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1-3)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시험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22:1-3)
너무 잔인한 하나님
성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종의 믿음이 순전한지 아닌지 대놓고 시험(test)한 경우는 아브라함이 유일합니다. 욥의 경우는 천상의 영계에서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그의 믿음을 두고 내기한 것이라 욥 본인은 자기에게 왜 그런 엄청난 고난이 임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이유와 목적을 밝히진 않았으나 구체적으로 명령했기에 본인도 믿음의 시험인 줄 알았거나 최소한 짐작은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은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그가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 그에 합당한 믿음으로 온전히 성숙해졌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너무나 가혹해 보입니다. 사람의 심령에 숨겨진 어떤 것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으로선 아브라함의 영적 상태를 굳이 아들을 바치라는 식의 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 단순히 네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짓궃게도 아브라함의 속을 완전히 까서 뒤집어 놓는 것 같습니다. 번제란 짐승을 죽여서 그 전부를 불로 태워서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번제로 바칠 제물’ 이라는 두 가지 표현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상극적인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더러 사랑하는 외아들을 그렇게 바치라고 요구하다니 너무 미개하고 반윤리적인 요구가 아닙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믿음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그가 75세가 되도록 아내가 불임이라 자식 보기를 포기하고 있는 참에 하나님이 네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취가 계속 지체되자 당시 관습대로 충실한 종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 했으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난 아들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미 폐경이 된 사라로선 자신의 젊은 여종 하갈을 후처로 주어서 남편의 씨를 받으면 되겠다고 판단했고 아브라함도 그에 동의해서 장남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 밖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은 사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주신다고 다시 확약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들도 그 약속을 다시 믿어보기로 하고서 늙은 몸에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성관계를 맺고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선 어쨌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따랐었는데 그 아들을 지금 당신께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그 이삭은 아직 인생의 낙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청소년에 불과한데, 불에 태워서 죽이라고 합니다. 이럴 양이면 처음부터 이삭을 주지 않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 부부가 오랜 기간 간절하게 기도하여서 겨우 잉태했는데 아내의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 격심한 산고 끝에 아주 허약한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부모는 금이야 옥이야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아이가 점점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서 부모에게 인생 최고의 기쁨이 되어가는데 갑자기 원인 모를 죽을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부모로선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아이를 왜 이렇게 다시 데려가느냐고 하나님께 의심과 원망을 품을 수밖에 없고 자칫 믿음마저 버리려 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꼭 그런 상황입니다.
너무 담담한 아브라함
성경은 하나님의 지시에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침묵하지만, 틀림없이 사라를 포함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밤새 하나님과 씨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바치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바치겠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인신 공양은 자기가 떠나온 우르의 우상 제사 관습인데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동일한 요구를 하느냐고 정색하며 물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속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우상 종교에 오염된 사상을 하나님이 완전히 없애 주려는 뜻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 잔인하고 미개한 관습이 너무 싫어서 하나님이 그곳을 떠나라고 명할 때 갈 바 모르지만 곧바로 따랐으며, 그 후로 가나안 족속이나 애굽의 우상 숭배 제사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잘 아시면서 왜 이런 지시를 내리느냐고 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절은 그가 밤새워 고민했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다음 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 그 명령에 주저없이 순종했다고 기록합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냥 포기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너무 무리하고 끔찍한 요구를 했음에도 아브라함이 선뜻 아들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나선 까닭이 궁금합니다.
