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끼리 참 사랑은 불가능한가요?

조회 수 984 추천 수 19 2012.10.16 14:32:30
죄인끼리 참 사랑은 불가능한가요?


[질문]


“모든 사람은 선악과 이후로 나면서부터 타락했기 때문에 터럭만큼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어떤 긍정적인 기대를 해서도 안 된다. 당연히 온전히 믿음을 주어서도 안 된다. 이를 테면 견물생심이라고 멀쩡한(?) 사람도 눈에 보이면 시험에 들기 때문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같은 행동은 지양해야 한다. 이건 신자-불신자만의 관계뿐 아니라 당연히 신자-신자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주위에서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는 다른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이 아닌 100% 온전한 믿음을 갖는 관계가 신자가 가질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중에서 아예 불가능한 소망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너무 삭막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심정적으로도 자연히 피로(?)해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해가면서 상대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서로 죄인이었던 사람들끼리 무엇을 기대하느냐?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까지 말합니다. ‘바란다’는 것은 위에 계신 분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지 사람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아니라면서 말입니다. 제가 기대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신의가 없는데도 서로를 믿는 척(?) 하면서 관계를 갖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필요하다면 그 믿음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믿음 한 가지만으로는 이 땅에서 온전히 신뢰하는 관계가 불가능한가요? 믿음이 없는데 서로 사랑을 한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과 직접 연관이 없는 질문을 해서 죄송하지만 최근에 계속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답변]

어지간해선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순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일 것입니다. 성경구절과 직접 연관이 없다뿐이지 아주 성경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상기에 인용하신 다른 분들의 말씀이 성경적 원리로 따져 부분적으로는 분명 옳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선 큰 하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런 말을 하게 된 숨은 동기가 아주 잘못되어 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미 즉, 죄의 본질에 대해서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

아담이 지은 원죄는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운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 없이 멋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순차적으로 자신과도 분리되고 이웃과도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였습니다. 여러 뜻이 있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의로운 성품을 닮아 도덕적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끼리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여서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게 했습니다. 또 그럴 수 있도록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자유의지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을 기꺼이 경외하면서 인간끼리도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음을 알고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허물과 잘못은 물론 숨길 것 하나 없이 투명하게 믿고 순수하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각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순전히 사랑하고 전적으로 순종 헌신함으로써 그들 영혼에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자기 심령에서 배제하고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 하니까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오히려 죄책감이 생기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추하고 더럽게 보였습니다. 수치심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과 분리된 결과입니다.

아담으로선 죄로 인한 공포와 수치를 스스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소원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높인 교만만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여전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으나 이미 뒤틀린 인간의 심성은 그분 앞에 무릎 꿇는 일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려봤지만 수치심 자체를 완전히 없애줄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서로 벌거벗은 모습이 이제는 아주 추하게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나체가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심령은 물론 그 지정의를 왜곡시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조차 추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앞만 가린 것은 똑같이 추한 사람끼리 허물을 들추어 내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완전한 신뢰는 사라지고 서로 겉과 속이 다르게 행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도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 않는 아담과 이브를 불러내어 그 경과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잘못은 상대에게, 심지어 하나님에게 원인이 있다고까지 뻔뻔하게 굴었습니다. 사람과의 분리도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끼리 온전히 믿지 못하니까 온전한 신뢰와 참 사랑은 실종되고 현실적으로 상호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결과는?

원죄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그 원죄가 만들어낸 결과 아래 들어 있습니다. 자연인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태어나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인간이 최고이며 자기 멋대로 행하는 존재입니다. 이웃과도 “온전한 사랑”(고전 13:4-7)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과도 분리되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순전히 경외 하는 가운데서만 온전해질 수 있음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뿐이지 하나님의 성품과 닮았던 윤리적 성품의 흔적은 모든 이에게 양심(良心)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참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사회가 나름대로의 종교와 도덕률을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도덕률은 상대적, 일시적, 심지어 왜곡되어 하나님의 기준에는 죄악인 경우마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지 못하고 또 인간끼리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인간 집단을 보존,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도덕률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비록 아주 단순하여 수준이 낮기는 해도 동물의 세계에도 나름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죄가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수 없기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분이 우리 죄 값을 대신 다 감당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과된 모든 죄의 형벌이 그분의 피 값으로 완전히 벗겨지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 앞에 겸허히 엎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덧입혀서 의롭다 칭해주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줍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죄인을 당신과 화해토록 해준 것입니다.

