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사례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조회 수 1726 추천 수 79 2009.04.14 22:22:05
선교사 사례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질문]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고전 16:1-3)

파송교회 혹은 단체에서 파송선교사와 선교지의 교회를 위해서 후원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엔 오히려 선교지의 교회가 파송교회를 후원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고후 8:13)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모여진 헌금을 통해서 개교회의 성장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측면에서 모든 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어려운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돕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상식적으로도 교회가 목회자와 그 가정을 충분히 지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생활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의문이 들었던 것이 있었는데 왜 선교사에 대해서는 그런 상식적인 생각들을 성도들이 잘 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선교와 그리고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이 큰 이유도 있겠지만 성도들이 선교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비량 선교사가 아닌 현지에서도 당장은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의 전임선교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교사님 가정은 파송교회에서 매월 30만원씩의 후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재정적인 필요는 모두 개별적인 후원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자녀가 셋인 선교사님가정은 당연히 생활 형편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파송교회 담임목사님의 사례비는 최소 4,5배 이상입니다. 차도 있고 집도 있으십니다. 이런 상황은 제가 아는 그 선교사님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에서 있는 보편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사례비를 받아야 할 정당성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밝혀주셨는데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재정적 후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좋으며 한국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생활이 현저히 대비되는 현실의 상황이 만약 성경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고쳐져야 좋을지도 알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 주는 것이 당연하고 더 형편이 어려울지도 모르는 선교사들은 많은 성도들에게 생계유지로 인한 헌금을 요청해야 하는 현실의 상황에
안타까워하시던 한 선교부장집사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답변]

이 주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사실상 이미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선교사도 전임 목회자이면 파송 교회나 단체가 생활하기에 충분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례비를 주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것과, 최근 전문인 혹은 비즈니스 선교로 대체하는 것은 선교사 개인과 해당국가의 사정에 따른 것이지 성경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성경적 원리보다는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따져서 적절한 해결책이 없을지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드리는 방안도 단지 개인적인 제안에 속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도 평균케 하자.

먼저 예의 성경구절은 선교지 교회와 파송 교회간의 협력 즉, 선교 비용이나 선교사 사례와 직접 연관된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이 밝히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용도 헌금이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에 대기근이 들었습니다.(행11:28) 거기다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히 더 어려웠던 몇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하느라 재산을 처분하여 생업이 없는 자가 많았고,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에 이방인의 경우와는 달리 저소득 소외계층이 주로 먼저 믿었으며, 나아가 유대교의 기득권층에게서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행세깨나 하는 유대인들은 나사렛 이단으로 매도된 기독교를 당연히 멀리 했을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있던 바울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그는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딱한 사정을 이야기해 부조를 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둔 돈이 아주 많아서 본인이 직접 들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로 했습니다.(고후8:20) 성령의 경고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결국은 로마까지 가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소속된 교회나 파송한 교회가 따로 없었습니다. 성경에 거명된 각 지역의 교회들을 거의 바울이 세우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하나 정하라고 하면 오히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였습니다. 요컨대 선교지 교회가 파송 교회를 도운 예로 참고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신에 바울이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 말한 그대로, 여유가 있거나 최소한 핍절하지 않은 교회는 가난한 교회를 도우라는 뜻입니다. 한 교회 안의 성도 간에도 십일조로 구제하여 평균케 할 뿐 아니라 교회들 사이에도 자발적으로 연보를 내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선 교단, 교파의 구분이 없었고 오늘날처럼 조직체계가 완전히 굳어진 교회들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믿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인식하에 나라, 인종, 문화, 제도, 지역 등의 구분 없이 온 지역의 교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부터 한 마음이 되어 개척한 교회들인데다 오직 예수만 머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비록 여러 현실적 제약이 따르지만 성도와 교회는 “평균케 하라”는 성경적인 뜻을  살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대형 교회 추세로 흐르지만 아직 농어촌과 도서(島嶼)지역에는 개척교회와 미자립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형 교회가 이런 연약한 교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대형교회로 인해 갑자기 교인이 줄어버린 이웃교회의 아픔을 함께 걱정할 줄, 최소한 여러모로 고려할 줄은 알아야 합니다.  

