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6-7) 육에 머무는가? 영으로 났는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6-7)

 

육에 머문 니고데모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적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심중을 꿰뚫어 아시는 주님은 미처 그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사람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이 단순히 거듭나야만 한다고 했기에 니고데모로선 말도 안 되는 줄은 알지만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 방법에 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마지막 날에 물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또 성령이 영혼을 새롭게 해준다는 구약 예언에 능통하다는 점을 감안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듭나는 구원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난해한 말씀부터 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따지면 “돌은 돌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식이라, 이야말로 불교의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구원 진리를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가르칠 리는 없습니다. 주님도 내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덧붙였는데 잘 따져보면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육체적인 맥락으로만 접근했습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 일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영적 차원에서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일이므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그 말씀의 문맥상 일차적인 의미는 육으로 나는 것과 영으로 나는  것을 별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이라 아주 심각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너는 육으로 난 이후로 계속  육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 셈입니다. 또 그래서 네가 구원을 받으려면 영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의 사람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으며 믿고 따랐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함께하면서 그들을 보호 인도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어느 민족도 겪지 못한, 아니 알지도 못하는 신묘한 은혜들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 거룩한 율법을 수여받아서 그대로 따라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건히 섬기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온유하고 합리적인 니고데모인데 예수님은 그를 아직도 육의 사람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승인 그가 그러하면 모든 유대인은 물론, 모든 이방인도 다 그렇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온 까닭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데, 주님은 네가 아직 육의 사람이라서 영혼이 거듭나는 문제를 알지 못한다고 말해준 것입니다. 그로선 구원에 그런 일이 반드시 필요한지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구원의 길에 뭔가 하자가 있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제부터 그에게 영에서 난 사람이 영의 생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지금껏 가르친 구원은 인간이 육의 수준에서 추정한 것이라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입니다. 구원은 영이신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베푸시는 것이라 그분의 영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인간 쪽에서 어떤 방법을 배워서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바꿔 주어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육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크스’는 인간의 육체(body)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인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타락한 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 거부하며 그 반대편에서 행하는 사고와 행동 체계 전체를 뜻하므로 성경에선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본성에 영향을 받으며 고안한 구원 방안이 하나님의 구원 방안과 같을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육에 머물러 있어서 영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현재는 그의 영이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 하에 묶여 있으므로 그 원죄의 멍에를 풀어주어야 영이 거듭나게 됩니다. 영의 거듭남을 알려면 아담의 타락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을 단순히 하나님이 명한 선악과 금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라고만 여기면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쁨과 감사와 경배로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자유와, 둘째는 사탄에 대해선 반드시 혐오하고 분노하고 멸시하며 배척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신자들마저 간혹 불만을 가지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를 그 두 방향으로만 작동되도록 고정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아니며 인간은 로봇 수준으로 격하됩니다.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할 수 있는 재량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그것을 주신 목적도 바로 그 두 가지 방향대로 행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창조의 목적부터 인간과 참사랑으로 진실하고 순전하며 충만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으며, 그러려면 인간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초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바라던 목적과는 정확하게 정반대로 사용했습니다. 사탄을 기꺼이 따랐고 하나님은 싫어하며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치고 자기가 이 땅과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통로가 단절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영 안에 사탄이 견고한 진을 틀고 앉아서 자기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생각이 항상 흉악한 죄를 저지르고 싶어지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기를 창조하여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서 자기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부터 사탄이 부추기는 대로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오직 이 땅에서의 형통과 출세로만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육에 머문다는 뜻은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불완전한 자기 생각으로만 판단 선택 결정 시행하는 것입니다. 

 

유대 선민주의

 

그러나 니고데모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 노력했고, 무엇보다 마지막 날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따르려 했다면 육이 아니라 당시로선 보기 드문 영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이 그를 여전히 육에서 나서 육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질의 응답하는 주제가 구원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겨도 그가 믿는 구원의 길이 아직도 당시 유대교의 사상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구원은 확정되어 있다고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라는 의미로 물세례를 베풀 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들도 포함됨)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7-8)

 

유대인들더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서 장차 올 진노를 피할 수 있으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비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함 받았다고 해서 너희에게 어떤 우월한 조건과 자격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돌들과 똑같아서 그중에 구원해 줄 자를 하나님이 고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장 연약한 민족이라서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선언합니다. (신7:7) 하나님은 인종이나 민족을 구원이나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자손과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당신이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에 거하면 자유롭게 된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도 그 자손처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마귀의 자식처럼 당신을 죽이려 든다고 엄중히 야단쳤습니다. (요8:31-47) 그 논쟁의 결론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47절)고 선언했습니다. 말하자면 영으로 거듭나지 않고 육으로 난 상태에 머무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인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굳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구약에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가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자 모두 다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 그분의 안식에, 즉 구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분명히 선언해 놓았습니다. (히3장)  

 

