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

조회 수 2806 추천 수 72 2005.10.15 02:13:02
신자의 영적 성숙과 현실의 행복

[질문]

안녕하세요. 목사님.
목사님의 깊은 묵상의 글들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목사님의 글들을 읽다가 (팔복에 관하여) 마음속에 드는 질문이 들어서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보통 복이라 생각하면 현세의 형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건강이라든지, 안정된 직장, 시험합격, 자식의 형통, 재산등등... 예수님께서 하신 복의 의미는 물론 목사님께서 지적해 주셨듯이 그 내용과 차원이 다를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신약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현세의 복에 대해 언급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도 다 잃었다가 몇 배로 얻게 되었고, 솔로몬의 소유와 지혜도 긍적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장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복으로 언급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삶의 최대의 기쁨으로 만들어가는 성숙해가는 성도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닥쳐진 현세에서의 복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닌가요?
여전히 인간육체의 모습을 지니고, 죄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세의 복 (안목의 정욕을 충족시켜주는 것) 의 갈망을 뛰어넘어 성숙의 길로 안착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너무 간과하고,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합한 예는 아니지만, 이상의 나라를 건설하려다가 현실적으로 망해가는 결국에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사회체제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나약함, 죄성, 기본적성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이런 사회체제와는 다르겠지만, 목사님의 말씀적용이 과연 모든 나이의 세대에 모두 적용될 수 가 있을지 혼동이 됩니다. 만일 살다가 은퇴를 해서 이제 사람들과의 경쟁을 할 필요도 없고, 혼자 조용히 살게 되었을 때는 얼마든지 성숙의 단계로 가는 환경이 될 것도 같은데, 돈이 없어서 자식들 학교준비물도 잘 못 사주는 부모에게, 성숙의 단계의 길만을 제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조리 있게 잘 정리하지 못한 것 같은데, 대강 제가 여쭙고 싶어하는 것이 뭔지는 조금 이해가 되었기를 바라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목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바른 성경의 적용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모든 성도들이 궁금해 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딱 부러지게 정리를 해주지 않는 문제를 거론해주셨습니다. 제가 드리는 답변도 과연 명확하게 정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해보려 합니다.

왜 혼란스러워 하는가?

신앙을 현실의 형통과 연결 시켜 해석할 때에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 갖고 있는 궁극적인 뜻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이뤄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리가 잘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신자를 다루시는 모습을 단편적, 부분적, 사례적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실의 형통을 축복으로 받은 욥과 솔로몬 등의 사례가 있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도 그런 뜻이 내포된 말씀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만 들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형통을 복으로 받은 사례나 또 그런 약속의 말씀도 앞뒤 문맥을 잘 따져서 읽어 보면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8장의 그 유명한 축복도 결국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율법대로 지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않습니까? 나아가 율법대로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면 그들 앞에 구태여 축복과 저주 두 갈래 길을 제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질문자님이 예로 든 욥의 경우, 하나님의 뜻은 그의 신앙을 정금 같이 만드시는 것에 있었고 모년에 받은 두 배의 축복은 그 결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욥이 이유 없는 고통에 대해 꼭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덤비니까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당신을 향한 경배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또 그 경배는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직접 하나님의 선하심을 겪어야만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라는 고백을 욥기의 결론 격으로 그로 하여금 토로하게끔 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그가 애초에 구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지혜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을 그에게 주었습니다.(왕상3:4-15) 말하자면 부와 영광이 결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솔로몬이 재물과 명예를 멀리하고 선한 것만 구했더니 하나님이 예쁘게 보아 부와 영광마저 보상으로 주었다고 단순하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혜롭게 나라를 다스리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그러면 나라가 부해지고 백성들이 평안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따라 오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구하면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는 약속도 앞 뒤 문맥을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구하는 것마다, 찾는 것마다 주시겠다고 약속 하지 않았습니다. 구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반드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응답도 기도의 결과입니다. 응답 자체가 기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보다 하나님 당신과의 교제와 동행이 궁극적 목적이 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평행되는 구절인 누가복음 11:13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 반드시 구하고 찾아서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언제 어떤 처지에서나 하나님과 아름답게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이 약속의 결론으로 기도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성령의 인도 아래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며 또 그 일을 위해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기도라는 뜻입니다.  

