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完)

조회 수 1603 추천 수 73 2009.03.27 19:10:51
예수님도 조직체 교회를 세웠다.

지금까지는 십일조 계명의 존속 여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율법과 구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실제적인 측면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조직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는지 또 십일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는지 여부입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22: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찬’으로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또 전도한 후에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구약의 모든 의식법을 폐지하고 교회가 새로이 시행할 필수적인 두 가지 성례전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의 또 다른 측면은 제자들더러 체계를 갖춘 공동체를 세우라고 말한 셈입니다. 물론 성찬이나 세례는 조직체가 없어도 시행이 가능합니다. 공개적 선교활동이 금지된 곳에선 아파트 욕조에서도 침례를 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분부한 것을 꾸준히 “가르치고 지키게” 하려면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가시적 조직체가 요구됩니다.

교회가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원론적 의미를 넘어서 실천적 의미와 필요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 사도를 통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끝까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핍박에 이겨내라고 당부하신 것도 조직체 교회를 인정하고 또 그 안에서 함께 승리하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많은 지원자 중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아서 삼 년간 동고동락한 것 자체부터 실은 일종의 조직체 교회를 세우고 운영한 것 아닙니까? 비록 한 지역에 고착된 조직체가 아니라 순회선교단체일지라도 말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지역교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 조직체를 성도들이 헌금한 돈을 갖고 운영했습니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삼년 내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거나 금식만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자라는 비방까지 받았지 않습니까? 최소 열세 명의 장정이 먹고 자려면 응당 상당한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바울의 경우와는 달리 세속 직업에 종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니 직업과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럼 공동체를 유지하는 돈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성도들의 헌금 내지는 제자들이 짬짬이 벌은 돈(여전히 헌금임)으로 충당했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요13:29)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그 조직체의 재정부장으로 유다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또 그 모인 헌금으로 교회 운영에 충당하고 심심찮게 구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더러 빨리 고발하러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27절)을 들은 제자들은 당연히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뜻으로 오해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조직체 교회를 세웠고, 헌금을 받았으며, 구제의 용도로 헌금을 사용했습니다. 전문 사역자의 사례비와 구제에 충당하라는 구약의 십일조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하셨습니다. 아무리 현재 헌금과 십일조를 잘못 가르치고 또 엉뚱하게 운용하고 있다 해도 신구약 성경과 예수님 모두가 교회는 성도들에게 헌금과 십일조를 가르치고 시행케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 가르치고 있는 교회와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지 헌금과 십일조 제도 자체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차가지로 조직체 교회를 세우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성도들끼리 함께 모여서 땅에서 매고 푸는 역사를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도 제자들에게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함께 모여야 하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배우고 구제하는 데에 정말로 열심이었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교회를 운용하는 방식과, 가르치는 내용과, 시행하는 일의 성격이 잘못인 것이지 조직체 교회 제도 자체가 잘못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성경은 오히려 그런 교회를 반드시 세우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대형 교회라서 다 잘못은 아니며 소형 교회라서 다 성경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교회이면 지역교회이든, 순회단체이든, 가정교회이든, 그 크기와 조직과 치리 방식과 상관없이 다 좋은 교회입니다.

교단과 교파가 나눠져 있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꼭 나쁜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단만 아니면 됩니다. 손가락이 열이 있지만 어떤 손가락은 가늘고 긴 반면에 어떤 것은 굵고 짧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더 있든지 덜 있으면 장애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열 가지 내용 중에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없는 것을 더 보태면 이단입니다. 그러나 열 개 중에 교단마다 더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은 약하게 가르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정서나 지성에 맞추어 적합한 교단을 선택해 따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사실은 교단이 여럿이어야 신학적, 영적 발전이 있습니다. 상호 간에 견제 경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또 어떤 면이 좋은지 분별이 가능하기에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하나만 있다가 종교개혁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신학적 진보를 이루었습니까?

이 또한 교단과 교파가 서로 시기 경쟁하거나 복음 사역에 협력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교단이 나뉜 것 자체를 두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나누었는데 그 접근하고 가르치는 방식은 분명히 조금 달랐을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를 만나자 베드로가 외식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가 넷으로 나뉘어 기록된 것이 그 독자층과 저자의 강조점이 각기 달랐듯이 교단들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작 문제 삼을 것은 각 교단이 진짜 성경대로 가르치는지, 사실은 현재 그러지 못한 것 같은 점이 더 부각되고 있지만, 여부인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하게 싸우고 나눠져도(행15:39) 오히려 복음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더 크게 확장되었지 않습니까? 위대한 사도들끼리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격해지고 분열되었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끄셨습니다.

