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4-5) 예수님과 선(禪)문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4-5)

 

선문답 같은 대화

 

바리새인이자 유대 공회원인 니고데모는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을 가르쳐야 할  선생이었으나 자신부터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늘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 있어서 마지막 때에 음부에서 부활할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아가 세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그 백성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도 미심쩍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여겨지는 예수님이라면 그 의문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밤중에 몰래 찾아와 개인적인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생각하는 구원의 진리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예법대로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면서 주님이 행하신 표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 인사를 받은 주님은 곧바로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의 입장이 된 주님이 그가 질문도 하기 전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라는 화두(話頭)를 던졌습니다. 이제 제자의 입장에서 니고데모가 그 의미를 헤아려서 그에 합당한 진리로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나 너무 황당한 말씀이라 도무지 자기가 알고 있는 구원의 진리로 맞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므로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는 질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이라고 전제했듯이 그의 나이도 출생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졌을 테니까 더더욱 말이 안 되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애도 하지 않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조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니고데모 같은 지성인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서 우습게 여겨선 안 됩니다. 그가  힐렐과 샴마이 어느 학파에 속한 바리새인이었던, 자기가 배운 스승이 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로선 밤샘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 고민의 답을 얻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왔을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남아선 안 되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만 했지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도 당신이 하신 말씀이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인 줄 모를 리 없으므로 처음부터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이나 강조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 쪽에서 니고데모더러 그런 어리석은 반문을 하게끔 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선문답은 스승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두리뭉실하게 상징적으로 암시하면 제자는 그 중에 자신이 각성한 진리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그들에게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자신이 깨달은 바가 바로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구원에 대해 가르치는 중인데 애매하게 표현해서 듣는 사람더러 자신이 깨달은 바대로 따르라고 방치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이 대화는 선문답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에 대한 주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일부러 어렵게 말해서 니고데모더러 깊이 생각해보라고 유도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그것이 절대적 진리이니까 그냥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길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친 선각자나 종교인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사람이 이미 태어난 후에 또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미쳤다는 말만 들으며 또 그런 선생에게 제자가 모일 리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말에 대해서 실증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으니까, 만에 하나 그런 말을 상징적으로 했다 쳐도 선문답 식으로 네가 알아서 깨달으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십 세기의 기독교 최고 변증가로 불리는 C. S. Lewis는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 표적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이거나 미친 사람 둘 중 하나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은 아무리 따져봐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에게 구원에 관해 가르친 이 첫마디만 봐도 그의 판단은 아주 타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실제로 그와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당신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선한 목자인데,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린 후에 다시 스스로 얻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요10:11-18) 본문과 비슷한 맥락의 불가사의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출생과 사망을 자기가 선택 결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살했다가 다시 자기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유대 랍비로선 입에 담아선 안 될 내용을 가르친 셈입니다. 하나님만이 갖는 생명에 관한 권능을 자기 재량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러니까 청중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요10:19-21) 주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판단은 완전히 정반대의 둘로 나뉘었는데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었다 스스로 살아나겠다는 그 말 하나만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먼저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 자기들과 주고 받은 토론에 비추어 보면, 주님이 무슨 의미인지 본인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는 미친 사람일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강조하려는 주제가 뚜렸했고 앞뒤 말의 논리가 정연했으며 또 서기관이나 일반 랍비들과는 달리 그 말씀에 영적인 권세까지 느껴졌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나면서 봉사된 자를 낫게 해준 일은 귀신 들려서 미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인을 고치는 것은 현대 최첨단 의학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이 행한 표적들에 관해 간접적으로 소문만 듣고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상적 사고를 가진 자가 네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의 생애 전체를, 특별히 주님 스스로 선포하고 스스로 행한 부활 사건을 면밀히 따져보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당신께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 대적할 핑계를 찾으려고 복음서를 연구하다가 거꾸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구주로 모셨다는 간증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네 번이나 강조한 진리

 

니고데모가 지금 주님과 선문답 식으로 즉문즉답을 하는 사이에 그런 논리적 추론을 할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예수님의 이 말이 진리인지 아니면 종교적으로 과장된 비유인지 궁금했을 것이며, 만약 진리라면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는 정도는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다시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을 강조하면서 앞에서 하신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앞의 말씀까지 합치면 주님은 진실이라고 네 번을 강조한 셈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 번 강조하면서 맹세하면 믿어주어야 합니다. 비교급 표현이 없는 히브리 어법에선 두 번 반복은 비교급, 세번 반복은 최상급을 의미합니다. 네 번을 반복한 것은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이름을 걸고서 절대적 진리라고 맹세한 셈입니다. 

