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문제에 관해 설교할 수 있는지요?

조회 수 622 추천 수 43 2009.10.30 00: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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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문제에 관해 설교할 수 있는지요?


[질문]


저는 현재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15년 동안 저희 목사님을 지켜보면서 존경할 점이 많은 분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보니 목사님이 대예배 설교 중에 정치적 발언을 간혹 하십니다. 그런데 저와는 다른 견해를 말하시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어쩐지 정치적 성향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님이 예배 중에 자신의 정치적 성향대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나 또는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성경적인 이해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싶었던 문제입니다.

[답변]

많은 신자들이 당혹해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요즘 같이 한국에 큰 일이 많고 국론이 분열된 시국에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가 설교 중에 정치적 소신을 그것도 한쪽으로 편향된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물론 목사도 목사라는 공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이기에 자신만의 정치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민주국가에선 그 의견을 개진할 자유와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설교 중에 그러는 것은 목사라는 직분에 어울리지 않으며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또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사람들과 섣불리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것은 그리 현명치 않습니다. 질문자님이 체험하듯이 상대로 당혹감 내지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신을 잘 알고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 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생각

설교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이미 완벽하게 계시 해놓은 성경의 진리들을 어떤 가감, 수정, 포기 없이 온전한 진리로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구원하신 역사적 사건과 그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설교는 예수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엡1:7) 베푸시는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경륜이 그 내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령하고 영원한 비밀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이 땅에 펼쳐 보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구속을 회상, 찬양, 기억, 적용케 하는 데에 모든 초점이 모여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설교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작업인 셈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기주장을 앞세우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해선 안 됩니다. 성경을 풀어 전하는 것처럼 하면서 살짝 자기 색깔로 위장해서도 안 됩니다.

따라서 설교는 제일 먼저 본문 해석에 충실해야 합니다.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에 적합하게 풀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가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해야 하기에 회중이 처해있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현실에 적용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신자는 자기 주위를 거룩하게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양식을 공급 받아야 하며 목사도 선지자적인 경고를 사회에 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자기 의견을 말해도 된다는 법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먼저 용어의 의미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정부가 판단 시행할 수 있는 대책이나 그 대책을 도출할 수 있는 주의나 사상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편향된”이란 여러 실현가능한 대체 방안이 있는데 특정 이념, 사상, 선입관, 편견 등에 따라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과 모든 상황에 다 같이 적용되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설교자가 믿음이 좋아도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어떤 대책도 장단점이 혼재하지 완벽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또 그런 대책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모든 상황에 온전히 적용되는 보편적 대책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정치적 의견이 구태여 편향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질문자님이 염려하신 대로 교인들 중에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기에 목사 말씀에 수긍하지 않는 자가 나옵니다. 설교를 통해 모든 교인들이 동일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원리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럴 수 없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신자가 설교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적용해야 하거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 판단해야 하거나,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가 한 교회 내에서조차 서로 다른 적용 방안으로 나눠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정치적 의견이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될 수 없지만 일단 설교로 선포되어지면 일부 신자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또 자칫 하나님을 한 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격하시키는 형국이 됩니다.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한국에서 국론이 가장 크게 분열되는 문제는 북한에 대한 정책일 것입니다. 이전 두 정권의 햇볕 정책의 장점은 남북관계에 화해 협력 무드가 조성되지만, 단점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침묵하고 도와준 자금들이 무력 증강에 오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현 정부는 북한이 개선되는 조짐이 보여야 도와준다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 장점은 북한의 무력 증강을 방지하며 인권문제에도 일정 부분 개입할 수 있는 데 비해, 단점은 남북관계가 경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 중 어떤 정책을 사용해도 장단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장단점이 비슷한 종류로  양적인 면에서만 차이가 진다면 좋으련만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한쪽의 장점은 다른 쪽의 단점이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호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을 택하면 다른 쪽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당연히 서로 아예 융합되지 않는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민감한 주제에 교회가 한 편의 손을 들어준다면 교인들도 서로 아예 융합되지 않는 둘로 나누겠다는 작정 밖에 안 됩니다.

