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 받았는가?

조회 수 2991 추천 수 36 2010.12.11 16:12:00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 받았는가?


[질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혼은 그들의 한 가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로 떠나갔지만(행5:1-11),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영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 특정한 죄로 인한 한순간의 심판과, 죄사함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엄연한 별개의 사안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일순간의 죄 하나로 인해 도말되지는 않는다. 물론 본문의 내용 자체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성도의 일원이었기에, 한번 이루어진 구원이 일시적인 한 사건으로 철회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접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저부터도 주일날 헌금할 때마다 손이 부끄럽습니다. 어떤 때는 얼마를 해야지 마음을 먹고선 막상 헌금봉투에 수표나 돈을 집어넣을 때는 절반은커녕 훨씬 이하로 깎는 치사한 짓(?)도 마다 않습니다. 이에 반해 이들 부부는 비록 일부만 냈다 하더라도 갖고 있는 땅을 팔았는데 하나님이 단번에 죽이시다니 너무 잔인한(?) 분 같습니다. 그것도 핍박을 무릅쓰고 갓 출범한 초대교회에 동참한 신자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구원 받았을 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기며, 위와 같이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됩니다.

성경 난제에 대한 전제

먼저 답변을 드리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과 본인만이(때로는 본인도 모를 수 있음)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를 두고 제 삼자가 구원 받았다, 받지 않았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단의 가르침은 분명 틀렸을지라도 그 중에도 예수님을 성경대로 순수하게 믿는다면 구원 받을 자가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정통 개신교회의 목사라도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으면 구원 받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 드리는 답변도 구원의 성경적 진리에 관한 이해를 돕는 차원으로만 이해해야 합니다. 미리 답을 드리자면 구원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거의 다지만 어디까지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또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들의 구원 여부와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천국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미 그런 주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정말로 거룩하고 영원한 차원에 가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당신의 신비한 경륜과 절대적 주권에 따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만 선물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측 입장에서 벗어나 구원의 의미나 구원 받은 여부를  따지면 그 자체로 이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구원 받은 자가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소 되지 않는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인간들이 취소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신자인지”여야지, “신자가 이런 짓을 했으니 구원이 취소되는지”여선 안 됩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도 초대교회 신자로서 복음을 받아들였으니까 당연히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전제하면 따로 따질 필요조차 없이 자동적으로 답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신자라는 진술에 이미 정답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보다 이부부가 초대교회 ‘교인(church members)’이었어도,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중생한 ‘신자(true believers)’인지 여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 설령 헌금을 수백만 불 속였더라도 이미 신자라면 마땅히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믿은 후에 잘못한 행위로 구원이 취소된다면 모세나 바울을 비롯해 인류 가운데 단 한명도 구원 받을 자 없습니다. 천국은 영원토록 삼위하나님만 계시고 보좌 아래는 텅텅 빈 채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부부에 관해, 아니 모든 성경 사건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됨을 먼저 고찰해야만 구원여부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경에 신학적 판단을 내리기 힘든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많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신자로 혼란한 가운데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꾸만 인간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성경을 읽기만 하면 영적인 현인이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깊이 묵상하며 때로는 세밀하게 연구해 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진리에 관한 해답을 찾기는 힘들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문제된 구절이 포함된 전체 문맥 안에 혹은 다른 성경 책 안에서 정답을 도출할 수 있는 힌트는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또 그런 힌트들을 추적 연결해서 정답을 얻고 나면 무릎을 칠 정도로 그 내용이 간단명료합니다. 진리는 복잡하거나 애매모호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어떤 성경의 난제라도 성경으로 풀면 풀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살인자들

성경을 성경으로 풀기 위해 이와 유사한 케이스를 찾아봅시다. 교회와 돈이 연결된 문제라고 해서 시몬의 경우(행8:18-24)와 비교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솔직히 헌금 속이는(?) 죄를 더 많이 범하는 우리의 경우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질문의 초점은 죄를 짓는 바람에 하나님께 큰 벌을, 그것도 죽음의 벌을 받았을 때 구원 여부를 따지는 데 있으므로 그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비교해봐야 합니다.    

