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4 동행(同行)이냐 선행(先行)이냐?

조회 수 520 추천 수 15 2009.09.08 23:19:29
동행(同行)이냐 선행(先行)이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12:4)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에 무작정 동쪽을 향해 또 다시 진군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페르시아를 넘어선 곳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작가 할포도 루코그는 그 사실을 “그의 지도에서 벗어나 진군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익히 알고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 적응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곳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알렉산더뿐 아니라 모든 자의 인생이 그 정도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사실은 동일합니다. 내일이란 항상 자기 영향력이 미치는 한계를 넘어선 차원입니다. 자신의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꿔 말해 인생이란 우리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에 그 계획과는 별도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력으로는 전혀 예상치도 아니 상상하지도 못한 길로 우회시키거나 수정시키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기 뜻대로 진행이 되면 신나게 가속도를 붙여 진군하다가 장애가 가로막으면 가던 길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로 돌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모든 자의 인생이 각자가 계획하고 시행한대로 이뤄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 세계에 60억 개의 왕국이 생겨 있거나 몽땅 죽어 없어졌든지 둘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와중에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으니 거꾸로 인간의 소원대로 이뤄져선 안 된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결국 미지의 세계로, 그것도 자기의 계획은커녕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첫 걸음은 당연히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나아가 그렇게 흐른다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영원한 진리를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절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그렇다 쳐도 신자마저 그 진리를 모르거나 계속 잊어버립니다.

불신자는 아등바등 힘에 겨워하면서도 자기 뜻대로만 인생을 꾸려가려고 죽을 때까지 고집스럽게 혼자서 걸어갑니다. 어차피 끝까지 믿을 데라곤 자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도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합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절대 혼자 걸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해 주신다고해서 자기가 계획하여 기도만 하면 그대로 응답해주리라 기대하거나 믿어선 안 됩니다. 그러면 단지 기도라는 종교적 방식을 빈 것만 다르지 불신자가 자기 계획대로 인생이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신자라도 스스로 계획은 세울 수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시기, 방식, 결과 등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계획을 두고 아무리 기도해도 여전히 장애는 나타나므로 수정, 우회 심지어 포기해야할 것과 나아가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이란 언제든 자기 계획의 수정, 우회, 포기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너무 쉽사리 수동적, 소극적, 부정적, 비관적으로 사태를 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즉 수정과 우회와 포기하는 사태마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는 신자의 인생도 불신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고달프고 힘들다는 뜻입니까? 만약 신자가 자기 계획만 두고 기도할 때는 수정 우회 포기가 수시로 찾아오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셔야 할 것은 그럴 때도 하나님은 신자와 영원히 동행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떠나는 법은 없습니다. 반면에 그런 신자는 평생을 두고 믿음으로 한 일이라고는 자기 계획을 이루려거나 위급한 일을 벗어나려 기도한 것뿐입니다.

신자의 인생행로는 불신자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야 합니다. 아니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아브람이 자기 뜻대로 순례 길에 나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한 것을 하나님이 그 걸음만 인도한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떠났습니다. 그것도 인생을 서서히 마감해야 할 후반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약속만 붙들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 하란에서 의외의 장애가 나타나 잠시 지체했지만 또 다시 약속을 바라보고 갈 바 모르지만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단순히 동행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약속과 함께 동행(同行) 해주셨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선행(先行) 즉, 미리 먼저 가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체적 시기와 장소와 방법과 결과는 미지의 상태로 둔 채 단지 약속만을 걸어 놓고 앞서 가셨습니다. 그에게는 여호와는 그 자리에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설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앞서 가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기도, 아니 주로 후자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가서 예비하신다고 해서 신자에게 구체적으로 직통 계시를 하지 않습니다. 선행하시는 하나님이란 말하자면 그분의 약속이 먼저 가 있다는, 다른 말로 신자가 그 약속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약속과 함께 구체적 행로까지 밝혀 주신다면 믿음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 못할 바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가고 있는 약속을 갈 바 모르지만 바라보며 갈 때에만 믿음이 요구됩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이 신자의 판단력으로는 완전 미지의 세계인 것 같은 영역을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언제 어니서나 신자와 함께 있습니다. 신자와 동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선행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항상 동행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 계획대로만 기도하면서 수정 우회 포기를 되풀이해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면 항상 에벤에셀의 하나님 믿음만 가진 셈입니다. 그래선 고난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그 인생이 불신자보다 별반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는 인생이라야 신자 본인에게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또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고귀한 인생이 됩니다.

불신자는 자신이 가진 지도로만 그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때로는 그 지도를 무시하고 용기와 담력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 업적을 남기면 알렉산더처럼 인간 사회의 영웅이 됩니다. 신자는 자신이 만든 지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지도, 그것도 목적지만 있지 가는 길이 나와 있지 않는 지도로 바꿔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는 구체적 행로가 없다고 그 지도는 제쳐두고 하나님과 함께 이미 걸어온 여정만 일정표에 기록하는 것으로만 인생을 마감하려 듭니다. 동행의 하나님을 넘어서 선행하는 하나님을 믿는, 즉 갈 바 모르지만 어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그분의 약속만 붙들고 따라가는 신자라야 믿음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아니하고는 그분의 영광을 맛보고 나아가 이 땅에 드러낼 길은 따로 없습니다.

12/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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