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목사님께 답변 드립니다.

조회 수 1950 추천 수 78 2005.12.30 04:45:24
[질문]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 최근에 이런 생각 때문에 고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최초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을 행하려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해당되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님이 임하기 전에는 죄가 죄인줄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으나 성령님이 거하는 성도가 외부적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

[답변]

목사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너무 깊이 파고드셔서 신학적으로 아주 어려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단순히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그 안에서만 묵상하기 때문에, 저의 그런 얕은 지식으로는 목사님의 고민이 해결될 만큼 만족한 답을 드릴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왕에 귀한 질문을 주셨는지라 단지 제 의견을 질문 별로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기 보다는 목사님의 질문하신 요지에 부합한 답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는가?

후세 사람들이 최초 인간 아담과 하와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타락 전과 후를 구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절대적으로 순종할 믿음을 가졌는가라는 질문도 타락 전에 그랬는가를 묻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타락 후에는 그들도 절대적 믿음에 손상이 간 것만큼은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사실은 믿음이 요구될 상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요컨대 보이지 않는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이미 일어난 사건은 사실(fact)로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타락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과 에덴 동산에서 항상 동행하면서 모든 일을 함께 도모했습니다. 아담과 하나님은 언제든 서로 찾으면 만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유컨대 그들은 가정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처럼 항상 함께 기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결코 배반하지 않고 따르게 하는 절대적 믿음이 구태여 따로 있어야 하거나, 그런 믿음을 만들어 키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아들이니까 본성적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이 요구될 때는 있습니다. 아버지가 외출했거나 오래 집을 비워서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 하나님은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동산 어디에서든 시선을 한복판으로 돌리기만 하면 당신을 연상하는 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잠시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 유혹했었고 또 이미 죄의 세력에 넘어간 아담은 선악과를 보기는 보데 이전과 다른 생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가 절대적으로 순종할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단이 유혹해도 죄에 넘어가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적 믿음이 없었기에 시험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이 상대적이고도 가변적인 믿음이나 마음을 가진 자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미리부터 그런 자로 만들었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타락전의 아담은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단지 최초 인간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한 자유의지라는 특권을 부여 받은 자로 창조되었고 믿음 이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경우는 그의 자유의지가 발동 됨과 동시에 믿음이냐 타락이냐의 갈림 길로 나뉘었습니다. 그의 의지가 하나님을 순종하겠다고 작동되면 믿음이 형성되며, 만약 불순종을 택하면 불신앙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자유의지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순종할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야 자유의지가 순종 쪽으로 작동될 것이 아니냐라고 또 다시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거했던 아담의 경우를 오늘 날의 우리와 견주어 비교하면 안 됩니다. 최초 인간 아담의 경우에는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하나로서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아담이 절대로 순종할 수도 있었는데 타락했다면 아예 논리적으로 이치가 안 닿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믿음을 가진 자도 타락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됩니다. 오늘 날의 신자에게 적용하면  한 죄인이 성령 세례를 받아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완전히 모셔 살면서도 다시 그 구원을 스스로 취소하거나 하나님이 취소 시킬 수도 있다는 뜻과 같아집니다.  

요컨대 최초 인간 아담은 믿음 이전의 사람이었지만 자유의지를 왜곡한 바람에 더 이상 인류에게는 절대적 믿음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불완전한 믿음의 소유자, 아니 완전한 불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아시고도 허락하신 까닭은 필립 얀시의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할지라도 자유의지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선 비록 자유의지로 인해 인간에게 어떤 큰 과오가 나타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기는 싫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죄를 지어 고통에 빠지더라도 내 몰라라 하고 완전히 방치 해 두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준비 해 놓으셨기에 인간이 정말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찾아 오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유의지 대신 절대적 순종의 믿음을 주었다면 이미 그 믿음도 자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기계적인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선을 행하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아담에게도 해당되는가?

이 또한  아담을 타락 전과 후로 나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 전에는 선과 악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선만 있었고 악이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분명히 하나님과 사단이 인간의 타락 전부터 있었듯이 선과 악이라는 실체는 이미 있었지만, 인간에게 그것이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과 실재로 체험적으로 인식되고 또 자신의 의지로 행하기는 타락 때부터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아담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은 악이 그에게 힘을 발휘하기 전이라 당연히 선한 것뿐이었습니다.