선교지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역으로 파송 교회까지 도울 수만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사실은 아무 부족함 없는 파송교회보다는 선교지 내의 다른 연약한 개척교회나 미자립 교회를 도우는 것이 더 급선무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연약한 선교사의 사례 문제라는 논의와는 무관합니다.  

목회자를 잘 대우해 주라.

많은 한국 교회가 목회자 사례에 대한 인식이 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목회를 하고 있지 않기에 중립적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평생을 주의 종으로 헌신한 사역자 본인은 당연히 사례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이미 전해진 복음이 혹시라도 방해 받지 않도록 정말 온전히 투명, 청렴, 공정, 검소, 절약해야 합니다. 물론 바울도 때로는, 특별히 로마의 가택연금이나 지하 감옥에 있을 때는 교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절대 돈으로 인해 성도들로 시험 들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목회자는 돈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은 본을 신자들 앞에 확실히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역자의 사례비를 주는 것은 주의 종으로 헌신한 자의 그런 자세와 생활방식과는 별도여야 합니다. 형편이 되는 교회라면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전임사역자에게는 최소한 그 사회의 중간정도 수입은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헌금으로 제일 먼저 지출해야 할 일도 목회자의 생계 보장입니다.

레위인을 위해 십일조를 제정한 뜻도 잘 따져 보면 목회자 생활을 평균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간단히 인구 비율로만 따져도 다른 열한 지파에서 십일조를 내면 레위 지파는 중간 정도 생활을 하고 혹시 남는 것은 구제나 성전 운영 경비로 사용하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포로 귀환 이후로 열 세대가 모이면 회당을 지은 이유도 십일조로 회당장의 생활이,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다면, 더도 덜도 아닌 중간 정도로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생계 수단이 있었다면 회당 운영경비와 구제에 사용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평균케 하라는 성경의 뜻을 현대 교회가 목회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사역자게에 부동산 같은 재산이 있다고 사례비를 적게 주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상 그 부동산을 팔아서 생계에 보태라는 강요나 다름없습니다. 사역자가 노후 대책으로 갖고 있을 수도 있는데 교회가 나서서 개인 재산을 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 교회가 직분에 서열을 두어서 사례에도 차등을 두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대표적 예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사례에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물론 담임 목사의 경우 여러 부수적 경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적 경비의 사용 한도를 더 많이 잡아주면 되지 사례비 자체를 몇 배로 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업무 성격의 경중(輕重)을 따지고 근무연수 같은 기본 요인은 당연히 사례에 반영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직분은 그 역할과 기능만 다르지 일반 회사처럼 중하거나 경한 구분이 사실상 없습니다. 따라서 전임 직원의 사례는 근무기간만 감안하되 판공비 사용한도에서  일부 차등을 주면 됩니다. 공적 경비의 관리는 당연히 객관타당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또 의료 산재 보험, 은퇴 연금, 퇴직금, 휴가나 초과 근무 수당 등 기타 지급도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대로 철저하게 준수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도 직분에 따라 또 다른 차별이 있어선 당연히 안 됩니다. 무엇보다 전임직원들의 의료 보험과 자녀 교육과 은퇴 후의 보장만은 아주 관대할 정도로 잘 고려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라서 특별히 더 잘 대우해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현실적 이유로 일반인처럼 재테크나 노후를 위해 따로 준비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누차 강조하지만 일반 교인들과 비교해 평균되게는 해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도 엄연히 직장이므로 기존의 법규를 솔선수범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모든 것을 희생 감수하며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어도,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듯이 교회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 인식은 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돈과는 초연한  길을 가야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자원했으니 사례가 상식적인 경우보다 적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우선 지출 항목을 교회를 키우기 위한 행사와 건물 신축 등에 둡니다. 돈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서 당연히 가난하게 고생해야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돈이 목적이 되거나 영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재정 관리를 합리적 규정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하는 것이지 무조건 지출을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최소한 일용할 양식과, 자녀 교육과, 노후 대책이 상식적 수준에서 보장되면 오직 말씀과 기도에 더더욱 전무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목회자가 스스로 교회 형편이나 더 시급한 사역 목표를 감안하고 또는 더 겸양하고 절약하기 위해서 사례비에서 헌금으로 교회에  되돌려 주는 한이 있어도, 교회는 일단 당시의 중간 수준은 최우선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의 전체 재정이 그럴 수 있을 때를 전제로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재정 자립이 될 때까지는 전임사역자들부터 허리를 더 졸라매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고생해도(?) 된다.

