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8:1-6) 하나님이 숨겨둔 변절자가 되어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0)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왕상18:1-6)

 

영적 천재는 없다. 

 

하나님은 영적인 영웅이나 천재를 세우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6)고 명확하게 선포했습니다. 신자더러 당신 외에 다른 어떤 존재나 힘을 절대로 섬기지 말고 오직 당신만 믿고 의지하라는 뜻이긴 하지만, 아무리 충성된 사역자라고 해서 당신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게 하지 않습니다. 

 

구약 최고의 영웅인 모세도 우리가 보기엔 아주 사소한 잘못을 한 번 범했는데도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쓸쓸히 죽게 했고 그 무덤이 어디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전에 모세 본인부터 인간적으로 이런저런 하자가 있었고 큰 죄도 범했습니다. 

 

신앙 영웅이 없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그분의 일에 충성할 수 있고 또 본인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각 신자가 감당했던 그분의 일에 의미나 가치에서 절대 우열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인데 인간이 크다 적다 평가할 수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모두 다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주로 평범한 신자들의 일상적 삶을 통해 당신의 큰일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신자가 실패하거나 죄로 넘어져도, 더 나아가 신자의 대적인 악인을 사용해서라도 당신의 거룩한 뜻을 당신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실현하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가 지금 닥친 여러 현실적 문제로 도무지 여유가 없기에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천천히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주일 예배만은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드리겠으니 양해해 달라는 송구한 마음도 함께 갖습니다. 그 어려운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설명드린 하나님이 사역하시는 그런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의 철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계획하여 당신만의 권능과 은총으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이 절대 원칙은 전혀 변함없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기 능력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며 더 온전해지더라고 고백했습니다. (고후12:9) 그렇다면 신자에게 여유가 없을 때가 오히려 하나님이 크게 일하실 기회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연약한 자나 아무 자격과 능력이 없는 자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더 크게 이루시는데 본문이 바로 가장 생생한 예입니다. 

 

왕궁을 맡은 자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에게 지난 3년간의 기근을 끝낼 테니까 아합왕에게 알리고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라고 계시해 주었습니다.(1절) 그래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혼자서 상대하여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서 백성들로 바알 선지자를 다 죽이게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엘리야는 광야를 거쳐 호렙산으로 피신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이제 이스라엘에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자기 혼자만 남았고 백성들이 전부 우상을 숭배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그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고 또 호렙산으로 피신하는 동안 그와 함께 한 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영적 정서적으로 너무 침체해 있었기에 하나님이 위로해 주셨다는 점은 알겠으나, 칠천 명이라는 숫자는 조금 뜬금이 없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칠천 명 중 백 명을 보호해 남겨둔 한 믿음의 위인이 있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엘리야를 위로하려고 칠천 명이라고 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만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 왕조 시기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시기였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는 가장 암울한 시기였는데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왕상16:31-33) 

 

여로보암은 북왕국으로 분열시킨 직후에 사마리아에 산당을 짓고 금송아지 상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이 유다로 넘어가서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이유이긴 했어도, 그의 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우상을 숭배했다는 뜻입니다. 또 아합은 그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으니까 그 죄가 훨씬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시돈 왕 옛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했고 그 나라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한 제단과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왕과 왕비가 섬기는 우상 신이 국가의 첫째가는 신이자 공식 종교라고 대놓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왕보다 여호와를 더 화나시게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아합이 그런 조치를 하자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이 수년간 땅에 비를 내리지 않게 했다고 말합니다. (왕상17:1) 단순히 우상 숭배 죄악을 심판하려는 뜻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간단히 말해 풍요와 다산을 보장하는 신이었습니다. 건조한 기후의 가나안 땅이 풍요해지려면 반드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한 때에 적당한 양이 내려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가뭄이 들게 함으로써 아합과 이세벨이 믿고 의지한 바알과 아세라에겐 풍요를 보장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었고, 이스라엘더러 그 사실을 깨닫고 어서 빨리 회개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도 아합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고 지금도 자기 힘으로 물을 찾아야겠다고 나섰습니다. 특별히 이세벨은 여호와에게 더 완악하게 대적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은 없으나,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했습니다.(4절) 바알 신전을 건축해 그 신상을 모시는데 여호와 선지자들이 반대 의견을 내었고 또 엘리야가 가뭄을 예언하자 그것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동조했을 것입니다. 이세벨로선 국가 공식 종교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에 화가 치밀은 데다, 실제로 엘리야의 예언대로 비가 오지 않으니까 더더욱 분기탱천해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도 수백 명은 되었을 텐데 얼마가 되었든 그중 백 명을 오바댜가 급히 피신시켰습니다. 오십 명씩 나눠서 굴 두 곳에 숨기고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해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물론 오바댜가 아합의 왕궁을 맡은 자, 즉 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자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합왕과 오바댜 두 사람이 책임지고 물을 찾으러 갔다고 하므로(6절) 어쩌면 권력 서열이 둘째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래서 이세벨의 모략을 미리 눈치채고서 선지자들을 빼돌렸을 수 있습니다. 아합으로선 자기를 가장 크게 배신한 신하를 바로 자기 곁에 두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름 없이 숨겨진 자들

