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되어버린 교회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8-11)
근자에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외면, 멸시 당하는 경향이 농후해졌습니다. 그 원인은 여럿이지만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식자층들이 예수 구원 유일성의 주장에 반발하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기독교가 그런 반발에 제대로 대응할 실력(?)이 없다보니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만 복 받는 식으로 신앙이 변질되어져 갑니다. 밖으로 나가봐야 별무 효과니까 안에서라도 열심히 믿자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뻗쳐 나가야 할 복음의 생명력이 교회건물 안에만 갇혀,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해도, 질식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 변질의 대표적 유형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입니다.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내용이 주로 어떤 것입니까? 십일조를 바쳐서, 일천 번제를 드려서, 작정 금식기도를 해서, 직분자로 열심히 봉사해서 등등 교회 안의 종교 활동에 모든 열성과 진심을 바치면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래 기도했던 제목이나, 현재 당면하고 있는 환난이나, 소원하고 있는 계획들이 시원하게 해결될 거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응답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성경적으로 전혀 틀린 가르침은 아니지만 사실은 그리 강조하지 않습니다. 갓 신앙을 가진 자를 견고케 세워주려는 시험일 뿐입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는 자녀 요구하는 대로 다 해주지만 커갈수록 부모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부모 욕심과 독단으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뜻보다는 부모가 아이들보다 인생에 대해 더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나님은 초신자 기도를 3 년은 잘 들어준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흔히 하는 이야기란 그만큼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며 그 배경에는 범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앙을 처음 가진 자로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총을 체험할 필요가 있음을 그분이 알고 계신 까닭입니다.
대신에 정작 주목할 측면은 성경에 신자 자신의 형통과 안락을 보장받기 위해 그분을 시험해보라는 구절은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없다는 것입니다. 초신자 3년 형통의 진짜 이유도 신앙을 굳게 해주려는 뜻이지 않습니까? 본문도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주님이 진짜로 기뻐할 일로만 시험하라고 합니다.
그럼 당장에 십일조, 기도, 예배, 직분봉사도 주께 기쁘시게 하는 일이지 않느냐고 반발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참 신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컨대 학생이 학교에 출석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학생의 인격이 자라며 실력이 늘어 대학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삼년을 개근하고 열심히 공부해도 그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오히려 선생님을 괴롭게만 할 뿐입니다. 또 그런 학생에게 아무리 학교생활에 충실했다고 해서 개근상 말고는 포상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초신자 시절 이후에 기도 응답이 메마른(?) 까닭입니다.
강단에서 교회 생활에만 모든 열심을 바치라고 가르치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사실은 담임 목사가 원하는 바이지만, 신자를 교회 안에 묶어 놓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신자들을 교회에 묶어 놓겠다는 것은 그들 각자의 신앙을 키우기보다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교인보다 교회를 키우겠다는 것은 솔직히 대형 교회를 이루어 자기 이름을 내겠다는 담임 목사의 개인적 욕심의 발로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둠의 자식으로 죄에 빠져 있던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어야만 합니다. 그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한 알의 섞는 밀알이 되어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나아가 의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가 속한 어느 공동체이든지 그 소속원들이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를 그 신자를 통해 비췸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영혼에 거룩한 찔림을 생기도록 해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본문도 분명히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닌지 시험해보라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해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빛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고, 사실은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런 것들이 자연히 우러나오게 된다는 것이지만, 하지 않습니까?
또 열매 없는 어둠에 참예하지 않고, 도리어 책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모든 악에는 아예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할 뿐 아니라 악을 악이라고 정확히 지적하여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주께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랍시고 대놓고 불신자들에게 죄 짓지 말라고 견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빛과 어두움으로 신자와 불신자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빛으로만 서있으면 어두움은 자연히 자기가 어두움인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마저 어두움에 행하면 불신자는 영영 자신이 어두움인지 모를 것입니다. 빛이 빛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여 어두움이 어두움의 더럽고 추함을 절감하여서 빛으로 나오고 싶다는 소망을 심어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시험한다는 것은 상대의 진실성 내지 성실성을 실제적 체험을 통해 판단해 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따지면 신자가 감히 하나님을 시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며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거짓, 사기, 위계 등이 있으리라고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스스로 자존하시는 썩지 않는 분인지라 당신의 뜻에 변개 가감 후퇴 포기가 있을 리도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더러 당신을 시험토록 허락하신 까닭은 우선 믿음을 갖게 하고 더 성숙시켜서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 쪽에서도 자신의 믿음 생성과, 믿음 성숙과, 하나님 일에 헌신하는 것들만으로 그분을 시험해 봐야 합니다. 시험당하는 상대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알아보려면 시험하는 쪽도 진실성과 성실성으로 대해야만 할 것 아닙니까? 상대를 속여서라도 떠보려는 것은 진정한 시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지 알아보려 것은 그분이 약속을 안 지킬 가능성도 있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 전제가 없이 정말 그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온전히 믿으면서도 그런 시험을 한다면 더더욱 문제입니다. 비록 자신의 성실한 종교행위를 내걸었더라도 그분의 상급이 대가로 따르는지 알아보려는 데만 마음이 쏠렸기 때문입니다. 실제 속마음 즉, 최종목적은 제사보다 젯밥에 가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교환하여 형통과 안락을 달라고 대놓고 요구하지 못하니까 그분을 시험해본다는 거창한(?) 구실을 내건 것에 불과합니다.
