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 신자가 믿은 후 가장 먼저 행할 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신자로서 첫걸음

 

예수를 믿고서 교회에 출석하면 대체로 제자 훈련 코스를 통해 교리, 예배, 기도, 전도, 봉사 등에 관해서 배우게 됩니다. 신자 된 후에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이 본인의 믿음을 경건하게 가꾸어서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 믿은 후에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이 그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즉 “예수를 믿었으므로”라고 전제한 후에 아주 단순하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권합니다. 본문의 전반은 신자에 대한 정의(定意)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후반은 신자가 된 후에 가장 먼저 행할 일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성경이 완비되지 않았고 교회 교육 체계는 물론 조직조차 정립되기 전이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세대의 신자에게 절대적으로 진리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은 후에 가장 먼저 행할 일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 권면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의롭다 하심’의 원어의 맥락은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최종적이고 확정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물론 신자 개인이 실제로 그런 법정에서 재판 절차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계에 제한받는 인간이 영계에 계신 하나님의 법정에 설 수는 절대 없습니다. 죄에 찌든 모든 인간은 그분의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 재판을 받기 전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소멸(燒滅)됩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서 영으로만 그분의 재판정에 설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죄인이 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재판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즉 믿음 안에서 이뤄지는 재판이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비유라고 해서 단순히 그런 의미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영적 차원에서 실제로 그 재판은 분명히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의롭다고 판결 내려준 것이며, 신자도 그 판결을 이미 온전히 받았고 그 효력이 계속해서 살아 있음을 믿어야 하고 또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의롭지 않다는 고소가 먼저 있었다는 뜻입니다. 의로운 사람을 두고 재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는 자나, 자신은 아주 의롭다고 자부하거나, 최소한 남들보다 더 의롭다고 믿는 자에겐 해당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의 궁극적인 재판이 있다고 믿는 자라도, 평소에 자기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므로 얼마든지 무죄 판결을 받아 낼 자신이 있다든지, 비록 현재는 그러지 못해도 앞으로 선하게 살 것이므로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와도 관계없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의롭다는 판결을 받은 후에 화평을 누리자고 말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신자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확정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신론자나 행위 구원을 믿는 자에게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결을 이미 받았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만 치거나 광신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서 빨리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라고 전도해 보면 평생을 남들보다 착하게 살았던 자가 천국에 가야 하지 무조건 예수를 믿었다고 죄를 많이 범한 자들도 이미 구원받았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합니다. 그런 의미로 기독교를 풍자한 영화였던 ‘밀양’이 한국에서 크게 히트한 까닭입니다. 

 

차고 넘치는 증거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해도 만약 자기에겐 죄가 없다고 끝까지 확신 내지 주장한다면 사실상 재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피고석에 세운 인간의 유죄를 온전히 입증하여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런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본문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만의 교리로 전락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누구도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가장 간단하게 사람의 평생을 일 초도 빠지지 않고 찍어 놓은 영상을 하나님과 함께 시청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모두가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나님 앞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쥐구멍을 찾으려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의 카메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 담아내기에 단 1분도 함께 시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두철미 무신론자가 아닌 다음에는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신이 도무지 없음을 알고서 불안에 떠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기 직전까지도 자기는 법 없이도 살만큼 의롭다고 큰소리친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만약 철저한 무신론자가 아닌데도 사후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주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의연함을 자랑하려는 너무나 헛되고 불쌍하기까지 한 고집이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지옥 심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눈앞에 맞이하지 않아도 평소에 죄를 짓고 나면, 그것도 끝까지 아무도 모르고 다른 이에게 아무 피해가 가지 않게 혼자서만 잘못을 범해도, 본성적으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도덕적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생한 예가 성경에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간음한 여인을 현행범으로 잡아 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물었던 사건입니다. 주님이 그냥 풀어주라고 하면 율법을 위반하여 공의를 굽게 만드는 셈이 됩니다. 그 반대로 주님이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그동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어기게 되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고 비난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이 자기들 모략에 꼼짝없이 걸렸다고 확신했으나, 주님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과는 아예 달랐는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른으로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 물러갔습니다.(요8:3-9)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가르쳤습니다. 추측하건대 간음하는 여자는 대체로 조금 예쁜 데에다, 현장에서 잡혀 왔으니 아주 섹시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몰려왔던 유대인들은 나이 불문하고 이미 그녀를 보고 마음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범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꼴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자라도 평소에 말로 형제를 욕하는 살인죄도 짓고 마음으로 이웃의 물건을 탐하는 등, 이런저런 죄를 수시로 지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입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주님이 ‘죄 없는 자 먼저 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아무 죄 없는 주님을 말장난으로 죽이려 들었던 자신들의 음흉하고 추악한 마음이 완전히 들켜버렸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그 여인은 어차피 예수님과 상관없이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제 예수님까지 율법에 걸어서 죄인이라고 판결하고서 그것을 구실로 미국 서부 영화에 자주 등장하듯이 군중들이 린치를 가해서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다 거꾸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다 물러갔습니다.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그것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의로웠던 유대인들 모두가 그랬다면, 죄에 찌든 인간이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한 존재임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진정한 고백

