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에 대한 일곱 번째 답변

조회 수 794 추천 수 28 2012.05.23 04:22:59
예수는 없다에 대한 일곱 번째 답변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의 세 단계로 나눈 것을 잘 이해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단계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부터 평생 동안 걸어 가야할 믿음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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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떤 것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첫 사랑의 의미)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면 이전처럼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생하고 난 뒤 성화의 단계에서 범하는 신자의 잘못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자기가 이미 완전히 회심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회심할 당시에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방해할 수 없다고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성화의 과정으로 넘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미 바꿔진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수시로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신자의 신분 자체는 절대 바꾸지 못하며, 신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도 결코 방해하지 못합니다. 처음 믿었을 때 그 사실을 온전히 알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신자에겐 자기중심적인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모자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 쪽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대표적 예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으로 살아가려면 현실에서 손해 보거나 억울한 일이 생길 것이 눈에 빤히 보이므로 인간적 세상적 수단에 의지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안에 따라 이전 불신자 시절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살면 세상에선 비록 궁핍하고 핍박을 당할지라도 이미 보장된 천국의 영광에는 절대로 아무 손상이 없으며 또 이 땅에서도 일용할 용식을 채워주신다는 진리를 잠시 잊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위험이나 손해가 너무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이해 못할 난관에 부딪히거나, 인간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거나, 나에게 기분 상한 일이 있어서 이런 벌을 주시는지 괜스레 의심이 생기고 심하면 불평마저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받을 수 있고, 혹시라도 신의 기분을 거슬리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방종교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인간의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이기에 신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이었는데도, 성화의 과정 중에 그 복음을 잠시 잊고 자꾸 뭔가 제대로 바치지 못해 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시킨 설교를 했고, 전승에 따르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당한 베드로조차 위에 설명한 대로 복음의 의미를 잠시 잊어버리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복음의 진리를 잠시 잊고 하나님 계명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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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완전히 믿게 되는 과정은 몰라도 믿고 난 후에 자신이 이미 예전의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차원에서 자신이 거듭났기에 예수가 온전히 믿어졌다고 자신의 지정의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이전의 죄 많고 헛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이는 칭의의 구원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은 영적 차원에서 성령이 인간의 영에 먼저 작동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의 작동인지라 그 구체적 과정은 인간이 온전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의 그런 간섭 이후에는 자신이 이미 예전의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도무지 이해 안 되던 십자가의 의미가 자신의 지정의로도 온전히 깨달아지고 주는 것 없이 싫던 예수도 믿어지고 좋아지게 됩니다.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인식했다는 말은 당연히 새로운 자기가 이전의 자기보다 훨씬 좋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필연적으로 이전의 죄 많고 헛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도덕적 죄도 하나님을 몰랐던 원죄 때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님을 제외한 채 자기 힘으로만 인생을 영위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짓이었음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온전한 목표와 향방 없이 살았던 낭비를 되풀이 하지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다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위에 말한 것처럼 세파에 시달리고, 자신의 죄의 본성이 살아 있기에 가끔(항상이  아님) 첫 사랑의 감격(십자가 진리의  깨달음과 성화하겠다는 결단 등)을 잊고 실패할 때가 생깁니다. 한 번 믿었다고 끝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즉, 이전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은 신자는 지금껏 단 한명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상기의 두 진술은 칭의와 성화라는 구원의 서로 다른 두 단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옳다고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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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사전적의미로 쓰신 것이라면 그것은 목사님의 말씀에 반하는 말씀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늘 목사님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도덕적 의식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다고 말하고 목사님은 그런 것은 필요가 전혀 없고 성경과 성령만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혹시 양심에 대한 사전적 의미 말고 다른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양심에 선한, 맑은 ,착한이란 형용사들은 양심에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양심에는 본래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해를 단단히 하셨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인 양심이 칭의의 구원을 얻는 데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아담의 타락과 함께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양심은 구원 전에는 물론 후의 성화를 이루는데도 어느 정도는 몰라도 완전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 땅에서 가장 경건한 즉, 양심이 깨끗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율법을 성실히 준행했으며 양심에 따라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성경이 어떻게 말합니까?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17-29 일부 발췌)

인간 양심이 달성할 수 있는 한계는 표면적 유대인으로 만드는 데까지입니다. 회심하여 예수를 믿기 전의 자연인 상태에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 결정 시행한 결과입니다. 성령이 간섭하기 전의 지정의만으로는 단순히 종교인이나 하나님의 기준과 무관한 사람들 사이에 칭송 받은 의인이 될 뿐입니다.

