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루터의 영적 방황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사말을 끝내고 난 뒤, 본문부터 십자가 구원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복음에는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에 대해 구약 하박국서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고 이미 기록해 놓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실은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고, 즉 구약성경 내내 그런 뜻이 계시 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기 전까지는 신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으로 구약성경의 최고 전문가였는데도 구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예수님과 연결해선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가 구약성경에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경위로 하박국서의 말씀에서 십자가 구원 진리를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에 관해 바울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인물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1517년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린 마르틴 루터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유대교 율법주의에 완전히 세뇌되어 있었고 또 당시 유대 사회의 영적 분위기상 구약성경을 오해할 수 있는 요인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루터는 구약성경은 물론 로마서를 필두로 신약 성경도 신학교에서 배운 천주교 신부였는데도 오랫동안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그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원받지 못했다면, 오늘날 성경 통독도 제대로 하지 않는 많은 신자들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루터가 그렇게 된 첫째 이유는 당시의 영적인 흐름 때문인데 교회가 앞장서서 십자가 복음을 캄캄하게 가리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 동안에는 로마의 박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어야 했기에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러다 392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 종교로 공인됨으로써 신앙생활이 편안해졌고 점점 성경의 진리보다는 사제들의 가르침에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 교황청이 종교와 정치권력을 틀어쥐게 되었고 하나님이 아닌 교회가 구원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런 교회 종교 권력을 유지하고 경제적인 부까지 쌓으려고 구원 얻는 데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따로 덧붙였습니다. 

 

루터는 교황청의 심각한 부패상을 고발하는 종교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도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영적 씨름을 지속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그의 회심 이야기를 다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루터는 신학교를 마치고 신부 서품식을 거행하면서 이제부터 다른 이의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천주교에선 성도가 고해실에서 지은 죄를 고백하면 신부가 듣고 판단해 용서를 비롯해 적절한 선고를 내려줍니다. 루터로선 인간인 자신이 다른 인간의 잘못을 판단 선고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죄부터 온전히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있을까, 나같이 추한 죄인이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기는커녕 그분과 화목할 수는 있을까, 등등의 질문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나 딱 부러진 응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관할 주교가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해서 지난 모든 죄를 기억나는 대로 몇 시간 동안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회개했더니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받았나보다 안심하고 일어서는 순간 지금껏 회개했던 것들보다 더 심각한 죄가 생각나서 더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수도사들이 죄를 솟구치게 만드는 육신을 학대하면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고 권면해서 채찍으로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했으나 더 허망하고 우울해졌습니다. 물론 의지적으로 죄 안 짓고 열심히 선행하려는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급기야 1511년 담당 교구의 일로 로마로 출장을 가서 빌라도 계단이라고 불리는 라테란 성당의 28개 돌계단을 무릎꿇은 채 기어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 계단을 그렇게 고행하며 올라가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애꿎게 무릎에 피만 흘렸을 뿐 기쁨도, 평안도, 구원의 확신도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설교를 준비하며

 

그러다 29세가 되던 1512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강해를 한 후 1515년부터 로마서를 설교했는데 바로 본문에서 완전한 영적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에게 성령이 조명해 주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의 사제였던 루터로선 교회가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이런저런 종교적 절차와 선행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카톨릭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려면 그분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러지 못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형벌이 따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제가 된 계기가 자기 친구가 눈앞에서 벼락 맞아 즉사하는 것을 본 사건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로선 더더욱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합당한 형벌을 주시는 진노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루터가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취했던 모든 노력이 아무 열매 없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여전히 죄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죄인이라는 사실만 갈수록 더 절감했습니다. 루터로선 하나님이 죄에 따른 형벌을 주어서 당신의 의를 세운다면, 자신에게 구원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나락에서 로마서 강해를 준비하면서 그의 시선을 빼앗은 구절이 바로 바울이 인용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루터는 말씀드린 대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 대로 하나님의 의를 죄에 대해 엄중히 처벌하는 공의의 차원으로만 접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도 하나님의 의를 자기처럼 이해하고 갈등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핍박받는데 하나님은 왜 방치하느냐고 따졌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유다를 정복하게 해서 그 악인을 심판할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너무 놀란 하박국은 그러면 의인까지 희생되지 않느냐고 다시 따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할 도구로 세운 바벨론의 죄악도 너무 많아서 이미 심판으로 확정해 놓았으니까 그때를 의인은 믿음으로 기다리면 된다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엘리야 때에 바알 신에게 절하지 않고 당신만 따르는 의인 7천 명을 남겨서 보호해 주었듯이, 당신이 택한 의인은 반드시 당신의 긍휼로 지켜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그 계시를 듣고선 의인에 대한 구원과 악인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그분이 행하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이 침공해서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감사와 설렘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도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어도 궁극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가 장차 올 것이라는 그런 믿음도 생겼을 것입니다. 

