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니 너무 힘듭니다.

 

[질문]

 

세상엔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고 특히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영적으로 타락하였기에 다들 부족한 점이 저마다 있음을 압니다. 크리스천은 그런 사람들조차 안아줘야 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자주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은 합니다. 그러나 상식에서 너무 자주 벗어나고 기본 예의조차 없어서 자꾸 화나고 짜증나게 만들다 못해 미워지는 유형의 사람들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냥 지나칠 인연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친구나 사회동료 등으로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상황에선 쉽사리 관계를 끊기가 힘듭니다. 이런 경우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맞는 걸까요? 더 중요한건 그 사람의 안 좋은 생각과 행동들이 저에게까지 미쳐서 저도 같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동참해야하는 애매한 상황마저 생겨 정말 난감해집니다. 시험에 들게 만든다고 해서 인연을 다 끊어버리면 주위에 남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힘듭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어떤 자세를 지녀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악인마저도 감싸 안고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줄 알지만 참으로 힘듭니다.

 

[답변]

 

유사한 주제로 본 사이트에서 이미 한두 번 다뤘습니다. “문제 많은 아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와 “어떻게 하면 이웃사랑을 잘할 수 있습니까?”라는 두 글을 읽어보시면 상기 질문에 대한 답을 거의 얻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의 답변도 그 두 글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건이냐 사람이냐?

 

신자라면 상기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모든 신앙상의 의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십자가 구원 은혜에서 해답을 얻어야 하고 얻을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도 그 점을 아시고 “예수님은 악인마저 감싸 안으라고 가르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상식과 예의가 없어서 화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까지 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북한의 김정은과 일본의 아베 수상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당신을 그렇게 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최초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도 주님의 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이젠 대적과 원수가 아니라 형제들 사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상기 질문에 대한 정답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면 490번이지만 사실은 숫자 칠이 뜻하듯이 끝까지 완전하게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의 문자적인 의미는 같은 잘못을 일흔 번 반복하고, 일곱 종류의 잘못을 그렇게 하더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한 종류의 잘못을 삼 세 번까지만 용서해주어도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당신을 빼고는 아무리 경건한 신자에게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어쨌든 최선을 다해 그렇게 노력하라고 강조하려는 뜻으로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 끝까지 용서하라는 계명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상대가 행한 말과 행동을 보지 말고 그 사람 자체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도 아무리 큰 잘못을 아무리 많이 범해도 끝까지 용서해주라는 뜻이므로 마찬가지로 그가 저지른 사건보다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죄를 다 감당하고 죽으신 뜻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줄여서 우리가 범한 죄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하되 우리라는 존재는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한 죄로 보면 도무지 그분의 사랑은커녕 구원을 받을 자격이 전혀 안 됨을 우리도 알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당신께서 그 죄 값을 다 감당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구원이자 예수 믿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원수마저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이며 그 십자가의 구원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스데반도 주님처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크게 화를 낸 일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의 제물 장사치와 환전상들에게 그랬고 또 바리새인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잘못을 조목조목 꾸짖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는 차원이 다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메시아의 자격으로 정죄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 자체를 방해함으로써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마15:14) 잘못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이단이나 잘못을 범하는 교회지도자들에게 한두 번 진정으로 권면해도 고치지 않으면 구태여 가까이 하지는 않더라도 계속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는 해주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첫 걸음

 

신자가 교회 안팎에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첫 걸음은 하나입니다. 신자니까 더욱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원수까지 사랑하기로 최소한 용서하기로 결심한 후에 최선을 다해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만 해선 일흔 번씩 일곱 번은커녕 일곱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되었어도 우리 믿음이 결코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세상 사람은 세 번까지 봐주니까 신자로써 일곱 번만 용서해도 아주 잘한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정말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온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하늘의 보물을 땅에 옮겨 심는 자가 신자입니다.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주변 불신자들로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나로 기분 상하게 만드는 상대의 표정, 태도, 말투, 행동거지, 사건 등에 자기도 모르게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 습성부터 죽여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여 나도 모르게 감정이 상하는 것까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건강한 육신을 갖고 지정의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바울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분을 내는 것이 죄가 아니고 분이 외부로 폭발하여 말로 행동으로 드러나면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발전되지 않으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 관습은 해가 지면 새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날의 분을 그날로 끝내고 다음 날까지 품어서 새로운 날을 망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계명입니다. 분이 났다는 것은 상대가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범했다는 것인데 하루 자고 나면 잊을 정도라면 사실 분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신 질문은 자주 만나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 때문에 화가 나는 경우입니다. 매일 저녁 그 사람만 생각하면 분이 치밀어 올라 잠도 못 잘 정도입니다.

 

그럼 길은 둘 뿐입니다. 관계를 끊던지 이어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 결단 시행해야 합니다. 신자니까, 아니 신앙과 무관하게 사회생활을 이어가려면 아무나 함부로 관계를 끊어선 안 되고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럼 그가 내게 행한 일로 매일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일단 받아들여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이 또한 말이 쉽지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므로 그분께 똑같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며,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에 어떤 죄와 잘못과 허물을 범해도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또한 정답인 줄 잘 알고 있으나 여전히 실천하기 너무 힘듭니다.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은 신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 믿음과 가치관대로,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오히려 감정에 휘둘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분을 해질 때까지 품지 말라고 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바꿔 말해 뭔가 상대가 좋은 점이 있어야만, 최소한 용서될만한 사항들이 있어야만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본 받아 자신의 진심과 열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신자들이 벽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싶고 목사님 설교 말씀대로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전혀 따라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정말 잘 대해주어야지 마음먹고 나가도 막상 그 사람을 만나서 그 싫은 점이 드러나면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납니다.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나고 꿈에 나올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최후의 길 하나

