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에 대해 궁금합니다.

조회 수 751 추천 수 37 2009.10.30 00: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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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에 대해 궁금합니다.


[질문]


세례에 대해 궁금한 게 생겼어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요1:25)고 묻는데 구약 시대에 세례 혹은 물로 하는 의식이 있었나요? 구약 성경에 이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

1) 당시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어떻게 해서 알았나요?
2) 그리고 세례를 주는 사람의 권위를 그리스도 혹은 선지자의 권위와 동일하게 생각한 걸     까요?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누가 세례를 줄 수 있는 건가요? 보통은 목사님들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그런 건가요?
3) 예수님께서 3장 니고데모를 가르치시는 대목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서 '물' 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4) 물 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나요?

아가페님의 추가질문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대리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세례를 받는 것입니까? 죽은 사람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고전15:29)

기독교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한 행위는(장례식 같은 의식적인 것은 제외하고)금기시 이단시 되는데 왜 사도바울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 것을 언급했는지에 대해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답변]

“무릇 그리스도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세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성경구절입니다. 반드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야 합니다. 세례 의식을 통해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 자신의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며 앞으로는 오직 그분을 본받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연합해야 하므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을 쫓아 죄악 가운데 살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활에 연합해야 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때가 되면 천국에서 구원이 완성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세례란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구원의 확신을 온전히 가진 신자가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은혜는 받을 수 있어도 의식 자체에 불신자로 믿게 만들거나 변화시키는 신령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동일한 믿음과 소명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에 가입하여 믿음 안에서 서로 자라가며 하나님의 통치를 함께 더 확장시키고자 다짐하는 의식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셨습니다. 전도하여 믿음을 갖게 된 자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전에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앞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케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서약하는 의식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신약 교회의 성례전으로 성찬과 세례 둘을 직접 제정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의 구원은 다 이루셨기에 구약 율법에 규정된 성전제사의 모든 의식은 당연히 폐지되었기에 교회로선 구원과 연관해선 이 두 의식만 행하면 됩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세례에 대한 이런 근본 개념을 바탕으로 각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1) 당시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어떻게 해서 알았나요?

세례(Baptism)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위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근원은 불명합니다. 하지만 고래로 대부분의 종교에 죄를 씻는 정결의식이나 타종교에서 개종하는 의식에 널리 사용되어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직 기독교가 태동하기 전의 유대교에서도 세례를 널리 행하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세례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근원은 레위기의 정결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컨대 시체를 만진 자는 오염된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온 몸을 물로 씻은 후에라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둥병을 비롯한 피부병과 유출병 같은 경우도 병이 나은 후 물로 몸을 완전히 씻은 후에 제사장에게 보이도록 했습니다.(레21:11-12, 22:4-6, 13-15장, 민9:6-10 등)  

유대교에서 미크바(Mikvah)로 불린 이 정결의식이 나중에는 타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도 행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 세계의 다른 종교의 죄악으로 오염된 상태를 물로 씻어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런 유대교 의식이 자연히 기독교에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구약에서 세례의 배경을 찾으려면 외적 의식보다는 그 의미에서 찾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세례의 의미를 확실히 드러내는 세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벧전3:20,22)과 출애굽 때의 홍해 사건(고전10:2)과 할례 의식(골2:11,12)이 그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구원 받은 자는 당연히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각 사건의 구체적 의미는 관련 성경구절을 참조 바랍니다.)    

(2) 누가 세례를 주어야 하느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세례 요한에게 따져 물은 이유를 신학적으로는 크게 둘로 해석합니다.  

우선 그들이 세례를 유대교의 개종의식으로 인식했기에 이방인에게만 베풀어야 하는데 왜 유대인에게 주느냐고 힐난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당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지금 질문의 의도가 세례 받는 자보다 세례를 주는 요한의 자격을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앞뒤 문맥이 전혀 뒷받침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사장도 아닌 주제에 세례를 주느냐고 따진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명확히 밝히면 되었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요한의 신분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같은 특정 인물에 빗대어서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이 세 인물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다 마지막 때에 오시는 메시아와 연결됩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기름 부은 자”(anointed)라는 뜻의 헬라어로 메시아를 지칭합니다.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유대인 사이에 흔했는데 특별히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혹은 “나사렛(고향의 지명)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데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말4:5,6)이 있었기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메시아 도래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유대인과 제사장들이 다시 온 엘리야인지 계속 궁금해 했으며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을 때에 엘리야를 찾는다고 오해한 까닭입니다.