욥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은 물론 이삭에 대한 미련까지 몽땅 잊어버리기로 한 것입니까? 성경에 관한 의문은 반드시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이에 관한 힌트는 히브리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사건에 대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히11:19)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켜 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까? 부활에 관한 문제는 조금 더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음부로 내려가 무의식 상태로 자고 있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야 그런 사상이 생성되었고, 예수님 당대까지 사두개파는 그런 부활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의 믿음이 모든 신자의 조상이 될 만큼 대단했다 쳐도 기원전 이천 년에 그런 부활을 믿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마지막 날의 모든 이의 보편적 부활을 믿었다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다”라고 표현할 리 없습니다. 죽은 신자들 모두가 동시에 다시 살아나므로 그 가운데 이삭만 살린다고 말하면 이상해집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묶어 놓고 칼을 치켜들어서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의, 최소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삭이 부활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밤새워 궁리한 아브라함
그런데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기록이라 히브리서의 설명을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고 ‘생각한지라’라고 말합니다. 영어 성경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결론을 내렸다’(conclude), ‘헤아렸다’(reason), ‘계산해 봤다’(accoun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헬라 원어인 ‘로기조마이’가 목록을 작성하다, 계산하다, 짐작하다, 추리하다 등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이 부활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으로 추측 내지 간주한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우리도 잘 헤아려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하란에서 당신께서 지시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면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한 사실부터 그는 상기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그의 당대에 큰 민족이 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지금 이삭을 바치고 나면 원래 불임이었던 사라에게 하나님이 또 다른 기적을 베풀어 주리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사라는 지금 너무 늙어버려서 임신과 출산을 감당할 만한 체력이 안 됩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려면 어쨌든 세 가지 방안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순간에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번복해야 합니다. 둘째는 번제를 취소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이삭을 대체할 다른 제물을 주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방안이 다 아니라면 마지막 세 번째로 이삭을 죽여도 다시 살려 주어야만 합니다. 만약 다시 살려주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브라함이 곰곰이 따져보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이뤄나가는 모습과 방향으로만 자기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에 개입 주도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분의 지시대로 따라서 그분의 뜻이 이뤄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스스로 최선의 길이라고 궁리해서 행했던 일이 크게 실패했어도, 하나님은 오히려 더 큰 선으로 바꿔주셨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지시대로 따르면 반드시 선한 결말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결론을 비교적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이삭이 죽어 없어지면 하나님도 당신의 약속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셋 중에 하나님이 어떤 방안을 취할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행한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실 분이므로 그 처분을 그분께 온전히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밤새 갈등 고민하였어도 결론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 세 방안은 어쨌든 이삭이 살아남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담대하게 새벽 일찍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제 독단적인 추측이 절대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부활을 생각했다고 말한 구절 바로 앞에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밤새워 궁리해서 이삭의 부활을 추측 기대하게 된 근거가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삭만이 큰 나라를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 약속의 수혜자가 되는 씨앗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이삭이 태어날 것을 아브라함이 믿고서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20,21)라고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자녀 출산이 불가능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잉태는 손쉬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단순히 그 일의 가능성만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분이 이루시고야 만다는 절대적 진리를 믿은 것입니다.
같은 뜻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속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므로 그것을 이루실 이도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브라함은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믿은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서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사고의 초점을 모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삭이 살아 남아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진다고 결론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날 아무 일 없는 양 담대하게 모리아 산을 향해서 출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런 생각이 그의 말에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아들 이삭이 보니까 번제를 드리려면 짐승 제물을 함께 갖고 가야 하는데도 아버지는 가축을 한 마리도 끌고 가지 않습니다. 중도에서 돈을 주고 사려나 보다 여겼으나 막상 모리아 산에 이를 때까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무심하게 번제 나무를 자기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들고서 제단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으로선 본능적으로 아주 불안해져서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더니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라”(8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궁리해 본 하나님의 세 방안 중에 둘째 것으로 대답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삭을 번제단 위에 놓고 정말로 죽이려 했습니다.