우선 모세, 다윗,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다들 살인한 죄인으로 죄의 질만 보면 헌금 속인 것보다 더 중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비록 징계는 받았어도 죽음의 심판은 받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후에 시간을 두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이 불륜의 소생인 어린 아들이 죽는 벌은 내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살인 같은 큰 죄를 범했어도 이들이 구원 받았음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구원을 의심할 만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분의 일에 크게 쓰임 받았던 종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죄를 짓는 현장에서 혹은 직후에 죽음의 벌을 받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고라당의 반역 사건(민16장), 아이성 전투에서의 아간(수7장), 사자에게 물려 죽은 유다에서 온 선지자(왕상13장) 등을 보십시오. 그들이 구원 받았을 것 같습니까?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 또한 성경 기록에는 그들이 구원 받았을 만한 힌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라당, 아간, 선지자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약시대로 치면 교인이었음에도 죽음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교인이었어도 신자는 아니었다고 봐야 합니다. 신구약 시대의 구원의 방도가 행위와 은혜로 나눠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원칙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구분은 어디까지나 인간 쪽에서 이해하는 관점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자에게 당신께 진심으로 항복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구원할 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더 유사한 경우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고 직접 대면하여 복음을 들었습니다. 거기다 숫자가 얼마 안 되지만 그 공동체의 돈궤를 맡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회 재정부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배반, 밀고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죄를 지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밑져야 본전 식의 심보로 주님을 배반했을지 모릅니다. 유대관원들이 잡으러 왔을 때 스승이 진짜 그리스도라면 큰 능력으로 물리쳐서 로마 압제에서 동족을 구해줄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어차피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니까 배반이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못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방안으로 구속을 완성시켰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 양심에 못 이겨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그가 구원 받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요13:10,11) 예수님은 유다를 구원하려고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로 복음을 가까이서 자주 들었던 그도 스스로 택한 길이긴 해도 자기 죄로 죽음의 벌을 받았기에 구원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애매모호한 성경 기록으로 신자로 당혹케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비슷한 케이스를 상호 비교해 보면 일관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죄로 인해 곧바로 죽음의 벌을 받은 자가 구원 받았으리라는 힌트를 성경은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아주 명료하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원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여호와의 율법을 항상 묵상하라고 성경 자체가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어떤 큰 죄를 지었어도 천국으로 입성시킬 당신의 자녀이기에 반드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신자는 순교, 환난, 사고, 질병, 노환으로는 구원하시지만, 죄를 짓는 즉시 죽음의 심판을 내리는 방식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인간 됨됨이

“한 특정한 죄로 인한 한순간의 심판과, 죄사함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엄연한 별개의 사안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일순간의 죄 하나로 인해 도말되지는 않는다. 물론 본문의 내용 자체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성도의 일원이었기에, 한번 이루어진 구원이 일시적인 한 사건으로 철회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기 진술은 복음의 절대적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이 부부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 전제가 맞는지 따져보기로 합시다.

성경에는 문맥 뿐 아니라 본문 안에도 행간(行間)의 의미 즉, 명확한 진술이 없는 구원여부에 관해 합리적으로 추적해 개연성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가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기록입니다.    

먼저 성경 원본에는 장절이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에 바나바의 헌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자가 바나바는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한 반면에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고 대조하려는 의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기 질투심으로 자기들도 교회 안에서 이름 한 번 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요셉을 두고 권위자(바나바)라고 칭찬해준 것을(4:36) 듣고서 땅을 팔았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값에서 얼마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5:2)고 합니다. 아내와 공모했습니다. 부부가 한 통속 즉, 같은 인격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말렸어야 합니다.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느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4절)한 것이었습니다.

남편 아나니아가 먼저 죽고 아내 삽비라도 이어서 죽음의 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히 그녀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8절)라고 물었는데도 시침 떼고 그렇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거짓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회개할 기회를 받았음에도 전혀 뉘우칠 기색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물었기에 어느 땅을 얼마에 팔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최소한 시세가 얼마쯤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감히 속이려 들지 말라고 미리 힌트를 준 셈입니다. 어쩌면 교인들의 칭찬을 받을 욕심에 땅 팔기 전부터 어느 땅을 팔아 그 전부를 헌금하겠다고 부부가 미리 떠벌리고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회개할 기회가 수차 있었음도 가룟 유다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까?  

