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과 거룩하고 아름답게 교제한다는 인식은 없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부터 그 일이 가능하다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죽고 나서야 영원한 심판과 구원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천국 소망은 결코 유토피아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너무나 풍성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 땅에서부터 절감했기에 그분을 실제로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더렵혀진 이 땅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너무나 싫었기에 죄가 전혀 없는 곳에서 완전한 영적인 충만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 한 치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참 사랑으로 온전한 성도간의 교제도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비밀과 하나님의 이 땅을 다스리는 경륜을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이 천국에서 찬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땅에서의 고통에서 건져 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직 보좌에 앉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물론, 특별히 그 독생자 어린 양의 구원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은 것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이 땅을 다스리는 왕 노릇하게 됨에 감사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4:8)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계5:9,10)  

천국에서 신자를 기다리는 영광은 너무나 엄청나고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런 형체로 바뀌며 더 이상 죄와 무관해집니다. 천국 안에 악한 것이 없다는 차원을 넘어서 신자 안에도 더 이상 추한 생각, 말, 행동은 근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지라 신자의 존재 형태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지정의로 감지, 인식하여 사고하는 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뤄진다는 측면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신자의 내면에 악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자유와 평강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특별히 온전한 참 사랑만이 천국에서의 모든 활동력의 근원이 됩니다.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도 천국에선 더 이상 필요가 없기에 그 셋 중에 사랑이 최고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3;13) 거기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지 않습니까? 이런 천국에서의 영광된 모습으로 자신이 변화될 것을 가슴 설레게 소망하며 진실로, 진실로 주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 것이 올바른 천국관인 것입니다.

또 천국을 목적지가 아닌 목표로 삼기에 이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죽을 때의 육신의 고통이나, 전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신비스런 두려움마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으로 인한 자기 존재의 멸절이나, 죽음 이후의 형벌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에 너무나도 가슴 설레는 기대감과 흥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부산을 생전 처음 여행하는 자가 그곳에서 즐길 여러 새로운 체험에 대해 약간 떨리긴 하지만 아주 신나게 흥분되듯이 말입니다.        

이 땅을 사는 자세 또한 완전히 달라집니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가장 먼저 죄와 전혀 무관한 곳에 가려면 아무래도 자기 속에 죄의 찌꺼기를 완벽하게 없애지는 못해도 최대한 씻어내고 가려할 것입니다. 고급호텔에서 열리는 대통령 주최 파티에 초대 받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꾸며서 갈 텐데 주님 계신 천국에 감히 더러운 모습으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 이 땅에서부터 주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어떻게 하든 그분을 더 알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막상 주님과 대면하여서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벗고자 함인가? 덧입고자 함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천국이 인생의 목적인 신자는 천국 가는 일을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죽기 싫다는 인간의 본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준비가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기에 오히려 이 땅을 온전하게 살아갈 준비도 제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종교와 아주 크게 다른 특성 중의 하나는 살아 있을 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미리 천국행 기차표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주로 모시는 순간 성령이 내주하며 그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구원을 주고도 곧바로 천국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이 땅에서 더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신자더러 이 땅에 시킬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이에게 신자가 갖고 있는 천국 소망을 동일하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하나님과 원수 된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비춰주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를 자기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확장시키는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사신인 것입니다.    

바울은 입신하여 삼층천까지 올라가 천국의 영광스런 광경을 보고 왔습니다.(고후12:4) 너무나 풍성하고 아름답고 거룩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서 어서 빨리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그러나 그일 후에도 천국 가기만 소망하지 않았고 이 땅을 염세적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신자의 이 땅의 삶이 단순히 고통 없는 천국으로의 도피 준비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덧입어서 승리하며 사는 것임을 확신, 아니 실제로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받은 이 땅에서 받은 고통으로 치면 바울과 견줄 자는 없습니다.(고후11:243-27) 거기다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는 심각한 지병도 있었습니다.(고후12:8-9) 그런 사람이 천국의 영광을 봤다면 어서 빨리 천국 가기만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로서 주님을 위한 큰 업적을 그 만큼 남긴 자도 없으니 말입니다. 은퇴해서 쉬고 있어도 누구라도, 아니 주님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말합니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3,14,16) 그는 빌립보나 로마나 감옥 안에서조차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천국의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주님의 생명으로 덧입혀 주려는 일에 죽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컨대 바울은 이 땅의 고통을 벗으려고 신앙을 동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천국이 이 땅의 육의 문제의 연장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천국의 영의 문제를 이 땅에 갖고 내려와 구현하는데 자기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걸었습니다. 우리와 달리 이 땅의 고난을 없애는 데에 신앙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어떤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데만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증거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바뀌었습니다. 재물로 주인으로 삼아 먹고 마실 것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아름답고도 가치 있게 살려면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부터 교제 동행하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려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슬에 묶여 재판을 받으면서도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8)라고, 확신에 차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당신과 화목케 하는 직책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불신자 시절과 달리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아선 안 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나의 죄 값을 갚으려 나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신자라도 세상의 예수 모르는 고관대작, 재력가, 유명인사 등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안타까이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겉모습이 아무리 후패해도 예수를 보배로 품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4-9)