선교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당연히 또 다른 목회사역자입니다. 오지를 탐험하는 모험가나 선각자가 아닙니다. 교회나 교단이 파송하였다면 또 자비량, 전문인, 비즈니스 선교가 아니어서 별도 생계 수단이 없다면 당연히 전임 직원입니다. 선교지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는 자기 교회나 교단 직원으로 생각해 목회자와 똑 같이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선교사는 사례를 훨씬 덜 주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심지어 목숨 걸고 순교하러 가는 자처럼 취급합니다. 고생을 사서 하려고 자원했으니 구태여 많이 안 주어도 된다고 여깁니다. 나아가 어차피 개척한 현지 교회에서도 사례비를 받을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기도 합니다.

현지 사정과 파송한 교회의 사정은 별개입니다. 물론 선교지의 대부분이 본국보다 생활비가 저렴하게 듭니다. 그럼에도 현지의 중간 수준의 생활과 사역 경비는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개척한 교회의 헌금은 당분간 완전 자립이 될 때까지 선교사 사례보다 교회의 다른 사역경비에 충당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파송 교회에 의존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하루빨리 자립하여 지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교사들의 사례가 적어진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수요공급과 부익부빈익빈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들의 재정 형편에 비해 선교 자원자가 더 많으니까 자연히 사례는 적어집니다. 또 대형교회나 교단들은 사례를 적절히 하니까 선교자원자가 많이 몰리며 파송도 많이 하게 됩니다.

넘치도록 많이 자원했으니 교회 책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선교에 대한 범교단 또는 범교회적인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어 있고 또 선교사들 또한 솔직히 주먹구구식으로 자원하여 턱없이 적은 사례비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무턱대고 현지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의 담대한 헌신이 좋은 결과를 맺는 수도 많지만 어쨌든 현지에서 상당기간 고생은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별 교회들이 대외 과시용(?) 실적 위주의 선교를 많이 합니다.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면서도 금방 그럴 수 있을 것처럼 해서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또 처음 지원을 약속한 것과 달라지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물론 선교사도 마땅한 후원교회를 구하지 못해 쥐꼬리 같은(?)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교사의 궁핍한 형편과 교회의 실적 위주 정책이 서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선교사의 사례비는 본 교회 목회자보다 오히려 세심하게 감안해 주어야할 요인이, 꼭 금액적인 것이 아니라, 더 많습니다.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면 본국 사정에는 무지하고 주위 연고도 없어진 상태가 되기에 선교지에서 뼈를 묻지 않는 한 노후 대책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또 선교사 자녀들까지, 선교사 본인과 가족이 아무리 자원했다 해도, 부모와 함께 희생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지에서나 본국에서의 교육을 적절하게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선교지에는 항상 온갖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겪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보험이나 비상금 등의 대비책도 세워야 합니다.    

개별교회는 선교에서 손을 떼어라.

상기에 말씀드린 것이 너무 이상적이라 도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적절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물론 이 해결책 또한 한국 실정에는 잘 안 맞아(?) 이상적이긴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방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이 오랫동안 시행해온 것처럼 개별 교회는 선교에서 손을 떼고 교단 차원에서 전적으로 맡는 것입니다.