더 결정적인 힌트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남편 아나니아에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4절)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나니아가 자기 땅인데도 팔아서 헌금하는 일에 자기 임의로 하지 않고 다른 입김이 작용되었다는 것이 전제된 말입니다. 앞선 구절에서 아내도 알더라는 기록과 또 삽비라더러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는 말을 보더라도 이 범죄에 아내가 더 앞장섰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요즘의 장로나 목사가 회의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사모의 말에 넘어가 번복하는 죄와 같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와 유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초 부부의 경우도 분명 아내가 선도하고 남편이 맞장구 쳤으며 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직접 지어 입혔습니다. 회개할 기회도 주었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셨다고 믿을만한 명시적 기록입니다. 그것도 원죄를 범하여 모든 인류를 당신의 죽음의 형벌 아래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확정적 표현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추측할만한 힌트를 반드시 성경에 포함시켜 놓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오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잘못된 구원관

그리고 질문하신 내용 중에 구원관에 결정적인 하자가 하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혼은 그들의 한 가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로 떠나갔지만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혼은 심판 받고 영은 구원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한 인간을 두고 일부분씩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을 하신 분의 진짜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고, 부주의로 우리 말 표현을 세밀하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혹은 영혼육의 삼분법으로 묘사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특성이나 신앙 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의 전인적 인격체로만 다루십니다. 플라톤 식의 영과 육이 분리된 인간을 절대 논하지 않습니다. 비록 신자가 죽어서 육신은 이 땅에 남기고 그 영(육체와 반대되는 내면이라는 뜻)만 천국으로 가지만, 마지막 때에는 완전한 육체의 부활이 있습니다.

육신의 부활은 기독교 구원만의 특징입니다. 바꿔 말해 죽어서 육신이 이 땅에 남는 것은 물질이 영계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이 땅에서 그 육신이 썩는 것도 단지 물질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 전에 신자의 육신 죽음도 원죄의 저주로 인한 결과이지만,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의미는 없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혼은 지정의를 의미하는 정신이고, 영은 하나님과 무의식중에 교통할 수 있는 영이라고 분류하여 죄를 범한 혼은 심판 받고 영만 천국에 간다는 주장을 하면 아주 이단적 발상이 됩니다. 우선 천국에서도 신자의 지정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해야만, 당연히 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며 그분과 세세토록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또 죄지은 혼만 심판 받으면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윤리적 구원관이 됩니다. 나아가 그런 원리의 일관성이 유지되려면 불신자의 경우도 동일하게 혼만 심판 하고 영은 구원해 주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일부는 나쁘고 일부는 좋기에 구원과 심판도, 혹은 죄의 구분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전부 반성경적입니다.

한 인간 전부가 구원 혹은 심판받는다면 필연적으로 그 부차적인 진리도 도출됩니다. 즉 하나님이 육체만 따로 떼어서 심판을 하지 않는다면, 역으로 따져 특정 죄에 상응해 곧바로  육체가 죽는 심판을 받았다면 사실상 그 사람 전부가 즉, 영도 심판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예에서 보듯이 즉사하는 심판을 받은 자는 구원을 못 받은 반면, 아무리 살인죄를 지었어도 회개의 기회를 얻어 돌아온 자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아니 이미 구원한 자라서 회개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앞에서 신자는 순교, 환난, 사고, 질병, 노환으로만 죽지 심판의 죽음은 없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기록을 보십시오. 심판 받아 죽은 자는 물론 자살한 자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 기록의 목적

성경의 모든 구절은 그 기록된 특유의 목적이 있으며 또 그 목적을 완벽하고도 명료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 목적은 물론 후대 독자더러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특별히 인간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뜻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나온다면 과연 본문이 기록된 목적에 맞는지 역으로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 사건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도 그 육신(내지 혼)은 심판 받아 죽어도 영은 구원 받아 천국으로 갔다는 것을 후대 독자더러 깨달으라는 뜻이겠습니까? 나아가 초대교회에 소속된 교인이라면 일단은 다 구원 받았다고 봐야 합니까?