필요와 욕심

물론 하나님은 신자더러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문제도 그 안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난 다음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일용할(daily)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없으면 안 되는, 말하자면 없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양식(예수님 당시는 한끼를 이어가는 문제가 심각했음)은 당연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 일용할 필수품을 넘어서는 사치품까지 구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또 마태복음 6장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해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바로 앞 절에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고 그 범위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들, 영어로 하면 꼭 필요한 것(need)이지 신자가 갖고 싶은 것(desire)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신자가 일용할 양식으로 무엇이 꼭 필요한지 이미 아시고 구하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드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염려는 일단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당신의 뜻을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말씀의 결론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세상의 것들에 얽매여 장래 일을 염려하지 않도록 당신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신자가 어디까지가 자신의 필요이며 어디부터 자기의 욕망인지 정확한 구분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예로 드신 “돈이 없어서 자식들 학교준비물도 잘 못 사주는 부모에게, 성숙의 단계의 길만을 제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필요입니까 아니면 욕망입니까? 어디까지나 필요이지 욕망은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구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성숙의 길을 무시 혹은 등한히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숙을 먼저 구하되 현실에 필요한 것은 그 다음에 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에 반드시 그 순서대로 꼭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 난관에 봉착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다른 것은 도대체 신경도 쓸 수 없을 때는 현실 문제만 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슨 문제든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진정한 겸비함으로 하나님께 일단 무릎 꿇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구하는 자가 먼저 되면 됩니다.      

간혹 신자 가운데 신자는 백만 불짜리 집에 살거나 벤즈 같은 고급 승용차를 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요와 욕심을 자꾸만 현실적 질과 양의 수치로 환산해서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욕심과 필요의 경계선에 혼동이 생기고 나아가 신자 스스로도 성숙은 제쳐두고 현실만 걱정한다는 정죄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했고 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이 땅에 있는 재화를 수치적으로 과도하게 원한다고 해서 다 욕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간단한 예로 크리스찬 사업가라면 얼마든지 많은 돈을 벌되 정당하게 벌어 하나님의 목적대로 쓰면 됩니다.

물론 욕심과 탐심의 일차적인 뜻이 필요한 것 이상의 질과 양을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만, 그 외에 신자가 정작 주의를 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신자가 신자의 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 않는 것은 교만이자 욕심입니다. 신자가 자기 믿음에 비추어 마땅히 생각하고 지켜야 할 바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구하되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고 또 그것을 이뤄나가는 과정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아주 큰 욕심입니다. 질과 양에서 과도한 목표가 탐심이 아니라 오히려 제 뜻대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탐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재화의 질과 양은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공급하십니다.하나님이 크리스챤 사업가에게는 필요하면 웅장한 저택과 최고급 승용차도 줄 수 있는 반면에 선교사에게는 가진 것들이 턱없이 부족해도 선교에 꼭 필요한 것들은 모자라지 않게 공급해 주십니다.

필요와 욕심을 자꾸 수치적으로 판단하려 들면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우선 당사자의 사정을 잘 모르는 제 삼자(목사 같은 영적 Mentor)가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필요인지 어디부터 욕심인지 섣불리 충고해 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필요치를 자기가 판단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소원과 필요를 혼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치 않는 것을 원하는 법이 없는 반면에 원한다고 해서 다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본인으로선 필요한 것은 다 원하므로 필요와 욕심의 경계선을 도저히 구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요와 욕심의 경계선을 나누는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에 여전히 수치적으로 따져선 또 다시 혼동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수백만 불의 재산과 몇만 불의 월 수입을, 또 다른 이에게는 겨우 몇만 불의 재산과 월 몇 천불의 수입만 정해 놓았다는 것을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신령한 자가 아무리 기도해본들 이 경계선을 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현실의 형통을 제발 수치적으로 따져 신앙과 연결시키지 말기 바랍니다.