개별 교회는 선교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선교를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가르쳐서 자원자를 많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일단 자원자가 나오면 그 선발, 교육,  파송, 지원, 관리 등은 교단본부의 해외 및 국내 선교부가 도맡아 시행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개별 교회는 선교지원금을 순전히 자원해서, 최저나 최고 한계가 없다는 뜻임, 부담합니다. 자원이기에 선교사가 배출 된 교회는 물론 한 명도 나오지 않아도 많이 합니다.

교단에선 선교지 현지의 사정에 맞추어 중간 수준의 생활비는 보장해 줍니다. 은퇴 연금도 물론 들어줍니다. 특이한 것은 어린 자녀가 있으면 최소한 커서 중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가능한 파송을 하지 않습니다. 열악한 현지 환경과 교육수준에 자녀들마저 희생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원칙과 제도는 다른 부분에도 확대 적용합니다. 교회 학교의 모든 교육 자료를 교단총회의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잘 개발하여 염가로 혹은 무료로 각 개별 교회에 보급합니다.  다양한 주제의 단기 세미나 자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은퇴 연금을 직접 관리해 줍니다. 교회 개척할 때에 일정 기간 지원을 해주고 교회 건물이나 부지 구입을 위한 대출도 해줍니다. 긴급 재난이 일어나면 물적 인적 지원을 교단 차원에서 아끼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개별 교회는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으로 전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데에만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의 선교, 교육자료 개발, 목회자 노후 보장, 교회 개척 경비 등은 교단이 전부 맡아 줍니다. 놀랍게도 그 경비가 소속 교회들의 자원부담금으로 충당되고도 남습니다. 헌금 총액의 반 이상을 교단에 그런 경비로, 세부적으로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협력기금이라는 명칭임, 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사실은 개별 교회들이 선교, 교육, 구제와 또 연약한 다른 교회와 목회자들을 넘치도록 후원하는 셈입니다. 또 아무리 작은 교회도 선교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뜻으로 운영만 잘 된다면 교단이 존재할 필요성은 오히려 더 절실하지 않습니까?
    
선교사로선 당연히 물질에 쪼들려 사역이 위축되거나 시험에 들 이유가 없습니다. 선교사 스스로 후원 교회를 찾아 나설 이유도 없습니다. 또 파송교회의 눈치를 보거나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헌신하여서 선교 현지에 적합하도록 언어를 비롯해 체계적 훈련을 받고 준비만 하면 됩니다. 자녀 양육과 노후 대책도 시름을 놓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주 큰 단점도 있습니다. 생활에 걱정이 없으면 복음 전파에 전념할 것 같지만 선교사도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나태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또 시급히 교회를 개척해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생활해야겠다는 인식이 없으므로 일대일 개인전도나 성경공부에 혹은 기존의 다른 사역을 지원하는 수준에 계속 머물 수도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한국 선교사들이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도 오직 열정만으로 선교할 때에 오히려  열매가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현지 법규를 뛰어넘는(?) 저돌적 선교로 더 빨리 과실이 맺힐 수 있습니다. 양쪽의 장점만 취하고 단점을 버리면 즉, 생활 걱정 없이 복음의 열정만 살아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인간의 죄성과 현실적 여건이 잘 허락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선 자연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또 선교사의 피와 땀이 뿌려져야 올바른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에선 얼마 전까지 한국인 자원자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선교를 활기차게 하고 있고, 자원자가 너무 많고, 또 솔직히 한국 선교사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한 부작용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의 지원자도 주는데다 그 열매가 더디 혹은 안 맺히는 경우가 많아서 수년 전부터 한국인 자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게을러진다는 단점은 있지만 선교사에게 열정과 지원 두 날개를 다 달아 주어서 선교에만 전념토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에 하나님께서 한국인을 선교의 특별한 도구로 쓰시는 것은 분명하며 어떤 결과를 맺을지는 그분의 뜻과 한국 선교사들의 변하지 않는 복음의 열정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지 또 한국 선교사들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정말 잘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의 특성  