아니면 특정한 죄로 인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육신이 죽는 심판을 받으면 그 인간 전체가 심판 받은 것으로 이해시킬 목적이겠습니까? 또 초대교회에 소속된 교인이라도 전부 다 구원 받았다고 가정해선 안 되는 것이 합리적이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아주 강력하게 역사했고 또 기독교를 하루 속히 견고히 세울 필요가 있었다는 초대교회의 특수성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 전체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지 시몬의 경우를 보더라도 교인 전부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교회에 적극 참여했다가 핍박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난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가라지와 알곡을 심판 때까지 함께 두라고 했으며, 또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씨 뿌리는 비유를 가르쳤겠습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 중에도 오늘날과 같이 중생하지 않은 즉, 구원 받지 않은 신자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처음부터 구원 받지 않는 자로 봐야 함이 더 타당합니다. 그 근거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살펴본 대로 그들에게도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바로 즉사하는 심판을 내릴 줄은 꿈도 꾸지 못하고 끝까지 버티면 넘어가게 되리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금액을 속이지 않았음을 우기고, 그 결과 땅 팔아 그만큼이라도 헌금한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이냐는 칭찬을 교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괜히 속였다는 것을 실토하느니 끝까지 오리발 내면 다 잘 해결될 줄 믿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치만 본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들과 똑 같은 잘못을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켜서 하나님 앞에서 실토하라고 하면 한두 번은 망설이겠지만 결국은 자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성경이 왜 구약의 아간의 범죄나. 신약의 유다의 배반 사건을 회개하는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는 동일한 형식으로 기록했겠습니까? 그 기록의 목적은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보았기에 구원 받지 못했다는 원리를 후대 독자로 깨닫게 하려는 뜻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차이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느냐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과연 그 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비록 경건의 실천이 더디고 여전히 죄도 짓지만 죄 지을 때마다 두렵고 부끄러워지기에 회개하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려는 소망과 열심이 생깁니다. 구원 여부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젠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스로는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시기에 그런 자가 어떤 죄를 지어도 반드시 회개의 기회를 주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음의 심판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입니다.(최근에는 이마저 부인하는 교단과 목회자들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진리를 성경이 증명하는 예로서 모세, 다윗, 바울, 베드로, 같은 자들로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구태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똑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아간의 범죄와 비교하라는 뜻 아닙니까?

이 사건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로 결론지어집니다. 이 부부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라면 이런 기록이 결론으로 첨부되어선 안 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했고, 또 진정한 신자로만 교회를 거룩하게 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셨고, 나아가 후대 독자들로 교회의 귀중함과 거듭난 신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치려는 것이 그 기록 목적이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당시 이 사건을 보고 들은 불신자들과 교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은 기독교 하나님의 참 하나님다우심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또 이미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하며 그 믿음이 더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은, 신자는 결코 남의 구원여부를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되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보다 본인부터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십자가 구원 진리를 깊이 깨닫고 항상 그분 앞에, 특별히 너무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할 것입니다.

12/11/2010  

기쁨의 날들

2010.12.12 09:07:41
*.176.226.233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하신분- 다윗의 목숨값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목숨값이 다르게 매겨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주님은 각사람에게 최선의 결정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되고 제 생각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선우

2010.12.12 15:01:33
*.202.153.41

이번에도 우매한 제 질문에 현답으로 맺어주셨군요..^^
100% 만족과 동의.. 그래서 코드 일치, 감사합니다!

Sarah

2010.12.12 15:57:53
*.81.24.118

저도 최근에 이 비슷한 설교를 듣고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었는데,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0^

Steve

2010.12.18 10:24:45
*.169.221.248

얼마전 선악과는 신자가 먹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 수 있다는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 ...) 내용을 읽고는 조금 놀랐습니다. 복음이 너무 이상하게 해석되어 전파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 제가 배운 "선"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죽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해서도 제가 배운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선”이라고 하면 의심없이 인간의 관점에서 옳고 좋은 것으로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말과 내용이 성경에서 발견될 때 가끔 혼란이 생기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Frame of Reference (기준 틀: 사실, 믿음, 원칙, 관습, 또는 형성될 수 있는 견해, 또는 결성되어 있는 결정들의 근거들) 에 맞추어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디.
바로 이 점 때문에 성경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은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은사를 받은 목사-교사님들) 를 받은 분들에게 정확하게 배워야 오해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막중한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긍정적인 바램을 (POSITIVE DESIRE) 을 가지고 있는 신자 혹은 예비 신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반드시 보내십니다. 초대 교회 시대 때,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얼마나 많은 능력 받은 신자들이 이방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러 나갔습니까? 이 세상 끝 어딘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선을 생각할 때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선과 하나님의 선 그리고 도덕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게됨으로 혼돈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선 (Human Good)

