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에서 자유할 수 있는 한계는?

조회 수 1268 추천 수 47 2011.03.01 21:02:04
전도에서 자유할 수 있는 한계는?


[질문]


유대인 신자를 얻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없는 자처럼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그처럼    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구원관이 제일 중요하니까 전하는 사람의 겉모습이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19 & 22)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동시에 로마시민권자로서 헬라 관습 및 사고에도 능통했습니다. 당시로선 최고 지식인이자 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칭송을 받던 자였습니다. 스스로 육체로는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으면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인생이 뒤집어지면서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또 자기에게 맡기신 이방인 선교 소명의 실현을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 배경을 활용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헬라인에겐 헬라인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는 단지 전도 방식에 관한 설명이지 영적 진리를 언급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여러 종교 배경의 불신자나 무신론자를 전도할 때에 기독교교리를 교회에서 통용되는 방식, 문화, 용어로 무턱대고 전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대와 상황에 비추어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는 전도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상제물과 전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런 원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 적용할 때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열정만 앞세워 간절히 기도한 후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일방적으로 전해버릴 수도 없습니다. (참고로 때를 얻고 못 얻고는 어떤 상황도 무조건 전도할 기회로 삼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라는 말이 바로 이어지듯이 구원여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우선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율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즉, 전도자가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면서까지 전도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또 그와 반대로 율법을 복음과 함께 강조하거나 필수 조건이라고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아무래도 바울 본인이 설명한 예를 살펴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상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실존하지 않기에 이방 종교 우상에 바쳐진 고기 제물도 사실상 우상에 바쳐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진리를 모르는 자가 있는 자리에선 혹시라도 신자가 우상제물을 먹는 죄를 범한다고 오해해 시험 들게 할 수 있으니 절대 먹지 않겠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헬라인만 있는 모임에선 바울도 거리낌 없이 제물고기를 먹으며 교제하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유대인이라면 우상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지식 내지 의심이 있는 자가 있다면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먹었더라도, 나중에 그 문제를 제기해 오면 오히려 전도 기회로 삼아서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실재조차 않는 우상을 상호 비교하며 잘 설명해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내가 주 예수 안에서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4,17)고 선언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는 어떤 음식이라도 먹을 자유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보다는 자신의 영적 실체를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굽이 갈라진 돼지는 부정하다고 여기고 (지금도) 먹지 않는 유대인들과 교제할 때는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5:20,21)    

바울과 베드로의 차이

그러나 이런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실제 상황에 닥치면 여전히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규정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고 또 기억하더라도 정확히 해석 적용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세속적인 것같아 보이는 일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느 선까지 해도 되는지, 최소한 전도에 장애가 안 되는지 스스로 판단하기 무척 힘듭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 교제를 하는 중에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유대 관습은 이방인과 교제를 금하기에 황급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러자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똑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선적으로 행한다고 그를 야단쳤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 교제했고 또 유대인의 관습에도 맞춰주었습니다. 언뜻 바울이 말한 대로 유대인에겐 유대인 행세를, 헬라인에겐 헬라인 행세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전도하려면서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관습을 시행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와 비슷한 경우에 둘 중 더 중요해 보이는, 지금 식으로 말해 교회에 더 유익이 될 것 같은 권세와 재물 많은 사람 위주로 전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양쪽의 비위를 다 맞춰주어야 합니까? 아예 식사 교제는 양쪽 다 하지 않고 교리만 전해야 합니까?

단순히 어느 쪽 관습을 따르느냐 않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저지른 잘못부터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는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져야 함을 몰랐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환상을 통해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계시를 맨 처음 받은 자였습니다. 또 주님은 동일한 의미의 계시를 준 고넬료와 대면케 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그 스스로 열게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믿는 바를 행동으로 완전히 옮기기에 주저했습니다. 아직은 믿음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이 몸에 베여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사마리아도 넘어선 변방, 이방과 다름없는 갈릴리 출신인지라 유대인에 대한 태생적 열등감이 있어서 그들에게 잘 보이려 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복음은 교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그대로 실현되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래서 음식이 복음과 무관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 것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2,23)

만약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에 계속 머물러서 교제했다면 나중에 온 유대인들로선 우선 당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율법도, 정확히 말해 장로들이 정한 유전도 모르는 무식한 어부라고 속으로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을 차별하지 않는 통이 큰 사람이고 또 자기들에게 전해준 복음대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속으로 존경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로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율법과 대비하여 복음을 더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환상을 보여주었고 고넬료와 대면케 해주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방 전도의 당위성을 설명할 자로 부름 받았으면서도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에 절하지 않는 신자