미국 남침례교의 예가 이상적 해결책은 될 수 있겠지만 한국의 실정과 신자들의 인식이 아직 그렇게 따르지 못해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한국교회의 선교 열정의 부족에 기인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강조했으니까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범교단 범교회적인 체계적 관리가 되어있지 않고, 신자와 교회들의 재정 관리가 허술하며, 헌금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합리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거기다 한국인 특유의 사정이 몇 가지 더 보태어집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가뜩이나 교회가 외형적 가시적 실적을 중시하는 데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어떤 형태로든 선교를 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무리해서라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이왕이면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여러 선교사들한테 나눠서 지원합니다.

바꿔 말해 선교를 비롯해 모든 사역을 개별 교회가 자체적으로 전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교회끼리 연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단순한 일회성 행사로는 잘 모이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그것도 지속적으로 상호 양보하면서 협력하는 일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교회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자체 교인과 교회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인종, 문화, 관습, 언어, 경제, 사회 여건 등을 뛰어넘는 비가시적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인식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 우리 교인, 우리 목사에 집중합니다. 물론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열정을 유지하는 데는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대외적 사역에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재정도 자기들이 전부 관리해야 합니다. 예의 미국 제도를 채용하려 해도 누가 선뜻 교단분담금을, 그것도 수십 프로씩 내겠습니까? 나아가 그 각출한(?) 돈을 어떻게 공평하고도 객관타당하게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낸 교회가 권세 잡고 좌지우지 할 것이므로 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한국인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서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선 범교단적, 범교회적 선교지원 체계는 솔직히 요원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개별교회에서 선교와 재정 관리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또 전적으로 담임 목사의 사고와 실천에 달렸습니다. 한국 교회에선 담임 목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통령과 방불하기, 때로는 더하기 때문입니다.  

담임 목사부터 사례비를 적게 받아 희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재정을 투명 공정하게 운영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또 구제와 선교 등 대외 사역에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그럴 필요성에 대해 성경에 의거하야 철저하게 교육시켜야 합니다.

나아가 선교사를 비롯한 전임사역자의 대우에 대해선 중간 수준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을 교인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부교역자에 비해 몇 배나 더 받지 말고 공적 비용은 전부 판공비 범위를 정해 영수증으로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고 사례비는 균등하게 받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대형 승용차보다 실용적인 소형차를 직접 운전하는 본도 보여야 합니다. 대신에 꼭 필요한 공적 사역이라면 큰 금액도 당당하게 교회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이상적인 대책입니다. 그렇게 하는 담임 목사가 사실상 드뭅니다. 결국 부담은 선교사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도 이 문제에서만은 그리 자유스러운 입장도 못 됩니다. 후원자가 확실치 않거나 후원금이 충분치 않은 상태임에도 선교에 헌신하여 현지에 나가 있다면 그런 여건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후원하는 교회가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못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수요공급의 원칙이 작용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선교사의 대책은 없는가?

결국 선교사로선 현지에서 자비량, 전문인, 비즈니스 선교를 하는 것이 재정적인 면만 따지면 최선입니다. 종교적 박해가 없어도 그렇습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대책은 하나뿐입니다. 현지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이제 막 복음을 전했거나 전하려 하는데 금전적 부담까지 지울 수는 차마 없습니다. 참으로 막막합니다. 결국 위의 질문에 막상 아무런 답변도 드리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럼 차선의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계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지교회설립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헌금에 대해 올바른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사역자 사례비에 대해서도 성경에 근거해서 오히려 온전히 가르쳐야 합니다.

단순히 십일조 같은 구약규정이나 신약의 헌금에 관한 말씀에 대해 설명해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서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재정 관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에 돈이 여러모로 필요함을 눈으로 보고 체험으로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조직체 교회가 되기 이전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부터 그래야 합니다.