인간의 선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가 동일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은 불신자들이 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을 행함으로 인류 사회에 많은 유익함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인류 사회의 기능과 존속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인간의 선은 신자와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공히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의 근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사회적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회적 체제의 법칙) 인류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모든 인류의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 (Privacy)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 결혼, 가정, 국가가 바로 그 제도들입니다. Altruism (애타심) , Benevolence (자비심), Charity (자선), Humanity (인간애) 등이 대표적인 인간의 선입니다.
인간의 선은 또한 결혼과 가정의 안정에 근간이 되며 그리고 책임의 인식과 양육의 근간입니다. 가정과 결혼이 파괴되면 사회가 파괴됩니다. 국가와 자유의 보존은 인간의 선이 행하는 부분입니다. 인류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선이 실행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선과 책임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들에게 이 사회와 우리 주변의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인간의 선보다 훨씬 더 위해한 선 (하나님의 선) 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은 아무리 많은 기부를 자선 단체에 하고 나라를 구하는 선한 업적을 이룬다 해도 불신자들에게는 접근 불가입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으며 유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선을 우리 신자들이 소유할 수 있으며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인식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 (Divine Good):
하나님의 선이란 하나님의 은혜라는 수단으로써 생성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만을 공로로 여기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로 사람의 행위나 영광에 촛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인간의 선이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은 언제나 성령충만의 능력으로 달성되는 행위입니다. 같은 선이라할지라도 하나는 인간의 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영적인 삶이 그 동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동기가 생길 수 없습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삶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선을 행할 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려는 신자의 혼 속에 있는 자극제는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 예수 그리스도의 동기와 동일함을 반영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에 대한 완벽한 본보기입니다.
이와 같은 선은 일반적 (개별적이 아닌, 모든 인류에 대한 우주적 사랑) 미덕의 사랑의 기능입니다. 이는 바로 신자들의 전유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만을 공로로 여기십니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하에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충만의 능력으로 주님의 삶과 죽으심을 이루셨던 것과 같이 신자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함으로 박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을 이룬 그 결과는 하늘에서 보상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도덕성 (Morality)
도덕성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고 유익합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을 제어하는 유일한 인간의 체제입니다. 도덕성이 없으면 인류는 무질서, 사악함, 포악한 행위로 타락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다소 지방 출신 사울의 도덕성은 대단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살인 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극악 무도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회교 테러 단체들의 도덕성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도덕성은 하나님의 체제확립의 법칙이며 (신자 불신자에게 공히 적용되는) 인류의 자유와 공동체의 기능을 보호합니다. 도덕성이 결여되면 자기 중심적이되며 사회공동체는 없어지고 무정부주의가 됩니다. 이 부분에서도 도덕성은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도덕성은 전 인류의 존속을 위한 것입니다.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성은 인간의 선입니다. 불신자들도 도덕적일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문명과 인간의 선의 튼튼한 기초입니다.
도덕성은 인류를 위하여 구원과 영성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혼돈이 끼어 들게 됩니다. 도덕성은 신자가 아니라도 , 성령충만 없이도 성취될 수 있습니다. 도덕성은 성령 충만이나 영적인 삶에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력의 문제이며 사람의 혼 속에 있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도덕성은 악과 죄의본성을 통제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highest kudos: 지고의 영광) 기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인식함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시험하는 도구라는 것을 다 잘 알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천상의 전쟁의(Angelic Conflict)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천상에는 루시퍼를 좇아서 타락한 천사들이 있었음을 창세기 3장과 이사야서 14:12-15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4:12-15의 사건은 인류 창조 이전에 이미 일어났던 일일 것입니다. 그 타락한 천사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를 공략하는 장면이 바로 창세기 3장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무산시켜야 사탄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교만한 사탄은 그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받게되었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사탄의 간교함이나 계락이나 능력은 우리가 창세기 3장, 욥기서 1장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능력을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천상의 천사 1/3이 그를 따랐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교만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벌의 심판을 (불 연못에 던져지는) 받았을 때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그대로 순순히 순복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을 이미 받았던 사탄이 욥기서에, 창세기에 자유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탄은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을 때 하나님께 무언가를 하소연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없으면 아직 활약하고 있는 사탄의 심판이 왜 집행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어렵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미국의 Bob Thieme목사님의 가르침을 소개할까 합니다.