본문이 어떻게 말합니까?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최종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님이 신자의 그 시험으로 인해 기뻐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신자가 대가로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자의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도 사실은 시험의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그것들을 동원했으니까 신자는 이미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실현하고 있는 셈이지 않습니까?
신자 개인의 현실적 형통과 안락이 인과응보적으로 따르지는 않지만, 당신의 주권으로 주실 수도 있다는 뜻임, 본문이 말하는 시험의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신자로 더 큰 착함, 더 풍성한 의로움, 더 확실한 진실함으로 다시 채워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악은 더 멀리 하게 만들어 주시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하다가 하나님처럼 저주하게끔 바꾸어 주십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책망을 받은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게”(13절) 해줍니다. 신자로 인해 죄악에 찌든 세상과 사람들이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원주의, 상대주의, 자유주의의 반발이 심할수록 기독교도 그에 맞는 논리적 합리적 신학적 변증이 필요합니다. 아니 사실은 그런 부분은 상당히 개발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증이 발달해도 변증한대로 실증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 앞에서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면 신자가 절대적으로 그 진리대로 사는 길 말고는 따로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기독교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 시험을 이길 길은 실제로 신자가 빛의 자녀답게 그들의 어두움에 빛을 비취는 길 밖에 없습니다. 말로서 아무리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외치며 그 합당한 종교적 논리를 설명해주어도 신자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주장이 힘을 얻겠습니까?
달팽이는 고개를 세상 앞에 쳐들다가도 그 촉수에 무엇이든 살짝만 스쳐도 당장 두꺼운 껍질 안으로 숨어버립니다. 마치 현재의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반발에 움츠려들어 교회 안으로 몰려갈수록 세상 앞에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증명할 방도와 기회는 없어집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어떻게 현 세태의 반발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신자끼리 아무리 좋아야 기독교의 종교행위를 한 것뿐이지 복음을 세상에 증거한 것은 아닙니다.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할 복음이 그야말로 주일날만, 교회 마당만, 신자들끼리만 밟다가 간 것뿐입니다. 결국 요체는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빛의 아름다움을 실제 절감토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두움에 속해 있기에 스스로는 빛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그들에게 빛을 비추는 길 말고는 다른 수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복음에는 놀랍고도 엄처난 생명력 이미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력을 품고서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기만 하면 됩니다. 본문 바로 앞 절에서도 우렁차게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단순히 전도에 힘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도 이전에는 어두움이었는데 그 추함과 더러움을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더욱 빛으로 행하기 쉬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어두움이 좋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빛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영적 실상이 항상 그러지는 못해도 “주 안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에는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것만 붙들면 된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이 세태의 반발에 대응할 수단은 “말로서 변증(辨證)”이 아니라 “몸으로 실증(實證)”입니다. 몸의 실증이 따라야 말의 변증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온전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또 그 길은 신자가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보다는,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증거되어져야 하지만, 십자가 복음에 의지할 때만 가능해집니다. 복음 즉, 하나님의 생명력이 실종되니까 교회에 알차고 좋은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열성적으로 교인들이 참여하면서도 기독교와 신자 둘 다 세상에 대항할 힘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달팽이 껍질을 벗으려면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믿음만 키워선 오히려 껍질을 더 두껍게 만들 뿐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면 사실상 더 키울 믿음도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들고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하나님께 시험하여 받을 것은 따로 없음을 확신하기에 오직 주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만 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어떤 시험을 걸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는 어떤 시험을 해보라고 가장 중점을 두고 독려하고 있습니까?
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