 

오바댜로선 아무리 아합의 신임을 얻었어도 여호와 선지자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곧바로 사형당합니다. 믿었던 충신에게 배반당한 것을 알면 그 분노는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 들키고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는데, 이를 단순히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보호해 주셨다고 해석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오바댜 혼자선 그 일을 절대 감당하지 못합니다. 백 명이 먹을 식음료를 혼자서 운반도 못합니다. 왕궁을 관리하는 일만 해도 아주 바쁠 것이므로 그럴 틈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지시만 하고 직접 그 일을 행하는 충직한 부하들이 최소한 수십 명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자기 목숨을 걸어야만 했기에 그들의 믿음 또한 대단합니다. 그 부하 중 한 명이라도 왕에게 밀고 하면 출세는 완전히 보장되고 어쩌면 오바댜가 맡은 직분을 대신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로선 백 명이나 되므로 섣불리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또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자들일 것이므로 개인적으로 숨어다닐 수도 없습니다. 이미 우상 숭배의 죄악에 흠뻑 젖었고 큰 보상을 바라는 백성들이 언제든 신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최장으로 따져 예후에 의해 이세벨이 죽을 때까지(왕하9장), 어쩌면 십수 년간을 그 굴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바댜의 부하들은 성경이 그 이름은커녕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수고했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야말로 하나님이 숨겨 놓은 그분의 일꾼들입니다. 아합왕의 폭정에 드러나게 반대할 수 없어서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여호와의 믿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니 알지도 못해도 묵묵히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목숨을 건진 백 명과 그 전에 이미 죽었을 선지자들 각자가 자기 주변의 수십 명씩만 여호와 신앙으로 가르쳤어도 칠천 명은 족히 채워집니다. 엘리야는 너무 탈진해서 바알 선지자를 죽일 때 함께 도와준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먹은 것입니다.(왕상18:40)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이 남았으나 7이라는 완전 숫자에 천을 곱하여 기억하기 좋게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뜬금없이 과장했거나 단순히 위로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성경만 갖고 있어도 목숨이 날아갈 판이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혼자서 예수 믿는 북한의 신자들도 하나님이 남겨 두셨다면 우리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칠천 명을 선지자라고 칭하지 않았고 본문에 여호와 선지자에 대해선 이미 별도로 언급했기에 칠천 명의 대부분이 일반 백성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들 또한 오바댜의 부하들처럼 너무 괴롭고 치사하긴 해도 겉으로는 아합에게 복종하는 척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알 신전의 우상 숭배에도 참여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한의 숨겨진 신자들이 국가기념일마다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에 절하며 참배하지 않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물론 자기 믿음을 속여가며 거짓말 하기 싫은 소수의 사람도 있었겠지만, 엘리야처럼 아슬아슬한 도피 생활을 평생 감수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로마 황제의 극렬한 핍박을 피해서 동굴이나 지하 묘지에 숨어서 자기들끼리만 조용히 믿었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심령의 중심은 항상 온전히 여호와만을 향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호와가 끝까지 자기들이 살아남도록 보호해 주시고 또 자기들 믿음이 유혹, 시험, 핍박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거룩하게 자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숨겨둔 백 명의 선지자와 그를 돕는 오바댜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특별히 혼자서 담대하게 아합을 맞상대하고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영적 승리는 우리 눈에 영적인 천재나 영웅으로 여겨지는 엘리야보다는, 이런 너무나 미약하고 이름도 빛도 없었던 무명용사에 대한 기록인 셈입니다. 엘리야가 이룬 큰 승리를 얻게 된 배경에는 이 남은 자들의 기도가 큰 힘을 보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혼자서 다 수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구약 최고 영웅 모세 뒤에도 아론, 미리암, 여호수아, 갈렙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아우르며, 신약 시대엔 열두 사도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열둘은 시공간적으로 완전히 충만한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세상 땅끝까지, 끝 날까지, 당신의 백성 모두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변절자들

 

흔히들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한 신자나 목회자들을 두고 변절자라고 정죄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성경은 무명용사를 넘어서 신앙 변절자들의 기록으로 차고 넘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자기 혼자 살려고 아내를 두 번이나 거짓말로 팔아넘겼기에 변절자의 조상도 되는 셈입니다. 