반면에 이면적 유대인은 이전 까지 사단에 묶여 있던 영혼이 성령의 중생의 씻음으로 깨끗케 된 자입니다. 모든 죄의 형벌을 예수님이 피 값으로 갚아주고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할례는 신령으로 마음(영혼)에 할지니 그 칭찬이 하나님에게서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양심은 인류 역사 이래로 시대와 문화와 민족에 따라 아주 상이(相異)합니다. 한 시대 안에서도 문화와 민족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 유교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 등에 선악은 일정치 않습니다. 한 곳에서의 선은 다른 곳에서의 악이 될 때도 많습니다. 불완전하고 무지하며 죄에 찌든 인간인지라 양심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인간 양심이 왜 불완전한지, 나아가 그것으로 성화마저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죄의 본질과 구원의 삼 단계를 다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sin)의 본질은 도덕적인 죄악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또 모든  타종교에서 죄라고 말할 때는 도덕적 죄입니다. 그것은 죄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결과 즉, 범죄(죄의 흉악한 정도와는 무관함, 犯罪, crime)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지정의적 사고와 판단도 자기중심주의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했던 때의 하나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던 순수한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고 도리어 사단이 조종하는 대로 세상을 향해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선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죄 하의 인간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력으로는 참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롬3:1-18 참조)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한 도덕적 존재입니다. 인간도 당신의 형상을 닮아 도덕적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그 도덕적 형상도 함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 모두가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끊겼습니다. 그럼에도 창조 시의 그 형상이 불완전하고 왜곡된 상태로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전적 의미의 양심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 같은 아주 기본적인 선악을 판별하고 때로는 선행도 하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기도 합니다. 아주 간혹 신(神)에 대한 인식, 말하자면 조물주는 있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만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5-10까지 여섯)인 부모 공경,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탐심의 금지에 관해 잘 지키고 있으니 예수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양심에 대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만 따져서 살인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사회의 의인으로 표면적 유대인에 속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도덕적 죄마저 아주 심오하고도 정밀하게 정의 내렸습니다. 형제를 바보라 욕하는 것도 살인이요,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십계명 자체에 예수님과 같은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탐내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기 전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살인은 이웃의 생명을 뺏은 행동, 간음은 이웃의 성적 순결을 파괴한 행동, 도적질은 이웃의 재산을 훔친 행동, 거짓 증거는 이웃의 인격을 훼손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행동 이전에 조금이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을 먹어도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인간이 지닌 양심의 또 다른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양심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당연히 사망일 수밖에 없으며 율법으로는 모든 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에게 비록 양심은 살아있어도, 자신이 그런 비참한 영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조차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죄인의 영혼에 간섭하기 전에는 제자들마저 그랬습니다. 성령으로 그들 영혼이 새롭게 되기 전까지 베드로나 제자들, 또 바울의 행태를 주목해 보십시오.    

십계명은 바로 그래서 첫 네 계명으로 하나님만 자기 심령의 중심에 모시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비참한 영적 상황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계명 안에도 성령의 복음이 충분하게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 되자,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분리됩니다. 영혼과 지정의가 일치 조화되는 대신 혼란만 생기고 양심과 행동도 제 각기 따로 놉니다. 모든 인간이 평생을 두고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실현해서, 자아를 충족하겠다고 말하지만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 내면이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고 항상 갈급하고 허망한 것입니다. 양심은 시퍼렇게 살아 있고 정말로 선행을 많이 해도 그러합니다.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좌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 중심주의가 되지 않고는, 더 정확히 말해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않고서 훼손 된 자기 양심만으로는 자아 충족은커녕 자아 발견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분리되자 이웃과도 분리됩니다. 이웃을 향한 탐심은 평생을 두고도 도무지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 탐심이 지나치거나 순간적으로 제어가 되지 않으면 범죄, 즉 윤리적 죄를 짓게 됩니다. 또 영혼이 타락한 상태의 죄인들끼리 세상에서 부딪히며 경쟁하다 보면 자연히 온갖 죄 속에 파묻히고 즐기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도덕적 죄의 원인이 인간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윤리적 선행이나 회개를 덜 해서가 아닙니다. 윤리 이전에 하나님이 계시며, 양심을 심어준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궁극적으로 도덕을 제정하신 이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온전히 선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오기에 그분을 제외한 채로는 어떤 선도 완벽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마저 필요 없다는 엄청난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양심만으로는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 의를 뽐낼 목적으로도 얼마든지 선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타락한 것입니다. 한 인격체, 그 존재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행동을 일일이 회개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영혼과 존재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성령으로 그 영혼과 존재를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회심케 해야만 합니다. 이 일에는 인간의 불완전하고 때 묻은 양심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회심할 때에 인간 쪽에서의 도덕적 회개도 당연히 동반되며 더 철저하게 이뤄집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회심이지 않습니까? 또 회심으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죄에 더 민감토록 만드십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도덕적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성령의 간섭 없이는 회심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선을 열심히 행하고 평생을 두고 진정한 참회를 많이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가 많음이 객관적으로 이를 증명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도덕적 회개가 더 철저히 일어나는 이유도 하나님이 영혼을 바꾸어 주었기에 그 지정의도 함께 바꿔지기 때문입니다. 훼손된 양심이 원상태로 복구되어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컨대 위에서 설명한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절대적 진리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믿자 마자 다 알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예수님 쪽으로 완전히 닫혀 있던 영적인 출입구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회심을 통해 죄의 본질과 그 가공할 힘을 더 구체적으로 깨달았기에 구원 후 성화의 과정에 도덕적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죄의 가공할 힘이 자꾸 흉악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악한 마음이나 습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설명 드린 맥락대로 하나님을 제거하거나 잠시 잊음으로써 자신과 인간중심적으로만 판단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만 앞세우는 너무나 끈질긴 성향입니다. 신자가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안에 거하긴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분과의 분리가 일어남으로써 자신은 물론 이웃과도 분리되어 윤리적 죄까지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를 이뤄나갈 때 자신의 도덕적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전에 성령의 인도와 간섭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바로 요한일서1:5-10에서 말하는 신자가 믿은 후에 행하는 영적 도덕적 회개인 것입니다. 성화란 그래서 자신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거룩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원죄로 훼손된 양심도 성경이 말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에 맞추어 수정 작업을 해야 합니다. 가치관, 인생관등을 바꾸는 것인데 그것들이 바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기에 질문하신 의미로 따지면 양심입니다.  