상기 구절이 바울의 삶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모두의 이 땅의 삶이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재물을 주인으로 삼으면 고난이 그치지 않은 반면에, 주님과 동행하면 고난 가운데도 너무나 신비하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실제 삶에서 맛보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 신자의 천국관은 이 땅의 육의 연장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의 신령한 보배를 이 땅에 연장하여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는 천국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그렇게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기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8,29) 교인들이 혹시라도 믿음이 떨어지거나 아예 실족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에 더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끝까지 완악하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초기의 박해도 그들로부터 왔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능통했으며 여호와에 대한 열심에 최고였던 그로선 더더욱 참 생명의 길인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이 불쌍해졌습니다. 그들을 전도해야 하는 일이 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9:1)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나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자신이 그들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더라도 제발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구원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항상 바로 그런 내용으로 기도 드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어떤 극심한 절망에 처해 있더라도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소원해선 안 됩니다. 또 그런다고 이미 구원을 허락한 신자를 하나님이 다시 심판으로 내몰지도 않습니다. 주위의 불신자들이, 특별히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이 예수를 모르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게 여겨진다면 바로 그런 간절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에 특별한 형식이 없습니다. 심오하고 고상하고 의로운 내용이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것도 성경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바탕에서 기도하라는 것이지 구태여 말씀을 줄줄 외우며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는 바탕에서 기도하는 내용에 적합한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을 인용하며 기도하면 당연히 더 좋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자의 심령이 순전하고, 간절하며, 진실 되기만 하면 됩니다. 또 대화니까 평상적인 말투로 자기가 소원하는 것들, 고백하고픈 심령의 상태, 지은 죄들을 구체적으로 아뢰면 됩니다. 시편의 다윗의 기도문들을 보면 하나님께 의심과 불평조차도 있는 그대로 쏟아내었지 않습니까?

영혼을 위한 기도라고 해서 특별히 신령하고 심오해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 글에서 이미 답변 드린 대로 영의 문제는 지정의로 인식하기 힘듭니다. 자신의 지정의가 이끄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또 영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빌 바를 몰라도 마음에 어렴풋한 소원만 있어도 내주하신 성령님이 대신 간구해주십니다. 평소에 신자가 무심결에 내뱉는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을 성령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눌리고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 다시 온전한 믿음 위에 서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자기 영혼에 대고 주님의 이름으로 힘을 내라고 선포하라고 권면하는데 물론 그런 일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모든 육과 영의 형편 그대로, 자기가 원하는바 그대로, 주님께 아뢰면 됩니다. 자기도 잘 모르는 내용이나 흔쾌히 동의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태여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제 어디서라도 일단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서 무릎 꿇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요체는 신자의 진정성과 갈급함입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지함이 반석이 되는 위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기둥으로 서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도 우리 지정의로는 알 수 없는 성령의 신비하고도 거룩한 인도하심을 소망해야 하며, 또 기도 제목들에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욕심과 고집이 개입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는 그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즉, 복음의 참 은혜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함은 기도의 최우선 조건입니다.  

2/21/2012


운영자

2012.02.21 18:19:51
*.104.233.248

왕개미님
주신 질문에 대해 네 주제로 나눴는데 마지막 답변입니다.
가능한 쭉 연결해서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하신 의도에 적합하고 궁금하셨던 점들이 잘 해소되길 소원합니다.
나름대로 더 깊이 다룰 측면도 있었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했습니다.
혹시라도 미진하거나 추가로 의심나는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질문 주십시오. 샬롬!

왕개미

2012.02.25 05:47:47
*.128.70.7

내가 가진 모든것을 내려놓겠습니다 하며 버스에서 고백을 했던때가 2년전이였는데, 아직도 내려놓지 것들이 툭툭 튀어나곤 합니다. 회개라 하면 완전히 돌아서다라고 하는데, 결심하고 결단은 있었지만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것은 회개는 됐지만 아직 성화의 과정이라고 봐야돌까요, 아님 아직 완전한 회개가 안된것일까요?
감사의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또 질문이 되버렸네요.
삼위일체와 회개에 대한 글이 어디쯤 있을것 같은데 못찾았습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게시판을 통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참, 새롭게 알게된 복음을 신자인 지인들에게 얘기하면 반응이 썩 시원치 않은데(너나 잘해 하면서요).ㅋㅋ
그러다보니 출석교회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좁인길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박신 목사님

임화평

2012.03.02 16:04:20
*.92.53.140

천국을 예수님 잘 믿으라고 (말 잘듣는 학생) 내건
하나님의 사탕발림 이라고 생각한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해 천국은 어떤사람들이 가는 곳인지
그곳에 가기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모루두개

2024.03.14 04:20:25
*.230.4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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