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3) 천국 열쇠를 사용하고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3)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1-3)

 

극존칭의 인사말

 

로마 제국은 식민지들이 세금을 성실하게 바치고 모반을 도모하지 않는 이상 종교를 포함해 고유의 문화와 관습을 자치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고 약 70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유대 공회가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공회는 그래서 성전 제사와 율법 준행을 엄격히 유지 관리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요한은 니고데모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칭했는데 그런 공회원이었다는 뜻으로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 내지 장관 급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였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적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혼자서 몰래 찾아온 까닭은 당시 정통 유대교에선 나사렛 예수 운동을 유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이단시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이 헬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방 문화에 오염되어 여호와 신앙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염려해서 기원전 2세기 경에 형성된 종파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규정하는 것들에서 분리하려는 태도를 견지했기에 ‘잘라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백성들에게도 모세 오경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지키도록 강요했으며 그러지 않는 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서 분리시키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요컨대 니고데모는 율법의 전문가로서 백성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당신의 구원 진리를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고 꾸중했습니다. 단순히 비유해서 정통 교단의 신학교 교수가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이단 교주에게 신앙 상담을 요청하는 꼴인지라 비밀리에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는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나 서로 초면인 상태에선 그 사람의 직위나 신분에 대한 존경부터 표시합니다. 니고데모도 가장 먼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라는 인사말을 건냈습니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진술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주류인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헤롯당 중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어떤 공식적인 관직도 맡고 있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제자들을 불러 모았으며 특이하게도 모세 오경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니고데모는 극존칭의, 어쩌면 숭배의 의미까지 내포된 표현을 동원했습니다. 주님이 보여준 표적은 인간이, 아무리 초자연적 능력을 가졌어도, 행할 수 있는 차원과는 전혀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권능을 부어 주어야만 가능한 표적들이었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했습니다.  

 

요한은 이 만남을 주님이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상을 내쫓은 사건 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라면 자기 목숨을 걸지 않고는 대제사장의 불의를 대놓고 정죄하는 그런 일은 절대 행할 수 없습니다. 마가는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다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준 모습을 지켜본 유대인들이 놀라면서 “이는 어찜이냐 권위있는 새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1:27)라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직간접으로 전해들은 바를 따져본 니고데모로선 주님이 어떤 신령한 랍비와도 아예 비교가 안 되는 차원의 인물이라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심중을 꿰뚫는 대답

 

니고데모가 방문한 목적과 이 인사말의 의도에 대해서 본인은 물론 성경은 침묵합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의 의심, 불만, 궁금증 등을 정확히 알고서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곧바로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당사자들은 자기들 속내를 들켜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 권세 있는 진리의 말씀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니고데모의 심중을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은 그가 묻지도 않은 구원의 길을 곧바로 알려 주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고 단언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가르쳤기에, 그는 당연히 그것이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봐야 합니다. 또 그것이 궁금했다면 지금까지 온갖 방안을 다 동원해서 노력해 봤으나 그 나라를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중에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당신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풀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3;16) 주님은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라고 표현한 셈인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도 요한이 니고데모를 가장 먼저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마지막 날에는 음부에서 자고 있던 의인들이 깨어나 부활하여서 메시아가 세울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동참하는 복락을 누린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당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호칭한 까닭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그 문제에 대해 묻고 싶다는  뜻인 줄 미리 아시고서 그에 맞추어 대답해 준 것입니다. 

 

먼저 부활 신앙은 다니엘의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12:1,2)라는 예언에 근거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미 죽은 자들도 깨어나서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또 메시야가 세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면, 세상의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게 되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정도로 만물이 회복되고,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갚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고 예언했습니다.(사11:1-9) 

 

바리새인 중 남은 자 

 

많은 신자가 바리새인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선입관만 가집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할 온갖 세밀한 종교적 멍에를 만들어서 백성들 목에 걸은 것은 분명히 잘못했으며 또 그로 인해 예수님과 많은 충돌이 있었고 저주의 꾸중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로선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율법을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는 선한 의도에 따랐던 것입니다. 나아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열렬히 소망하면서 자기들부터 기도, 금식, 구제 세 가지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준비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문답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내가’라는 일인칭 단수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복수 주어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따로 더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누구일지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산헤드린을 대표해서 면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으로(요2:13-20) 유대 당국과 예수님 사이에 이미 대립과 균열의 조짐이 크게 형성되었으므로 이는 불합리한 의견입니다. 둘째는 유월절에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보이자 많은 사람이 믿었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요2:23) 니고데모가 그런 유대인들의 궁금증을 대변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유대 대중은 당장에 다윗 왕국의 현실적 영광이 재현되는 것을 더 강력히 소망했지 마지막 날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관심은 훨씬 덜했습니다.  

