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은?

조회 수 1055 추천 수 14 2013.06.28 17:45:13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은?


[질문]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ek me with all your heart.)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이 구절을 읽다가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요즘 저의 기도가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with all my heart)” 기도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봤던 어떤 글은 마가복음 9장 24절을 인용하며 설명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은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글의 설명은, 우리가 24시간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 수 없기 때문에(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칠 수 없는 자리, 영역에서 우리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맥락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심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개념이 잡히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것일까요?

[답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쉐마’(신6:4,5의 별칭)를 신앙의 첫째 신조로 삼아 그대로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원문에선 “들으라”가 먼저 나오는데 그 히브리어가 ‘쉐마’이기에 그런 별칭이 붙은 구절입니다.

여호와를 마음뿐 아니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는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는 어법이 흔합니다. 지정의의 전인격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려면 가장 먼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쉽고도 간단하게 도출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분을 찾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이유와 목적이 과연 그러할까요? 오히려 그분에게서  넘치도록 은혜를 받으려는 의도가 앞서지 않을까요? 신령하게 표현해서 은혜이지 솔직히 말해 복을 많이 받으려고 온 힘을 다해 찾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잘못된 인식 하나만 바로 잡아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지금껏 막연히 이해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의미하는 온 마음

이 구절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보낸 서신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 서신이 말하는 전체 문맥을 살펴야만 정확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유다와 마찬가지로 바벨론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에서 금방 해방될 것이라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이 지나야만 귀환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그곳에서 전원을 만들고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낳으면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라고 권면했습니다.(5,6절)

심지어 적국인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7절)고까지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로는, 아니 어떤 세대의 누가 보더라도 쉽게 용납되지 않는 권고입니다. 그가 그렇게 상식에 반(反)한 충고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을,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뜻을, 서신에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7절)고 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바벨론에게 괜히 저항을 해야 오히려 핍박 받고 헛된 죽음만 당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벨론이 아무리 강해도 온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잠잠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11절)고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우상숭배를 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탓에 이방족속을 동원해서 징계를 하긴 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사랑하는 근본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뤄집니다. 또 약속의 기한이 차기 전에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포로 생활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더러 그 정해진 기간 동안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신만을 소망하며 평안 가운데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만이 상천하지의 유일한 하나님임을 온 천하가 알도록, 그분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왔음에도 적국을 위해 기도하면서 죄와 담을 쌓고 사는 모습을 바벨론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뜻이 명료해졌습니다. 우선 한 개인을 위한 당부가 아니고 또 거짓 선지자들이 현혹하고 있기에, 포로로 잡힌 모든 유대인들이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이 옳은지 분쟁하지 말고 이미 계시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붙들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들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그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평안과 성결은 물론, 원수인 바벨론의 미혹된 영혼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마가가 의미하는 믿음 없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3,24)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의 믿음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서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이 없다고 야단친 상대가 단순히 그 아비가 아닙니다. 주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앞뒤 문맥에서 더 세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치유 능력에 관해선 유대 전 지역에 이미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이 아이의 아비도 자식을 고치려고 찾아왔는데 마침 예수님은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부재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요청했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또 그 자리에 서기관들이 함께 있는 바람에 그 문제를 가지고 서로 변론(辯論)이 붙었습니다. 아마 가뜩이나 예수님을 싫어하던 서기관들은 제자들의 실패를 이 때다 싶어서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또 그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내보냈을 때에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고”(막6:7), 실제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막6:13) 놀랍게도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그런 이적을 베풀었습니다.(마12:27) 그러니 서기관들과 예수님 제자 사이에 누구의 능력이 더 큰지 다툼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이 축사 이적과 또 바로 앞의 변화산 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았고, 또 쫓아낸 경험도 있었고, 나아가 예수님이 그리스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예수의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제자들에게 치료를 요청할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이 축사에 실패를 했으니 예수님께 믿음 없다는 야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대에 믿음이 없다고 꾸중(막9:19)하셨기에 아이의 아버지를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 모두에게도 적용되지만 실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내용과 실제로 실천하는 모습에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의탁과 헌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마태복음강해 #176 설교의 본문이 바로 이 사건이므로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단지 능력이 큰 랍비 정도로 알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축사에 실패하자 예수님께도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전제 내지 조건을 달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니 혹시 그 스승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주님이 믿음이 없거나 적다고 야단친 이유를 둘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고도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그 능력만, 그것도 반쯤 의심하면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맥락에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것”은 “믿음 없음”의 반대가 됩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신자)의 경우는 하나님께는 당신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못 이룰 일이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 아이의 아버지(불신자)는 먼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불신자가 그 기도를 할 수 없으니 신자가 그들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대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다는 것은?