 

그럼 도무지 길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최후의 길 하나가 남았습니다. 거꾸로 따져봐야 합니다. 내가 그보다 못한 점이 있어서 내가 나를 볼 때마다 그보다 더 싫은 점이 있거나 많다면 상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아주 희박할 것 같은(?) 이 가능성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그 방안에 대한 100%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이와 끝까지 관계를 좋게 이어가려면 반드시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다는 첫째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 아닙니까?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아주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악한 자임을 절감한 것입니다. 북한 김정은보다, 일본 아베 수상보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의미가 아닙니다. 나의 추하고 완악한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내가 그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 예수를 믿은 첫 걸음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비추면 내가 제일 불쌍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김정은과 아베가 똑같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모든 사람 중에 내가 최고로 완악하거나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절감하기에 이제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그 사람 자체를 더 악하다고 보지 않게 된 자입니다. 나나 그나 완악하기는 똑같으니 그런 행동을 나에게 저질러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5-17)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중에 얼마라도 쓸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구태여 당신께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구원을 베풀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고는 어떤 이도 진정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귈 때에 우리의 의도가 순전하지 않고 이해타산을 따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야말로 눈에 보이는 외모에 따라 감정이 제일 먼저 생기고 그에 사로잡혀 상대를 올바르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일부 외모에 따라서만 반응하는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사항

 

그런데 더 중요한 사항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면 내가 상대에게 비춰지는 것도 동일하며 상대도 그와 같은 바탕에서 나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이 “특히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영적으로 타락하였기에 다들 부족한 점이 저마다 있음을 압니다. 크리스천은 그런 사람들조차 안아줘야 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죄성을 가졌고 영적으로 타락해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질문자님도 그러함을 시인한 셈입니다. 그럼 질문자님이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질문자님을 똑같이 품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바꿔 말해 내가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그도 나에게서 갖게끔 나도 그에게 똑같은 행동을 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평소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입니다. 이 진리를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래서 상대의 말과 행동과 사건을 보지 말고 상대를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질문자만 아니라 질문자가 관계를 맺는 이, 아니 지구상의 모든 이에게 똑같이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만 해도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부터 매일 새벽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확인하면 상대도 나와 똑같이 불쌍한 죄인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우위에 두고 상대를 자꾸만 외모로만 판단하여 차별하려는 습성을 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불쌍한 만큼 상대도 너무나 불쌍하다는 분명한 인식이 들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무나 유명한 인간관계의 황금율(黃金律, the Golden Rule)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단순히 윤리적으로 선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남을 외모로 판단해서 대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래서 나또한 지금 상대에게 그렇게 대우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나부터 먼저 남에게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인간관계가 지금까지처럼 외모에 따른 감정적으로 대하는 판에 박힌 관계로 일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32절) 상대가 사랑받고 용서 받을 만한 확실한 것이 있다면 불신자도 얼마든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 즉, 상대에게 사랑받고 용서받을 만한 요소가 하나 없어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된 자라고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5,36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그대로 따라서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며 그것이 필요 없는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팁

 

지금껏 설명 드린 진리와 그 실천 방안까지 알아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힘들긴 마찬가지라는 반발 내지 의구심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신자 속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이 윤리적 차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대를 의도적으로 멸시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저주하여 원수지려고 생각하는 신자는 없습니다.

 

죄의 본성이란 자기만 가장 중요시하고 자신의 감정 생각에만 따르는 끈질기고 뿌리 깊은 성향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현실적인 방안보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비를 온전히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 바로 적용하여 실천하고 싶은 방안이 여전히 궁금합니까? 그에 대한 좋은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헨리 클라우드, 존 타운센드 공저, 좋은씨앗 출판사)을 들 수 있습니다. 신자라고 무조건 싫고 귀찮은 상대를 용납할 것이 아니라 공과 사를 구분하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래야만 신자도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오래 유지할 수 있고 본인의 정서와 영성을 성숙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인간관계 이렇게 하면 쉬워진다”(플로렌스 리토어 저작, 줄과 추 출판)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네 가지 기질로 나눠서 각각의 관계유지 방안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두 책이 제일 좋다는 뜻이 아니라 참고할만한 자료가 시중에 얼마든지 많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성경 말씀보고 기도한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런 전문적인 책들을 많이 참조하셔야 합니다.

 

싫고 귀찮게 하는 사람에게 당장에 사용이 가능한 현실적인 방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와 일대일로만 대면하여서 나의 감정을 말로써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 상대의 잘못이나 나쁜 점을 지적하고 비평해서 앞으로 그러지 말아달라고 해선 절대 안 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지적 비평 당하면 감정부터 상합니다. 앞에서 말한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주어를 일인칭 “나”로 삼아서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네가 이렇게 저렇게 할 때에 솔직히 내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라든지, 조금 더 친절하게. “네게 그렇게 한 것이 나를 위해서 좋은 뜻으로 행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충분히 이해하지만. 막상 나는 이런저런 불편함을 느꼈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해선 일절 내 의견을 말하지 않고 내 감정만 있는 그대로 정색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럼 그는 지금껏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앞세웠다는 점을 깨닫고, 대부분의 경우는 전혀 몰랐다가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 앞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하게 됩니다. 그로 하여금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서로 역지사지를 행하는 것이고 성경적으로 따지면 주님의 황금율의 초보적인 단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8/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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