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도 자꾸 죄를 짓는데요?

조회 수 3076 추천 수 71 2009.03.31 19:47:44
복음 안에서도 자꾸 죄를 짓는데요?

[질문]


항상 하루하루를 구원에 대한 감사로 누리면서 살고 싶지만 기도하는데도 안 고쳐지는 모습들, 사소하면서도 큰 잘못들을 마주칠 때에는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 잘못들 때문에 저의 신앙생황에 장애가 오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받아서 다행이지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하구요.

예수님은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천주교에서는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는데 개신교는 그런 것은 없고... 일일이 지은 죄를 다 고백할 수도 없고 모르고 지은 죄들을 다 고백할 수는 없는 것 같은데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이 다 용서하신다라는 걸 알고 짓는 죄는 어떻게 하나요? 가끔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고 방종하는 것 같아서... 제 자신에게 많이 화가 납니다.

저는 전도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그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해주니까 신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범죄 하는 기사가 많이 올라오느냐고 반박하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도 궁금하구요... 전도란 것이 사람들이 하는 질문의 답을 다 머릿속에 채워 넣고 하는 건 아닐 텐데 쉽지 않네요.

[답변]

답변이 너무 늦어져 죄송합니다. 또 제가 이전만큼 머리 회전이 빨리 돌아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비슷한 주제를 두 번이나 다룬 적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라도 우선 그 글들을 참조하시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두 글은, #102 “자꾸 죄의 유혹에 넘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와 # 93 “믿은 후에도 자꾸 죄를 지어 너무 괴롭습니다.”입니다. 이미 늦었지만 이 글들을 함께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또 상당부분 그 글들에 답변이 나와 있으므로 가능한 중복되지 않은 차원에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실컷 기다리게 해 놓고 간단히 답변 드리겠다니 두 번이나 죄송합니다.

질문에 답이 있다.

질문하신 가운데 답변이 이미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것만도 사실은 믿음 가운데 들어왔고 아주 좋은 믿음입니다. 불신자는 인간은 완벽할 수 있고 서로 힘을 합하면 이 땅에 얼마든지 유토피아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완벽하므로 하나님의 도움은 전혀 필요도, 요구도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 같은 실망과 당혹이 자주 생기는 것은 모든 신자가 겪는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물론 일상적(日常的)이라고 해서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신자로선 정상적(正常的)인 것은 아닙니다. 비유컨대 학생은 매일 공부하기 싫지만 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하고, 또 공부에 왕도(royal road)가 없듯이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결국은 승리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의 정답도 오직 하나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세상사에는 그나마 1% 영감을 갖고 태어나는 천재가 있지만, 영적 문제에선 아무도 그러지 못합니다. 모든 자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영적 시체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간섭해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천주교에선 고해성사라도 할 수 있지만 개신교에는 그런 절차가 없어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고해성사 때문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뤄졌지 않습니까? 그가 수도원 수사시절에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아 고해에 정말 모든 힘을 쏟았던 적이 있습니다.

오죽 열심히 했으면 고백을 받아주는 신부가 지쳐서 엄마를 죽인 정도의 죄가 아니면 다 용서 받았으니 그만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기억나는 대로 미주알고주알 6시간을 회개 했더니 정말로 다 용서 받은 것 같이 마음에 평강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순간 지금까지 고백했던 것보다 더 중한 죄가 떠올랐습니다. 결국 아무리 진정으로 회개를 많이 해도 결코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예가 처음 구원 받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알게 모르게 죄 때문에 괴로워서 회개하고 있고 또 이 질문을 하게 된 것 자체도 이미 회개를 열심히 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럼에도 상담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회개로는 도무지 근본적 해결이 안 되더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성화도 회개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치입니다. 학생이 공부하기는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나아가 게으름 부린 일을 두고 거의 모두 회개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전히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에 왕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믿은 표시와 능력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으니 당혹되고 불만입니다. 거기다 이제는 불신자 시절에 없었던 염려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다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알고도 죄를 지으니 자기의 죄질이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구원 받은 의미