인용하신 두 구절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은 인간이라도 자신의 편견, 선입관, 고집, 어리석음, 무지함은 물론 죄의 본성과 사탄의 훼방까지 기도에 끼어드니까 엄격히 말해 전심의 간구를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전심으로 간구하는 일의 전제이자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온전한 전심의 간구가 불가능하긴 해도 그런 간구를 하도록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간구의 가장 모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일 것입니다.(마26:36-46) 이 기도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갈급함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한 사형방법 중에 가장 고통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제국도 제국에 반역하는 자에게만 이 사형을 시킨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빌라도 로마 법정에서의 공식 죄명도 유대인의 왕으로 제국을 거역한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고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당신께서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쳐놓고(마6:7) 세 번이나 같은 내용으로 기도했겠습니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그분의 절실함은 우리의 상상이었습니다.

기도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정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유대 민족에겐 그곳에서 해방만큼 갈급한 기도 제목은 없었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비는 자기 가진 것 전부, 아니 자기 생명과 바꾸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성육신 한 이후 최후이자 가장 큰 고난과 시험을 체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실함이란 다른 말로 “나는 전혀 무능 무지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제 인생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발가벗기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면 소망이 전무하므로 바로 사망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 속에 하나님의 응답이나 도움 외에 다른 대체 방안이 있다든지, 응답 받지 않아도 조금 나빠지긴 해도 사망까지는 아니라고 여긴다면 결코 갈급함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전심으로 주님을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과 능력과 목표가 아니라면 그분은 단지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는 꼴입니다.  

나아가 한두 가지 절대 절명의 문제를 두고 간구하는 것이어야 갈급함이 됩니다. 여러 요구 조건을 동시에 갖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문제의 심각성, 시급성, 중요성 등에 차별이 생깁니다. 자신의 마음과 성품과 힘도 여러 기도 제목에 분산됩니다. 거기다 만약 기도자가 스스로 그 문제들의 중요도에 순서나 점수를 정해버리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여러 문제를 갖고 기도하더라도 그 모두가 동일한 갈급함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전심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순전함        

거짓(false) 믿음이 아닌 진짜(true) 믿음이란 의미에서 순전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라면 하나님만이 우주만물과 인생만사의 유일한 절대적 통치자이시고 또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온전히 믿습니다. 그 부분에 의심하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전한(pure) 믿음이란 의심, 잡생각, 다른 대체 방안, 다른 우상을 겸해 섬기는 것 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우상만 쫓은 것이 아닙니다. 성전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키면서도 가나안 우상을 따른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세속적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내용이 그들을 제사장 백성으로 세운 하나님의 뜻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의 안일과 형통만 구하면 하나님은 응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을 못하는 모양이다 여기고 다른 신들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성부 하나님을 찾음에 있어서 혼탁함, 어지러움, 이중성, 사기성, 이해타산, 대체방안, 의심 등등이 아예 개입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서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습니다. 두 분 사이를 가르기는커녕 훼방이나 영향을 미칠 힘이나 존재라곤 이 우주에 실존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한 아들과 순전한 아버지의 일대일의 순전한 인격적 만남과 교제와 동행만 이뤄졌습니다. ‘쉐마’에서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이유가 하나님은 한분이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한 갈급함과 거의 같은 의미인 것 같고 또 갈급함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순전함을 갖게 마련인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전함은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선 생기지 않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의 거짓 교사들도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갈급함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기에 순전함을 상실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70년 후의 귀환이 너무 더디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이 메시아로서 하실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온전히 몰랐으며,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도 주님의 능력이 크다는 정도밖에 몰랐기에 치유에 실패하고 또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맞았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8)

