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가 어떻게 예수님께 전가 되었는가요?

조회 수 3154 추천 수 92 2009.08.25 19:52:48
우리 죄가 어떻게 예수님께 전가 되었는가요?


[질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복음을 해석하자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말인 데요. 어떻게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의 세례로 전가된 것인지, 아니면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못 박아서 전가된 것인지요?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오고가는 모든 인류의 죄가 전가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이 주제에 관해 답변 드리기 전에 복음과 죄에 대해서 먼저 확실히 규명해둘 사항이 한두 가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신비

우선 복음은 하나님의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에게 당신의 일방적 긍휼에 따라 당신께서 직접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를 온전히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신자는 그 은혜에 수혜자(受惠者)로서 참여하는 것뿐입니다. 인간 쪽에서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격, 공적, 선행, 심지어 믿음까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믿음을 포함해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연히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용했다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원 안에 담긴 그분의 경륜은 인간 이성에 의한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이성과 절대 반(反)하지 않습니다. 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 안에 들지 못한 자는 십자가 복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지만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전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 되는 까닭입니다. 당연히 신자에게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만듭니다.(롬1:17) 토마스 아퀴나스의 “믿는 자에겐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겐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합니다.

인간이 신학적으로 복음의 신비를 설명하는 내용 모두는 아주 단편적인 설명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 기록조차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었기에 복음의 신비를 일목요연하게 묘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그 기록 자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오류가 하나도 섞이지 않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언어가 갖는 본질적인 한계성 때문에 성경에 산재한 복음에 대한 설명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하는 내용이 각각의 구절이 규정하는 내용에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적인 성경 신학이 필요합니다. 신자로선 개별 교리들을 먼저 이해하고 그 전부를 모아 성경 전체의 뜻에 맞추는 큰 그림을 그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핵심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 교리의 단편성은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봉사들이 코끼리의 귀와 꼬리와 다리 등 한 부분만 만져보고는 각기 부채, 뱀, 기둥으로 묘사했지만 코끼리의 실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히 틀린 내용이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에 관한 신학적 설명은 마치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육안으로는 아무도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창틈이나 구름 속에서 비스듬히 내리비치는 경우에 한해 단순히 희고 밝은 색의 직선 모습으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빛은  이처럼 흑암이 있어야만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대낮에는 그냥 빛 속에 잠겨 있기에 빛을 감지조차 못하며 어떤 모습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프리즘으로 보면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무지개 색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복음에 대한 예정, 대속, 칭의, 보상, 전가, 은혜, 회심, 중생 등의 신학적 설명은 바로 프리즘으로 비춰본 일곱 색깔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평소에 빛을 구태여 프리즘으로 볼 이유나 기회는 없습니다. 빛에 대해 공부할 때에만 그렇게 봅니다. 빛은 그냥 흰색으로 항상 우리 곁에 함께 있을 뿐입니다. 신자에게는 복음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해보는 것 같이 복음에 대한 신학적 설명도 복음을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코끼리 봉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복음의 성격을 분명히 사실대로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틀린 내용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전부가 아닌 단편일 뿐입니다.

나아가 빛에는 프리즘으로는 볼 수 없는 적외선, 자외선이 있으며 또 파장과 입자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성격까지 갖추었습니다. 복음에도 이처럼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컨대 선택과 예정 같은 영역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함께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측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빛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지만 인간 육안으로는 그냥 하얗게 인지됩니다. 또 태양이 항상 인간과 함께 하듯이 빛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비록 때로는 먹장구름이 막혀도 태양은 그 위에 상존(常存)하며 밤에도 달에 반사하여 비춰줍니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단순히 빛으로 이해됩니다. 빛을 모르지 않으며 보지 못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안에 들어온 자는 복음을 일곱 색깔로 나누거나 자외선 적외선 같이 복잡한 과학적 설명을 알 필요 없이 그냥 단순히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 안에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었음을 확신하면 됩니다. 아무 의심을 가질 필요가, 아니 생길 리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 들어온 자는 복음을 이해하고 그 은혜와 권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과 그 구원을 빛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절묘한 유비(類比)입니다. 아니 그분은 실제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컨대 복음 전부를 한 마디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따라서  죄의 전가라는 측면에서만 복음을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전가는 복음의 수많은 신비 중의 한 단편적 설명일 따름입니다. 반드시 복음의 여러 다른 차원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죄가 전가된다는 그 제한된 영역에선 아무 하자 없는 정확한 설명이자 온전한 진리입니다.  