지금 질문은 아담이 선을 행할 자의적, 자발적 의지가 있었느냐를 묻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타락 전 아담에겐 분명히 그런 의지가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일을 아름답게 대행했으며 돕는 배필을 만나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까지 그가 행사한 의지는 완전한 의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선택의 기로에서 행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의 질문과 연결해 완전한 예는 아니지만 이렇게 접근해 봅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은 언제이겠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이겠습니까? 자의식이 확고하게 세워진 이후겠습니까? 너무 쉽게 어린 아이일 때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린이들의 믿음은 사실은 순진한 믿음이자 어떤 면에선 기계적인 믿음입니다. 아이가 부모에 대해 가지는 그 믿음의 순수성과 세기는 정말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믿음의 표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솔직히 자기의 자유의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본 체험이 아직 없습니다. 자기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 이는 오직 부모님이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으며 100% 순수하게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타락 전의 아담이 하나님에게 갖고 있는 믿음도 같은 성격입니다. 비록 앞 질문의 답변에서 타락 전에는 그가 믿음 이전의 단계라고 했지만, 아담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믿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나 아담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던 때라 그 믿음을 순진하고 기계적인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믿음에 동원된 의지도 아직은 순진하고도 기계적인 의지일 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라 청소년이 되면 스스로 택하여 부모를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아담의 타락과 성격이 동일합니다. 그러다 아들이 장가 가서 아이를 낳아  스스로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면 부모의 마음을 거의 완전하게 헤아리게 됩니다. 비로소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타락 이후의 죄인도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알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자발적 의지가 작동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선이란 항상 하나님 안에서만 완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곳에서 이뤄지는 것은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타락 전 아담이 행한 것만이 완전한 선이며, 나아가 예수를 믿어 거듭난 자가 성령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야만 비로소 선이 완전해집니다. 선을 행하겠다는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 밖에 있는 불신자들도 윤리적인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또 실천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완전한 선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을 때에도 분명히 윤리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또 실천한 세상적 의인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시작하고 마칠 때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담의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타락 전에는 순진한 의지는 있었습니다. 그러다 선과 악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 쪽으로 그 의지를 자발적, 자의적으로 행사했습니다. 그러면 타락 이후의 아담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할 의지를 갖고 태어나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 태어난 구약의 여러 신앙 위인들에 대해서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자발적으로 완전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결핍된 채 태어났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신약시대와는 달리 일시적으로 간섭하여) 그 의지를 회복하고 행사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신약 시대에 와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안에서 거듭나는 신자는 두말 할 것 없이 언제든지 그 의지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작 아담의 경우는 성경은 몇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나고 얼굴에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으며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또 셋을 통해 인류 구원의 조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마도 기록에는 없지만 가죽 옷을 하나님으로부터 지어 입힘을 받고 난 이후에는 아담도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로 바뀌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타당한 성경 해석이 아닐까요?  

3. 성령이 거하는 전이 된 성도가 외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당연한가?

이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 당연하다는 표현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옳고 그른가라는 뜻에선 성도가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당연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는가 없는가라는 관점에선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 질문의 아담의 경우를 다시 보면 하나님이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그를 선택해 구원해주는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풀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어디까지나 의지이지 능력과는 다릅니다. 능력이란 자전거 타기, 수영, 운전처럼 한 번 배우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구단으로 곱하기 하는 것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능력이지만, 미적분까지 풀어보고 싶은 의지는 있어도 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드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령이 내주하는 전이 되었다는 뜻이 모든 죄와 유혹을 이겨낼 능력을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던 자에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자기 삶을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하게 만든 것 뿐입니다. 물론 신자가 성령의 인도와 권능에 의지하면 어떤 죄와 유혹도 물리치고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마저 십자가에 처형 당하기 직전에 오히려 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처절한 심정으로 자백했지 않습니까?

바울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죄와 의지의 문제와 연결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6:17-19)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왜곡되어 오직 죄쪽으로만 굽어져 있어 모든 인간이 선을 행할 의지도 없었고 그래서 죄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그 종 된 사슬에서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100% 하나님 쪽으로만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아담의 타락 전 자유의지의 상태로 되돌린 것뿐입니다.

구원 이후의 신자는 현실의 삶속에서 다시 선과 악, 생명과 죽음, 하나님과 사단의 기로에서 자의적, 자발적으로 그 의지를 행사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성화(聖化)의 구원은 신자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의에게 종으로 드리고 거룩함에 이르라고 신자의 능동적 선택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는 어느 누구도 죽기까지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조금씩 자라 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고도 죄에 넘어갈 수 있게 허락하신 것이 당연한 일인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은 신자가 스스로 선을 택해서 기쁨으로 행하고 악은 자신의 의지로 물리쳐 주기를 원합니다. 성령은 아주 긴급하고도 비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에게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성령의 전이 되어도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는 있지만 그 넘어간 것이 절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옳지 않은 일에 빠지는 실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12/29/2005

이준

2006.01.03 10:15:00
*.207.13.179

목사님 . 감사합니다. 올해도 주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되실 것을 기도드립니다.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성의 있는 답변과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종이 될지 부럽습니다.

뵈옵고 싶은데 너무 멀리 계시군요 . 주님의 주님과 한상에 앉으시는 참 종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사라의 웃음

2012.10.18 23:06:51
*.109.85.156

아담 할아버지가 선악과 먹은 것을 몹시 속이 상했었습니다. 마치 내가 아담이라면 먹지 않았을거라는 착각에 잠시 빠져 보기도 하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너무도 주시고 싶어하시어서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시면서도 그리 하셨군요.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으시려고 그리하셨군요.
성령님의 전이 되어진 성도에게도 이젠 죄를 이길 능력을 원하게 되고, 어서 어서 죄완 거리가 먼 그런 자가 되어지길 원하게되고, 그러다 보면 '뽕' 하면서 마치 커져버릴 것 같은 그런 착각에 너무도 자주 빠져버리게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마치 스스로 선해지는 듯한 그런 교만스럼에..

아주 조금씩 자라가며, 매일 십자가 아래서 자기를 부인하며 겸손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매일 매일 구하며 말씀 가운데 살아가야함을, 정말 그렇게만 살아가야함을 세세하신 설명을 읽으며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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