(창22:6-10) 하나님이 곧바로 다시 살려줄 것을 아니까 마음 턱 놓고 짐짓 번제를 드리는 시늉만 낸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밤새워 궁리한 그대로 실현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고 따로 준비 해놓은 제물도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가적인 지시가 없으므로 처음 받은 명령대로, 즉 세 번째 방안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자기가 추측한 첫째와 둘째 방안을 하나님이 취하지 않았으니까, 세 번째 방안대로 자기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어떻게든 부활시켜 주리라고 믿고서 말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 전해 주었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양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습니다.(13절) 그렇다고 그가 사태가 다 해결되고 나서야 주위를 살펴본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번제에 쓸 양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이삭에게 대답해 주었듯이 혹시 둘째 방안대로 제물이 있는지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전혀 눈에 띄지 않았기에 이삭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처음에 집에서 함께 데리고 나온 두 종을 모리아 산에 이르자 따라오지 말라고 하며 남겨둔 것도 아브라함으로선 이삭을 실제로 죽일 각오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들에게 아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고 또 그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숫양을 아브라함의 눈에 잘 띄게 바로 곁에 놓아두었다면 그가 행동으로 이삭을 죽이려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은 믿음의 시험으로 성립되지 않고 그냥 말장난한 것에 불과해집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 심령의 깊은 속내까지 항상 꿰뚫어 보시므로 시험 후에야 그의 믿음을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그가 정말로 자기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마저도 다 아시지만, 믿음을 순종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즉 이제는 아브라함이 그를 불러낸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모습을 당신께서 큰 기쁨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완벽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는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이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표면적 결과적인 분석입니다.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도 전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삭을 어떻게든 살려서 당신과 맺은 언약의 주역으로 자기를 이어가게 하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절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이삭의 부활을 생각했다고 말한 후에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이 사건의 진짜 결론을 덧붙였습니다. 이삭이 완전히 죽을 뻔했고 또 그랬어야만 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 제물을 죽임으로써 그가 대신 살아났으니까, 이삭은 부활한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소명에 대한 시험
이 시험을 뒤집어서 살펴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그에게 맡긴 소명에 끝까지 충성할 것인지 테스트한 것입니다. 그것도 당신만큼 어쩌면 당신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을 그 소명의 실천을 위해서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지 알아보신 것입니다.
소명에 충성하는 모습이란 아브라함이 큰 사건이나 기적적 은혜를 받아 누림으로써 순간적으로 강해진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 내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전하고도 신실하게 따르는 그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얼마나 귀하고 막중하게 여기면서 실천하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인생 말년에 가장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너무나도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 나온 이후 그의 삶에는 흠결도 많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섣부르게 잘못 결정하여서 우왕좌왕하며 실패한 모습도 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 기록을 잘 살펴보면 그가 자기 인생에서 일관되게 지킨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족속의 우상 종교 관습은 물론이고 죄로 타락한 그들의 생활 방식에 절대로 물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더 중요한데 그는 자신의 영달보다는 항상 주변 사람이 잘 되기를 더 바랐다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이방 왕들에게 아내가 큰 곤욕을 치를 뻔한 잘못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로서 가나안으로 넘어올 때부터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함께 생명을 지키자고 약속했던 대로 행한 것입니다.(창20:12,13) 당시에 예쁜 여자만 보면 힘센 자가 무력으로 그 남편을 죽여서라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아브라함의 잘못만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기근을 피하려고 애굽과 그랄 땅으로 넘어감으로써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가 집에서 기르는 사병이 사백 명이나 되었는데, 자기 가족만 살리려면 굳이 그곳으로 넘어가지 않고도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군대가 사백 명이면 그들 가족과 나머지 종들까지 합치면 아브라함은 한 씨족 국가의 왕이었던 셈입니다. 성경 기록은 없어도 그들을 살리려면 곡식이 아주 많거나 기근을 당하지 않는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그는 조카 롯을 살리려고 비옥한 초지를 양보했고, 나중에는 마찬가지로 롯을 살리려고 그 사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 연합군과 전쟁도 치렀으며, 하나님의 심판 예고를 듣고는 소돔에 거주하는 롯을 살리려고 그 천사들과 끈질기게 기도 같은 담판을 했습니다. 서자 이스마엘과 첩인 하갈을 품어주느라고 본처 사라와 친자 이삭과의 갈등을 무마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소돔 왕이 전쟁 승리의 보상으로 탈취물을 전부 가지라고 제안했으나 거절했고 대신에 살렘 왕이자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그것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애굽과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종답게 거룩하게 구별된 모습으로 담대하게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서 그를 축복하는 자를 당신이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당신이 저주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또 실제로 그의 삶은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언약에 아브라함은 어떤 위험에 처해도 자기 전부를 바쳐서 동참하며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수고와 희생을 감당했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멸과 멸시도 이겨냈습니다.