 

루터의 영적인 전환을 감히 추측해 보자면, 본문을 성령의 조명으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기 죄를 아무리 씻으려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했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박국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 십자가에 비추어 묵상해 보니까,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지 인간의 어떤 의로움도 구원에 한 치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자신의 지난 영적 체험에 비추어 봐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악을 반드시 심판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당신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완벽하게 실현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는 말씀도 이제 절대적 진리로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만 제한하지 않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그분의 긍휼과 함께 접근하니까 비로소 예수 십자가가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한 정의와는 다른 ‘하나님만의 의’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루터와 동일한 영적 순례를 겪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스스로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로 당대의 도덕적 의인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열정에선 더더욱 최고가는 종교적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율법대로 착하게 살면 사회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고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의 일당이 나타나 유대 사회의 질서를 무너트릴 뿐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마저 흔들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예사로 어기고 성전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부활한 인간 랍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예수의 제자들은 반드시 도려내야 할 유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자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여기고 박해하기 시작했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흘간 봉사가 되어 죽은 것과 방불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선 예수가 부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렇다면 그가 생전에 가르친 말씀도 하나님의 진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흘간 구약성경을 다시 묵상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이미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다메섹에서 거꾸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고 전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약속한 대로 바벨론을 심판하여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켰으나 이스라엘이 형통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이방에게 시달림받았고 바울 때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겪는 모든 환난이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정확하고도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바리새 운동이 헬라 치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바울도 철저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의인이라 천국 입성은 확정되어 있고,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타락한 이방인은 죄인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이방인, 세리, 창녀 같은 천하의 죄인들과 교제하고 치유해 주는 모습을 보고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이단 괴수로 여기고 그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고선 바울에게도 성령이 조명하여서 구약성경에서 이전에 몰랐거나 지나쳤던 구절의 의미가 정확하게 깨달아졌던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자기들 선조로 삼았을 때 맺은 언약에서부터 그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운다고, 즉 모든 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모세와도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세운다는 피의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방인을 하나님의 저주를 이미 받았다고 자기가 속한 바리새파가 정죄 심판했고, 대신에 자기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바로 그 바리새파가 구원해 주었습니다. 루터 때의 카톨릭처럼 인간이 지닌 종교 권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원도 베풀고 심판도 내린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이는 말도 안 되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가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을 크게 대적하고 있었던 그분의 원수였습니다. 

 

그동안 바리새파 율법 준행 운동을 통해 자부심으로 가득 찼으나 하나님 앞에서조차 인간의 알량한 의를 뽐내고 사람들 앞에는 의인인 양 자랑하려는 헛되고 헛된 종교적 가식과 위선이었음을 바울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왜 공사역 중에 유일하게 종교 지도자들만 크게 야단쳤는지 그 이유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시도는 무모하다 못해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며 그 자체가 바로 가장 큰 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을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도무지 말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도, 또 하나님이 인간의 죗값을 갚으려고 인간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은혜만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사교(邪敎)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그분의 의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당신 원수들의 죄악마저도 용서해 주려고 대속 제물로 받으신 것이 하나님의 의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 당신께서 다 짊어지시고 대신에 죄인들은 당신만의 자비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달성하신 그 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죄인에게 예수님의 그 의를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부터 이방인이라도 예수를 믿었으면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이미 밝혔습니다.(6,7절) 하나님의 의는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어떤 큰 죄인도 품어주는 의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에 빠져 영적으로 시체가 된 인간은 평생을 두고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당신과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셔야만 했고 또 각 개인에게 그분이 손을 내밀어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바울과 루터 같은 성경 전문가도 성령이 역사하기 전에는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깨달아 주님을 믿게 된 그 믿음마저도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이 심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신의 능력으로 순전한 믿음이 생기게 하는 그분이 선물로 주는 의입니다. 

 

그 선물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 전부를 내어드리며 저절로 겸손히 엎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생전 처음으로 루터처럼 세상에선 절대 얻을 수 없었고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참된 평안과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죽음만이 죄로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자 궁극적으로 영원한 기쁜 소식입니다. 

 

다윗이 깨달은 복음

 

바울이 복음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해서 이미 약속한 것이라고 선언했듯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 다윗에게도 성령의 역사로 당신의 의를 온전히 밝혀주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0-14)

 