루시퍼가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즉시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을 정확히 잘 알고 있는 그가 하나님께 Appeal (하늘 나라의 대법정에 항소)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의 창조물을 그 지옥 불못에 던져 넣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런 분이 사랑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그 appeal을 하나님께서 수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이곳 저곳에 등장하고 지금도 마귀가 역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항소가 하늘나라의 대법정에서 옳게 판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획 (인류의 구원 계획)을 철저히 분쇄하는 것 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한마디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구세주로 오시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는 사탄과 하나님과의 전쟁사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아담의 창조 이후 인간의 혈통을 이어 받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무산시키고자하는 사탄의 계략이 세세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정책으로 타락한 인류를 대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사탄의 정책은 “종교와 선악”입니다. 종교는 선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그 선을 이루어 나가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경계해야할 부분입니다. 도덕과 선은 인류에게 구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올바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고도 옳다고 여기는 선 (인간의 선)과 도덕성, 양심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종교에 현혹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예언하신대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루셨습니다. (IT IS FINISHED: 요한복음 19:30). 사탄의 계획은 이미 무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적 승리가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모든 인류가 선과 종교에 안착한채 멸망하도록 세상을 혼탁하게 하며,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을 오염시키고 “종교”와 “선”을 도구로하여 인간의 눈을 가리려고 합니다. 그리함으로 모든 인류가 복음에서 떨어져 나갈 때에 비로소 자신의 항소가 하늘 나라 대법정에서 무죄로 선고되고 자신의 교만한 생각대로 뭇별 위에 자신의 자리를 잡게될 것이라는 허망한 바램으로 모든 인류를 타락시키는 대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날로 악해지고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먹어야한다 라는 것은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에 대해서 그 두 사람이 천국에 갔는지의 여부는 하나님과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인간의 선이었지 하나님의 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의 선행 즉 하나님의 선과 상관이 없는 선을, 그것도 동기가 요셉이라 하는 바나바의 칭송이 부러워 시기심에 의한 우매한 행위로 인해). 성령 하나님을 속임으로써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떤 인물입니까? 살인자이며 인간 도살자이었지 않습니까? 그 또한 인간의 선과 종교와 도덕성에 근거하여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죄의 무게로 볼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보다 더 중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볼 수 있는 영광,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개인 교습까지 받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늘 나라에 가서 이런 이유들을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 정확히 알수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오로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신자 개개인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 개개인의 죽음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모든 신자들은 구원 받아 하늘 나라의 법정에서 사탄 앞에 서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당당히 증거할 증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 처럼 사탄의 계략에 속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공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림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0:28-30)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하나님께 범한 죄는 징계를 받는데 어떤 이는 약하게 되고 (심신의 상태가 활달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고 좋지 않은 상태) 또 어떤 이는 병들고 (여기서 병이들다란 말은 상태가 위중한 것을 말함) 또 어떤 이는 잠자는 징계 (죽음이라는 징계) 를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가 구원을 상실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징계는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징계는 (징계를 받을 때 곧 바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궤도로 다시 들어 올 때에) 바로 축복의 전령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말씀 역시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자이며 그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린도전서 11:29-31)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요한일서 5:16-17)
형제가 (즉 구원 받은 신자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라는 말씀에서 구원 받은 신자도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의 죽음에 대해 그 신자가 천당에 갔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으며 그런 시도 초자 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하나님의 판단력이 혹시 모자랄까봐서, 실수하실까 봐서) 우리의 제한되고 미련한 생각으로 대신하는 꼴이 됩니다.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신자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천국으로 대려가실 때에 그 장소와 시기와 방법을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미 창세 전에 다 계획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이 땅에서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자 각자에게 세우신 그 계획을 신자가 이룰 때까지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며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하루 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우리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운영자