 

주님의 뜻은 내가 이렇게까지 강조하는데도 믿지 않으면 너에게 아무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너에게 달렸고 그 결과도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염려한 그대로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며 기다리는 것은 지옥 심판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실상 니고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미치광이든지,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너는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스승’이라고 칭했지만, C S 루이스처럼 곰곰히 따져보고서 하나님이라고 다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앞의 말씀에서 빠트렸던 다시 태어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인 성령이 거듭나게 해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물로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여러 신학적인 의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물은 세례 요한의 물 세례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물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나 방식은 절대 될 수 없기에 참고는 할 수 있어도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인데도 당신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꾸중한 말씀에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주님은 다 아시고 다니엘과 이사야의 예언에 맞추어서 대답해 주는 중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구약에 능통한 자라면 지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도 사실은 네가 이미 알고 있어야 하며, 또 내가 바로 그 예언을 실현하러 온 자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예언을 상기하라.

 

세례 요한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서 가장 먼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즉 메시아라고 선포했고 또 공사역을 시작하도록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러다 유다 지역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헬로디아와 결혼한 불륜을 공개적으로 정죄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옥중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여전히 갈릴리 변두리에서 어부, 세리, 이방인, 과부, 창녀 등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유대 사회의 굽어진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잡으려고 헤롯의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바람에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예수는 너무 여유자적하게 선문답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라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 대해서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절)고 답해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봐도 예수님이 베푸신 여러 표적들은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신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표적에 대한서만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듣고 보는 것을 ‘알리되’라고 제한했기에, 그 다음에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지켜본 주님의 표적들보다는 지금부터 하는 말을 철자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너희 스승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제자들까지 보내어서 알고 싶어 했던 의문이 풀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온갖 신기하고 엄청난 표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은 요한도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그런 큰 권능을 갖고서 왜 빨리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이 갖고 있는 의문도 꿰뚫어 아셨습니다. 표적에 관한 보고만으로는 그의 의문을 해소할 수 없고 오히려 의심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전하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요한도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이 스승에게 그대로 전하라고 했던 후반부의 말씀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라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문자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맹인, 귀머거리, 절름발이, 벙어리가 완전히 낫는 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회복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그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은 주님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대답하셨는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종 사촌인 주님이 성경이 말한 오실 이가 맞는지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행하고 있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거기다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뒤에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더 확정시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표적을 행하는 것, 즉 이스라엘을 현실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십자가 복음을 실현 전파하여서 영적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다짐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주님이 표적을 일으킨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21)고 가르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옥 안에 갇힌 요한과 옥 바깥에서 사역하는 주님이 요한의 제자들을 중간에 두고 선문답 같은 교통을 했으나, 사실은 주님이 구약 율법의 진리에 따라 세례 요한에게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감과 소통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겐 성경에 자세한 언급이 없어서 이해하기 힘든 대화이지만, 당시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대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물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에게도 주님은 구약 선지자의 예언에 비추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부어주실 영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들의 영혼이 깨끗이 정결케 된다는 의미를 종종 물로 상징했습니다. 앞에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에도 분명하게 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스겔서 36:25-27을 들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에 따르면 물과 새로운 영을 동격에 두고서 인간의 노력으로 취득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이 부어주셔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은 한 죄인에게 구원을 주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이 구약 예언에 근거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방안을 세례 요한과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은, 구약 성경만 잘 살펴봐도 구원의 원리는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구원의 방안도 당연히 하나입니다. 시대와 장소와 민족에 구분 없이 구원의 방안은 반드시 같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구원 받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 것은 에스겔 때부터, 아니 창조 때부터 모든 세대의 원죄 하에 타락한 모든 죄인에게 절대적인 영적 진리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지금 네 번이나 진실이라고 강조한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도 이미 암시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 네가 왜 모르느냐고 다그친 것입니다. 이 문답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이 바로 구약에서 계속 예언되었던 오실 메시아일 뿐 아니라, 내가 바로 하나님이므로 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너도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왔어도 하나님의 의에 절대로 합격하지 못한다 것을 절감하고 지금 찾아왔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물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이 조건 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에 대해 들었던 소문과 표적만으로 판단한 자기 생각으로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스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부터 그 당시에는 몰라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으로 택하였기에 성령이 역사해준 결과입니다. 그도 나중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 승천한 후에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는 선문답 같았던 이 대화의 의미가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참 진리로 명백하게 깨달아질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의미 

 

우리 또한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미친 자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정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가르침과 사역을 행하시고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절대적 진리이거나 허황된 종교적 망상 둘 중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분이 미쳤을 리는 없으니까 당연히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오직 그에 따라 살고 그에 따라 죽어야 한다는 엄청난 의미이지 않습니까?