죄는 만질 수 없다.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당연히 죄의 본질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지적할 사항은 그 전가되는 죄를 도덕적 죄로 한정지어선 복음을 절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도덕적 죄란 특정 사회에 통용하는 윤리나 관습을 개별적 행동으로 범한 것으로 누구나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치적으로 많고 적음까지 측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 윤리적 죄의 범위마저 훨씬 넓혔습니다. 말로써 형제를 바보라 욕하는 것은 상대의 인격을 죽인 살인죄에 해당되며,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은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과 생각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짓는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측면에서도 모든 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동일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죄의 범위를 더 넓히고 더 세밀하게 규정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타락해 있기에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행동입니다.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사실상 행동으로 범한 죄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패해 있기에 죄가, 생각으로 짓는 죄도 당연히 포함해, 나타난다면 죄는 이미 행동과는 별개이자 그 이전의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바람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되어 있는 상태,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죄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악하고 추한 행동으로 이끄는 어떤 힘, 경향, 추세, 방향으로 이해해야지 개별적 행동으로 따질 계제가 안 됩니다.

이처럼 죄의 본질을 범과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을 묶는 힘이라고, 그것도 하나님과 반대로만 이끄는, 이해하는 것이 복음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됩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모든 죄의 전가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라야만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죄를 영혼이 타락된 원죄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윤리적 범죄로 이해하면 자연히 그 구원관도 달라집니다. 사회윤리나 종교계명을 어긴 개별적 행동이 죄라면 그 잘못된 행동만 고치면 됩니다. 서두에서 개별 행동의 죄는 수치적으로 측량이 된다고 했는데, 죄를 적게 지은 자는 천국 가고 많이 지은 자는 지옥 간다는 원리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으려면 죄의 업보를 없애는 선을 많이 쌓아야(積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경미한 죄라 할 수 있는 거짓말만 해도 평생 약 십만 번 가량 한다고 합니다. 쌍스런 욕이나 남에게 상처 주는 말까지 합치면 수십만 번은 될 것입니다. 그럼 아름다운 말과 남에게 감사 칭찬하는 말을 수십만 번 해야만 그 죄책이 벗어질 수 있을 텐데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말로 지은 죄만 해도 이럴진대 행동이나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합치면 아무리 회개하고 보상해도 인간 스스로  죄책을 지울 방도는 절대 없습니다.

거기다 개별적 행동으로 범한 죄는 아무리 철저히 회개하고 고친다 해도 죄의 본질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있는 죄의 힘은 여전히 그 죄인을 묶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가 죄라면 인간의 죄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반드시 그분으로부터 심판이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본질, 사실은 죄 자체가 남았다면 그 죄책이 해결 안 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모든 불신자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그중에서도 복음주의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에 대한 이런 간단한 원리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이 죄에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부인, 외면, 거부, 항거, 배역, 심지어 저주하는 상태에선 절대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합니다. 그 죄책도 당연히 벗어질 수 없습니다.  

죄의 본성이 인간을 묶는 힘이라는 차원에서 원죄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합니다. 한때 공산주의자의 자녀는 무조건 불이익을 주었던 연좌제처럼 아담의 후손 모두가 무조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비가 지었던 모든 죄들이 즉, 죄를 지으려는 성향과 그 죄책이 개별적으로 아들에게 유전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알기 쉽게 비유해 사기꾼 아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기꾼의 기질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스스로 자기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고 그분의 권위 위에 올라섰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태로 영생하면 안 되기에 낙원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쉽게 말해 당분간 사탄이 이 땅의 공중 권세를 잡도록 한시적으로 허용한 것입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영적으로 사탄에 묶인 채로 태어나는 것을 묵인한 셈입니다.