원죄의 출발이자, 그 후의 모든 윤리적 죄들의 기원이었던 하나님과의 분리가 제거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개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져 취소되지 않는 영생을 선물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 자신의 본성이 완전히 거룩하게 바뀐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그분의 보좌 앞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유혹과 세상에 만연한 악의 시험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또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자기만 높이려는 이기적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날 책임은 신자에게 지어졌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라.”(엡4:22-24)  

이웃과의 분리를 극복하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담과 이브는 한 치의 불순물도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로는 죄가 인간에게 불변의 상수(常數)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이겨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뤄진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경외는커녕 찾지도 않던 한 죄인의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소망을 심어준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또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없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절감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회개를 한 자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너무나 귀한 존재이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온전히 깨닫고 평생 감사하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헌신과 실천이 따릅니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발견하고 회복됩니다. 자신과의 분리도 해소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나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을 아름답고 활기차며 거룩하게 가꾸려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의 나만 높이려는 탐욕적 이기적 사랑과는 다른 하나님의 겸비한 피조물이자 자녀 된 신분으로서 자기 전부를 귀하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웃과의 분리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불변의 상수가 되어서 여전히 자신의 심성에서 꿈틀거립니다. 평생토록 끈질기게 자신만 높이려는 자기중심성 즉, 죄의 본성을 이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았어도 아담과 이브가 했던 온전한 사랑을 여전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랑의 관계를 1) 아담의 타락 전, 2) 아담의 타락 후, 3) 예수 구속 후의 신자, 세 단계로 구분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인간 사이의 온전한 신뢰라는 뜻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질문자님이 지적하신 대로 서로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는 당연히 온전한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1) 타락 전의 인간은 이웃을 사랑할 소원은 물론 능력도 함께 갖추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의 아담과 이브의 예입니다. 그러나 2) 타락 후의 모든 인간은 이웃을 사랑할 소망은 계속 남아 있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능력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겨우 서로 앞부분만 가리는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먼저 신자는 사랑할 소망은 있되 스스로는 온전히 사랑할 능력이 없음은 타락 전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동료 성도와 불신자 모두에게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없어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면 그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음도 알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은 나도 불쌍하고 믿든 안 믿든 이웃 모두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너무나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필요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즉,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인간끼리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이런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스스로 사랑할 소망은 물론 능력마저 갖고 있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인간끼리 노력하면 이 땅에서 이상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미혹되었던 타락 전 상태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자기중심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황혼이혼이 그 가장 좋은 예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배우자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했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니까, 아무리 늦어도 내 맘에 드는 상대를 찾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배제하고 혼자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죽기까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고 자유의지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바람에 죄가 들어왔고, 또 죄에 찌든 인간들이 온갖 범죄를 자행함으로써 이 땅을 더럽히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지금도 불신 세상은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을 당신의 뜻에 순종시키며 인간끼리도 서로 사랑하게 함으로써 이 땅을 아름답게 회복시키려 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와 같이 사랑하는 두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끼리의 온전한 사랑을 통해서 역사를 이끄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신자가 감당해야 합니다. 아니 신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신자 스스로는 불가능해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속한 어떤 공동체라도 먼저 기꺼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그런 사랑으로 감염시켜서 공동체 안에 온전한 사랑이 누룩처럼 번져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에게 사랑할 소원은 있으나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롬7:15-23) 예수 전과 후에 그 사실은 변함 없으나, 예수 후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성령이 내주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따르지 못하는 사망의 몸을 예수만이 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도 없을 뿐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여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온전한 사랑을 연습, 훈련,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초대교회는 그랬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3-47)

하나님의 뜻이 이러한데도 상기에 인용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혼자만 잘 믿어서 혼자만 천국 가겠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이요 은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안다는 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과 권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수행할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 예입니다. 썩어지는 옛 사람을 벗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전부 죄인이니까 믿지 말고 기대도 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사랑하겠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는 것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전부 죄인이니까 더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형수 간의 사랑    

세상에서 가장 신의가 돈독한 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 부모 자식 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만의 내리 사랑 즉, 일방적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그보다는 함께 고난을 견디어 내는 자들끼리입니다. 이왕이면 죽음의 고비를 함께 나누면 정말 그들 사이에 흐르는 신의와 사랑은 결코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최고 일선에서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전우들끼리의 사랑과 신의에는 어떤 기교나 화려한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함께 있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또 단칸방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며 열심히 사는 부부가 가장 행복하고 사랑도 깊습니다. 서로가 똑 같이 힘들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 한쪽이 우월해서 자랑하거나, 다른 쪽이 열등해서 멸시할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분의 긍휼과 은총 없이는 단 하루라도 온전히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끼리는 오직 서로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또 그 사실을 절감했기에 그렇게 실천하는, 최소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나 근거가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그러니까 도리어 더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끼리는 십자가를 통해 실제로 죽음에서 살아온 사이이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사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면 생판 초면에도, 또 어떤 현실적 이유나 보상 없이도 애틋한 정이 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4)

성도 간에 사랑으로 교제하라는 권면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를 낮추는 데에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 본체임에도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죄인들의 자리에까지 내려간 주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신자더러 혹시라도 죄가 없는데 부러 죄 있는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이 죄인이니까 더더욱 그리스도의 긍휼만이 인간관계의 최우선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서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언뜻 합리적인 말 같습니다. 또 세상 처세하는 면에선 아무래도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은 열외(列外)로 세어놓은 것 같은 동기가 심령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기가 잘해주려 해도 어차피 돌아오는 반응이 별로라는 것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죄로 인해 견물생심(見物生心)을 일으키니 아예 믿고 맡기지 말라는 것도 상대를 배려해 주는 척 해도, 실은 현실적으로 자신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영악한 도모가 숨겨졌을 수 있습니다..

