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딴 하나님은 안 믿는다고 합니다.

조회 수 1927 추천 수 90 2009.06.29 19:57:56
그딴 하나님은 안 믿는다고 합니다.


[질문]


어느 날은 할머니께 전도를 하는데 그 할머니가 "나는 그딴 하나님 안 믿어"라고 중얼거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라고 물어봤더니. 내용은 이겁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모든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갔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그딴 하나님 안 믿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예정에 관한 문제인거 같은 데요~
1.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정된 사람만을 사랑하신다는 건가요? 그리고
2.하나님의 예정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건가요?

[답변]

질문하신 주제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관심을 워낙 많이 가지는데 비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그만큼 당혹해 하는 내용입니다. 저희 사이트에서도 이미 비슷한 내용들을 가장 자주 다뤘습니다. 별첨 리스트가 그 글들인데 참조하시면 원론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 핵심만 다시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답변에 대하겠습니다.    

구원의 두 가지 견해

한 죄인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를 다루자면 신학적으로 끝이 없습니다. 지난 2천년의 신학역사가 사실은 이 주제와 그 언저리를 논한 것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로 대표되는 두 흐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앞서면 예정에 의한 제한적 구원이 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추면 보편적 구원이 되면서 한 번 얻은 구원의 취소도 가능합니다. 구원론이 이런 둘로  나뉘게 되는 시발점은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상태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다, 영적 상태 또한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도무지 깨끗케 할 수 없다고 보는 경우입니다. 쉽게 말해 모두가 0점인데다 나아질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모든 인간이 아주 흉포하다거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으로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부다 심판하여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인간을 애당초 창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전부 다 구원하여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인간을 죄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하나님과 방불한 성자나 로봇처럼 만들었어야 합니다.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간섭하여 그중 일부만 살리고 일부는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모두가 빵점이기에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으로 예정 선택하여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제한 된 자에게 베푼다는 구원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 받을 길을 모두에게 열어 놓았다고 보는 또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그 길을 택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만 제한해서 구원해 주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인간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도 있으며, 또 일단 스스로 믿은 구원인지라 나중에 스스로 배역해서 이미 얻은 구원을 버릴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이 견해는 세부적인 입장에선 다양하게 나눠지지만 하나님의 제한된 예정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의 폭넓은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들지 못하는 자들을 지옥에 가도록 방치하는 하나님이라면 너무나 독단적이며 무자비한 분이 되므로 그럴 수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부 자유주의 기독교를 포함해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관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능력이 있을 만큼 선하다고 봅니다. 스스로 착해져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하나님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인간과 어떤 개인적, 인격적 관계도 없다가 단지 천국과 지옥을 지키는 문지기로서 시험 점수를 매기는 채점자에 불과해집니다.)

둘 중 하나는 옳다.

분명히 똑 같은 복음을 동일한 여건의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전해도 순순히 받아들여 믿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두고 한 쪽은 예정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다른 쪽은 자유의지에 인한 인간의 선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각각을 뒷받침 하는 듯 한 설명들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실제 현상과 성경의 설명이 일치한다고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에 논란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논란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양쪽이 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까? 어느 쪽 손을 들어주어야 합니까? 그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신학적 이론으로 따지려 들면 한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는 신자에게 있어선 논란을 외부에서 지켜보는 제삼자의 입장이 결코 아닙니다. 각 이론의 장단점이나 논리적 타당성을 따져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주관적인 구원 체험을 이미 겪은 자입니다. 그럼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그 입장을 정리하면 됩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을 능력은 둘째 치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선택해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믿는 자는 그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복음을 전해 듣고 납득이 되어서 스스로 믿기로 결단했고 말씀을 배워갈수록 주님의 은혜가 크고 귀하다고 여기면 그 또한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두 견해가 다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설명한 것이므로 세부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당연히 하나가 옳으면 다른 것은 틀리게 됩니다. 아무리 구원이 각 개인별로 주관적 체험으로 이해된다고 해도 진정으로 거듭난 자 모두에게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그 이전에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과정과 내용과 의미들을  분명하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하나님과 그 본인 사이의 은밀하게 일어나는 구원이라도 그분만의 진리는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한 죄인이 처음 예수를 믿기로 결단 헌신하는 외형적 모습은 두 견해중 어디를 따르든 동일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과 주권적 간섭이라고 해도 인간 의지로 그 은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신앙 내용은 처음에 따른 견해에 따라, 사실은 자기가 믿었던 체험에 따라 좌우됩니다. 출발이 종말을 결정지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의 경우는 몽땅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입장에서 자기 쪽의 원인과 조건이라곤 전혀 없었음에도 건짐을 받았으니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평생을 두고 생명의 은인을 위해 살게 됩니다. 다시 물에 빠트림을 당할 염려도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십자가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자신이 수긍하여 믿은 경우는 하시라도 그 믿음이 약해지거나 그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면 다시 안 믿거나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겨 그분께 쓰임 받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계속 잘 유지하여 구원의 효력을 유지하는 데에 초점을 더 쏟게 됩니다.  