먼저 우리 죄대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은 죄대로 처벌하자면 당장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미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공의로 처리해선 아무 해결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당신의 크신 인자로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처럼, 즉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거리만큼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신 것입니다. 마치 죄를 전혀 짓지 않았던 양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체질이 먼지라서 죄에서 스스로는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 시편 139편에서 하나님은 자기가 앉고 일어섬의 행동과 혀의 말과 나아가 생각까지도 통촉한다고 시인했습니다. 절대로 그분의 눈을 피해서 도망갈 수 없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길 수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나아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평생토록 행하는 행동, 말, 생각의 목록이 하늘의 생명책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 말,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찍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과 그 영상을 단 5분이라도 함께 볼만큼 간이 큰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창피하고 두려워서 곧바로 제발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바짝 엎드릴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누가 더 의인이고 누가 더 죄인인지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도해 보면 하늘 우러러 부끄러운 점 없고, 십계명도 잘 지켰고, 남들에게 해로운 짓 한 적 없으니까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말로 형제를 욕하면서 인격 살인을 하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어야 하는데 겉으로만 잠시 그럴 뿐 계속 배 아픈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교회에서마저 거룩하게 성가대로 봉사하면서도 화음을 잘 맞추는 예쁜 다른 여자 성도를 보고 야릇한 생각을 하는 것이 신자라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는 썩어질 것이며 모두가 가면을 쓰고 위선을 떠는 너무나 추하고 비겁한 버러지일 뿐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역사상 최고의 의인으로서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바리새 계명이 아닌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의 요구도 당신은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모든 이를 외모로 절대 차별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긍휼로 다 품어주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자를, 나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낙인찍힌 자들도 당신만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도 최고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과라곤 단 한 톨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갚아진 죄과는 하늘을 우러러 죄가 없다고 교만을 떠는 완악한 우리들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원수들마저도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죽기 직전까지 기도해 준 것입니다. 

 

당대의 의인이라 바울은 스스로 율법에 하자가 없다고 자랑하면서 자기처럼 율법,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규례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한 가지 구실만으로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루터도 아무리 회개해도 기억 속에 숨겨진 큰 죄가 남아 있었고 무릎에 피를 흘리며 계단을 올랐으나 조금도 의로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런데도 십자가 예수님을 끝까지 외면하고서 완악하게 자기는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집하는 자들은 너무 어리석다 못해 그저 불쌍할 따름입니다.

 

주님 오시기 수백 년 전의 선지자 하박국은 궁극적인 십자가 구원의 약속만 어렴풋이 받았을 뿐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그분의 긍휼로 참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바울보다 약 1400년 후의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섯 Sola 구호를 내걸고서 사탄이 약 천 년이나 교회를 포함하여 온 세상에 덮어씌운 흑암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하나님의 의보다는 인간의 의를 더 강조하는 기독교 교파가 꽤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구원의 길만 열어놓았을 뿐 그 외에 자기들 교회가 정한 여러 절차를 거쳐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누가 봐도 성경이 엄격히 정죄하는 이단이라서 굳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작 염려스러운 것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기에 다른 절차는 필요 없어도, 인간이 그 구원에 힘을 보태어서 협력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필요 충분한 도덕성 종교성 영성을 갖고 있기에 성경의 진리를 스스로 깨달아서 자기 의지로 믿기로 결단할 수 있고 그러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바울과 루터 같은 성경 전문가도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어쨌든 모든 신자가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복음을 이해하고서 믿기로 결단하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에게 온전한 영성이 있다고 전제하니까, 예수 믿은 신자가 죄를 지으면 그 구원이 취소된다고도 말합니다. 충분히 죄를 안 지을 수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정말로 진지하게 되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본인은 죽을 때까지 과연 죄를 안 지을 자신이 있는가입니다. 또 앞에서 비유한 대로 자기 일생의 모든 것을 찍은 영상을 과연 하나님과 함께 볼만한 그런 떳떳함이 정말로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는 평생토록 당신의 의의 수준에 절대 미치지 못하니까 또 그 체질이 진토인 줄 아니까 당신의 아들로 죗값을 치르게 한 그 은혜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선물로 그분이 주십니다. 그것도 당신께서 구원을 주기로 작정한 자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죄를 짓는다고 구원을 취소하면 아예 골고다에 십자가를 세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라고 꾸중한 말씀이 그들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바울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이방인 교인들에게도 너희가 예수를 순전히 믿었으면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선언해 주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맺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훈계는 해도 그 사랑의 관계를 아버지 쪽에선 절대 끊지 않습니다. 바울이 결국 네로 황제의 핍박 때 자기가 처형한 스데반처럼 순교 당했지만, 그는 그 죽음마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절대 끊어낼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본문 서두에서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이전에 예수를 몰랐던 자신이 부끄러웠으나 지금은 아무리 현실적으로 궁핍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율법의 의로 자부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자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 정반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이신 십자가가 아주 자랑스럽다는 뜻입니다. 

 

로마 교인들처럼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복음을 제대로 믿어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있는지 다시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 믿어서 현실적으로 형통하지 않다고 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고 대신에 내 속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이 최고로 자랑스럽습니까?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져 용서받은 죄인, 즉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라고 확신합니까? 

 

믿음이란 비록 체질이 연약해서 종종 죄로 쓰러져도 예수 십자가 은혜로 다시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욱 경건하고 의로워질 수 있는 그런 당당함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나처럼 아직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주변의 영혼들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바울과 루터처럼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11/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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