헌금과 십일조도 문제는 인간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에게 잘못이 있어도 교회가 그 가르침까지 중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잘못 가르쳐 지고 운영되고 있으니 더더욱 바로 가르치고 또 올바르게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일조를 확실하게 명령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비롯한 금식, 구제, 기도 등의 종교 행위에만 열심을 내었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개의치 않는 것을 두고 야단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입으로 분명히 십일조를 행하면서 동시에 그 계명을 주신 뜻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십일조를 폐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충실하게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단지 의도 행하고 신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버린 것은 의와 신이기에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의와 신입니다. 또 의와 신을 버렸다는 것은 계명에 든 목적과 뜻을 등한히 한 것입니다. 대신에 십일조를 드린 것은 행동으로 행한 것이기에 이것도 행하라는 것은 분명히 십일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바리새인이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행위를 자랑했듯이 예수님도 비유나 과장의 뜻으로 말씀하신 것뿐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아예 불가능하거나 너무나 하기 힘든 일을 명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던 일을 더 잘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는 다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5:29) 부모가 밤늦게 쏘다니는 자녀를 향해 다리를 부러뜨려 집구석에 묶어 놓겠다고 엄포는 놓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음으로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고 당장 애꾸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만큼 죄의 본성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멀리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뜻인 줄 성경전문가가 아니라도 상식적 판단에 따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성령의 인도대로 푼다고 해서 기도해서 초자연적 계시를 받는다던지 또는 기도 중에 언뜻 떠오른 자신만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지정의를 통해 인격적으로 역사하기에 모든 사람의 상식에 부합되는 지혜로도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분명하게 직접 명하신 말씀을 무시할 수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서두에서 십일조를 권면, 장려하는 일을 상식에 비추어 판단해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십일조는 이미 믿음을 온전히 가진 자가 공동체로 모일 때만, 특별히 구제에 소명을 두었을 때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자 개인의 구원과 믿음에 직접 연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교회주의자나, 자비량선교사나, 가정교회 등에선 강조 아니 거론될 필요조차 없는 사항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에게 십일조를 권하지 않았다고 초대 교회가 그것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무리한 해석입니다. 그 때 논의된 주제와 이뤄진 결정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필두로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신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15:10)고 따졌습니다. 인간이 율법으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제 복음 안에 들어온 자에게 복잡한 종교적 절차를 부과하는 것도 사실 멍에처럼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절차는 구원과 관계없이 사실은 이방인들을 그 때까지 유대인들이 주를 이루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절차였을 뿐입니다. 그 네 가지 요구 사항을 지킨다고 믿음이 생기거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기로 한 이방인들을 특별히 지금껏 유대교에서 시행했던 개종절차처럼 할례를 시키느냐 마느냐 로 의견이 맞선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세례와 침례 중에 어느 것이 맞느냐, 혹은 입교식을 세례식과 별도로 꼭 해야 하느냐 같은 문제에 해당됩니다.

교회에서 신자가 시행할 네 가지 필수적 절차를 제정했기에 십일조는 안 해도 된다는 것도 논리상 무리입니다. 필수적이라는 것은 항상 최소한의 의무를 말합니다. 그 외에도 신자들이 지킬 필수적 의무는 많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예배, 기도, 말씀, 구제, 전도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실 이런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필수적 개종확인절차였지 필수적 신앙행위규범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보듯이 구제에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십의 십조를 바쳤습니다. 아무도 강요하거나 권면하지 않아도 그랬습니다. 또 이 부분에서 즉, 초대교회가 권면하지 않았으니까 현대 교회도 십일조를 권하면 안 된다는 말도 무리한 해석입니다.

유대 공동체에선 십일조는 아주 상식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양념과 야채의 십일조까지 한다고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이 그들만큼 성실히 지키지 않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시행하고 있었고 또 시행치 않은 자라도 십일조가 제사장의 사례와 구제에 사용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습니다. 아무도 반발하지 않은 너무나 당연한 규례였기에 따로 제정하거나, 권면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초대 교회가 상당 기간 동안에 갖고 있던 성경이 바로 십일조 규례가 이미 명기되어 있는 구약이었지 않습니까?