어느 견해가 옳은가?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 체험에 따라 한 쪽 견해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각자가 믿은 바대로 생각하고 치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는 구원의 문제를, 그것도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쳐 두고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말입니다. 과연 성경이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따로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학적 논란으론 끝이 없기에 조금 다르게 접근해 봅시다. 논리적으로 두 의견이 상충할 때에 판단하는 방식으로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한 구절씩 따로 떼어서 보면 성경은 분명히 두 견해를 다 지지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아 한 쪽은 다른 쪽의 이론까지 수용 내지 설명이 가능한 반면에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 가능한 쪽이 옳은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 모순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믿으려는 스스로의 판단과 결단까지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간섭한 결과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해서 인간이 믿기 싫거나 거부하는데 인간은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강제로 믿게 만든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개인의 자의적 판단과 행동은 그대로 두고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뤄나갑니다. 예정에 의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여전히 각자의 결단과 책임에 속한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할 줄 알고 제자로 택했다고 본인이 아닌 예수님께 책임이 돌아갈 수는 결코 없듯이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 이론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을 부인하는 바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결단해야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진술만으로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이 그를 먼저 선택해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풀었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믿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고만 말하면 예정은 부인됩니다.

말하자면 예정은 자유의지를 수용하지만 자유의지는 예정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어느 쪽 의견이 더 포괄적이냐를 따지자는 뜻이 아닙니다. 더 쉽게 설명해 성경이 1에서 10까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부인하느냐 전부를 말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예정(십자가의 객관적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 구원의 예정까지)과 인간의 믿음의 결단 둘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은혜에 대한 결과적 반응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열 가지를 다 포용하지만, 절대적 예정은 없고 믿음만으로 은혜가 올 수 있다는 것은 그중 일부, 그것도 너무나 중요한 진술을 부인하는 셈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측은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는 자를 유기하는 독단적이고 무자비한 분일 수는 없다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도리어 분명히 그렇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7-16)

구원 얻으려는 소망이 있다고 또 그렇게 노력한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은 부인하고 스스로 믿기로 결단하는 일도 구원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또 일방적으로 택하시는 하나님께 불의는 전혀 없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데 그중에 일부를 버린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일부라도 구원해 주신 것을 그분의 긍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아가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감히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니리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19-21)

선물 받는 자의 입장

예정에 의한 제한적 구원이란 비유컨대,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를 도울 목적으로, 하나님이 일방적적으로 한 죄인을 선택하여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가 아닌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선택은 인간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분만의 절대적이며, 신비로우며, 완전하며, 공의로운 뜻이 포함되어 있기에 인간이 이미 이해하는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안으로는 결코 완벽한 비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쟀든 선물이란 오직 주는 자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누구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줄 지, 심지어 그 내용과 포장까지 주는 자가 정합니다. 그래도 선물을 받는 자는 받기는 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당연히 믿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선물을 받는 자가 그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선물을 받는 일에 기여한 사항은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선물을 주면서 거부할 자를 골라 주실 리는 없습니다.  