 

인간의 영적 실상이 이러한데도 죽을 때까지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고집한다면, 자기의 의로움을 완전한 하나님의 수준과 방불하다고 우긴 것이므로 더더욱 그분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사후 심판에 대해서 크게 불안해져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잠시 기도한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기도가 구원의 효력이 있다면 누구나 평생 실컷 죄악과 쾌락을 즐기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막상 죽음을 앞두면 누구나 겸손해지고 생전 처음으로 100% 온전한 진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한 가지 사항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100% 진심일지라도, 자신이 100% 온전한 죄인이었다는 것에 관해 진심 어린 고백이 아닌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는 인정하나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그런 좋은 예도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두 죄인의 경우인데, 편의상 좌편 죄수로 분류한 자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반어법적인 의문문으로 사실은 주님을 비방하는 내용입니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면 다른 죄인을 구원해 줄 그리스도일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정말로 그리스도라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구했으므로 심판에 대해 크게 두려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편의 죄수가 그를 두고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40절)고 야단쳤습니다. 같은 사형수끼리 도토리 키 재기 식의 상호 비난이 아닙니다. 그는 이어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41절a)라고 고백했습니다. 사형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형벌이라고 수긍했기에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인정했고 또 그 벌을 담담히 수용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좌편 죄수는 사형 형벌에 절대 수긍하지 못하고서 불만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죽을 죄인은 아니므로 구원을 바란다는 뜻입니다. 두 죄수가 감옥에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좌편 죄수는 불평불만만 쏟아내었지 스스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을 우편 죄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를 야단쳤을 것입니다. 

 

우편 죄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엄청난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처형받는다는 사실을 넘어서 절대로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철저했을 그가 입 밖에도 내지 못할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이라는 온전한 지식이 생겨야만 할 수 있는 간구였습니다. 

 

어쩌면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부터 주님의 이적과 가르침의 현장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불치병 환자, 나면서 불구자, 귀신 들린 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 죽은 자도 말씀 한마디로 되살리는 것을 직간접으로 목격했을 것입니다. 폭풍우도 꾸짖어서 잠잠케 하고 스스로 물 위를 걸었으며 하늘에서 음식을 만들어 내려서 이만 명을 먹였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어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크게 찔림을 받고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주님의 말씀과 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 같은 가르침을 전해 듣고는, 우편 죄수도 주님을 구세주로 믿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직접적인 가르침을 못 받았다 해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그 현장에서라도 주님에게서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를 온전히 느낀 것입니다. 

 

그로선 자기 자백대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도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저를 불쌍히 여긴다면 나를 기억해 달라고만 요청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자기 운명을 온전히 예수님의 처분에 의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었습니다.(눅23:43) 

 

우편 죄수는 스스로 죄를 씻고서 의로워질 기회도 시간도 없이 오직 예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도적 능동적 우선적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되었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누구라도 자기가 지은 죄가 온전히 처리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그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고 그런 의에 근거해서 우편 죄수에게 의롭다하심을 덧입혀 주었기에 천국 입성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공정한 형벌

 

이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는 신자의 정의가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십자가의 우편 죄수처럼 가장 먼저 하나님 법정의 피고석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진정한 자백부터 있어야 합니다. 그 죄인 됨을 용서해 주실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므로 그분의 긍휼만 소망한다고 자기 전부를 내어드려야만 합니다.