다른 모든 종교는, 천주교도 말로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같은 맥락임, 인간이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은 결과를 없애는 절차를 준행하면 그 죄가 씻어집니다. 신 앞에 회개를 하거나, 고쳐서 더 이상 같은 죄를 짓지 않거나, 그에 상응하는 공덕을 쌓거나,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로도 구원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의 루터나, 구안록을 지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를 필두로 많은 신앙 선각자들이 그런 모든 절차를 다 해보았지만 결론은 한 결 같았습니다. 죄의 본질이 행동으로 지은 결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 무교회주의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자신의 구원 과정을 지은 그 책은 아주 참조할 만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거나 찾기는커녕 아예 원수가 되어 있다고 선언합니다.(롬3:9-18, 5:1-11) 사단이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합니다.(고후4:4)  도덕교육의 부족이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속에서 죄가 끊임없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마15:1-20) 한 마디로 이미 죄인이 되어 있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길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길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성령의 거듭남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고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 문제에 이르면 실제로 죄를 짓고 있기에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의미와 죄의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꾸 잊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있다면 다시 배워야 하고(사실은 거듭남의 체험 여부부터 따져야 하지만), 잊고 있다면 계속해서 상기하면 됩니다.  

이미 저의 다른 글에서 여러 번 그 두 주제를 다뤘기에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진리 그대로, 죄인이 되어 있는 것 그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다른 말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짓는 죄(犯罪/crime)는 단지 죄(Sin)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요컨대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근본적 분리의 결과 자신과 이웃과도 분리되어서 여러 형태의 부작용과 폐해로 나타나는 것이 도덕적 죄입니다. 다른 종교나 불신자는 바로 이 결과들만 붙들고 씨름하고 있으니 결코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잘 아시다시피 개신교에선 인간으로선 도저히 죄 씻음이 불가능함을 하나님이 잘 아시기에, 그 본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당신의 보좌 앞으로 누구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다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담이 사단의 꾐에 넘어가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진 셈입니다. 여전히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사단 둘 중의 한 길을 선택해서 따라가야 할 책임은 신자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원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이 확보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본성은 여전히 신자 속에 남아 있어서 평생을 두고 그것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전보다 더 격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노예를 예수님에게 빼앗긴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먹이 감으로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여전히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기 종이 되어 있는 불신자들을 노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현실적 축복을 주어서 먹고 마시는 일에 더 집착하도록 할 뿐입니다.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복과 능력

신자가 죄의 문제에 하등 변화가 없다고 여기면 과연 신자가 된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 가장 크게 변화된 증거입니다. 불신자시절에는 죄를 즐겼고  심지어 죄 짓는 자들이 옳다고 여기며 예수 믿는 자들을 틀렸다고 욕했지 않습니까?

예수쟁이들은 뒤로 호박씨 깐다는 흔한 비난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만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필요 있나 큰소리치면서 나약한 자들이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 예수 믿는다고 조롱합니다.

아닙니다. 신자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보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것만도 너무나 큰 복이며 참 인간답게 사는 길임을 확신합니다. 성령의 거듭남으로 불신자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을 알고 또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도덕적 죄에 대해 회개하며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흔적이 양심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행은 시대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의일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살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큰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되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요3:19,20)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영혼이 묶여 있어서 스스로 의식은 못해도 그 영혼에 빛이 없어서 항상 갈급합니다. 루터처럼 도덕을 실천하고 종교 계명을 따라도 절대 평강과 자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만 가능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됨으로써 또 된 후에도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자 권능입니다.

성령이 내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어두움보다 빛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악을 미워하게 됩니다. 여전한 죄의 본성 때문에 자신의 의롭지 못한 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너무나 애통해집니다. 이전에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지만 흰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조금만 흙탕이 튀거나 먼지가 묻어도 그 더러움이 확연히 드러나고 당장에 씻어내고 싶습니다.