2010.12.19 17:57:47
*.104.233.212

Steve 형제님

매번 귀한 의견을 소상하게 나눠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길고도 중요한 내용은 가능하면 자유게시판에 단독 글로 올리는 것이
더 자세히 읽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으실 텐데
댓글로만 다니까 아무래도 보는 이가 조금 한정될 것 같습니다.

즉 이미 글을 읽은 자들은 다시 안 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댓글 보는 재미로 더 들어올 수도 있고
게시판 글은 제목이 마음에 안 들면 안 볼 수도 있으니
어차피 일장일단은 있겠군요.

Steve 님도 그간의 댓글에서 그런 뜻을 언뜻 비취셨습니다만
저와 이해를 달리하는 부분들이 아주 조금씩 있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는 그 차이가 확연해서
저의 의견을 참고로 밝혀두고자 합니다.

요한일서5:16,17를 인용하면서
“구원 받은 신자도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다는 말씀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잘 살피면 여기서 사망은 육체적 사망이 아니고
바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사망에 이르는 죄의 해석에도 여러 학설이 있지만
주로 “예수를 부인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를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치 못하고 남아 있는 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16절을 아래처럼 해석합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일반적 윤리적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인간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중보 기도하라는 뜻임)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이미 구원 받았지만 일반적 죄를 지은 신자)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하나님이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구원 받지 못하는) 죄가(예수를 부인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물론 구원을 위해 기도는 해야겠지만
그 구하는 것과 상관없이 구원여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라는 뜻)”

샬롬!

운영자

2010.12.20 16:11:24
*.104.233.212

Steve 님
한 번 구원 받은 신자의 경우 절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할 질문은 항상 신자의 구원이 취소되느냐 보다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신자인지 여부여야 합니다.
이 점들은 제 글의 서두에서도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제 글의 요지도
헌금 속인 그 하나의 행위 때문에 구원 취소되고 심판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에
구원 받지 않은, 중생하지 않은 단지 교회 멤버로 보는 관점에서 기술한 것입니다.

Steve 님과 의견이 확연히 다른 것은 요한일서 5:16의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또 이에 대해선 여러 학설이 있다고 미리 전제했습니다.
댓글을 삭제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어떤 오해도 없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귀한 의견들 계속 올려주시어
본질이 아닌 부분적인 것에선 서로 함께 배우며 교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Steve

2010.12.21 03:39:05
*.169.221.248

목사님 제가 드린 글은 다른 의도와 오해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단지 염려하는 것은 제가 올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보가 다른 신자들의 믿음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 점을 염려했고 목사님께 처음부터 약속드렸습니다. 언제나 OUT 하라고 하시면 그리 따르겠다고....왜냐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들, 주님께서 피값으로 구하신 귀한 자녀들을 어느 누구도 잘못된 길로나 혼미한 길로 인도하거나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고 배웠고 그리 실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사이트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 까지 이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도 그릭어의 문법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 말씀에 접근하여 (한번의 동작으로 그 결과는 영원한 것) 전파하면 (가르치면) 하나님의 양들을 잘 못 인도하는 목자가 없을 터인데.... (이것이 신약이 그릭어로 기록된 이유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히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종들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연구하여 정확히 가르치기를 우리 모두는 부단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인지라 때로는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이 부분도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실수를 허용하시는지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말입니다)

제가 부족하여 실수가 더러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지체없이 목사님께서 지적해주시고 깨달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자 각각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의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사님의 양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Steve

2010.12.23 02:43:09
*.169.221.248

목사님 저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받은 종들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연구하여 정확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의 거룩하신 보혈로 구원 하신 자녀들) 말씀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혼돈없이 하나님의 뜻을 잘 배워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목사-교사님들의 말씀을 들으면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또 어떤 날은 그 구원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구원과 성화의 삶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보면 구원에는 아무런 전제 조건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을 허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통회 자복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구원의 조건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간혹 듣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인 말씀을 가미하여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은 우리의 됨됨이나, 어떠함이나 노력이나 그 이외 어떤 무엇으로 구원을 얻거나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 중생 즉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의가 그 순간 우리에게 전가되어 그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신자를 이미 의롭다고 선포하셨는데 또 다른 무엇이 구원에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믿음이 신통치 않으니 내가 네게 준 그 구원 도로 돌려 받아야 겠다고 하실까요?
구원과 성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면 구원의 확신 위에 서서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더욱 뜨거워 지지 않을까요? 신자들이 그렇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목사-교사님의 직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이 점 때문에 제가 아직도 두려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복음을 들은 자는 고린도전서 2:16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개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12:2)
인간의 자녀도 한번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그 관계는 언제나 지속되는데 (어느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 관계는 결코 ㄲㅜㄶ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습니까?)

구원 받은 신자는 이제 성화의 단계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성령의 열매를 크리스챤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렁 주렁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신자가 아니 오히려 믿지 않는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징계가 필요하면 징계를 가하셔서 하나님의 궤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박목사님께서 한 말씀 한 말씀 정확히 가능한 많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기르치고자 하나님 앞에 최선의 노력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러 다른 교훈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적 성장에 혼란을 일으키거나 방해 받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처음부터 제가 목사님게 먼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관련된 몇 가지 말씀을 목사님 사이트에 올리려고 하니 도형이 있어서 인지 올릴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소를 본의 아니게 첨부하였습니다.

목사님의 견해와 확연히 틀린다면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답글을 읽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혼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target=_blank> target=_blank>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46770&menuId=344776&listType=2&from=null&to=null&curPage=2&logId=452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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