그로선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외면 대적하고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 죄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했는지 70여 년이나 생생하게 목격하고 또 체험해 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언약에, 바꿔 말해서 자기 소명에 충성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너무나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이 요구를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주저없이 따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시험은?
이 시험을 두고 아브라함이야 믿음의 조상이니까 특별하고도 엄청난 시험을 받아야 했지만, 그 후손인 우리는 굳이 그런 시험을 받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라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려 나온 자입니다. 신자가 아브라함을 닮기도 힘든데 어떻게 예수님까지 닮을 수 있느냐고 반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면 아브라함쯤은 얼마든지 닮을 수 있다고 말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제자들이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작은 예수라는 것이었습니다.(행11:26)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당했던 것과 같은 시험, 고난,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을 자신과 관계없다고 여기면 신자가 된 본분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아서 더 훌륭한 후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까?
흔히들 온갖 즐겁고 신나는 세속적인 오락이나 돈으로 형통 출세하는 이웃의 모습에 현혹되어서 믿음에 시험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믿음이 없어도 어지간한 의인이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 다툼이 생겨서 혹은 목사의 정죄하는 설교에 상처 받고는 믿음에 시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시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다시 집중하면 평강을 되찾고 믿음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반드시 아브라함처럼 자기 소명과 연결되는 시험인지 아닌지 따져봐야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주실 리는 없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소명을 실천하는 일을 주저하게 만드는 시험은 언제 어디서나 신자 앞에 두십니다. 그것도 현실적으로 따져서 아주 중요한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시험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흔히들 지금은 제 코가 석 자라서 나중에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겠다고 핑계를 대는데, 바로 그런 말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아브라함처럼 모든 민족으로 여호와를 알게 해주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세상에서 불려 나온 자입니다. 그만 최초의 해외선교사가 아니라 모든 신자가 자기가 거주하는 그 시대와 그 장소의 선교사로 불려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라고 젊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디모데더러 하나님께 불려 나온 그분의 군사이므로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을 수행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시험을 통과한 후에 이삭에게 그간의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데에 모든 것을 바치는 믿음으로만 살아가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삭은 완전히 죽을 뻔했다가 하나님이 대신 마련 해놓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직접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르침을 피부로 절감하고 아버지와 동일한 소명자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권능을 주변에 더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목적과 방향으로만 이끄십니다. 감히 단언하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서 그 일 외에는 다른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다면 우리는 그 아들의 이름을 높이는 일로만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주도할 것인데,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꿔 말해서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을, 그 정도와 세기는 각기 달라도, 똑같은 의미의 시험을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신자 된 신분부터 그처럼 밤새도록 되새겨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사실상 당신께서 이천 년 후에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모리아 산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 언덕이었습니다. 모든 신자는 예수 십자가 앞에서 이삭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일차적으로 영적 부활을 거쳤습니다.
신자는 이미 십자가 군병이 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사나 죽으나 당신의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실제로 번제물로 내어주신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분에게 이미 다 맡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병사로서 해야 할 바를 어찌 내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계속 미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지금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계속해서 온갖 시련 고난 시험을 신자 앞에 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껏 실패했듯이 어떻게든 그것만 극복해 보려 해선 또다시 그분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없다고 계속해서 핑계 댈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의 나라와 일을 먼저 구하여 실현하면 시간과 여유를 그분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1/12/2025)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