신자가 된 증거는 죄를 안 짓는 것은 아예 아니며, 지으면서도 회개를 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죄에 확실히 민감해졌기에 회개를 해야겠고 또 예수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확실히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완벽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나는 그럴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짓는 죄도 다 용서해주실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더 죄책감을 갖는 것은 물론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좌절은 물론 실망까지 하실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자식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부모는 야단은 때때로 치더라도 결국은 다 용서 내지 품어줍니다. 또 철이 없어 미처 부모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자식이라도 부모자식의 관계 자체에는 전혀 변함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이미 얻었다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제물로서의 완전성과 또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해주신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절대로 변화 수정되지 않기에 십자가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보혈을 흘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들로서 제대로 구실을 하려면 아들 된 권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효도를 해야 합니다. 또 어긋나면 부모의 징계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아들이 잘못한 일을 두고 어미 신사임당이 자신의 종아리를 대신 때리자 이율곡이 회개하고 바뀌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용서 다 해주실 것을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은 자식이면서 여전히 불효를 완전케 못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일 뿐입니다. 또 앞에서 말했듯이 사단이 세상의 죄악과 쾌락을 동원해 더 강하게 걸어 온 시험과 자신에게 남은 죄의 본성에 졌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믿은 후에도 죄를 지으니까, 아니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더더욱 성화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생각만큼 진전이 없는 것도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선해지려 노력하는 것도 불신자 시절과 달라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뜻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단순히 자신에게 샘솟는 악한 정욕을 죽인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따지면 수도승들이 제일 경건해야 하고 또 구원에 가장 가까워야 합니다. 또 의로운 불신자들도 어떤 면에선 더 성실히 그렇게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는 자가 더 많이 죄 짓는다고 우습게 여기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것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선 인간더러 세상의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스스로는 죄를 절대 없앨 수 없었다는 처절한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또 세상의 먹고 마시는 것은 썩어 없어질 것임을 확신시켜서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게 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진다는 근본 의미와 출발은 바로 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화도 자신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해놓고 또 무슨 말인가 당혹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스스로 죄성을 죽이는 도덕적 훈련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인생을 사는 자신의 가치관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자꾸 먹고 마시는 것 쪽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하늘의 신령함을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아가 죄를 자기가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정말 힘을 다해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바로 세운 후에 힘을 다해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자나 의로운 불신자나 거룩해지려 모든 힘을 다하는 겉모습은 같습니다. 그러나 불신자 시절에는 스스로의 도덕성만 높이려 했다면 이제는 그 힘을 성령을 따라 믿음을 먼저 세워서 말씀대로 실천해야 하는 두 군데에 경주해야 하는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에 먼저 쏟으면서 말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중략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0-18)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불신자보다 더 거룩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상대적 의를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데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성령의 권능으로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게 되는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질문하신 것 같은 의심과 실망이 들 때마다 오히려 더욱 십자가 진리의 의미를 다시 상기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구하되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게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승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신문에는 기독교 죄인들뿐?

이 문제는 사실은 상식적으로도 전혀 합당하지 않는 비방입니다. 우선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아서 확률적으로 죄인도 자연히 많습니다. 또 거의 모든 종교가 중앙에서 통제하는 체제라 잘못이 불거져도 외부적으로는 쉬쉬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개신교는 개별 교회 중심주의라서 모든 문제가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이 또한 그러니까 더더욱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하나님의 섭리인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 교인이라도 다 거듭난 온전한 신자가 아닙니다. 아마 교회에 적만 둔 교인과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의 비율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자가 많을 것입니다. 비록 변증으로는 적절하지 않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독교 신자가 지은 죄가 아닙니다. 또 이상하게도 교회 다닌다 하면 언론을 비롯해 세상이 크게 떠듭니다. 다른 종교적 배경은 크게 문제 삼지 않거나 아예 발표도 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종교인이 죄는 거의 같은 비율로 짓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기독교인이 죄를 짓는다고 기독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타 종교인이 죄를 범했다고 그 종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예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한 대로 믿음을 가졌다고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덕적 성결이 기독교 신앙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본질 내지 출발이 아님을 그들은 모릅니다.

이 모든 이유를 아우를 수 있는 한 가지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아직 안 비취어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악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의 범죄만 유독 비방하는 이유도 사람은 믿음과 관계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영적 진리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귀신들린 것처럼 사단의 꼭두각시가 되어 완전 헛소리를 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기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기독교인은 죄와 상관없이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해놓고 죄를 마치 마음 놓고 짓고 있는 것 같아 보이니까 더 미운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죄를 씻어서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종교를 가진 자라면 그 씻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함에도 기독교인은 등한히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은 몰라도 죄를 씻고 또 선해지는 일에선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기는데, 기독교인은 범사에 하나님 도움을 받는다고 큰소리치면서 죄를 지으니 더 말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완벽해져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욱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얼마나 인간이 불쌍하고 연약하며 하나님의 긍휼이 꼭 필요한지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점을 증거 하려면 신자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비록 때로는 죄를 짓더라도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여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반성만 한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진짜 새롭게 고쳐야 합니다. 실패하면 할수록, 아니 그러니까 더 그래야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가 가장 약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즉,  그래서 습관성이 되니까 습관성부터 하나씩 뜯어 고쳐나가야 합니다. 정말 주위로부터 예수 믿더니 그동안 쉽게 넘어지든 죄와 허물부터 완전히 고쳐졌다는 말을 불신자에게 들어야 합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과 타협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또 동시에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기독교 구원의 진리를 잘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리임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전하는 자부터 정말 변한 모습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무턱대고 신자를 향해 던지는 비방에 대해 제가 앞에서 열거한 논리적 모순에 대해선 구태여 말해 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래봐야 말만 앞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비난에 혹만 하나 더 붙이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립적 입장에서 말이 어느 정도 통할 것 같으면 함께 설명해주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재차 강조합니다. 죄를 짓되 실망과 죄책이 (심하게) 들수록 잘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거나 오히려 우울해지면 사단에게 넘어가 죄에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근본적 뜻이 우리 스스로는 절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또 다시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징계는 몰라도 정죄한다면 예수님 스스로 모순을 범한 것이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잘 알고계시겠지만 구원과 성화에 대해 더 깊이 배우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진지하게 공부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3/31/2009