반면에 예정이 부인 된 채 자유의지에만 의한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 꾸러미를 잔뜩 만들어 도피처를 쌓아놓고 대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올지 미리 알고는 있을지언정 그 사람에게 아무 조치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 그 선물이 얼마나 좋은지 납득했다는 사실을 고한 다음에 하나씩 얻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이해하고 찾아간 사실 자체가 자칫 인간의 공적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가 스스로 믿겠다고 작정하거나 또 그렇게 믿었다고 여겨도 성령이 간섭하여 십자가 복음 안에서 중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예컨대 단지 기독교를 알아볼 작정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성령이 간섭하면 구원이 일어납니다. 또 여전히 본인은 자기 의지로 스스로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은혜가 분명 선행된 것입니다.

한 죄인에게 성령이 선행적 은혜로 임하면 가장 먼저 자신의 너무나도 더럽고 추한 영적 실체를 제대로 발견하여 주님의 보혈로 깨끗케 되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또 앞으로 남은 일생을 오직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그런 중생으로 인도하여 믿음을 갖게 된 과정 전부가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간섭한 결과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다른 말로 중생하여 구원 안에 들어온 자는 예정이 하나님의 공의가 굽은 독단이 아니라 정말로 자기를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신 절대적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정은 자유의지를 수용하지만, 자유의지는 예정을 부인합니다. 성경은 둘 다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부인한다면 부인하는 쪽에 과오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뜻은?

그럼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은 자는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신자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간혹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했으니 예정에 든 사람만 사랑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유컨대, 이 또한 상기 선물과 동일한 맥락에서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비뚤어져서 인생을 완전히 망치거나 심지어 부모를 원망 저주하며 자살하는 자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그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결실을 못 맺은 것뿐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은 반면에 믿지 않은 자는 그분의 동일한 사랑 가운데 있었지만 그 사랑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오해하여 열매 맺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시 예정한 사람만 편애 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인류 전체에 대한 뜻은 오직 안타까움과 불쌍함 뿐이지만 예정에 의한 방식으로 구원을 주기로 당신께서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이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 두 말씀이 단지 신자들로 핍박을 끝까지 견디어 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가 다시 구원 얻을 만한 회개를 할 수도 없으며, 벧전3:7에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이라고 해서 분명 불신자도 대상으로 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3:8에는 그들까지 포함해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선택하여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선물이라는 측면을 너무 강조하면 마치 선물 받을만하니까 받았다고 오해할 소지가 생깁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완전한 비유가 되지 못합니다. 예컨대 생일, 입학, 취직, 승진 등등 받는 자 쪽에 어떤 면이든 선한 부분이 있었기에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구원은 선물은 선물이되 특이한 선물입니다. 사형수로 확정되어 그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사면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면의 선물을 거절할 사형수가 있겠습니까? 또 그 사면에 공의가 부족하며 왜 나만 사면해주느냐는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까? 절대 없는 법입니다. 예정에 의한 구원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으로 자기에게 아무 자격과 조건과 공로가 없었음에도 사면되었음을 실감하는 자만이 제대로 이해하고 실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어떤 이가 믿고 어떤 이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알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을 나누어 예정한 것은 아니라고 일부에선 말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설명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씨를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롬9:11)에 의해 정했다고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엡1:4) 택했다고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예정의 목적

구원에선 예정했기에 예지가 따라오는 것이지 예지가 예정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도 조금 억지스런 설명입니다. 예지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듯이 사전에 어떤 조짐이 있어야 예지가 가능합니다. 나기도 전에, 잉태되기도 전에 알아본다는 것은 이미 예정이지 예지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왕이 사형수를 사면할 때는 죄의 종류, 반성여부, 수형생활, 건강상태 등등 여러 조건을 감안합니다. 그러나 불편부당(否便不黨) 하신 하나님이 특정 조건, 자질, 공로 등을 고려해서 편향된 사면을 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유기(遺棄)가 이뤄진다 해도 그 이유 또한 절대로 완전하고 공평하며 사랑에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한 치도 저촉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절대적 주권에 따른 예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해도 인간이 생전에 절대 알 수 없으며 성경에도 밝혀놓을 수 없습니다. 독단적, 강압적인 분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이유라도 일단 밝혀지면 당장에 인간의 공로 내지 자랑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이제 한 죄인이 나기도 전에 구원 받기로 선택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예정이란 방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드러났습니다. 이미 얻은 구원을 절대 자랑치 않게 하면서 대신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면서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또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소명에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형수를 사면해 주어야만 왕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 아닙니까? 만약 여러 조건을 감안해서, 예컨대 회개 하여 개전(改悛)의 정을 확실히 표명하고 또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했기에 사면했다면 꼭 목숨을 바쳐 충성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해진 규정에 따라 사면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공로, 조건, 자격이, 나아가 믿음조차 구원에 단 한 치도 기여한 것이 없어야만 사면권자인 하나님께 오직 감사와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돌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딴 하나님을 못 믿겠다면?

