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7:4 요나의 초막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조회 수 781 추천 수 5 2009.10.26 0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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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초막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교인들이 기도와 말씀과 찬양을 통해 접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가슴이 벅차고 기뻐서 교회에 모여 있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입니다. 그런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여 성령 안에서 이뤄진 그분과의 진정한 교제였다면 반드시 그 순간의 감격으로만 끝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자리를 차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러 가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교제가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통이 아닌 기독교라는 종교의 영역 안에서만 이뤄진 것이라면 곤란합니다. 자칫 기도, 말씀, 찬양 등이 신자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죽여주는 진통제의 역할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자꾸 여기가 좋으니 산 밑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산상 집회 밝힘증(症)”이 있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욘4:5) 요나가 천신만고 끝에 죄악의 도성 니느웨에서 어쩔 수 없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해주려는 하나님의 뜻과 또 실제로 그들도 회개하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쩌나 보려고 성 밖에 나와 초막을 짓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초막을 짓고자 한 까닭 가운데 혹시라도 요나와 같은 마음은 없었을까요? 고대의 최강대국 애굽을 열 번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물리친 모세와, 구약 시대 최고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 엘리야와, 자연을 다스리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등 온갖 이적을 보이신 예수님 세 분이 모였으니 로마 제국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닐까라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세 분의 합동 사역으로 로마를 멸망시키고 유대를 해방시키는 모습을 초막에서 지켜보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앞뒤 문맥으로 그렇게 해석할 만한 확실한 언급은 없습니다. 베드로의 요구는 일차적으로는 생전 처음 본 장엄한 광경에 매료된 감동이 너무 커서 그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베드로보다. 오늘날의 신자가 산상에 초막을 짓고 모여서는 죄악 된 세상아 어서 빨리 망하라고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나 신자가 사이비 종말론에 심취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가 좋다는 말은 항상 저기는 나쁘다는 것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쁜 저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 좋은 여기를 소개하여 그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초대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면 역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나쁜 저기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입니다. 요나가 초막을 짓고 구경하고 있는 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서너 가지 뿐입니다. 우선 여기가 최고로 좋다고 아직 제대로 실감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내 혼자만 그런 기쁨을 간직하기 아까우면 반드시 남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나아가 상대가 그 좋은 것을 제대로 못 알아주거나 받으려는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안타까워지고 좀 심하면 화도 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산상에 초막을 지어서 그곳에만 머물겠다고 덤비면 그 곳이 아주 좋다고 인정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주 좋은 것을 남에게 나눠주기 아까운 탓입니다. 혼자만 차지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산상에서 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이상한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현실의 형통과 물질적 축복을 받고 있으니 남은 뒷전이고 자기만 먼저 많이 받아서 혼자만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아가 아직도  자기 성에 찰만큼 많이 받지 못했기에 남에게 적선해줄 고물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은 어차피 성경과는 아예 다른 것이니까 하나님과는 사실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복음은 복음이되 약간 변질 된 복음이 있습니다. 교회가 신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죄 사함의 구원 즉, 영생임에는 분명히 동의하고 자기도 그것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도 요나처럼 나눠주기는 싫어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저들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는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기독교 교리를 단순히 자기 지성과 의지를 동원해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생생한 체험이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아무도 없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은 십자가로 바로 받고서도 차츰 종교적 행위에 심취하다보니 마치 자기는 아주 신령해진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산 밑의 사람을 아주 우습게보고 잘 상종하지 않으려 듭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그런데 혹시라도 예의 그런 엉터리 복음들이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엉터리 종말론이나, 기복신앙이나, 율법적 복음에 빠진 적이 없으며 지금은 형편과 여유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언제든 나아지면 전도에 나설 것이다. 혹은 성격이 좀 소심해서 그렇지 불신자를 보면 항상 예수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래서 나는 요나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런 불만이 든 적이 정말 한 번이라도 없습니까? “왜 저 예수 안 믿는 악한 자는 세상에서 형통하고 나 같이 예수 잘 믿고 의로운 자는 이렇게도 고생을 시킵니까?” 이 불만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저 사람의 형통을 빨리 빼앗아 망하게 해 주시고 나의 환난은 빨리 없애서 형통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닙니까? 다른 말로 저 사람은 형통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고 나는 그런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예수님의 복음은 실종되었습니다. 아니면 예수 믿은 것을 자기 공적으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랑하고 있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질문이며. 해선 안 될 질문이며. 심지어 아예 성립이 안 되는 질문 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그런 불만이 저부터도 자주 듭니다. 심지어 하루에도 몇 번씩 들 때도 있습니다. 요나처럼 성 밖에다 저를 위하여 초막을 지어 놓고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하시는지 두고 보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는 언제 어디서든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 분외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위로와 능력을 맛볼 방도가 아예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롬7:24,25, 갈2:20)

신자가 산상에서 초막을 짓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며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제는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처럼 눈앞에 예수 죽인 것을 뻔히 보고도 순식간에 사단의 꾐에 넘어가 성 밖에서 자기만의 초막을 짓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 나는 잘 믿었는데 형통하지 않지라는 의심과 불만이 드는 순간 사단은 우리 곁에서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 보태어 조금이라도 남이 잘 되는 것이 부러워질 때는 더 큰 마귀가 곁에 와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힘들고 괴로운 것이 당연하다거나 무조건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주님과 일대일의 인격적 교제를 십자가 앞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소망도 살 가치도 전혀 없었던 저 같은 죄인에게 골고다 언덕의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이 시간, 아니 평생을 두고 찬양합니다. 아멘!

8/3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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