 

단순히 이런저런 윤리적인 죄들을 많이 지었다고 수긍하는 정도로는 절대로 부족합니다. 그런 죄들은 세상 법정에서 정죄 받을 수 있거나, 그럴 정도로 심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모멸을 받고, 최소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낌으로써 사실상 이 땅에서부터 심판받는 셈입니다. 그와 달리 자기 존재 전부가 철저한 죄인이라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전부 추악한 것뿐이라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오직 하나님만 주관하실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만이 죽기 전에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도 그래서 죽은 후에 행하는 심판처럼 한 인격체 전부에 대해서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죄 선고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비록 영적인 설명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재판을 주도하면 그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이 부과되어야만 공의로운 판결이 됩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자백했다면 그에 합당하게 실제로 죄인이 죽어야만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저부터도 당장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사형수 죄인인데 인간 사회의 법정 식으로 공의를 실현하려면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은 모든 인간을 깡그리 죽여야만 합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으로선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당신의 의로움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냈습니다. 본문에 이어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확증하셨느니라.”(8절)고 설명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죗값을 대신 갚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의가 나타났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justice)와는 다른 하나님만의 의(righteousness)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추악함과 불공정함이 전혀 없으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당신의 그 완전한 의로움에 따라 죄로 타락해서 죽음만 기다리는 인간 문제를 완벽하게 의롭게 처리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부과해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은 한치의 부족함 없이 정확하게 주님께 부과했고, 그와 동시에 죄인들의 생명은 전부 다 살려 주었습니다.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와 사랑을 어떤 불공평함도 없이 동시에 완벽하게 실현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아무 꾸중 없이 용서해 주시면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일차 실현했습니다. 그렇게 무죄 방면하신 까닭은 그녀가 당해야만 했던 죽음의 형벌을 나중에 당신께서 대신 감당해 줄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려 했어도 그 유대인들이 주장하려던 공의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벽하게 충족시켰습니다. 주님은 그들도 그 여인처럼 그 현장에선 무죄 방면해 주었는데, 나중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으로만 자기 죗값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제발 뒤늦게나마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한 마음의 화평

 

신자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이 먼저 찾아와서 당신의 독생자 죽음으로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그런 사랑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신자도 처음에는 주변의 전도 대상인 불신자들처럼 그 엄청난 사랑을 기독교인들만 편애하는 불공평한 특혜라고 여기고 비방하기에 바빴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의로우니까 그런 특혜는 필요 없다고 완악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실체가 오직 죄악의 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반드시 맞닥트리게 됩니다. 속으로는 시커먼 까마귀가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겉으로는 백로인 척했던 자신의 가식적인 의가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달라도 영적 죽음에 처해있는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영적 각성은 하나님만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권으로 구원해 주기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제물로 대신 받으심으로 그런 죄인을 의롭다 해줄 수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이미 확정해 놓았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자에게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하늘 법정에서 궁극적인 무죄 방면 선고가 내려졌음을 믿어지게 해주었습니다. 

 

특별히 성자 하나님의 생명과 교환해서 무죄라는 선고를 내렸기에 더 이상의 수정과 취소는 절대 없습니다. 세상 법정도 한 번 내린 판결은 번복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 원칙을 적용하는데, 하나님의 법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구원받을 때부터 전혀 의롭지 않아도 의롭다고 선포했는데, 믿은 후 의롭지 않다고 그 선포를 번복할 리도 절대로 없습니다. 

 

신자는 더 이상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제 그 구원받은 은혜를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가 ‘화평을 누리자’는 말씀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유하자면 항공여행사 VIP 클럽이 규정한 가입 조건을 모두 충족하여 평생회원이 된 것과 같습니다. 여행할 때마다 공항의 전용 라운지에서 최고급 식음료를 먹고 마시고, 또 목적지에 도착하면 리무진을 공짜로 이용하는 등 항공사가 제공하는 모든 특권을 하나 빠짐없이 즐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We have peace with God.”이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했고, 일부 한글 성경도 ‘누리고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 없이 신자의 일상 삶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의 연속입니다. 