전도할 때에 예의 할머니 같은 분을 수시로, 아니 거의 매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반발에 신자마저 기가 죽거나 말문이 막히는 것은 예정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모든 세대의 모든 지역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빵점이자 사형수라는 진리를 붙들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이라 구원받지 못한 자도 사형수로 마땅히 죽은 것이지 하나님이 불공평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그 은혜를 믿어  구원 얻는 것을 예수가 창시한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고안하여 그 교인들에게만 한정된 교리인 줄 아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노예로 묶여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 그 의미를 성경을 통해 절대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예수를 안 믿었다고 지옥 보내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 같이 죽어 마땅하지만 오직 하나님께 진정으로 그 죄를 인정하고 엎드리는 자는 구원해주는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혹시 그분을 알아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깨끗케 될 수단이 전무하므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느냐 않느냐를 가름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전하긴 하되 예수를 기독교에 한정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구원도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크신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하면서 그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를 진짜 솔직하게 되돌아보라고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에 신경 쓸 여유나 필요가 없이 오직 자신의 구원에 대해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자력구원이 전혀 불가능함을 겸비하게 인정해야만 비로소 그 권능과 은혜가 효력을 발합니다. 철두철미 죄인임을 고백하고 영적으로 완전히 깨어져서 전혀 무력해져야 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하려면 기독교 교리보다는 오히려 죄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처럼 행동만 아니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죄가 더 많습니다. 영혼이 부패하여 죄인이기에 죄를 짓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말과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합치면 선행과 공적으로 일일이 갚기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평생을 두고 한 인간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찍은 비디오를 하나님과 함께 감히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행동만 찍은 것만 해도 부끄럽고 두려워 당장 숨기 바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왜 구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질 엄두도 못 내고 자기부터 완전히 엎드려 긍휼만 구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님으로선 모두가 죽을 죄인인데 엎드린 자를 구원해 주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자 사랑이라고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런 모든 설명에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럼 어떤 하나님이라야 믿을 수 있는가?” 반문해보셔야 합니다. 틀림없이 착한 자를 천국 보내고 악한 자를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라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선 “변증의 동산/믿지 않는 형제에게” 사이트의 #12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 가지 못한다.”는 글의 내용을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논리적, 도덕적, 교리적으로 온전한 진리를 다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고 수긍은 해도 믿지 않은 자가 반드시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자가 실상을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전도란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한 죄인의 영혼 속에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비록 전도가 하나님의 고유의 작업이라고 해도 신자는 십자가 복음을 풀어서, 때로는 성경말씀 그대로라도 불신자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해 못하고 또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니까 더더욱 진리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해해서 믿을 수 있다면 구변의 재주가 좋은 자가 전도해야 합니다. 또 예정과 상관없이 자유의지로 스스로 믿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일단 믿어만 보라고 끈질기게 권면하는 자가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또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면 성령의 간섭이 반드시 배후에 있어야만 구원이 이뤄집니다. 또 누가 예정이 되어 있는지 모르니까 더더욱 때를 얻든 못 얻든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이 구원하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정에 의한 구원이니까 전도가 미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성경은 아무리해도 믿지 않는 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바로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신자의 전도하는 노력과 수고는 모두 허사가 됩니까? 아닙니다.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정에 의한 구원이라도, 아니 예정에 의한 구원이라야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롬11:29) 때문입니다. 또 신자로 구원에 대해 자랑치 않는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전도에 보내심을 기꺼이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딴 하나님은 안 믿겠다고, 그것도 아무리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버티는 것은 그 영혼을 사탄이 미혹시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까지 해놓고도 그러합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의 상태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한 죄인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이뤄지는 그분의 무한한 긍휼이자 완전한 사랑입니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격하게 반발하는 자는 전도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어쨌든 서로 성경의 하나님과 십자가 예수님에 관해 토론할 기회를 더 가지게 되고 또 말씀의 능력도 함께 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강할수록, 아니 모든 전도에는 끈질기게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되 그 이전과 이후에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6/29/2009