기독교 구원의 특징

기독교의 구원의 두드러진 특징은 죽어봐야 자신이 구원 받을지 심판 받을지 아는 다른 모든 종교와는 달리 살아 생전에 이 땅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분의 자신을 향한 인생의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알아 그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미리 구원을 확신 시켜 주는 이유는 당연히 당신의 뜻대로 남은 여생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두말 할 것 없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고 그 복음 안에 든 자들로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속한 어떤 공동체라도 신자가 있음으로써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보고 맛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직접 증거하는 것이 바로 자기 직업이 되는 풀타임 사역자와, 세속적 직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나머지 평신도들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 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평생 동안에 이 일을 제대로 이루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은 강도의 경우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천국에는 갔지만,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꿔보는 일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은 잘 갖고 있는데 이런 소명 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은 지는 오래이면서도 실제 신자로서의 삶은 십자가 상의 강도와 다름 없는 일생으로 마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현실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의 해결에만 신앙 생활의 전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와 나라는 먼저 구하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먼저 구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필요를 넘어서 욕심을 구했고 그것도 자기 방법과 때만을 고집하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구하는 돈의 액수와는 상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신한다면 당당하게 백만 불, 수천만 불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구하는 액수가 늘어나면 괜히 죄를 짓는 듯 자신이 없어집니다. 자기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자기 일생을 향한 계획 안에 들어 있지 않는데도 단지 자신이 갖기를 원한다고 해서 기도했다는 것을 자신도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신자가 정확히 알아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또 다시 현실의 특정한 일로만 판단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조차 수량적으로 따지려 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맡겼고 그래서 그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에 소요되는 물질과 현실적 형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밖에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특정한 일을 맡기기 이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즉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먼저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라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은 신자가 하는 특정한 일에 관심과 계획을 두기 보다는 주님의 증거만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자가 정작 구해야 할 것은?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구태여 따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준비만 갖추면 됩니다. 그리고 자꾸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와 나라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는 어떤 삶을 살며 어떻게(How) 그리스도를 증거해 신자로서의 소명을 이뤄나가는가에 관심을 먼저 쏟아야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What)을 할까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에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는 신앙이 성숙되면서 차츰 세 단계로 바뀌게 마련이고 또 반드시 바뀌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Give Me” - 간구의 기도입니다. 초신자 시절에는 필요든 욕심이든 잘 구분 못하고 자기 현실적 삶과 관계되는 일만 간구합니다. 질병의 치료, 사업의 형통, 자식의 문제, 심지어 성경공부나 큐티 생활을 잘하도록 간구하는 것도 자기에게만 연관된 것이므로 이 기도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다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이전에는 자기 힘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무엇이든 간구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 차원입니다.

둘째는 “Change Me 혹은 Make Me” - 변화의 기도를 합니다. 쉬운 예로 첫째 단계에선 어떤 사람과 사이가 틀어져 괴로우면 그 관계가 이전처럼 원상회복 되게 해주고 상대를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선 내가 먼저 용서하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계명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소원하게 된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기도는 “Use Me” - 헌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라도 쓰임 받기를 원해 자기를 완전히 그 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현실적 형통과 상관 없으며, 구체적인 직업이나 수입과도 상관 없이 그야말로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완전히 비워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 하에 두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 순간을 그분의 손만 잡고 동행하는 단계입니다.  

이제 질문자님께서 제기했던 “아이들 준비물도 못 사줄 형편에 영적 성숙만 요구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여기에 적용시켜 봅시다. 우선 제발 준비물을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사줄 수 있는 형편과 수입을 달라고 Give-me의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다 준비물을 못 사는 한이 있더라도 실망치 않고 믿음으로 잘 인내할 수 있게(부모나 아이 모두) 해달라고 Change-me의 기도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한 칸 더 나가길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 힘든 형편에 준비물도 못 사가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가 안 죽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당당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데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언제나 즐겁고 오히려 부자인 우리를 도와주니,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우리도 한 번 믿고 싶다”는 말을 듣는 자리에 이르도록 Use-me의 기도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학교 준비물조차 못 사가는 그런 형편 가운데도 신자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면 반드시 그 일을 통해서(다른 일을 통한 차후의 보상이 아닙니다) 당신만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영적 성숙과 현실의 형통