둘 다 어쨌든 화자(話者)의 입장에선 잘해주려 했고, 믿고 맡기려 했으니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는 선한 측이며 그 베품을 제대로 소화 못하는 상대만 악해집니다. 다 같이 죄인이라는, 아니 자기부터 가장 큰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가 자신과 똑 같은 생각과 헤아림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지도 않고 믿어주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품을 물고 상대를 비방하게 될 것입니다. 비유컨대 다 같은 사형수(신자의 신분) 사이에서마저 서로 잘났다고 순서를 매기는 꼴 아닙니까?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부인하지 말라.

누차 강조하지만 분명히 모든 이는 죄인입니다. 하루도 죄와 무관하게 의롭게 지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과 회복되었고 자신의 정체성도 주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이제는 이웃과 화목할 차례인데 현실에선 도무지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웃에 대한 시기, 질투, 탐심, 분쟁, 분노,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자신과 화목한 것으로 만족하고 치워야 합니까? 어차피 죄인끼리니까 교회 안이나 밖에서나 이웃과 깊은 신뢰, 섬김, 사랑의 관계를 맺지 말고 혼자라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면 되는 것입니까? 진심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구원은 받겠지만 아주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입니다. 구원 받은 뜻을 온전히 실천하지, 아니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신자의 체질이 여전히 진토이고 죄의 본성을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행하면 얼마든지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겠다는 것은 신자 자신과 동료 신자의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불신자라 해도 성령이 역사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변화시키거나 최소한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도 신자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는 꼴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16-18 & 22-24)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덕을 세우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더욱 힘을 내어 충성하도록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적합한 은사를 나눠줍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오직 이웃과 성도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탕에서, 또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확대되는 목적과 맥락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2:31, 13:1&13)

신자마다 어떤 종류의 은사라도 하나 이상씩은 다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은사를 사용하여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이웃을 그 사랑으로 세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니 그러지 않겠다면 어떻게 됩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주님 오실 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야단을 맞고서 있는 것마저 빼앗긴 후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길지 모릅니다. 요컨대 신자가 신자 된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 사랑의 모습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다.

인간이 죄인이라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또 서로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다는 진술은 분명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방식이 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더욱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귀하고 소중해져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부터 그 사랑 안에서 용서 받고서 그 받은 사랑으로 주변을 섬겨야 합니다. 다 같이 불쌍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서로 친밀하고 돈독해져야, 아니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형수라면 같은 사형수를 만났을 때 어찌 불쌍히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못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사형수 신분이었다는 것을 잊었거나 한 번도 그런 인식이 없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이웃을 믿지 못한다는 진술도 단지 상대에게 선을 베푼 후에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의 핑계로 삼아선 결코 안 됩니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 신뢰할만한 측면이 있어서 그러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신자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죄와 사탄이 인간 사이에 쳐놓은 불신, 시기, 미움 등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장벽을 뛰어넘는 방안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온전히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온전히 신뢰하기 위해서라도 온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물론 인간 세상에 죄가 상수가 됨으로써 사랑의 완전한 실현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 미뤄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에라도 신자가 온전한 사랑을 실천, 연습, 훈련하여 천국 입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사랑은 죄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죄를 이길 방안은 여전히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주님 안에서 새롭고도 온전히 사랑하게 되고 이웃도 그렇게 사랑해야 죄를 온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땅도 신자를 통해 조금씩이라도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꿔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상기에 길게 설명한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타락 후의 이 세상에서 온전한 신뢰와 사랑이 되려면 일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과 신뢰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를 위해선 그것을 깨달은 자가 먼저 다가가 그런 사랑으로 섬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듯이, 그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바꿔 말해 조금이라도 자기 유익과 이해타산을 앞세우면, 아니 어떤 핑계라도 대면 이미 신뢰와 사랑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말입니다. 비록 여전히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그것으로 핑계는 댈 수 없습니다. 성령이 내주해서 도와주신다는 이유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에게 실제로 실천하기 전에는 사랑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미숙하고 온전하지 못한 사랑이라도, 상대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든 못하든, 일단은 실천해야만 사랑이 됩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너무나 작은 일에서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신뢰와 사랑을 드러내면 비로소 성령이 역사하여 참되고 아름다움 모습으로 승화시켜 줄 것입니다.  

10/16/2012

사라의 웃음

2012.10.16 22:41:25
*.109.85.156

하나님을 사랑하므로써 자신을 사랑하게된 자가 신자인데, 그런데 자신을 사랑함에 있어 자기만 높이려드는 오래된 본성으로 인해 자꾸만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여기게 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짐짓 깨닫게 될 때 마다 죄책감에 무화과잎으로 가리려고만 하고, 그리곤 이런 저런 변명만 합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고요,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요.. 하면서,

정말 믿음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이 이렇게나 처절하리마치 변명과 핑계만 일삼는 죄인에게 저촉되어진 것을 자꾸만 잊고는 스스로 무화과나무잎만 둘러대는 이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의지하며, 미숙하나마 그래서 잦은 실수로 인해 참 부끄럽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지길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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