별첨

146 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도 지옥가나요?
123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지옥 갑니까?
47 구약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나요?
14 예정에 의한 구원이라면 구태여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13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이라고 하면서 왜 자꾸 믿으라고 하는가?
11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구원하면 불공평하지 않는가?
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가?
3 이 순신 장군은 죽어서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상기 외에도 비슷한 주제의 글들이 다수 있습니다.)


운영자

2009.07.02 20:19:33
*.104.231.60

처음에 급히 글을 올리느나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멏몇 곳을 고쳤습니다. ^^

사라의 웃음

2013.03.10 23:10:22
*.109.85.156

구원의 선물, 그런데 선물 주신분에게 감사해야하는데 자주 선물 받은 것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를 때가 많구요 자랑하면 안되지~~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선 맘 속으론 자랑코 싶어지는, 참 희한하여 어찌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 아닌가, 저를 가만 들여다 보면서 말로 설명키 어렵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야곱에게 찿아오시어 씨름을 걸어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오시어 씨름하자고 건드려 주시며 도망갈 마지막 방책인 넙적다리 힘줄은 툭허니 끊어놓으시며 아버지께만 매달리도록 만들어 가시는 너무도 오묘하신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복잡하기 짝이 없는 자를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또 상황 속에서 또 말씀하시고 또 손잡아 이끄시며 보호하시는 그 부드러우신 사랑은 십자가에 독생자를 저 대신 매달아 죽이신 사건으로 이미, 이미 다 드러내신 사랑이심을....말씀을 읽으며 다시금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죽기까지 사랑을 부어주시는 그 은혜를 감사드리며....

낭여

2018.10.29 02:51:28
*.205.4.86

제가 항상 고민하는 주제가 바로 이거였네요.

의문을 순서대로 정리하자면 

: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다시 사셨으며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칭의)을 믿음에서 온다.

 그런데 믿음은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고 할 때(하나님의 주권 또는 예정),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없고(자유의지) 성령님 즉 하나님이 믿게 하신다면, 즉 어떤 자의 믿고 안믿고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다면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하나님이 믿게 하지 않으셨으니까) 라는 의문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본문에 나온 로마서 9장도 최근에 읽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어렵더라고요. 변증의 대가인 바울 사도도 그냥 하나님 맘이라는 식으로만 얘기하는 것 같고.

약간 제가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는 구원에 대한 예정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서 후자 측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관계를 열어주셨고 인간이 그것을 선택하느냐 아니냐) 예정 쪽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던 이유가 그렇게 되면 앞서 말한 믿지 않음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없지 않는가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확실하게 믿음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혼란을 갖고 있네요.

이 글에서 예정은 자유의지를 포함하지만 자유의지는 예정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가 모순상충되지 않는다면 아 머리야... 

arbol

2018.10.29 14:26:09
*.173.73.96

사실 하나님은 맘대로 하실 수 있다..

우리가 개미를 죽일 때 죄의식이 없다.. 개미를 죽일 때 이유를 따져서 죽이지 않는다.

또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이 개미는 살리고 저 개미는 죽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살지 않는가?

왜 그런가 개미와 우리의 존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은 개미가 아니라 티끌보다 먼지보다도 못하다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다..

하나님을 내 관점에서 보니 당연히 이해가 될 수 없다..

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 눈을 열어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일일이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내 마음에 들어야한다면

그분이 어디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 예전의 사람을 구원하셨건 안하셨건 그건 하나님의 영역이고

오늘 나를 구원하셨다는 게 더 중요하다..

인생은 예전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다 죽어 지옥 갈 존재들이다

근데 그중에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택하셨다

이유는 모른다.. 감격스럽지 않은가?

왜 나를 살렸냐고.. 왜 나를 택했냐고.. 왜 나를 지옥에 보내지 않느냐고.. 막 따지고 싶은가?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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