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28-31 천국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조회 수 547 추천 수 15 2009.10.26 0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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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들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보나 미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통점입니다.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설렁한 이야기로 들립니까? 조금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상념은 “지금 이게 아닌데!”라는 불만족입니다. 신나는 일이 생겨 기분이 좋거나 감사할 거리가 생겨 만족하는 경우마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일시적인 만족과 감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반드시 도달하고 싶고 또 해야 할 더 높은 단계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누구라도 이런 부족감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전부를 걸고 살펴보았을 때에 인간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 인격과 삶의 모든 부분과 지나온 평생을 두고 따져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상태에 가 있었어야 함에도 아직 그런 상태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말 그대로 평생을 두고 아니 죽기 직전까지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죄를 많이 짓고 있는 자라도 “나는 원래 이런 나쁜 놈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지?”라는 회오(悔悟)를 항상 가집니다. 부모로서, 부부로서, 자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각자 처해 있는 어떤 직분이었던 정도(正道) 대로 가지 못하고 어쨌든 뭔가 빗나가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도덕적 죄책감이나 직업적 사명감과는 다릅니다. 죄를 안 짓는 자라도, 아니 그럴수록 더 선해져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직장인도 직무와 인간관계에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깁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이 항상 “내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업무의 성취도나 인격의 완성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결핍감입니다.  

요컨대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정말로 참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실종되어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 때문입니다. 파스칼이 “우리 각 자 안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이 있다”라고 말한 대로입니다. 인생이란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여정이자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핍감을 보충하려는 노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과학적 탐구로, 철학적 사추로, 도덕적 인격도야로, 자기 경험에 입각한 독선으로, 세상적 쾌락 심지어 마약에 의해, 또 종교에 귀의하는 등 천차만별입니다. 마치 자기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는 양 가장하기도 합니다. 허무주의, 실존주의 같이 고상한 철학의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그런 노력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족을 가장, 무시, 포기하는 것도 사실은 부족을 메우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영국의 기독교 변증가 G. K 체스트톤은 “기생집 문을 두드릴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인간의 상실감을 너무나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먹고 마시는 것에 풍요하게 되어 사람들 앞에 자기를 겉으로만 치장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풍요롭고 화려해진 모습으로 자기는 더 나은 품위를 유지하고 인생에서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증명해 보이려 합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남들 앞에서 과시하는 잠깐 그 때뿐입니다. 돌아서면 내면의 진정한 만족은 여전히 없습니다. 그 모든 인간적 노력들은 에례미야 선지자의 말 대로 밑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려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들은 앞으로 가야할 더 좋은 길을 찾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어떤 목적지 즉, 분명하게 의식은 못하지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처음 출발이 잘못된 상태에선 아무리 가봐야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밑이 터진 웅덩이는 반드시 밑을 먼저 막은 후에 물을 부어야 채워집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 거창하고 심오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완벽하고 도덕적으로 무결(無缺)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 왔는가를 모르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아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도 모릅니다. 목적지를 정확히 겨냥하기 위해 출발지를 제대로 찾으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원래 갖고 있어야 할 형상을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기원이 창조인가 진화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진화가 맞으면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상태가 아닙니다.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다가 다시 또 어떤 우연한 형상으로 바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살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도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형상도 되찾을 형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그냥 먹고 놀고 자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창조가 맞으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 있고 또 그 만드실 때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 잃어버린 길을 되찾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외에 자신의 진정한 자아상을 회복할 재간이 결단코 없습니다.

창조와 진화를 논리적으로 비교해 내려진 결론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의 부족분을 찾으려 온갖 몸부림을 쳐보다가 결국은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수고임을 깨닫는 자는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임하여 자신의 인생이 이전과는 달리 밑이 터지지 않았고 물이 채워지기 시작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자기 형상을 되찾고자 하는 그런 갈급함이 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든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비록 모든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극도로 부패되어져 있지만 원래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그분이 은혜만 베푸시면 그분과 실질적인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있고 참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인간의 눈에는 가장 죄가 많은 자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장 많이 방황했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인생의 결핍감이 너무 커서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데까지 간 것입니다. 혹시라도 외부적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그런 형편에 떨어졌다 해도 당장에 느끼는 상실감은 가장 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들이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운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 인생 중에 가장 크고 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 구원 받은 강도가 예수님께 순간적인 감동을 받아 구원 받기로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헤매다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형상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나마 전도가 가장 쉬운 때가 언제입니까? 사람이 죽기 직전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의 사형수들입니다. 십자가상의 두 강도에서 보듯이 즉시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거나 끝까지 완악하게 항거하거나 둘 중 하나의 확실한 반응은 반드시 보입니다. 바로 지옥과 천국으로 나눠지는 절대적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맏아들은 부모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일단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조금 지나고 보니 가기 싫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부터 가기 싫으니까 부모에게 꼭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둘 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 이유도 똑 같이 스스로 판단해 그 일이 싫고 귀찮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두 아들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둘째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부모 말을 들었고 맞 아들은 그러지 않은 것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로 나타난 모습일 뿐입니다. 본질적 차이는 따로 있습니다.

큰 아들은 스스로 도덕을 잘 알고 지킬 수 있다는 자만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본연의 상실감을 도덕이라는 선한 수단으로 메우려 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진정한 충족은 여전히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도덕이라는 수단도 아무 효과를 못 볼 정도로 내면의 상실감이 더 커져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싫고 귀찮으면 윤리 도덕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처음부터 부모 말도 안 듣는 개망나니였습니다. 그도 여전히 부모마저 채워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갈급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 온갖 짓을 다하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했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결국 자기의 뿌리, 출발점을 되찾지 않고는 인생에 진정한 만족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순종하기로 즉,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뉘우치고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는 기생집을 두드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만났던 탕자였습니다.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도 어떤 때에 가장 천국에 가까이 가 있습니까?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어 영적으로 충만해졌을 때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도 가장 많은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동일한 죄수들이 똑같은 시간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심판과 구원이 좌우로 나눠져 있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여전히 그 내면에는 예수님이 채워주지 않으면 비워있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자의 일생도 마찬가지로 그 상실감을 채워나가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절대로 이 땅에선 완성되지 않습니다.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말씀과 기도로 그 부족분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자기 웅덩이가 밑이 터진 줄도 모르는 잘못을 범한다면, 신자는 자기 웅덩이가 밑이 터진 줄은 깨달았는데 여전히 자기가 그 밑을 채우려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신자더러 자기의 밑이 터진 웅덩이는 예수님이 막아주고 또 물을 부어주어야만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꾸자꾸 깨닫게 해서 그분께 자기를 온전히 의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자체가 터진 웅덩이의 밑이 되거나 생수 자체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천국에 가장 가까운 때는 세상에서 도저히 진정한 만족과 의미를 찾지 못해 갈급해진 심령을 지녔을 때입니다. 비록 실패하고 넘어지고 죄에 빠졌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나올 때만이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운 때입니다. 혹시라도 오늘날도 신자보다 세상의 세리와 창기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9/2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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