따라서 초대 교회가 헌금이나 십일조를 시행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사이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한 것도 자신의 고백대로 혹시라도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까 스스로 금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사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그런 율법의 규정이 틀렸으므로 초대교회가 폐지한 탓에 그렇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사례를 받는 것 즉, 당시로 보면 성도들이 바친 십일조에서 받는다는 의미가 됨, 율법에 비추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쒸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의 성경은 당연히 구약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도들은 다 사례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9:5) 바울과 바나바만 자비량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선교비를 각 지역 교회의 헌금에서 충당했으며 심지어 아내를 선교여행에 동반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일절 말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입장만 설명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초대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명확하게 십일조를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기독교 개혁의 본질

작금 기독교 내에서 십일조를 존속시키냐 폐지해야 하느냐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또 폐지하면 마치 교회 개혁의 아주 큰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은 접어둔 채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껏 폐지론자와 존속론자 양쪽에서 제시했던 논리가 일부 타당성을 가지며, 특별히 폐지론자 쪽에 개혁의 충정이 더 많다는 점은 충분히 사줄만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또 정말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에서,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바뀐 신자의 신분과 특권과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감안해 보십시오. 십일조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일은 당신께서 얼마든지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십일조가 당신의 은혜를 더 깊이 풍성하게 누리는 통로 내지 방식으로, 나아가 당신 백성들의 공동체에서 구제에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뜻으로는 얼마든지 권장, 장려할 수 있으며 또 투명하게 모금 운용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교회의 개혁은 분명히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를 없애거나, 교회 건물을 짓지 않아야 하거나, 교단 교파를 다 없애야 하거나, 공격적인 선교를 중지해야 하거나, 다른 종교에 관용을 베풀어야 하거나, 지구환경보존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하거나, 십일조 제도를 폐지해야 하거나, 가정교회로 바꾸어야 한다는 등의 운동을 벌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예수님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성경대로 회복되어 가르쳐져야 합니다. 나아가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모든 계명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복음을 성경대로 회복시켜서 신자로 성화에 매진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교회 건물을 짓거나 십일조를 권면 운용하는 측면도 성경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또 교회는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길수록 좋은 것입니다. 정말 초대교회처럼 십자가 복음만 증거 실현되고 그 공동체의 자금의 모금과 운용이 성경적 뜻에 따라 투명하고도 잘못이 없으면 됩니다. 나아가 정말로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많이 내어서 구제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구약대로 열 가정 정도의 십자가 사랑의 공동체가 곳곳에 세워지고 그 중 한 가정이 성경적인 제사장이 되며, 또 그런 공동체들이 이 땅에 편만하게 확장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십일조만 해도 폐지시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그 뜻을 잘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올바른 개혁 아닙니까? 기독교가 개혁을 해야 할 만큼 그 동안 잘못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5:24) 한 마디로 교회도 재물을 섬긴 것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십일조 규례를 제정하신 의미에 교회가 재물을 섬겨야 한다는 의미가 단  한 치라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선 신자는 재물에 굴복하지 않고 산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과도하게 여겨지리만큼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신자들의 공동체는 재물에 의존하는 세상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방식으로만 운영되어져야 하기에 구제를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제사장 레위 지파는 마음을 재물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하고 또 그렇게 사는 모습을 신자들 앞에 솔선해서 보이라고 세속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성도들의 십일조에 의존하게 한 것 아닙니까?
  
바꿔 말해 십일조 규례를 제정하신 목적 안에는 오히려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핵심 방안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 앞에 교회가 돈 때문에 망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돈을 아예 없애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해서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해 마음이 그곳에 가있는 것이 모든 죄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 때문에 망했다면 개혁하려면 역으로 돈으로는 결코 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아예 망할 여지조차 없는 것, 사실은 돈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지 돈에게 승리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많아도 그 돈 때문에 절대 세상 식으로는 망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혹시 또 교회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부터 구약 율법 식으로 사례로 받은 것의 십일조를 가장 먼저 바쳐야 합니다. 신자와 그 공동체도 돈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돈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희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7-11)

바울이 헌금에 대한 권면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교회 쪽에선 강요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것이, 교인 쪽에선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헌금하는 것은 기꺼이 많이 하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현실적 축복이 아니라, 넘치게 해준다고 했지 않습니까? 분명 헌금이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성도가 은혜 받을 수 있는 통로를 교회가 어떻게 가르치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설교 때마다 매번 강조하고 다른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강요하듯이 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성경 본문에 그런 기사가 나오면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의 진술을 두고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해 마케도니아 교회들에서 모은 연보에만 해당되지 오늘날 교회의 헌금과 십일조와는 관계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목적이라고 했으니 가난한 자가 그 때 한 번만 있었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가난한 자는 항상 있습니다.

또 이어지는 12절에서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인하여 넘쳤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직무라고 표현한 것은 일시적 행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는 분명 구제와 사역자의 사례비를 헌금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또 헌금 가운데 십일조는 너무나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 말씀 앞에서 오히려 현대교인들이 듣기에는 거북한 권면까지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6절) 일회성 Fund-raising 에 관한 권면이 아니고 헌금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 원리로 말하고 있기에 헌금은 일상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많이 받는 것이 현실적 축복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10절) 구제 헌금 즉 십일조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먹을 양식을 주시고 또 풍성하게 심을 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즉, 구제에 또 참여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또 다른 뜻입니다.