흔히들 영적 성숙을 단순하게 도덕적 행위의 수행, 인격적 품성의 도야, 종교적 실력의 배양 등으로만 해석합니다. 그러니 신자가 돈을 얼마까지 벌 수 있는가라는 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란을 벌립니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도 무소유, 황금을 돌 같이 여기라는 인본주의적 도덕률이 맞고 선한 양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무소유만 강조하면 이 땅에는 거지 아니면 수도승들만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을 번성시키되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하는 신자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벌어야 할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는 돈을 악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돈 자체가 악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처럼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고 돈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자꾸 돈을 멀리하고 품성을 바르게 가꾸고 선행을 베풀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그렇게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얼마나 내어드리느냐의 싸움입니다. Give-me 의 기도에서 Change-me의 기도로 바뀌며 Use-me 기도만 하게 되는 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실현하는 자가 되는 것이 영적 성숙의 본질입니다. 기도 잘하고 말씀 줄줄 외우고 심지어 신령한 영적 은사를 베푸는 것도 그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적게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자가 갖는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이 전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어 변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영적인 성숙입니다. 신앙을 현실적 축복의 질과 양의 경계선을 구분해서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 형편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실현하시고야 만다는 것을 확신해 자신의 전부를 그 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해서 돈이 적어도 참으며 무소유나 검소한 인생관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분명히 그가 풍부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비결을 배웠다고 해서 기도했더니 돈을 주시더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의 소유가 적든 많든 아무 상관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더라는 뜻입니다. 물질과 현실의 형편과 관계 없이 바울이 Use-Me의 기도를 했더니 그대로 다 이뤄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쓰임 받겠다고 기도해 보십시오. 또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과연 그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거나 부족하게 응답하는 일이 있겠습니까?(실제로 이런 기도에 응답이 안 되었다고 불만인 신자를 보았습니까? 아니 그런 기도를 못해 애통해 하는 자라도 있습니까?) 신자가 특정한 하나님의 일을 정한 후에 그 일을 하겠으니 이뤄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Give-me의 기도의 일종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이것 저것 필요하니 마련해 달라는 기도가 자연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 나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십시오”라고 기도하면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 물질까지도 채워주십니다.

학교 준비물을 사가지 못해 안타까운 부모의 심정은 너무 괴롭고 힘듭니다. 거기에 자녀까지 믿음으로 이겨내고 심지어 자녀를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자리에까지 가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연약한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통해서도 주님을 증거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으로 준비물을 사게 해주든지, 믿음으로 인내하게 해 주든지, 오히려 기쁨으로 주위에 도움을 주는 아이로 바꿔주든지 셋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해 주십니다. 더 이상 신앙 때문에 물질의 질적 양적 경계선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지요?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노예로 팔려가고 시위대장의 처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었고 감옥에 들어가 고생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형통한 것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두고 하나님이 형통한 자가 되게 하고 범사에 형통케 했다고 합니다.(창39:2,3, 23) 오직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이 현실의 형통과는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기만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구조적 가난과 신앙

물론 현재의 세상에서 질문자님께서 지적한 대로, 이상의 나라를 건설하려다가 현실적으로 망해가는 사회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사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나약함, 죄성, 기본적성질)을 간과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완악한 죄인이 되었고 피조세계도 왜곡 되었기에 그런 환경 하에서는 어떤 한 사람이나 단체가 이상적인 삶을 실현해 가려 해도 세상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복으로 따지자면 과부와 고아처럼 구조적으로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정말 영적으로 성숙하려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욱 궁핍하고 힘들어지며 전혀 개선될 여지마저 안 보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갈등했던 대로, 왜 악인은 형통하며 그 반대로 의인은 핍박을 받는가라는 의문이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현실의 형통 혹은 궁핍과 상관 없이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가 걸어가는 길과 세상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도와 수준에서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만약 수준의 차이라면 또 다시 현실의 행복을 삶의 질적 양적 수치로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반대라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가치관이 이미 바뀌어진 자가 신자입니다.

돈이 목적인 삶에서 돈이 수단으로 바뀌었고, 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서 하늘의 영원한 복락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만을 실현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자기가 가는 방향이 맞다고 확신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는 다른 방향에 대해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는 법입니다. 반대 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자가 현실에서 세상 사람과 동일한 행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해선 안 되고 오히려 핍박이 당연히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자를 따르면 머리를 둘 곳도 없으며, 신자가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세상에선 환난을 당하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면 현실의 축복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승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의와 진리로 넉넉히 승리하며 자유케 해주신다고 말입니다.

또 현실에서 구조적 가난이란 인류 역사 이래 항상 있어온 것이며 앞으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까지 계속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는 은혜가 그런 어려움을 안 겪게 해 주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 가운데도 당신과 동행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체험케 해주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께서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삶의 최대의 기쁨으로 만들어가며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닥쳐진 현세에서의 복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스러운 것 아닌가"라고 했습니다만, 조금은 따져보아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적 성숙이 신자의 삶의 최우선의 목표가 된다는 것에는 질문자님이나 저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자체도 제 2의 목표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영적 성숙 즉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그 뜻의 실현이라는 오직 한가지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뤄 가는 과정인 현세에서의 현실적 행복을 주고 안 주고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가 현실에서 너무 힘들어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궁극적 목적은 신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기에 사람에 따라 그 일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 현실의 복을 줄 수도, 아니면 뺏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재삼 강조하건대 현실의 축복은 어디까지나 결과로 따라 오거나 안 올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목표하거나 심지어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너무 힘들어 신앙마저 포기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려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면 하나님은 영적인 소생을 위해서도 그 신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쥐어 짜듯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의 반복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신자라도 그 자리에 머물기 보다는 앞으로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전진 시키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 특유의 방법만 사용하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그것이 축복과 고난 둘 중 하나로만 이해될지라도 말입니다.  