따라서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원죄를 지녔다는 것은 죄가 이 땅과 인간 영혼을 묶고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나 죄책이 생물학적으로 한 부모에게서 그 자녀와 후손에게로 계속해서 유전된다는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자연인은 생래적(生來的)으로 하나님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다 악한 것뿐인 죄인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세상 신은 물론 사탄인데 예수님의 초림 때까지 뿐만 아니라 재림 때까지도 세상을 농간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을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구원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4)

원죄의 성격을, 정확하게는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아주 잘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사탄의 흑암의 세력에 묶인 관계로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제 마음에 원하는 것만 행하며, 세상 풍속을 좇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에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인식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는 사탄에 넘어가 타락된 인간의 영혼이 절대적 진선미이신 하나님과 매사에서 거역하는 방향으로만 이끄는 힘이 바로 죄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또 만질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개별적 실체로 수치화할 수 없습니다. 개별적 사안으로 감지 인식되는 것은 이미 죄가 빚어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처럼 죄의 본질이 개별적 행동이 아니라 인간을 묶는 힘이라면 죄의 전가도 개별적 죄들과 그 결과들을 전부 모아서 전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영혼 자체가 타락한 상태에선 구원마저 성립 되지 않는다고 이미 밝혔습니다. 대신에 인간을 묶고 있는 사탄의 힘을 제거하고 또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받을 형벌을 제거해야 한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가가 이뤄져야 하며 또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희생양을 통한 죄의 전가

죄의 전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복음의 신비와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과연 죄의 전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선 구약시대의 희생양 제도에 전가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나타납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眷屬)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찌니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曠野)로 보낼찌니라.”(레16:6-10)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레16:21,22)

염소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는 것이 바로 전가(轉嫁 Imputation)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염소를 두 마리를 택해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한 후에 사람이 전혀 살지 못하는 광야로 내몹니다.

우선 첫째 양의 경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여호와께 고백하며 그분으로부터 그 죄 사함을 받는 의식입니다. 희생양의 죽음이 모든 죄인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죄를 망라해 일일이 용서 받는 절차라기보다는 모든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것도 죽음의 형벌을 그 양에게 전가한 것입니다. 죄보다는 죄책의 전가입니다.  

둘째 양의 경우는 양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모든 불의와 죄를 고하여 전가하는 절차를 갖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죄의 목록을 전부 다 고백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개인이 짓는 죄를 일일이 고하려 해도 그럴진대 전체 백성의 경우는 더 그러합니다. 기록된 율법을 분명히 위반한 죄와 매년 치르는 대속죄제이기 때문에 그 해에 특별히 지은 죄들을 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기원이 사탄에 있으며 또 사탄은 인간이 전혀 살지 못하는 광야에 거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죄들을 구체적으로 고하고 전가한 후에 그 양을 사막으로 보내는 것은 죄의 근원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자는 뜻입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죄의 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는 결단과 헌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단의 시험을 스스로 받으러 먼저 광야로 갔습니다. 사단과 능력의 세기를 겨룬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구약의 희생양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기에 인간에게 씌워져 있는 죄의 고리를 끊으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희생양의 전가에 나타나는 특징은 한 마리는 하나님께, 다른 한 마리는 사탄에게 바쳐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첫째 양은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며 둘째 양은 구원 받은 새 생명 안에서 살려면 흑암의 세력을 끊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죄로 인해 받을 형벌을 양에게 전가한 것이며, 후자는 범죄에 빠지도록 인간을 묶고 있는 힘을 양에게 전가해서 사탄에게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희생양의 전가에서 개별적 죄들을 모아 어떤 물리적 행동에 의해 몽땅 옮겨 떠맡겼다는 의미보다는, 그 양이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인간을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더 근본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전가의 의미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전가는 하나님의 작정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게 하고 또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는 것이 전가의 핵심이라면 당연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죄의 본질이 사단에 묶여 있어서 하나님과 반대되는 곳으로만 이끄는 힘이라면 죄인 스스로는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배역한 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당신께서 사해주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죄의 전가에도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의가 개입될 여지라곤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이 받아야 할 죄책을 십자가의 독생자에게 전가하기로 작정하시고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죄의 형벌을 벗기고 사단의 세력을 없애주기로 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전가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히브리 헬라어 단어가 주로 “간주하다.”(reckoning), “고려하다”(counseling), “여기다”(crediting)는 등의 용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 죄인 아브라함이 아무 공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믿으니 의인으로 여겨주었습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8-시32:2 인용)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여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3,4) 다윗도 인간의 죄를 하나님이 인정치 아니해주고 또 의롭다고 판단해주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 드러난 바울의 진술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합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6,7)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성령이 간섭하여 썩어져가던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으로 중생하게 되면 죄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의미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 죄인을 오직 예수를 믿었기에 의롭다고 간주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의롭다 하심을 수동적으로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준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하나님이 너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겼으니 신자도 당연히 그렇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준다고 해서 하나님의 어떤 뜻이나 계획이 그분의 사고 안에서 작정만 된 채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당연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뜻을 세우면 필연적으로 완전한 실현으로 연결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모든 죄책을 완벽하게 전가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는 온전한 죄 사함과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렇게 여겼으니 신자도 동일하게 간주해야 한다고 해서 신자의 사고 안에서 스스로 작정, 결단, 헌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여 썩어지던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 자세한 과정은 몰라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감격을 누리며 그분을 주로 영접하여서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신자는 스스로 계획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예수님의 은혜로 중생하여 믿게 되었고 또 그 이후로는 이전의 자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본인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사탄에 묶이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만 하며 세상 풍속을 좇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최소한 그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하나님은 원죄 하에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들을 한시적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묶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모든 죄인들을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하실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 죄의 형벌을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 전가하고 성령으로 그 영혼을 새롭게 하는 구원방식을 이미 태초 전부터 계획하신 것입니다. 죄의 전가는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었습니다. 십자가만이 당신을 거역하여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향한 최선이자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전가-예수님