요컨대 구원의 첫 단계인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에 따라 전적으로 그분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회심 후의 성화는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경의 절대적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려 노력하는 일로서 그 궁극적 책임은 인간에게 맡겨졌습니다. 구원의 삼 단계를 죄와 연결시켜 간단히 살피면 아래와 같습니다.

칭의(Justification) - 죄의 형벌에서 자유케 됨(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예수를 모르던 인간이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분리된 철두철미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그분 앞에 항복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헌신하는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교만 즉, 죄의 본성 자체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덧입혀서 신자의 원죄는 물론 이전의 윤리적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면제시켜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화(Sanctification) - 죄의 힘에서 자유케 되는 과정(Free from the Power of Sin);
신분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분의 자녀답게 성품을 거룩하게 바꾸며,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끔 회복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며, 윤리적 죄와도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분의 일을 수행하려고. 일생 동안 계속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그전까지 불완전했던 양심을 성령의 간섭으로 절대적 의의 기준에 맞게 바꾸어 나가야 하고 또 그 바뀌고 있는 양심에 따라 거룩해지려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Glorification) - 죄의 존재 자체에서 해방되는 일(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신자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죽어서 죄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설명한 내용도 저의 개인적 사상과 철학이나 윤리관에서 도출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성경이 타락된 양심이 성령으로 새롭게 회복된다고 선언하는 내용에 주목하십시오. (이외에도 성경은 양심 앞에 선한, 악한, 착한 등의 수식어를 붙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딤전 1:5, 딤전 1:19, 딤전 3:9, 딤전 4:2, 딤후 1:3, 딛 1:15, 히 13:18, 벧전 3:16, 벧전 3:21 등 참조)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히9:9) 예수님 오시기 전의 유대인들의 성전 제사만으로는 마음의 평정함이나 양심의 깨끗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타락되어서 양심만으로 는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쉽게 말해 악하게 훼손된 양심이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이 깨끗케 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믿어지며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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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은 결국 칭의(중생, 회심) 구원과 성화 구원을 온전히 구분하지 못하거나, 각각에 대해서 서로 이해를 달리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누차 논의의 범주가 동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제 글은, 아니 더욱 중요하게는 성경을 읽을 때에 반드시 이 구분을 하면서 그 의미를 따져 봐야 합니다. 불신시절의 상황인지, 이방인의 죄상을 말하는 것인지, 회심하는 칭의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인지, 성화를 열심히 이루라는 권면 내지 계명인지를 구분하지 않으면 혼란, 오해, 착각이 생깁니다.

예컨대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의 경우 전반은 칭의를, 후반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부터 정확하게 한 후에, 때로는 한 구절이나 한 문단 안에서 둘을 다 다룰 수 있음, 성경을 가르치고 논해야할 것입니다.    

5/22/2012


의인

2012.05.23 16:01:35
*.76.111.201

아멘!

제가 좋아한는 구절 입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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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너무 위선자 같아 예배에 집중이 안 됩니다. [1] 운영자 2012-04-20 981
288 서원기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2) [2] 운영자 2012-04-11 1553
287 서원기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1) [1] 운영자 2012-04-0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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