교회는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또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께서 분부하신 것이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마땅히 예수님이 명하신 십일조와 그 정신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금지한 것도 아니고, 아니 예수님이 확실하게 명하신 것을 두고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자.

그런데 지금껏 변증한 내용들은 십일조 존속론자나 폐지론자 모두 익히 알고 있거나, 최소한 동의 내지 이해는 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다른 말로 서로 간에 이미 확실하게 합의할 수 있는, 아니 실제로 하고 있는 공통분모는 충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 대충 어떤 것들입니까?

“신자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은혜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돌려드려야 한다. 어떤 형태의 신앙공동체이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구제에 힘써야 한다. 헌금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잘못 운용해선 안 된다. 특별히 기복신앙에 이용하거나, 믿음과 구원의 잣대로 제시해선 안 된다.”

반면에 합의 안 된 부분은 무엇입니까? 헌금과 특별히 십일조가 믿음 성숙의 고백이자 성숙할 수 있는 수많은 통로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장려할 수 있느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부분만 신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에 비추어 각자가 묵상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또 도저히 합의가 안 되면 상호 간에 의견 차이로 접어두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십일조와 헌금의 유익을 분명하게 확신하는 목사가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권면, 장려하는 것을 두고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쌍방 간에 합의한 대로 믿음과 구원에 연관되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서 그 성경적 의미를 곡해하여 가르치고, 기복신앙을 전파하는데 응용하고, 교회의 양적 성장의 수단으로 동원하고, 교회 건물 신축을 위해서 강요하며, 모인 돈을 잘못된 용도로 사용하는 것 등은 얼마든지 비판, 정죄, 시정을 요구해도 되는 것입니다. 이 변증으로 최소한 이런 점만이라도 쌍방 간에 확실히 합의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십일조를 존속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자로서 마지막으로 간곡히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확고한 폐지론자가 아니라 아직 확신이 없는 신자라면 십일조 생활을 정말 한 번 해보십시오. 물론 복을 받기 위해서, 신자의 종교적 의무로서 해선 안 됩니다. 또 이미 받은 것의 10%이지 따로 뭉치 돈을 준비해 헌금하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아가 구제에 참여해야지라는 마음까지도 아직은 사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재물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으며 진정한 보물은 예수님뿐이라는 온전한 고백과 실천으로 한 번 해보십시오. 심지어 교회가 그 돈을 어떻게 쓰든 아직은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각오하고 드려보십시오.

단언컨대 각자마다 가장 합당한 은혜를 하나님이 풍성하게 부어주심을 틀림없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게 해주십니다. 주위에 어려운 자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이 솟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갈 수 있는 열망과 태세가 더 많이 생깁니다.

또 다시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잘못 살고 있고 은혜를 못 받는다는 뜻으로 절대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많은 통로 중의 하나라고 말했듯이 십일조 하기 전과 하고난 이후에 분명히 달라지는 부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3/26/2009

사라의 웃음

2013.02.14 23:31:47
*.109.85.156

전엔 십일조가 아닌 십구조가 저희 가족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이 참 행복이라 여겨졌고 그만큼 구제할 수 있음이 너무도 큰 기쁨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리되도록 기도도 엄청 했더랬습니다. 물론 십일조만큼은 정확히 아니, 조금이라도 더 드리려 애를 쓰면서요...

요즘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맘에 기복신앙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궁금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난 분명 순수하게 그러하고 싶었는데~~라고 스스로에게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간 배워왔던 신앙교육은 사실 기복신앙과 기복주의에 젖어 있던 부분들이 참 많았었음을 우리 사이트에 와서 조금씩 운영자님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됩니다. 깨닫고 뒤돌아 보면 아, 그 부분은 나의 교만이였음을, 또 저 부분은 나의 기복주의며 기복신앙이였음을 어렴풋이나마 되돌아 보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예전의 선교하고픈 맘, 구제하고픈 맘...그래서 십구조가 목표였던 것은 분명 순수하게 그러하고 싶었는데~~라고 스스로 답변하고 싶었던 맘도 더 해부하여 보며 그 가운데 기복신앙이 정말 없었던가? 라는 질문도 지속 던져 보게 됩니다. 물론 십일조는 주신 것에 너무도 감사하여 드림의 기쁨이 예전의 저의 맘과는 확연히 달라진 맘인 것을 새록 새록 느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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