예컨대 교재(敎材)와 교제(交際)에 소요되는 자금을 가능한 처음부터 교인들에게 분담토록 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돈이 용도와 목적대로 정확히 사용되었고 또 그럼으로써 자기들에게 영적 유익을 받았다고 확실히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 선교사부터 근검절약하며 검소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절대로 외모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아무리 적은 모임이라도 교회로 발전할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인지, 그 소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교회 안에서 전임 사역자가 어떤 위치인지, 지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대외적으로도 선교와 구제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등등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헌금을 직접 가르치지 말고 교회론을 가르치면 자연히 헌금과 목회자 사례에 관한 교육도 겸하게 될 것입니다.  

순전히 객관적인 측면에서 헌금은 결국 자기 돈을 특정한 용도가 불명한 채 교회에 내는 것입니다. 그럼 그 돈이 사용되어진 용도와 결과가 분명히 자기에게 유익이 되었다면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헌금을 낼 것입니다. 자기가 낸 돈이 낭비되고 있거나 비성경적인 용도로 사용된다는 느낌이 들면 아무래도 주춤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교회가, 선교사가 절대적 최우선적으로 영적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된 교인들이 주의 일에 자원해서 헌신하게끔 해야 합니다.  요컨대 자연적으로 교인이 증가해서 헌금도 자연적으로 증가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일은 정말로 성령이 역사하여야지 선교사의 인간적 노력이나 현실적 방안만으론 부족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지역에선 아예 다른 생계 대책이나 충분한 지원을 받고 선교에 임해야 합니다. 또 선교는 자유스럽지만 복음의 불모지에선 자립까지의 기간이 상당히 걸릴 것을 각오해야 하고 그 동안에는 동일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현지인이나, 후원 교회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채워 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미국 남침례교회는 교인이 한 명일 때부터, 즉 가정에서 작은 모임으로 시작할 때부터, 헌금을 거두어 그 반(半)을 앞에서 말한 교단분담금으로 내었습니다. 실제로 $1이면 50센트라도 내었습니다. 말하자면 선교, 구제, 다른 교회를 평균케 하는 일에 처음부터 동참해서 계속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 참여한 교인들도 목사님의 뜻과 교회의 소명을 정확히 알게 되었고 또 그 수행 방식에도 납득했습니다. 반이나 대외적으로 나가도 부담이 된다거나 아깝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는 늘어나고 교회도 더욱 성장했습니다. 교인들이 헌금 관리를 훤히 알 수 있도록 철저하고도 투명하게 관리되었고 그 전에 십자가 복음이 정확히 전해진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대책일 것입니다. 미국 남침례 교단 같이 중립적 독립 기관이 없지만 교회 스스로 그런 원칙을 갖고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누구가, 복음이 제대로 안 들어간 선데이 크리스천은 빼고, 헌금을 아끼며 또 그 헌금으로 선교사에게 사례비를 주는 것을 주저하겠습니까?

4/14/2009

아가페

2009.04.15 02:45:51
*.216.87.229

답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안들에 더하자면
현지에서 한인목회를 하면서 선교또한 감당하고
현지에서 전문인 선교사들을 세우는 사역도
선교의 좋은 도구라 생각합니다.

결국 지금의 한국교회상황 에서는 담임목사의 인식이 바뀌는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갔을 때
담임목사님께서 사례비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교회가 제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니깐
나눠 먹을 수 밖에 없다" 라고 표현했던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습니다.

배부르면 나태해지는것이 인간의 죄의 습성인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더 절실히
간구하게 되고 또한 그런 상황에서
사역의 열매들이 더욱 많이 맺혀지는 것이 맞습니다.

비단 선교사들 뿐 만이 아니라
한국의 목회자들도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참된 진리로 성도들을 양육한다면
한국교회가 조금더 바른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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