 

셋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약 6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바리새인이라고 가장 먼저 강조했고 예수님의 답변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므로 니고데모는 자기와 같은 궁금증을 지닌 동료 바리새인을 대표해서 찾아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이사야와 다니엘 같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같은 반열로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마지막 날에 관해서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얻고 싶었고 혹시라도 더 추가할 새로운 예언은 없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조국의 현실적 회복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거룩하게 바뀌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을 일부 택하여서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적 실체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의 상위 0.1%에 속하므로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치적 권세가 최상위 70명 중의 한 명이었므로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풍족했을 것입니다. 율법의 전문가로서 여호와를 따르는 믿음에서는 물론이고 실제로 선행을 많이 해서 도덕적으로도 제일 의로웠을 것입니다. 이후 기록을 보면 온유하며 합리적인 사고를 지녔기에 주변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현실 삶에서 아무런 고난과 결핍이 없는데도 그의 마음에는 온전한 평강 기쁨 만족이 없었던 것입니다. 조국은 로마에 멸망당해 식민지가 되었고, 정치적인 탄압으로 백성들의 자유는 크게 박탈되었고, 온갖 과세와 수탈 정책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졌으며, 문화적으로도 이방의 추악한 풍습에 오염되어 갑니다. 백성의 지도자이자 선생으로서 모세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라고 강조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며 실천해도 별무효과입니다. 자신의 주변이 날로 짙은 어두움에 휩싸여 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참 만족과 기쁨이 없는 상태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의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수시로 알게 모르게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너무 괴롭습니다. 말로나 생각으로 이웃은 물론 가족들까지 수시로 시기 질투 증오 저주를 넘어서 사실상의  살인까지 자행합니다. 자신의 지성, 지혜, 의지, 도덕성, 종교성, 영성 등을 다 동원해서 그러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실패하니까, 언제부터인가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너무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양 점잖게 대처하지만, 돌아서면 자기 실체를 스스로는 아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추한 실체를 사람들에겐 감추고 속일 수 있었으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엄중한 눈길은 도무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로선 구원의 확신이 생길 수 없고 거꾸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늘어날 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거룩한 율법을 받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조차, 대다수 바리새인과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그런 영적 침체에서 자신을 전혀 건져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적 상태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가 주님을 밤중에 몰래 찾아온 이유만은 분명합니다.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가 너끈히 동참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예수님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자기 주위에 자기와 같은 동료가 더 있으므로 제대로 가르쳐 주면 돌아가서 그들에게 대신 전해 주겠다는 의사를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통해 내비췬 것입니다.   

 

생명책에 올릴 이름

 

당시에 최고 의인이었던 니고데모가 풀지 못한 궁금증이라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 그것도 전혀 풀 수 없는 의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이 왜곡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상의 흔적이 남아서 영원토록 신실하고도 완전하신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품고 있습니다. 그런 향수병에 가장 심하게 걸린 니고데모가 도저히 참지 못해서 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주님더러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칭한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비밀을 정확히 알 것 같은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추측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와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 진리는 대언했으나 예수님 같은 표적은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더러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표적을 보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주님의 가르침부터 지금껏 어떤 선지자나 랍비와도 다르고 권세가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예컨대 주님은 제자들에게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자부하는 자기들은 원수를 갚아야 의롭다고 가르쳤는데 정반대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율법으로 부정하다고 정죄하여서 여호와의 총회에서 추방한 세리와 창녀는 물론 이방인들과도 예수님은 식사를 나누며 따뜻한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그런 가르침을 몸소 실현한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아가 그의 가르침이나 온유한 섬김을 받은 자는 단번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의롭게 바뀌었다는 소식도 종종 들렸습니다. 

 

유대 역사상 이런 인격과 성품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까지 지닌 선지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모세가 겨우 견줄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모세 같은 선지자로 올 것이라는 예언(신18;18)이  이 예수에게 해당된다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 본인의 주장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로선 바리새인이자 유대 관원이라서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정작 주님께 묻고 싶었던 사항은 다니엘 예언대로 자기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올라가 있을지, 아니라면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였을 것입니다. 평소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그의 심중의 정곡을 찌르며 대답해주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절대적 진리일 뿐 아니라,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절대로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려면, 즉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동참하려면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

 

니고데모는 당시의 모든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천국 문 앞에서 대기 번호 일 번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오랫 동안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그 문이 자기 앞에 활짝 열릴 것이라는 확신은 커녕 그런 낌새도 못 느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도 그렇게 되리라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거꾸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더 영악하고 치사해져 가기에 그 문이 점점 더 굳게 닫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런 영적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는 길 밖에 없는데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 일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니고데모가 구원에 대한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언급은 없으나,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아마도 궁금증이 더 복잡하고 많아진 채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가 천국 문이 자기 앞에 굳게 닫혀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영적으로 단절 되어서 개인적이고 친밀한 소통이 전혀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싶은 소망은 있어도 하나님과 닮았던 영적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므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회복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서 쉴새 없이 솟아나는 온갖 추악한 탐욕 감정 교만 등을 심오한 철학, 고상한 도덕, 경건한 종교로, 특별히 모세의 율법으로 계속해서 없애보려 했지만 여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영적인 시체가 되어 있는지라 거듭나지 않으면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더욱 알 수 없었고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때가 차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니고데모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 다 갚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당신의 예고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사십 일간 제자들과 교제하다가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소망했던 마지막 날의 부활을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서 실현시켜 준 것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음부에서 자던 자들이 마지막 날에야 깨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가 죽으면 당신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니엘이 말하던 마지막 때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또 이런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서 신자들로 정확하게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그 때 니고데모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간의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원어의 또 다른 뜻은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위로 부터 오신 성령의 역사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이 거듭나게 해주면 하늘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간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믿음