각각의 장단점을 세밀히 비교 검토하여 현시대에 남북에 공(共)히 가장 유익한 정책을 채택 시행하는 일은 정부의 몫입니다. 물론 장점은 더 늘리고 단점은 최소로 줄이는 방안을 함께 추구하면서 말입니다. 또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선거를 통해 국민들한테 최종 판단을 받으면 됩니다. 선거에 이겨 정권을 잡고 있는 쪽의 정책이 더 옳다고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다음 선거에서 국민들이 또 어떻게 판단할지 모릅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이 더 옳을 때도 있지만 현재 한국이 택하고 있는 체계가 민주공화제인 이상 법치에 따라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 자유, 생명이 달린 문제가 아닌 이상 비상적인 수단에 의존해선 빈대 잡으려 초가를 태우는 꼴이 될 뿐입니다. 요컨대 정치적 문제는 정부에 맡겨야지 구태여 교회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교회는 남북문제에 관해 아예 입을 봉하고 있어야만 합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상황과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어질 수 있는 보편적 원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진리는 가르치되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대책은 정부에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정확한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자칫 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민한 정치적 문제에는 더더욱 구체적이지 말고 원론 수준에서 언급하고 그쳐야 합니다.

예컨대 남쪽의 분열부터 해소되어 서로 상대를 인정 존중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정권은 종식되어야 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자유와 삶의 질이 향상되고, 남북이 통일을 지향하여 화해 협력하며, 무엇보다 십자가 복음이 북에 들어갈 수 있게끔 하나님이 역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정치적 편향성이 개입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남한의 교회와 교인들부터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변하고 더욱 그분의 말씀 위에 온전히 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회 개혁 방식

그런데 목사가 정치적 발언을 할 이유가 없는 더 중요한 까닭은 기실 따로 있습니다. 정치적 대안들이 다 장단점이 있다는 현실적 이유와는 달리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분명히 교인과 교회는 그 시대를 밝게 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동참하는 모습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어서 죽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와 잘남을 앞세우지 말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 전에 스스로 성품과 인격을 주님을 닮게 가꾸어야 합니다.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성령의 권능어린 인도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치와 향락과 부정과 부패에 찌든 남한 사회에서 정말 죄악과는 절대로 등을 지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신자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소속한 모든 공동체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비록 그 일부에만 비췰지라도, 드러내어야 합니다. 신자 한 사람의 수고와 희생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명이 풍성하게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또 그 살아난 사람이 똑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살려나갈 때에 비로소 사회가 거룩해집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실천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간혹 구약의 선지자들은 민족을 구하는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가장 먼저 혹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와 우상숭배와 혼합종교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대신 선포했습니다. 참된 회개로 이끄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자 사역의 전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정치적 군사적 행동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결과였고 선지자들도 단지 쓰임 받은 도구였을 뿐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회를 손수 개혁하려는 시도를 했다고도 주장합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하신 겉모습을, 그것도 일부만 보고 판단한 것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신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러나 향유옥합을 깨트려 당신의 머리에 부은 창녀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1)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비한 이 여인이 행한 일을 기념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오병이어 같은 현실적 이적을 본 백성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오히려 피신했습니다. 백성들이 대제사장의 꾐에 넘어가 주님을 배반한 이유도 오히려 주님이 사회개혁을 거부하는 것 같이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회 개혁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당신처럼 신자들이 먼저 십자가에 죽어서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지 이 사회 전부를 바꾸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생전에 하셨던 정치적 행동이라고 해야 성전을 청소하신 것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도 정치적인 동기가 아니라 형식적 위선적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더러 진정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촉구였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운동, 행사, 세력화해서 세상을 변화시킨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독교 자체의 부흥조차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잘못된 기독교부터 바로 잡은 것이지 올바른 기독교가 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사회를 정화시킨 강력한 부흥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역시 신자가 제도나 규범을 바꾼 것이 아니라 성령의 초자연적이고도 비가시적인 간섭에 의한 영적 운동이었습니다.