3. 순종함

사람의 성정은 다급하면 간절히 기도하게 마련입니다. 불신자들도 천지신명은 물론 자신만이 아는 어떤 힘에 의지하려 듭니다. 심지어 징크스나 사주팔자를 믿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빕니다. 또 그 때의 마음도 문제 해결 하나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신자도 급한 일이 생기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새벽 기도에 나오며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봅니다. 그 동안에 기도를 잘 하지 않아서 집중해서 기도하기가 힘들다 뿐이지 그 문제를 갖고 부르짖는 순간만큼은 분명히 갈급함과 순전함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의심 없는 순수한 전심이 될 수 있습니다.

전심으로 간구함에 있어서 그 둘보다 더, 아니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또한 겟세마네 동산 주님의 기도에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자신이 간구한 대로가 아닌 다른 응답이 있더라도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다는 말의 동의어는 전심으로 주님께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이 찾으면 사실상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종으로 부려 먹으려는 심보밖에 안 됩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되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버립니다. 아니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성경구절 “쉐마”의 “들으라”는 뜻도 순종(obey)하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아먹는 것과 그 말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Listen! be quiet!"이라고 고함치면 조용해집니다. 그야말로 그 말을 들은 것입니다. 반면에 무슨 소리 내지 말인지 알아먹었지만(hear) 여전히 떠들고 있으면 들은 것이 아닙니다.

쉐마의 뜻은 그래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최고로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더라도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을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 의지, 정성, 열심, 치성, 봉사, 수고 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서 하나님을 찾으면 그분도 비례해서 응답 내지 복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거기에 자신이 죽도록 순종하겠다는 자세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서 최고로 높이겠다는 탐욕뿐입니다. 전심으로 찾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아니 정반대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갈급하면 그 기도는 순전해지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순종할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없으면 전심이 아닙니다. 전심이 내 마음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란 존재만 위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 삶, 인생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 간섭 인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 쪽의 상태를 종교적 영적으로 신령한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깨트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라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그분만이 좌정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소원은 전심으로 기도하되 하나님이 어떤 응답을 하든 전심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처분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시편은 구약 신자들의 기도문의 모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시편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다는 의미를 절실하게 간구하는 것(시119:2, 10, 58 한 시편에서만 세 번)과는 조금 다른 뜻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시9:1) - 전도에 전심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86:12) - 찬송에 전심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111: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38:1)- 감사에 전심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119:34),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시119:69)  - 율법 준수에 전심

전도와 감사와 찬양과 율법 준수에 전심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언뜻 주께 순종하겠다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여 하나님이 응답을 어떻게 하든 순종하는 것과는 달리,  평소 삶에서 주님 말씀대로 사는 순종입니다. 신자로서 신자답게 사는 일에 전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며 어떤 어려운 일 가운데도 평강을 잃지 않고 찬양과 감사를 주님께 돌리는 모습을 불신자가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와 고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전심으로 찾아야 하지만, 평소에 그분과 전심으로 교제 동행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닥쳐도 당장 그 고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목표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주님의 뜻을 먼저 묻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할지 그분의 처분에 온전히 맡깁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운 형편에 빠지든 반드시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과 영광이 드러남을 확신하므로 묵묵히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전심으로 주님과 동행하면 갈급하게 주님을 찾을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잘 대처할 수 있기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6/28/2013

모루두개

2024.04.10 15:48:07
*.230.44.2

아멘. 저는 고린도전서 10:23-24 이 참 큰 힘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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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목사에게 상처를 받아 너무 힘듭니다. [6] 운영자 2013-07-13 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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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구원에 관한 궁금증(3/4) - 믿기로 결단한 신자 [1] 운영자 2013-06-30 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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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구원에 관한 궁금증(2/4) - 열매가 없는 신자 [2] 운영자 2013-06-26 912
308 구원에 관한 궁금증(1/4) - 이단교회 출석교인 [9] 운영자 2013-06-19 2995
307 사탄은 언제 어떻게 생겼나요? [3] 운영자 2013-06-13 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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