 

짐 윌톤이라는 선교사가 남미 콜롬비아 정글의 뮤나네 종족을 위해 신약성경을 번역하면서, ‘화평’에 해당하는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네 추장 훼르난도가 여행을 가야 하는데 걸어서 가면 3일 걸리는 거리를 비행기로 20분 만에 태워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늦게 오는 바람에 추장이 기다리다 지쳐서 도보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그가 가자마자 곧바로 비행기가 도착해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가 추장을 다시 데려왔으나, 또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다음 일정 때문에 출발해 버렸습니다. 

 

화가 난 추장이 짐 선교사에게 추궁하는 말을 퍼부었습니다. 번역 작업을 위해 항상 녹음기를 휴대했는데, 나중에 추장의 말을 천천히 다시 들어보니까 “나는 너와 한 마음이 아니다”라고 자꾸 야단친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마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봤더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평을 ‘한 마음’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 상태를 누리려면 그분과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미 완전한 제물로 받았기에 신자를 만나 주심에 어떤 전제, 조건, 자격, 공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오아시스

 

이제 신자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도 밝혀졌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뭔가 장애가 남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신자 된 신분과 특권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공사 VIP 클럽의 회원증을 손에 쥐어주었는데도 그 혜택이 뭔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쪽에서 그분과 화평을 이뤄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황량한 사막을 며칠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걷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조용히 물을 떠서 마시는 바보는 없습니다. 곧바로 그 오아시스에 온몸으로 뛰어들어서 고개를 처박고서 벌컥벌컥 마십니다. 사막에서 갈증으로 큰 고통을 겪어 본 자라야 오아시스가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갈증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절감한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오아시스만 소망하고 또 구원받으면 그 오아시스에서 벗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신자라면 섬기는 교회의 제자 훈련 코스에 성실히 참여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예수 믿어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영적 정체성과 그에 따라오는 무한한 은혜부터 정확히 알아서 그에 걸맞게 실제로 살아가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경건의 훈련과 실천에 조금 게을렀다고 너무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붙들지 못하는 것이 믿음의 진짜 실패입니다. 

 

물론 현실 삶의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완악한 인간적 본성 때문에, 진토같이 연약한 육신의 체질 때문에, 그 사랑을 제대로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 자신을 정말로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 속에서 정당하고 공의로운 의로움이, 죄를 씻을 깨끗함이, 어려운 상황을 개선할 만한 능력이 제대로 나올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하기에 예수님 사랑의 오아시스에 온몸이 잠기는 길 외에는 소망이 없지 않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과거시제로 표현했으며, 신자가 행할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환난 중에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다고 추가로 선언한 것입니다.(3절)  그 이유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확신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아버지도 아들에게는 시종일관 좋은 것으로 채워주려는 마음뿐입니다. 자식 쪽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 내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올바른 아들이라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기에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앞에 인용한 예화의 추장에 대한 선교사의 마음도 한결같은 사랑이었으나 현실 상황이 그러지 못해서 추장은 한마음이 아니라고 화를 내며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신자들이 고달픈 현실에 눈이 멀어서 추장과 같은 영적인 잘못 내지는 실수를 수시로 저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존재나 힘은 우주 안에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가로막고 있는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현실의 장벽, 나아가 사탄조차도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도덕적 종교적 영적 헌신을 더 많이 바치는 훈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완전히 실현해 놓은 사랑을 더 깊이 더 많이 누려가는 씨름입니다. 우주의 주관자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보잘것없고 추한 이 죄인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었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우주만큼 무겁고 깊으며 끝이 없습니다. 정말로 십자가의 우편 죄수처럼 절망과 죽음의 터널을 예수님 보혈의 필터를 통해서 빠져나온 체험이 있는 자라면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하고서 매일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아 내려는 신자로서의 치명적인 잘못은 이젠 제발 중지하시고, 대신에 예수님 사랑의 오아시스 안에 푹 잠기는 참된 경건을 실천하십시오. 

 

(8/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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