신자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원리가 예수님이 하신 방법이니까 무조건 그렇게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부조리나 모순의 근본원인을 정치적 제도 법규나 사회적 관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것도 도덕적 죄 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한 죄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사회를 개혁하는 방안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를 깨끗케 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이 서서히 빵 덩어리를 크게 부풀려 나가듯이 신자 한 사람으로 인해 주위 사람을 연쇄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다른 말로 교회에서 전해지는 모든 말씀이 신자로 단순히 종교인, 도덕군자, 사회개혁가, 전도일꾼, 교회회원 등을 양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로 인해 죽을 수 있는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죽음 앞에 당당하고도 의롭게 맞설 수 있는 십자가 군병을 양성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요컨대 기독교와 교인들이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 다시 온전히 서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믿음도 믿음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신자들의 사는 모습과 믿음을 동시에 보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왜 일주일 중에 가장 소중한 시간을 쪼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교회에 나왔는데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고 TV 의 시사토론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겠습니까? 솔직히 목사님들이 성경의 말씀을 풀어 전하는 데에만 평생을 바쳐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신자와 교회가 사회를 밝게 만드는 책임은 분명히, 아니 가장 많이, 더 정확하게는 오직 신자에게만 있습니다. 성경이나 예수님이 개혁성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서만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잘못된 까닭은 원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배역한 죄부터 씻어야 합니다. 또 먼저 죄를 씻은 자들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는 방식으로만 사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정치적 대안에는 절대 완벽한 방식은 없고 오히려 분리만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예수님을 증거 함에 가장 적절하고 소중한 예배의 설교 시간에 정치적 의견을 개진할 이유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예배 설교 중에 정치적 의견을 말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목사라도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는 있고 또 개인적인 소신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목사라는 타이틀을 반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사가 참여한다면, 사실은 현실적 정치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데도, 한 사람의 의견이 마치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를 대변하는 것처럼 오인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행동은 둘째 치고 정치적 의견을 발표한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려 했어도 세력화, 조직화, 체계화, 심지어 규범화 한 적도 없습니다. 만약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가룟 유다를 수제자로 해서 열심당원으로 제자를 삼았으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유일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해봐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22:21)는 말씀 한번 뿐이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법제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제도를 바꾼다고 인간과 세상의 근본적 딜레마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용서 받은 사람들이 적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야 사회가 진정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와 유대 당국에 대해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잘못된 종교 제도와 가르침과 종교인들에 한해 크게 야단치고 심지어 저주하면서까지 정죄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 세상에 무엇이 절실하게 부족한 것인지 당신의 가르침과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신자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분이 걸어가셨던 좁고 협착한 길을 일생을 걸고 따라가야 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고 세상에선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받아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자기가 서있는 장소와 만나는 사람과 사건에서 기존의 법과 제도를 지켜가며 적은 일에서부터 주님을 대하듯이 충성해야 합니다.

신자가 각자 서있는 그 시대와 장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도 운동, 행사, 세력화해선 안 된다는 것을 결코 나약하고 무책임하며 방관하는 자세라고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 안에서 당신께 온전히 헌신한 신자를 통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인간이 처한 세상 여건을 풍성하게 하는 것보다는 인간 각자가 당신의 거룩한 통치 아래에 들어오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상상 내지 가정해보십시오. 지금이라도 전 세계에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자들 모두가 초대 교회의 신자처럼 믿고, 말하고, 행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입니다. 정말 성령의 권능에 충만히 사로잡혀 목숨이 달아나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서 세상과 죄악과 사탄에게 당당히 맞선다면 이 세상은 지금껏 모습과는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그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지 성경에 드러난 예수님의 개혁방식이 잘못이거나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고안해낸 모든 대책은 비록 그런대로 장점이 있었지만 항상 단점과 부작용을 훨씬 더 많이 노정(露呈)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외에는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인간은 갈수록 더더욱, 이미 완연히 그러고 있지만, 그 구원과 개혁방식 둘 다를 부인하고 거부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종말로 향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참 복음 안에 들어와,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끝까지 참고 이겨내는 신자만이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운영자의 (종교적,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성경이 엄숙하고도 일관되게 선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6/1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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