 

본문의 이 면담도 겉으로 보기에는 니고데모가 주도적으로 주님을 찾아간 것 같지만, 대화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잘 살펴봤더니 주님이 미리부터 택하시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 않습니까? 그 배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역사하여서 그더러 주님의 정체성을 인간 랍비에서 구세주 하나님으로 바꾸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서 지금 품고 있는 모든 영적 고뇌와 갈등을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본질을 과연 이런 원리대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개인을 위해서 이 땅에 2천년 전에 오셔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적 개념적 동의 수긍이 아니라, 실제로 물과 성령으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사람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반 종교의 구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종교적 진리 계명을 배워서 그대로 따라 준행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고 또 선행의 성적이 좋으면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갈 수도 있다는 그런 식의 믿음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의롭다는 치명적인 착각에 태생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만은 얼마든지  착하게 살아서 구원에 들 자신이 있다고 여기므로 다들 행위 구원의 종교를 따릅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 최고 의인이었던 니고데모조차 아무리 해도 그럴 자신이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꾸중까지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를 소원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일시적으로 왔다가 가버린 인간 메시아가 절대 아닙니다. 태초부터 영원토록 인간의 구원을 주관하시는 구세주 하나님입니다. 니고데모도 단순히 유대의 한 랍비이자 공회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가 너무 추하고 버러지 같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는 생전 처음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진실로 진실로 간절히 보고 싶어했던 자의 대표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바탕을 둔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 앞에 한마디도 못하고 꿇어 엎드렸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천하의 주인이신 하나님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그분의 친백성이자 친자녀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후로는 그에게 영원토록 성령님이 내주해 주심으로써 무슨 일을 해도 오직 예수님의 인도에 따르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구원의 은혜 안에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거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재점검해보길 원합니다. 너무 신령하게 따질 것 없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손이 나를 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주님보다 더 큰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과 문제가 닥쳐도 주님 은혜 안에 있기에 비록 육신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고 예수님, 아니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과 선문답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그 이후로 자신의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죽음마저도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으며 오히려 영광스러운 부활 생명으로 바뀝니다. 물론 그 전에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연약한 체질과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세상의 유혹으로 종종 넘어질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루이스처럼 성경의 예수님을 다시 파고 들면 니고데모처럼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점검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성경의 절대적 진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진실로 진실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났던 적이 있는지 뒤돌아보면 됩니다. 그것을 점검하는 기준도 간단합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자기 생각대로만 살았는데, 그 중에는 이웃들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의로운 일도 종종 했으나, 그 모든 것들이 허망했었다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참 기쁨과 만족은 오직 예수님의 생각대로만 따라 살 때에 풍성하고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고 절감, 아니 체험하고 있는 중이어야 합니다. 

 

(1/2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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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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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2]

(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 2024 송구영신 예배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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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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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1) 초림보다는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행1:6-11) 초림보다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 2024년 성탄 주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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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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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8) 혼란한 비상 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0)

(행1:6-8) 혼란한 비상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20)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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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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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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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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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9)

(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19) - 2024년 추수감사절 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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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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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8)

(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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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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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7) [1]

(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7)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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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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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6) [2]

(왕하 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6)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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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3
  • 조회 수 367

(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1]

(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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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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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5) [2]

(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r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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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0
  • 조회 수 378

(막1:14-20) 참 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6) [1]

(막1:14-20) 참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6)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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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3
  • 조회 수 352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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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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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5)

(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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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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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왕하 5:9-14) 행위 구원으로 변질된 믿음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3)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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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2
  • 조회 수 343

(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4)

(마7:1-5) 예수님은 인간을 전혀 믿지 않았다. 새롭게 읽은 신약성경 (1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보라 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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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5
  • 조회 수 313

(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창16:11-13)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다고 확신하는가?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2)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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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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