전가란 어떤 이에게서 다른 이에게 뭔가를 옮기는 것입니다. 반드시 양 당사자와 옮길 대상과 옮기는 행동의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옮겨야 하는 이유는 한쪽이 그 짐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당연히 대신 져주는 쪽은 그 짐을 완전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그 짐을 옮기는 행동의 주체는 양자 모두, 어느 쪽 일방, 혹은 제 삼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죄의 전가라고 해석할 때에 먼저 양 당사자는 인간과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지고 있던 짐은 죄와 죄책인데 도무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짐을 대신 져준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형벌을 완전히 감당했습니다. 물론 그 짐을 옮긴 행동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이신데 창조 시부터 당신의 작정 안에 이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이방 족속들은 죄를 단순히 행동으로만, 그것도 자기들 공동체의 법률이나 계명을 위반한 정도로만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그에 상응하는 공적을 쌓거나 제물을 바쳐서 죄 사함을 받으려 했습니다. 일부 종교에선 동물이나 인간 희생물에게 전가시키는 개념도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의 형편도 크게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죄를 하나님께 지은 것으로는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구원이 확보되어 있었기에 매년 지은 죄를 희생양에게 전가하여 씻음만 받으려 했습니다. 여전히 사탄에 묶여 있는 힘이라는 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요컨대 당시까지 이방족속이나 이스라엘의 죄의 전가는 인간이 행동으로 지은 죄만 희생 제물에게 인간이 전가하여서 사함을 받았다고 인간 스스로 간주한 것에, 사실은 자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죄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또 그 희생제물도 온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전가 받은 쪽이 동물인지라 그 받은 짐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초림 때까지는 세상에서 구원을 얻은 이는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여 당신께 온전히 순종한 일부 이스라엘의 종들뿐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정확하게 설명한 대로입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0:1-4) 그러나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9:18)라고 합니다. 율법도 인간의 죄책은 오직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또 고대 종교들이 피의 제사를 했다는 사실도 구체적이고도 명료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 그런 기본 인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7:26)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4:15)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 또 “영원히 계시므로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7:24)하기에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9:12)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29)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온전한 죄의 전가를 미리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현실의 고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오시기 전까지 인간들이 구원을 얻으려 지고 있던 도덕적 종교적 수고와 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동물 제사와 바리새인들이 부과한 온갖 장로의 유전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수고와 짐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푼 고을마저 회개치 않는 것을 야단치고, 또 그래서 구원의 신비를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밝혀주셨다고 말씀하신 이후에 하셨습니다. 바로 앞에도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고 당신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됨을 명백하게 밝힌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껏 동물에게, 그것도 행동으로 지은 죄만 전가해선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 인간으로부터 모든 죄와 죄책을 전가 받아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의 주체적 능동적 행위에 의해, 당신이 죽으심으로 전부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온전히 믿는 자는 “마음의 쉼”을, 현실의 안락과 풍요가 아님,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많은 신학 용어가 그러하듯이 성경에 전가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 직간접으로 그런 의미의 표현이 나타나며 또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속하신 의미를 일관되게 살펴보면 완벽한 전가의 개념이 드러납니다.  

