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

조회 수 719 추천 수 22 2009.09.21 00:39:18
환난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행8:1-5)


영국 런던에 1666년에 대화재가 났습니다. 많은 시민이 죽었고 당시 세계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던 자들마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될 정도로 런던 전체가 처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청교도인들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재산 피해도 입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만 피해서 불이 나게 했거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레이저 방호 막을 쳐주어 불길이 닥쳐도 타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화재가 나기 6개월 전에 ‘5 마일 법령’이라는 것이 시행되었는데, 청교도인들은 모든 집단으로부터 5마일 이내에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런던에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참사로부터 안전하게 생명과 재산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곳을 심판할 때에 당신의 백성들이 피할 길을 어떤 방식으로든 미리 만들어 놓으십니다. 스데반처럼 순교로 당신의 특별한 뜻을 드러내어야 할 경우를 빼고는 그렇습니다. 노아더러 다가오는 심판을 대비해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의인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구원해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아가 런던의 화재의 경우는 더 오묘합니다. 그 도시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기도 하겠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직접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되 바로 그 핍박 자체가 핍박 받는 자들에게는 보호막으로 작용케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되게 한 셈입니다.

악인을 악의 구덩이에 그대로 방임해 두시는 것 자체가 심판이 되는 원리입니다. 악인이 왜 형통하는지 의아해 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스스로 쇠퇴하고 엄정한 심판도 따릅니다. 설령 눈에 보이는 현실적 심판이 없어도 그 심령이 평생 방황과 허무 가운데 지내다 그런 괴로움 가운데 죽습니다. 또 죽은 후에도 영원토록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것만큼 큰 벌이 따로 없습니다.

신자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에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장애가 생겨 그 앞이 막혀버리는 경우도 런던 화재와 같은 의미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따로 심판하거나, 다가올 더 큰 환난을 미리 피하게 하시거나, 또는 더 좋은 당신의 계획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겪는 당시로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전후 경과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결말이 난 뒤에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얼마나 오묘했는지 소름끼칠 정도로 절감하여 그 큰 은혜 앞에 온전히 경배하게 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신자는 미처, 아니 평생을 두고 알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그런 식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준 경우가 도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 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의 일생은 가히 하나님의 너무나 신비한 은혜의 대양(大洋) 속에 잠겨 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마 신자는 입이 딱 벌어져 기절해 죽을 것입니다. 아니 이해조차 제대로 못할 것입니다. 설명을 해주어도 이해를 잘 못하는 일인데 실제 겪을 때야 더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이해도 안 되는 일을 자꾸 그 얄팍한 지성으로 따지려 드니까 염려 불안이 그칠 수 없지 않습니까?

욥이 하나님으로선 너무나 간단한 추궁에도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오직 이 한 마디만 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무소 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하나님이 신자 앞에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들어 막지 않으면 신자는 자기 길로만 계속 가려고 고집할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이 있는 신자일수록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생겨야만 다른 길로 가려고 마음먹을 것입니다.  

스데반으로 순교하게 만든 것, 또 그 일이 기폭제가 되어서 동족이자 같은 창조주 하나님 신앙의 뿌리를 가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한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지게 된 것, 그런 핍박의 선봉에 선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그 자존심과 정체성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려 회심을 시키신 것,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하게 싸워서 헤어지게 만든 것 등등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계획과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기준도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편만하게 증거 시키는데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핍박으로 신자들이 비록 정들고 익숙한 고향을 등져야 했지만 결과는 모든 땅으로 흩어져서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런던이 신자를 핍박한 죄 이전에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왜 어떻게 화재가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큰 환난에서 신자를 안전하게 보존시켜 계속 복음을 전하도록 했고 또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지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환난 가운데 기도할 내용이 달라져야 합니다. 단순히 환난을 없애달라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알 수 없으니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환난 가운데 있는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사실 한창 환난을 당하는 중에는 어지간히 기도해도 잘 모릅니다. 아무리 신령한 신자라도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해 주시지 않는 한 헤아리기 힘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되어져 가는 사정과 비교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이 일을 통해 들어 사용하라는 헌신의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핍박이 생기면 아무 염려하지 말고 그 핍박을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있는데 그곳에 남아 계속 복음을 전하겠다고 버티면 자기도 죽고 복음 전파도 중지되지 않습니까?  핍박을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와중에도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있다는 확신을 갖고 오히려 능동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당신의 온전한 뜻대로 쓰시라고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고난을 절대 외면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구원해 주시려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난에서 건져주려고만 함께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신자를 겸비케 만들어 당신을 더 찾도록 하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그럼 “병 주고 약 주고”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 환난이 아니고는 신자를 자신의 거룩한 계획에 동참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게 환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이 셋(환난에서 구원, 신자의 성숙, 하나님의 계획 달성)이 다 포함 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은 마지막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무런 계획 없이 어떤 일을 도모하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 스스로 기꺼이 그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길이 환난을 이기는 가장 첩경이 됩니다. 신자는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구원의 소망만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럼 구원이 안 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면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남기에 여전히 괴로울 뿐입니다. 또 믿음도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구원과 성숙과 영광 셋 다이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보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참으로 연약하여 체질이 진토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겪더라도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신자가 평생을 두고 최소한으로 붙들어야 할 절대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내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분의 길이 내 길보다 높으며 그분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높다는 것입니다.(사55:8,9)

요컨대 인생을 살다가 예기치 않는 장애나, 억울한 핍박이나, 이해되지 않는 환난이 생길 때면 자꾸 하나님과 쟁론하려 하기 이전에 끝까지 인내하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우리가 상상치도 못했던 영광스런 결말로 이끄셨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3/7/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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