유대인들은 간단히 가데스 바네야 반역 사건이나(민13장), 바알 브올의 시험에 빠진 사건(민25장) 등만 회상해 봐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수여받았다고 자동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선민주의 사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육으로 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또 그래서 영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란한 이방인

 

구원에 인종적 차별이 없다면 이방인도 하나님의 구원 범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육에 머물지 말고 영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대의 이방인들도 인간으로서 어떤 근본적인 죄책감을 느끼면서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서 각기 고유의 종교를 가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본성적으로 그분을 향한 향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육에 머무른지라 육의 생각으로 구원에 접근했는데, 이방인들의 구원의 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세상만사를 부분적 지역적으로 각기 다른 신들이 주관한다는 다신교 차원의 구원입니다. 인생사에 자기들의 소망 계획 노력대로 되지 않고 엉뚱한 결과를 낳으며, 때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변수나 불행이 생깁니다. 나아가 엄청난 자연의 위용 앞에 한 해 동안 힘들여 농사지은 작물들이 단번에 파괴 소실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인간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일들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신적 존재가 자기들 기분대로 통치한다고 여겼습니다. 

 

고난은 인간이 그 신들에게 뭔가 잘못을 범해서 노여움을 산 결과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절기마다 최대한의 치성과 제물을 바쳐서 신들의 기분을 누그러트릴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요구대로 잘 들어줄 인간을 닮아서 인간이 조종하기 쉬운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전쟁의 신, 농사의 신, 바다의 신, 비의 신, 등등 삶의 온갖 어려운 여건과 중요 고비마다 인간이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신들을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신들인지라 그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인간의 요구대로 맞춰 주는 신들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 내용도 전부 이 땅에서의 풍요와 안락과 쾌락뿐이므로, 자연히 신을 숭배하는 방식도 그런 요구에 맞춰서 화려하고 풍요롭게 고안하다 못해서 음란하게 타락했습니다.

 

예컨대 가나안 지역은 건조해서 비가 제때 잘 내려주어야만 농사가 잘되는데, 남성 신 바알과 여성 신 앗세라가 성적 교섭을 가질 때 비가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신전에서 인간끼리 성관계를 가지며 경배를 드리면 비가 잘 내리고 풍작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창녀, 남창, 심지어 동기를 사제로 둔 것입니다. 쾌락과 죄악을 즐기려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서 그에 합당한 신들을 조작하여서 그럴싸하게 종교로 위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가 우상을 만드는 가증한 죄는 절대 범하지 말라고 엄격히 금했던 것입니다. 당신만 따르라는 선악과 금령은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에게 계속 유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 내내 주변 족속의 물질적 풍요가, 특별히 그런 쾌락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런 우상 신들을 우선적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그 신전에서 음란한 쾌락을 짐짓 즐기면서 말입니다. 

 

인간과 순전하게 교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를 받아야만 하고 또 그 받는 대로 통치하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거꾸로 인간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다. 공사역 내내 사회에서 소외되고 구조적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자들 중심으로 만나서 돕고 위로하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받기만 하는 다른 신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도 구약 시대에 이미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할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인간이 당신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백성들의 집을 지어준다고 가르쳤습니다.(삼하7:1-17) 당신의 가장 큰 기쁨이 창조 때부터 인간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뭔가를 바쳐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전에 여유 있는 부자만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라도 인간에게 그런 불합리한 구원의 길을 제시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의로운 유대인  

 

이방인들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고안한 두 번째 구원의 길은 음란한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도 인간이 깎아서 만든 조각상이 신일 수 없다고 믿는 의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죄를 안 지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인간이 짓는 어떤 죄라도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니까 하나님이 싫어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그래서 구원받는 길은 착하게 사는 것뿐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순진하고 의로운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도덕적 양심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윤리 교육을 받지 않아도 죄를 지으면 본성적으로 스스로 부끄러워지고 뭔가 형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개신교를 제외한 세상 모든 종교는 결국 선행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정한 의의 기준에 들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로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죄에 관해서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쳤습니다. 유대인을 포함해 모든 의로운 사람들에게 너 자신의 영혼부터 깊이 잘 따져보라고 도전했습니다. 예컨대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보고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율법을 행동으로 어기는 것만 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은 물론이고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지으며, 오히려 그런 죄가 더 비겁하고 추하며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게 산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사랑이 아니며, 그런 사랑은 세리나 이방인도 한다고 야단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이방인을 두고 율법을 모르거나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의 저주를 이미 받은 자라고 정죄했으나, 예수님은 거꾸로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들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은 그들과 똑같은 수준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겸손히 고백하는 반면에,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면서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요구한다는 비유를 통해서 죄의 본질에 대해 깊고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인간 밖의 환경이나 사건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영혼이 죄로 찌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까닭부터 그대로 행하면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앞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분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규범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전에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는 행위 구원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의 삯이 죽음인 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긍휼을 소망하게 만드는 역할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를 유대교식 행위 구원은 틀렸고 유일하고 올바른 은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중입니다.