 

그의 증손자 야곱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이자 장차 동족들을 학대할 애굽의 총리를 했습니다. 모세는 아예 바로의 왕자로 사십 년, 미디안 제사장 사위로 사십 년, 합계 팔십 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낭비했습니다. 다니엘도 원수 나라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총리로 봉직했고 그의 세 친구도 그 왕의 환관으로 섬겼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막부의 장관이나 총리를 한 것과 같습니다. 

 

왕궁을 맡은 오바댜도 어쩔 수 없이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 숭배 제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풀무 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만 유일한 예외일 뿐, 요셉도 다니엘도 이방 제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오바댜로선 바알과 아세라에게 절할 때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속으로는 피눈물이 흘러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이세벨이 여호와 선지자를 멸할 때 함께 죽어야 합니다. 몰래 탈출에 성공해도 평생을 도피자 신세가 되어야 하고 그러면 가족의 생사는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무턱대고 자기 믿음만 지킬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자기 의를 지키려면 여호와 종들은 꼼짝없이 전부 다 죽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한 데다 인생 자체가 절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평생을 연극 배우처럼 가짜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눈 질끈 감고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일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무려 80년간 자기 국적과 모국어를 잃어버린 채 이국땅에서 부모 형제와 떨어져 혼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정말로 영원한 이방인이자 나그네처럼 쓸쓸히 외로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히 여호와를 아는 믿음을 지키려고 그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함부로 버려선 안 됩니다. 믿음도 생명이 있어야 더 거룩하게 가꿀 수 있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 하나님은 오바댜보다 후대의 사람인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기적적으로 문둥병을 치유해 주자 여호와 신앙을 갖게 되었고, 조국에 돌아가서도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유다 땅의 흙을 병에 담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문제는 왕을 모시고 우상 제사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라 여호와가 아닌 이방 신상에 절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솔직히 여호와께 그 사실을 아뢰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다른 일에선 절대로 여호와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뜻임),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5:18)라고 말입니다. 오바댜도 똑같은 기도를 매번 드렸을 것입니다. 

 

오바댜, 요셉, 모세, 다니엘, 나아만을 포함해서 함부로 변절자라고 비난 매도하는 것은 영적으로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막상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부터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강압적이고 위급한 상황에 빠지면 가장 먼저 변절하든지, 성경의 인물들처럼 그런 척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보성 전문 교장이었던 인촌 김성수 선생은 학생들을 신사 참배하도록 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학생들이 감옥에 갇혀서 큰 곤욕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 학업에 충실해서 장래를 도모하게 이끄는 것이 당신의 임무이자 책임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의 모든 비난을 혼자서 받을 각오를 하고선 말입니다. 

 

기도 후원자들

 

오바댜는 물길을 찾으려다 엘리야을 만나자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따로 도피시켜서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13절)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오바댜가 담대한 믿음으로 여호와의 군병들을 묵묵히 섬기는 모습을 보고 크게 도전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정서적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는 바람에 오바댜와 그가 숨긴 백 명의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힘을 내라고 남은 자가 칠천 명이나 있다고 대답해 주었던 것입니다. 네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네가 잘나서도 아니요, 단순히 내가 너를 돌봐주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바댜를 비롯한 칠천 명의 기도 후원자가 너를 위해 밤낮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 혼자서 850명을 상대해서 이겼다면, 칠천 명의 남은 자들에 곱하기 850하면 6백만이 됩니다. 단순 수치로는 그들의 기도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가, 그것도 이름도 없는 연약한 신자의 기도가 그만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전에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엄청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숨기신 이름 없는 당신의 종으로 기도하게끔 이끄시는 것부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오바댜가 물을 찾다가 엘리야를 만나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12절) 아합왕에게 당신을 만났다고 보고해야 하는데 만약 당신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거짓 보고한 자기가 죽게 되니까 제발 왕을 만나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만큼 아합과 이세벨이 아주 포악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바댜의 이 당부를 잘 살펴보면 우선 그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당신이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라고 미래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산 채로 승천시킬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한 셈입니다. 오바댜는 어려서부터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고 특별히 기도에 전념하는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오바댜의 당부가 없었어도 이미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기에(1절), 아합을 만날 계획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도 기도는 매 순간, 특별히 여호와의 백성을 위해서 행해야 하는 영적인 호흡이었습니다. 엘리야라고 포악한 아합왕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삼 년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숨어 다녔습니다. 그러다 오바댜를 만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계시는 받았지만, 아합을 꼭 상대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바댜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했던 이전의 계시를 다시 상기시키면서 바알과의 대결을 단단히 준비하라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여유가 없는 신자 