운영자

2009.03.31 19:51:28
*.104.238.244

어쩌다 보니 첫 페이지에 문답의 글로만 도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답변할 것이 하나 더 남았고
또 진재용님이 오래 전에 문의하신 자녀의 성경적 양육에 관해선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당분간 질문사절이라는 간판이라도 걸어야겠습니다. ^^

진재용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인내를 갖고 지켜 봐주십사 염치 없는 부탁을 드릴 따름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3.02.16 23:48:45
*.109.85.156

신자가 되었기에 여러부분에서 거룩해져야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나에게 저촉되어지다니~~ 너무 놀라웁다!! 라고 여기면서도 제 맘 속 깊은 곳 그 어느 곳에서는 마치 선택받은 자 같기도 하고, 그 기쁨이 정말 너무 너무 좋아서 자랑하고 싶은 맘도 있고, 그러다가 속에서 솟아난 죄라 인정되는 죄와 제 생각에는 죄가 아닌 것 같은 것을 죄라 지적받을 때 받은 충격들이 어우러져 균형없어 허우적일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신앙에 천재가 없기에 말씀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며 아파하기도 하며 또 변명하느라 땀을 흘리기도 하고 또 자책하다가 우울해지기까지도 하고...그렇게 설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의 속에선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성들을 보고 놀라며 괴로와하기 보다는 지속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하되 피흘리기까지 복종하도록 말씀으로 훈련되어지고 말씀으로 조금씩 성장되어가야함을 늘, 항상, 지속 가르쳐 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음에도 이런 제 속의 죄성들은 그 사랑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아니면 스스로 깨끗해지려 노력하고 싶어하고 아니면 도덕적 죄만을 죄라 인정하기에 다른 죄들은 죄가 아니라 변명하고 싶어지는 그런 여러 죄들을 모두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맘에 시원함을 얻도록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늘 이렇게 십자가 말씀으로 먹고 마시울 수 있음이, 귀한 말씀들로 배움받으며 조금씩밖엔 자라가지 못해 죄송스럽지만, 매일 매일 귀한 십자가의 말씀들이 더더욱 맘의 시원함을 입혀 주기에 오늘도 또 맛있게 말씀을 먹고 힘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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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부활 이전의 성도는 어디에 가나요? [1] 운영자 2009-05-03 2783
161 세례에 대해 궁금합니다. [6] 운영자 2009-04-25 9491
160 신자가 죄를 지으면 믿음이 없는 표시인가요? [6] 운영자 2009-04-24 4593
159 한 성령께서 다른 말씀을 할 수 있는가? [2] 운영자 2009-04-24 1499
158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나요? 운영자 2009-04-18 1455
157 시편 109편에도 복음이 있는가? [2] 운영자 2009-04-17 4197
156 선교사 사례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1] 운영자 2009-04-14 1726
155 교회에서 신자의 복장은 어때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4-09 2661
154 교회의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4-01 1812
» 복음 안에서도 자꾸 죄를 짓는데요? [2] 운영자 2009-03-31 3076
152 십일조 논의에 마지막으로 덧붙여 [10] 운영자 2009-03-30 2202
151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完) [1] 운영자 2009-03-27 1603
150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2) 운영자 2009-03-27 1591
149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1) 운영자 2009-03-27 1795
148 천주교인을 전도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3-25 6666
147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었는가? [1] 운영자 2009-03-19 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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