 

행위 구원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세상에 자기보다 더 악해서 하나님의 엄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아주 많다고 판단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는 완전한 의인은 아닐지라도 아주 의롭고 최소한 평균 이상으로 착하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들이,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과 지식층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선한 일만 베푸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악한 일을 당신의 제자 한 명이 적극 주도했고 나머지는 치사하게 방관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앞장서서 모든 사람은 육에서 나서 육에 머물고 있다고 확증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 땅에서 형통하고 자기를 높이는 일에, 최소한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윤리 도덕 철학 사상 종교도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주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천국 복음을 배우고 많은 이적을 목격한 자들부터 살인자, 배반자, 비겁한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 앞에 고개 쳐들고 온전히 설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인간도 초등학교 윤리 교과서의 가장 간단한 가르침 하나도 평생토록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육에 머무는 신자들 

 

결국 육으로 난 상태란, 인간은 신에게 충족하게 바치거나 온전히 의로워져서 구원을 취득할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악한 성품이 아닙니다. 사탄으로 인해서 왜곡 파괴된 영혼이 계속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에게 네가 이 땅의 주인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도 네가 스스로 정해서 하면 된다고 그 영적 분별력까지 완전히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그 첫째 결과가 가인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서 아무 잘못도 없는 친동생 아벨을 살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만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시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문제를 두고 최초의 살인을 범한 것입니다. 인간이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시기해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아담 스스로 그분을 자의로 판단했던 것과 똑같은 행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는 구원마저, 더 나아가 그분이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는 은혜마저도 인간이 자기 주도하에 조종하려는 것이 육으로 난 상태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지금껏 단순히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고 이스라엘도 회복되고 자신도 마지막 날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기대하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오히려 의심과 불안만 더 늘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사는 모습이라도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셈이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실 리 없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을 찾아왔으며 주님은 네가 육으로 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물론 지금 상태에선 그는 정확히 그 뜻을 모르지만, 나중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사탄이 그의 영혼을 묶고 있는 죄의 사슬을 끊어주면 그 모든 영적 갈등이 깨끗이 해소될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오늘날의 신자에게 해당하는 매우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육에서 나서 육으로 남아 있는 신자가 너무 많습니다. 술 담배 끊지 못하고 있거나, 세상에서 돈을 열심히 벌고 있거나, 수시로 죄에 빠진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주도로만 이끌어 가려 하고 그 판단 기준을 오직 자기를 높이는 데에 둔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처럼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신령하게 대표 기도를 하고 봉사도 많이 하며 온유한 인격을 지니고 의롭다고 칭찬을 받아도 그렇습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세 가지 유형으로 믿음을 유지한다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 여전히 육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처럼 사람을, 주변 성도들까지 인간 사회에서 나누는 외적인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서 그에 비례해서 대우하는 것입니다. 현실 삶이나 믿음으로나 수준이 맞는 사람끼리만 교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안에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더 우선시하는 우상을 지니는 것입니다. 자식의 출세, 사업의 형통, 교회 안의 직위 등을 인생의 목표를 삼아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더 많이 바치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 봉사 많이 하면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금이라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흔들릴지 의심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평생토록 자기 혼자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일에만 소진하고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금 정말로 솔직하게 혹시 육에 남아 있지는 않는지, 정말로 영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반대로 따지면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범사를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기꺼이 맡기며, 혼자만 의롭게 살기보다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그대로 실제로 따라가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2/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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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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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4-5) 예수님과 선(禪)문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5)

(요3:4-5) 예수님과 선(禪)문답을 해본 적이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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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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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1-3) 천국 열쇠를 사용하고 있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3)

(요3:1-3) 천국 열쇠를 사용하고 있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3)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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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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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1-3)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시험 - 새롭게 읽은 구약 성경 (21) [1]

(창22:1-3)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시험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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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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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14:1-3) 진심만으론 많이 부족하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0)

(호14:1-3) 진심만으론 많이 부족하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0)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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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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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2]

(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 2024 송구영신 예배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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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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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1) 초림보다는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행1:6-11) 초림보다 재림을 기념하는 성탄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1) / 2024년 성탄 주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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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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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8) 혼란한 비상 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0)

(행1:6-8) 혼란한 비상시국에 신자가 취할 행동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20)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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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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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느2:17-20) 하나님을 청소부로 만드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9)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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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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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9)

(고전1:4-9) 가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19) - 2024년 추수감사절 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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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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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8)

(롬1:16-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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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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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7) [1]

(합1:2-6) 북한군을 빨리 죽여 주십시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7)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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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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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6) [2]

(왕하 9:5-7) 북한보다 남한을 징벌하실 하나님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6)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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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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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1]

(마10:1-7) 열두 제자 선택에 숨겨진 비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7)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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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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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5) [2]

(창2:25 & 3:7)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r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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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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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4-20) 참 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16) [1]

(막1:14-20) 참믿음인지 판단하는 기준.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6)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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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3
  • 조회 수 378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창26:1-6)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을 사는 비결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14)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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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6
  • 조회 수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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