현실의 축복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이 너무 심한 말인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대를 하기 시작하면 그 기대가 충족이 안 되면 자연스런 반응으로 실망과 원망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축복을 결과로 인식하면 단지 겸허하게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해당될 뿐입니다. 수용하는 자는 신자이고, 수용하지 않는 자는 심하게 말해 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이뤄진 결과를 거절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어찌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모든 세대의 모든 여건의 신자들이 현실의 행복관에서 이런 성숙한 자리에까지 다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구원의 의미와 세가지 종류의 기도를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신자마다 구원 이후의 삶에서 과연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오직 천국 가는 구원을 얻은 것에 만족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제거하는 데만 신앙을 동원하다 일생을 마칩니다. 말하자면 Give-me의 기도만 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런 자가 오히려 현실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한 가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겹칩니다. 세상이 모순되어서도 그렇지만 하나님이 자꾸 사탕만 달라며 울고 보채는 아이에게 좀 자라라고 일부러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그 원인을 모릅니다. 오직 기도하면 만사 형통인 줄 알고 또 강단에서도 그렇게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조금 나은 신자라 해야 자신을 변화시키려 애를 쓰지만 그것도 도덕적, 인격적, 종교적 변화만 추구합니다. 그런 일은 기독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종교를 안 가지고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만약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가 그것 뿐이라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이유가 전혀 없으며 성령을 보내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광채가 드러나야 합니다. 오직 그 목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거듭난 신자라면 천국의 영생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맞대면 할 때에 Give-me만 한 신자와, Change-me를 시도해 본 신자와, 자기 삶을 일관되게 Use-me로 살았던 신자와는 상급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는 현실의 필요는 얼마든지 구해야 하고 하나님도 책임지고 채워주십니다. 단 하나님 나라와 당신의 의를 먼저 구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외면하십니다. 욕심과 필요를 현실의 질과 양으로 따져선 안 됩니다. 현실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로를 증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 하에 하나님이 주관적으로 주시던지 뺐던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축복 자체를 기대하거나 소망해선 안 됩니다. 결과로 따라오면 당연히 감사함으로 즐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신자가 그분을 위해 어떤 구체적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처지에 있든 먼저 기도하는 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당신과 항상 교제하며 동행하는 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증거하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자가 Use-me의 헌신의 기도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현실의 축복이 따라 오든, 안 오든 자신은 이미 영적으로 성숙해졌고, 또 그 성숙해진 자세와 삶 자체가 행복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불신자 시절에 누리던 행복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현실의 축복 유무가 편안과 불편의 문제는 될지라도 자기 삶과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주지는 않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란 물질을 멀리하거나 적게 소유하는 행복관을 갖는 자가 아닙니다. 물질이나 현세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동행만이 자신의 참 행복임을 확신하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서 증거 되는 것은 예수님 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이르기까지는 세상에서의 많은 희생과 핍박을 통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신비로운 은혜, 무한하신 긍휼, 살아 생생하게 역사하는 능력을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체험해 나가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현실의 행복을 기대하는 자가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다른 천국의 행복관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된 자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soo

2009.07.30 16:11:42
*.130.98.204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주고 계시네요.
정말 믿는 자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2.10.12 22:18:58
*.109.85.156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서 증거되는 것은 예수님 뿐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입술이 되길, 그런 삶이 되길 너무도 소원하는데, 예수님 자랑이 아닌 사람자랑된 듯 하여 죄송스럽고, 그럴 때 마다 이런 영적무지며 또 자신도 모르게 속고있는 교만과 착각들로 인해 맘이 많이 힘이 들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음이 축복임을, 예수님 안에서 자라감이 참 복임을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가도록 고쳐주시는 성령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매순간 더 감격하며 영적무지와 스스로 속기 쉬운 교만과 착각들을 치료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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