어떤 재벌 회사의 신자 간부가 저녁마다 술 먹는 회식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그런 자리에 초대도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그룹 전체 신년하례식에서 불교신자였던 회장이 부처를 모셔놓고 모든 간부가 그 앞에서 회사의 발전을 빌면서 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간부가 자기 종교와는 무관하게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회장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인지라 부처상에 절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회사 발전을 위해서 제가 믿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회장은 오히려 "당신은 내가 온전히 믿을 만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하면서 사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런 경우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헬라인에게 헬라인이 되라고 해서 무조건 회장의 요구대로 따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나는 신자니까 죽어도 절 안 하겠다, 차라리 파면시키라"고 회장에게 대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 정말 고리타분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이고. 광신 맹신에 빠진 신자라고 매도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배우고 또 그대로 행하다보니 그런 욕을 실제로 듣고 있지만....)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다보니 이방인 즉, "사람"을 차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가장 근본 되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은 죄는 끝까지 저주하되 죄인은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아닙니까? 요컨대 사람을 절대로 외모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관습, 규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질서나 도덕을 바로 세우는 역할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를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게 만듭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유대인과 헬라인이 각기 따로 있기만 하면 아무 걱정 없이 각각에 통용되는 관습대로 전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반드시 함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불신자와 일대일로 만나도 기독교의 관습과 상충되는 일이 비일비재 생깁니다. 그 때에 우리가 반드시 따르고 지켜야만 할 유일한 원리는 바로 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5,16)

재벌 회사 간부는 진정으로 회사도 사랑하고 회장도 사랑해 다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신자라는 외모 즉, 세상에서 통하는 관습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전해서 반드시 신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심만 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 사정이야 어떻게 되던, 또 그런 자리에서 회장 체면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 신자니까 죽어도 절 안한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도 물론 회장을 언젠가는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겠지만, 포교할 대상보다 사랑할 대상으로 먼저 본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그 죄인을 사랑하되 자신이 믿는 복음대로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것입니다.

전도의 더 중요한 원리

나아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믿는 바대로 행하기만 하면 전도의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2:4) 됨을 확신한 것입니다. 또 성령으로 전도된 자만이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한다는 것은 각 사람이 선호하는 방식, 각 민족의 관습과 문화에 잘 적용해서 전도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정말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 모든 허물과 죄를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 주고 싶은 열정이 앞서야 합니다.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를 주님의 자녀로 변화시켜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락을 은혜로 누리게 하고 싶은 진심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설령 전도자가 피전도자의 관습과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경우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먼저 걱정했지, 그때까지 교제했던 이방인은 물론 뒤에 온 유대인들의 심령까지는 진정으로 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의 회사 간부로 인해 그 회장이 당장 개종은 안 했어도 그런 열렬한 불교신자가 기독교와 기독교 신자에 대한 인식은 다시, 올바르게 했을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전도에서 문화나 관습에 차별을 두려하지 않기 보다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복음 안에서 진짜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기 믿는 바대로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며, 믿음의 분량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지 세심하게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는 믿음마저 남들에게 의심받는 행위라면 절대 해선 안 됩니다. 이것들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전도하면서 그 상황에  적합하다고 스스로 판단되는 대로 무엇이든 진정한 사랑과 함께 행하면 됩니다.

바울이 상황에 따라 유대인, 헬라인처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傳播)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6,27)      

본문을 지금껏 설명한 원리로 바꾸자면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면서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되, 주님의 심정으로 불신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몸가짐은 믿는 바대로 온전하게 갖춘 후에, 상대의 문화와 관습에 맞추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질문하신 주제는 전도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하지 않은 사항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본 성경문답 사이트의 #41 "불신자와 함께 술 먹으면서 전도해도 되는지요? (신자와 술 담배)"의 글도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1/2011

정양호

2011.03.02 05:22:21
*.54.202.195

좋은 글입니다.
요즘 선교일각에서는 전도할때에 모스크에서 무슬림과 똑 같이 하면서 예수를 믿거나 선교한다는 운동이 내부자운동입니다.
과연 옳은 전도방법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참고
target=_blank>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23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082

운영자

2011.03.02 16:30:53
*.108.161.206

정양호님

댓글로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올리신 인터넷 주소 둘 다 접속하기가 힘드네요.
혹시 그 글들을 퍼와서 게시판에 모든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올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아니면 제게 이멜로(parkshin@gmail.com) 보내주셔도 좋고요. ^^

정양호

2011.03.03 03:55:30
*.25.255.195

랄프 윈터의 '내부자운동'을 비판한다(1)
복음의 핵심 요소가 변질된다면 분명히 혼합주의요 영적 간음 행위이다

국내의 선교계 일각에서 <Mission Frontier>의 한국어판을 곧 간행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리라는 기대에 앞서, 랄프 윈터(Ralph D. Winter, the general director of FMF)와 그의 팀이 지향하는 문제점을 냉정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한국교회의 바른 선교를 위해 긴요한 일이다.