 

고난과 문제가 해결되어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만큼 엄격히 말해 비성경적인 생각도 없습니다. 신자의 일생은, 아니 모든 인간은 평생토록 문제와 고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하나님을 제치고 지가만 최고로 높이려는 죄로 타락한지라, 신자도 그런 끈질긴 본성이 남아 있기에, 다들 매우 완악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자기가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다투므로 인간 세상에는 항상 문제와 고난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서 본성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끈질기게 거역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대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으로부터 항상 이런저런 모양으로 핍박이 닥칩니다. 신자가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여유는 좀체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잘 아시므로 신자가 여유를 갖고서 본격적으로 헌신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자가 여유와 시간이 생겨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행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자존적이고 완전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행하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불완전하고 감정과 욕심에 흔들리며 때로 죄의 본성까지 작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스스로 행하되, 또 그래서 당신의 백성 누구라도 아무 때라도 그 일에 충성 헌신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더러 아주 일상적인 일에서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당신의 일을 감당하게끔 주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엘리야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큰일을 보란 듯이 해내고 싶다는 소망과 열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구원 여부부터 다시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런 큰 종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직통으로 계시해 주었고 성령의 큰 능력으로 함께해서 이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매우 보잘것없는 일반 신자를 동원해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십니다. 엘리야 시대에 칠천 명의 숨어 있었던 사람들로 단지 숨어서 기도만 하게 했듯이 말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담대한 사람들도 오바댜나 다니엘처럼 구차하게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겉으로는 우상 숭배하게 하고 속으로는 눈물 흘리며 통탄하게 만듭니다. 스승을 부인했던 베드로나, 마누라를 넘긴 아브라함처럼 아주 치사한 모습으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입니다. 

 

너무나 치사한 신자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바라는 일은 어떤 모습으로라도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변절자가 되더라도, 사실은 되는 척해서라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순교는 꼭 그래야만 하는 비상한 경우에만 또 그럴만한 믿음과 담력을 먼저 심어준 자에게만 허락하십니다. 그 외는 비록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그 중심만은 반드시 당신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회개할 기회가 있고 더욱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마련해 놓은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당신께서 이끌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로 살아가는 이상 자살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소명과 다른 임무를 각기 다른 자에게, 말하자면 그 일에 가장 합당하도록 당신께서 준비해 둔 신자에게 맡깁니다. 그 일이 선하게 열매 맺을 것은 하나님 당신의 계획인지라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 일의 크기와 업적으로 하늘의 상급을 나누지 않으며, 신자가 당신의 뜻에 충성 순종했는지만 따집니다. 오바댜처럼 어려서부터 그 중심이 여호와께만 붙어서 흔들리지 않았는지를 보십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청개구리 기질을 가진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 듭니다. 가뜩이나 자기만 높이려는 본성이 신자에게도 남아 있기에 하기 싫은 일은 결코 쉽게 행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고서 하나님께 봉사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히 생겼겠지만, 그것이 오바댜처럼 최우선적인 순서에 자리매김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헌신하겠다는 신자는,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는 진정한 열망이 없거나 크게 부족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이 완전하고 거룩한 당신만의 계획으로 완벽한 때와 방식으로 이끌어 주심을 알기에 매사에 마음 턱 놓고 그분의 인도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부족하고 여유가 없는 현실적 문제와 환난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놓고서, 대신에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분의 소명을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통해 실현해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신자의 일상을 통해서 당신께서 실현하고 있는데, 신자가 그분 일을 하는데 지체하고 주저할 까닭은 전혀 없습니다. 

 

솔직히 따져서 저부터도 영적인 실체는 오바댜는커녕 그를 도왔던 무명의 부하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대제사장의 관저까지는 따라갔습니다. 그전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간 제자들도 겟세마네 동산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잘 봐주어야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라고 소리치는 유대 군중 옆에서 숨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쪽으로만 향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치사한 우리를 통해서도 반드시 당신의 큰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거룩한 인도에 순응하는 것 하나이면 됩니다. 

 

(8/18/2024)


날마다순종

2024.08.23 17:35:53
*.14.99.126

'눈앞의 부족하고 여유가 없는 현실적 문제와 환난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놓고서, 대신에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분의 소명을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통해 실현해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프리지아

2024.08.25 05:40:23
*.36.134.179

아주 치사한 모습으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 제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입니다. 거룩한 인도에 순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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