우선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선언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물론 신약사도들 모두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누차 강조하지만 전가를 인간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죄를 전부 망라해서 떠맡긴 것으로만 해석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죄를 행동으로 지은 범과에 한정시킬 경우는, 특별히 인간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자부한다면 전가는 아무 의미가, 아니 필요조차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예수님에게, 그분을 인간 혹은 성자 하나님 어느 쪽으로 인식하든, 옮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의 선을 이룰 능력과 의지를 인정하는 자유주의나 일부 이단은 십자가 복음에 나타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가되어야 할 대상인 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또 정작 전가되어야 할 죄책이 반드시 사형이 되어야 한다고 까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예수를 죄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인 개별적 죄를 지었다는 뜻일 수는 전혀 없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가 어떻게 죄를 범하겠습니까? 그를 죄인으로 여기고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전가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 죄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죽이셨다고 해서 모든 인간의 죄들의 누적된 결과가 그만큼 중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도무지 그 죄과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 반대로 하나님 본체이신 독생자의 죽음으로 보상했으니 그 죄과는 완벽하게 영원토록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구원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바로 지옥의 형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새 생명의 인침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화목 된 관계로 바뀐 것입니다. 구약의 첫 번째 희생양이 이루는 결과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죄의 권세에서 놓여놔야 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영혼의 묶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분의 자녀답게 바뀌고 자라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이 땅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신자에게 내주케 하여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세례 요한의 세례나,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인 하나의 사건이나 형식을 통해서 전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믿어서거나, 믿은 후에 세례식을 할 때에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가시적 개별적인 행동에 제한되지 아니라 흑암의 권세이기에 죄의 전가도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완벽하게 그 권세를 무력화시킨 승리의 은혜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복음 안에 든 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될 수 없도록 성령의 권세로 덧입음으로써 죄의 전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의 죄와 죄책은 하나님이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던져 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동과 서는 먼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만나지 못합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드는 순간 그 즉시로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의 죄와 죄책을 없어졌다고 간주해 주시는 것이 바로 전가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죄의 전가에 대해서도 별도로 따져볼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전체에 대한 구속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노예가 되어 있던 한 죄인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십자가의 의가 덧입혀짐으로써 개인의 구원도 실현됩니다. 물론 그 전에 혹은 동시에 중생의 은혜도 임합니다. 말하자면 죄의 전가는 회심, 은혜, 중생, 칭의, 예정 등등 복음의 다른 색깔들과 함께 살펴봐야 제대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신비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죄의 본질이 인간 스스로는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을 묶고 있는 더럽고 추한 힘입니다. 그래서 그 형벌도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하기에 “죄의 전가”가 성립됩니다. 한 개인이 죄에 대한 이런 인식을 갖지 못하면 전가도 이해할 수 없으며 구원 얻을 실제적인 죄의 전가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죄인에게 성령으로 간섭하여 자기야말로 십자가 앞에서 정말 죽었어야 했다는 철저한 회개가 일어나게 합니다. 또 예수님이 자기 죄를 지고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인간적인 방식으로도 지옥 가는 형벌을 면할 수 없음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전가된 것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 복음(福音)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9/25/2009

김 계환

2009.08.26 05:39:25
*.219.115.4

김순희

2009.08.26 12:10:08
*.82.116.33

아멘!

모루두개

2024.03.01 01:29:59
*.97.127.172

자수해서 광명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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