 

익히 알고 있는 구원 교리를 다시 가르치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현재 이 땅에서 십자가로 구원받아 부활을 확보한 상태로 살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소원은 마지막 부활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을 갖는 목적은 이 땅보다는 하늘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다 갖추었기에 추가적으로 더 크고 좋은 보상을 받으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로 이 땅에선 사실상 아무 것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날이갈수록 하늘을 더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자기를 그 생명책에 올려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너무 심오하고도 신령하게 따질 필요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심지어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도 결국은 그분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생명책에 올릴 자를 택하고서, 니고데모가 겪었던 것 같은 영적 갈등의 과정을 거치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겸손하게 엎드리게 만드는 하나님만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거듭나게 한 자는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며 그곳에 예비된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거처에 살다가 마지막 때는 육체적으로도 부활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흔히 말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조금 과격한 구호를 언제 어디서나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적인 종교 구호가 절대 아닙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단순히 이 땅에서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률에 머뭅니다. 아무리 그런 식으로 의롭게 산들 죽은 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신나게 쾌락을 즐기며 살았던 자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이 전부인 줄 아니까 오직 물질만 챙기며 살아 갑니다. 영원에 관한 문제는 잘 모르겠고 골치 아프니까 잊어버리고 매일의 현실 삶에만 충실하려 합니다. 그들의 속내는 어차피 죽어 없어질 인생에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실컷 쾌락을 즐기다가, 최소한 안락하게 살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지옥이 있다 쳐도 어쩔 수 없으며 지금의 형통과 쾌락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영원한 구원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있습니다. 그분을 끝까지 외면하는 자는 입장권 번호 1번을 타고서 지옥문의 맨 앞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예수님의 보혈로 쓰여져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인생의 첫째 가는 문제인 죽음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결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천국 입장권을 확보했다고 해서 이 땅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거나 없애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이 현실을 도피하거나, 염세주의로 살아가거나, 무소유의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혼자 만의 감정적 흥분, 정신적 카타르시스, 영적 엑스타시를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눈앞에 아무리 큰 환난과 재앙이 닥쳐도, 특별히 여전히 체질이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서 수시로 넘어져도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개인적 인격적 관계는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확보된 미래의 부활을 주님처럼 이 땅으로 앞당겨 실현하면서 주님의 은총과 긍휼 안에만 거하고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해가 쉽게 바꿔 말하면 다른 종교처럼 이 땅만 바라보는 신앙 생활은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중심의 종교 

 

너무나 안타깝게도 작금 많은 신자가 눈앞의 고난만 해결하려고 뜨겁게 기도하며 교회 중심의 종교생활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의 사건들을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며,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치료사도 아닙니다. 신자는 개별적인 사건을 일일이 기도해서 해결받기 보다는 자기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특별히 천국의 영광을 이미 확보했으므로 자기가 소망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오직 하늘로 한걸음씩 올라가는 거룩한 여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범사를 하늘에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만 분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여서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물으며 자기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춰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에 대한 믿음을 처음으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어떻게 약속하셨습니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천국 열쇠는 교회가 맡을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신자 개인에게 적용하면 천국 입장권 1번을 회수하고서 그 문을 여는 열쇠로 바꿔 준 것입니다. 거기다 아직 천국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들도 그 입장권을 얻는 천국 문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준다고 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가르침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준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천국 열쇠를 지녔으므로 천국은 내 것이 되었으며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신자를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천국 열쇠를 받아 쥐고서도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천국 열쇠를 계속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롯해 신자가 속한 가정과 직장 모든 공동체는 천국의 인턴으로서 수습 훈련하는 곳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 왕국이 먼 훗날에야 세워질 막연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예수 믿는 신자들이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한 모습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형통만을 위한 교회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탄의 먹이감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완악한 죄가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서 천국 열쇠를 받지 않은 상태에선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서 정서적인, 심지어 신령한 위로와 힘을 얻어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신에 정말로 천국의 열쇠를 받아 쥔 신자는, 거룩하고 신령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교회보다는 세상의 불신 이웃에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쏟아 붓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처럼 가장 의로운 자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않고는 결국 지옥에서 비참하게 그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신자 자기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알기 전에는 아무리 형통 출세 했어도 그 삶이 너무나 갈급하고 허망했다고 처절히 체험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예수님이 너무 좋고 매일 아침 그 십자가 앞에 자기를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 삶의 가장 즐거운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받은 천국 열쇠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최소한 받아 쥐고는 있습니까?

 

(1/1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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