나아가 “그 선지자”라고 지칭한 이유는 에스겔과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 는 물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로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4-26)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37:23)

에스겔 선지자는 새로운 지도자를 보내주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내용을 34장부터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새 이스라엘을 세우고 새 영을 부어 주신다고 합니다. 특별히 맑은 물로 모든 죄악을 씻어서 정결케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邪鬼)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슥13:1,2) 스가랴 선지자는 더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례나 유대교로의 개종 의식으로서의 세례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에 범했던 온갖 죄악들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유대 민중 전부에게 요구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범민족적인 세례는 메시아가 와서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요한이 지금 그러고 있으니 네가 메시아인가 밝히라고 요구한 셈입니다.

특별히 요한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기에 더더욱 그런 의심을 살만했습니다. 이 질문 전에 제사장들이 “네가 누구냐”(요1:19)라고, 또 대놓고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21절)라고 물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도 아니면서 세례를 주느냐고 따진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요한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또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다시 오는 엘리야라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도래가 곧 바로 임박했음은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예언한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23절)

오늘 날에 주는 세례는 메시아의 죄 씻음(사실은 성령 세례)이나, 세례 요한의 메시아 오심의 준비로서 씻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구약에 명기된 성전의 정결례나 유대교에서 행하는 타종교에서의 개종의식과도, 그 배경의 뜻은 몰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으로 중생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다는 신앙 고백이자 신자로서 그분만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식입니다. 어떤 조직화된 신앙 공동체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미는 이차적이자 결과적으로 응당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집전자는 누가 되어야 합니까? 꼭 목사여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우선적인 자격으로는 세례에 대한 의미를 잘 아는 자로서 중생한 자의 믿음과 헌신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빌립 집사가, 사도가 아니었음, 유대 광야에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8:36-38)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세례 받을 자의 믿음과 헌신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전도자가 세례를 주면 된다는 뜻입니다. 또 이디오피아 내시처럼 스스로 먼저 세례 받기를 원해야 즉, 적극적으로 자기 믿음을 사람 앞에서 시인하고 여생을 주님께 헌신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조직체 교회가 형성되지 못한 선교지나 기독교를 박해하는 지역에선 본인이 원하면 세례의 뜻을 확실히 알고 간단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신자라면 누구나, 가능한 그 사람을 전도한 자면 더 좋겠지만, 집전하면 됩니다. 비록 조직체 교회가 없다 해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신자들의 공동체에 참여되었음을 확인시키고 항상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자라고 사역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은 물론입니다.  

반면에 조직체 교회가 있는 지역에선 목사가 집전하는, 다시 강조하지만 목사만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님, 것이 좋습니다. 세례에는 믿음의 고백 뿐 아니라 헌신의 서약도 포함되는데 그 헌신은 당연히 성도들과 함께 즉, 조직체 교회에 가입하여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하는 의식이기에 그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전 교인이 보는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세례를 행하면 모든 이에게 은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 3장 니고데모를 가르치시는 대목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서 '물' 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물론 물로 씻는 세례 의식을 거쳐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서 그동안 하나님을 거부하며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삶을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오직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고집스레 견지하고 있던 인생의 목적, 가치, 의미, 방향, 생활 방식, 자세 등이 인간과 세상현실 중심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 중심으로 뒤바뀝니다. 이런 변화는 정말 한 인간의 속과 겉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에스겔, 스가랴, 요엘 등 구약 선지자들은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촉구 했고, 죽기 전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며, 부활승천 하신 그해 오순절에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불같이 임했습니다. 또 베드로의 설교로 그날에 삼천 명이 회심하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 세례입니다.

그런데 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여 중생이 일어나면 그동안 지었던 죄에 대한 진정하고도 철저한 회개도 반드시 동반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했던 죄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존재가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행동과 말이나 생각으로 지었던 개별적 죄를 일일이 회개하는 것보다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 죄를 지었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전에 지었던 온갖 죄들 또한 아주 세밀히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알게 모르게 지었고, 심지어 죄인 줄 모르거나 정당하다고 착각했던 일들도 왜 죄가 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단번에 일어나는 일회성 회개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깨닫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겸비한 회개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그런 죄들을 완전히 뜯어 고쳐서 주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할 것을 다짐하고 하나씩 실천하게 됩니다.  

불신자 시절에도 기본적인 양심에 따라 죄책감이 들고 회개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단순히 반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의 권세가 얼마나 추악하고 강력한지 철두철미 깨달으며 이젠 아주 죄를 싫어하고 민감하게 되며 반드시 멀리하겠다는 결심과 실천이 따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도 진정한 죄 씻음 즉, 물로 세례 받는 일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과 동시에 혹은 이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만 있어선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선 도덕적 회개만으로는 결코 구원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회개를 아무리 해도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데 실패하자 종교개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지 않습니까? 수양과 득도만 강조하는 종교의 종말은 항상 무(無)나 공허로 끝나지 않습니까? 구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또 이미 죄인이 된 자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려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간혹 성령이 역사해도 구원과 거리가 먼 경우가 있습니다. 찬양 신유 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심지어 병이 낫는 기적을 맛보아도 잠시 그 때 뿐이지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히6:4-6)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전부 성령의 일회적 순간적 역사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그 심령의 깊은 곳에 임재하여 그 영혼을 비롯해 존재 전부를 중생 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한 죄인에게 성령을 내주케 하면 철저한 죄 씻음의 회개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선행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온당한 반응을 해야, 물론 성령이 임재하면 당연히 그렇게 됨, 구원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4) 물 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나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하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요3:15-17)

아무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도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고백이나 헌신을 서약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이유는 우리가 받는 이유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당신을 죄인의 처지에까지 낮추신 성육신의 의미를 더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또 이제부터 죄인을 구원하실 소명을 공적으로 시행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모든 사람들 앞에 증거했습니다. 인간 제자와 힘을 합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뜻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택하신 제자를 가르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뜻이 합하여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려고 물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신자의 세례와는 그 뜻이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흐르는 맥락은 비슷합니다. 또  반드시 본받아야만 할 뜻도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신앙 고백과 신자답게 살겠다는 결단을 사람들 앞에 입술로 선언하는 것이 세례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무엇을 먹고 마셔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출사표를 세상에 던진 것처럼 신자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의식인 것입니다.  

세례는 또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여 함께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겠다는 뜻입니다. 모퉁이 돌인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서 그분을 닮게 서로 깎이고 자라며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확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주위에 비춰야 합니다. 그 모든 일을 한 마음으로 한 믿음 안에서 서로 격려 위로 도전 하면서 수행하겠다는 뜻입니다.

물 세례를 받아야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로 물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비록 물 세례가 상징적 행위이자 자신의 내면의 결단을 더 다지는 뜻이 우선적이지만 믿음의 동지들 앞에서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남은 인생을 그분을 위해 바치겠다고 서약할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혼자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여 함께 사역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의 의미만으로도 물 세례는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페미님의 질문 - 죽은 자를 위한 세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대리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세례를 받는 것입니까? 죽은 사람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고전15:29)

오래 전부터 죽은 자을 위해 대신 세례 받는 일을 옳다고 여기는 의견들이 분분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중세 가톨릭이나 이단들의 잘못된 의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 세례 받게 하는 효과가 있다든지 즉 믿지 않고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다거나, 죽은 친척들로 예수님과의 연합을 더 강화시켜 준다든지, 구원 받은 자의 숫자를 늘려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든지, 단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등등 아주 좋은 일로 여겼습니다. 지금도 몰몬교 같은 이단은 죽은 불신자 가족, 친척, 친지를 구원할 목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앞뒤 문맥을 따지면 바울이 죽은 자의 세례를 인정해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는 부활의 확실성입니다. 아가페님이 인용한 한글 성경의 번역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개역판을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이라는 문장을 맨 앞에 놓아서 강조했듯이 죽은 자의 부활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부에서 행해지던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 받는 관행을 그 뜻을 강조하려는 예로 든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세례는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명시적으로 그 관행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분명하게 찬성한 뜻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뜻은 부활이 없으면 그런 관행이야말로 너무나 어리석고 아무 쓸모없는 짓이지 않느냐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뜻과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복음에 관한 일관된 진리를 따져보면 그가 그 관행을 인정했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우선 구약에서도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올리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신18:11) 사단의 종들이 행하는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명시적으로 죽은 자를 위해선 어떤 의식도 행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28) 이방 족속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단순히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그들의 의식 가운데는 죽은 자로 심판을 면하게 한다든지 인간이 죽음 이후를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분명 내포된 것입니다. 그 의식이 드러내는 종교적 사상이 완전히 틀렸고 너무나 큰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의 말미에 “나는 (삶과 죽음을 전적으로 유일하게 주관하는) 여호와니라”고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9:27)고 했습니다. 심판은 당연히 죽은 자의 영원한 운명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인데 따로 추후에는 어떤 변경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의 비유에서 그 사실을 확증했지 않습니까?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승천하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주님처럼 사흘간 죽음과 방불한 체험을 했다가 살아났습니다. 또 천국에까지 올라가 하늘의 비밀을 직접 목격하고 왔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그만큼 확신할 수 있는 사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관해 가장 잘 설명(고전15장)할 수 있었고 또 신자더러 천국 소망을 안고 살라고 가장 강력하게 설파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그만큼 깊이 깨달은 자도 없었습니다. 세상 철학 및 지식과 유대 종교에 가장 능통했던 자가 죽었다 살아났고 입신하여 천국까지 갔다 온 초자연적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장 깊이 있게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한 마디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약 죽은 자를 위한 세례가 유효하다면 인간이 저승의 영역까지 힘을 미치는 셈입니다. 나아가 세례라는 의식이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초자연적 중생의 간섭도 전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가장 깊이 깨달은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인정했을 리는 절대 만무하지 않습니까?

4/2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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