그는 20여 년을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에 헌신해오면서, 이 잡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선교의 남은 과업과 목표를 제시함은 물론, 정직하게 서구 선교의 잘못을 통찰하고, 탈서구화, 상황화를 외치며 어떤 면에서 세계선교의 나침반 노릇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그가 외치는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이라는 발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몇 년 전 오늘날의 세계선교 동향을 다음과 같이 코멘트하였다.
“한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언제인가? 누군가가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 말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어느 누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두가 다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교회를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나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Messianic Jew’는 어떤가? 한편 자신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안식교, 여호와의증인, 몰몬교, 카톨릭은 어떤가? 보통 신앙의 입장에서 이들은 적어도 성경을 넘어섰거나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넓은 시야를 필요로 한다.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함께 예배하는 시리아의 한 교회의 예나, 힌두크리스천, 유대크리스천, 무슬림크리스천이라는 라벨을 붙여 언급하기 시작했었다. 물론 카톨릭이나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도 성경에서 조금 멀리 나갔을 뿐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인정하는 넓은 시야가 필요함을 역설한다.(Mission Frontier Vol.22, No.2)

랄프 윈터를 추종하는 KWMA의 H 목사도 최근 ‘한국교회의 전방개척 선교세미나’의 발제에서 “하나님의 시각과 범기독교적 관점에서 세계교회에 주어진 전방개척 선교지를 말할 때 개신교를 뛰어넘어 독립교회(아프리카), 카톨릭교회, 그리고 정교회를 바라보는 조금 넓은 시각 내지는 약간의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적어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 중 상당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복음 선교의 우선점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여리고 성의 라합이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같은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중에 있음을 믿는다. 선교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랄프 윈터의 지적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나 참 그리스도인의 잣대를 불필요하게 카톨릭이나 기독교 이단이나 다른 종교에까지 들이대면서 자칫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고 위험한 발상으로 간주한다.

복음의 연속성(連續性) 문제는 기독교와 혼합된 거대한 아프리카 전통종교에서 보듯 오십보백보처럼 그 옥돌을 가리기 힘든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적인 복음운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오히려 다른 이방종교나 성경말씀의 궤도에서 이탈한 혼합된 신앙운동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거대한 흐름, 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참다운 선교학자다운 태도가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넓은 시각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시각인가? 성경대로 오직 예수를 얘기하면 편협하고 배타적이어서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고, 개신교를 뛰어넘어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에큐메니칼 시각이어야 너그러운 우주적 하나님의 시각인가? 그들 중에 상당수가 비성경적, 비복음적 모조품 예수를 부르짖어도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선교할 필요가 없는 양 말하는 그 논리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윈터는 같은 저널 금년 10월호에서는 마치 미전도종족 선교의 결과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려는 듯 이른바 ‘Insider Movement’을 노골적으로 집중 거론하였다.

“초대교회의 헬라그리스도인들, 갈라디아 교인들, 로마교인들은 자신들의 의복, 언어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롬 9:32 롬 1:16) 문화와 우주적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유효한 버전이 무엇인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미국에 전파된 유럽의 기독교는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에서 보듯 아주 성경적이든 그렇지 못한 것들이든, 아주 다른 약 200종을 생산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인 믿음이 어떤 문화나 언어로 옷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흥분되는 일이면서 어지러운 일일 수 있다.

요즘 아프리카나 인도 중국에서는 진짜 예수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인으로 보이지 않고 문화적 측면에서 여전히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로 간주되고 있다. 오늘날의 선교필드의 사람들은 서구적인 정서가 있는 기독교의 문화, 신학, 성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원인 중에 아직도 기독교가 일본풍으로 번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도에는 실제로 가정교회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예배하는 수 백만의 힌두교 예수신자들이 있다. 어떤 곳에는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모스크로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무슬림으로 간주되는 수 천의 예수신자들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 몰몬교 신자들보다 더 순수한 5천만 이상의 아프리카독립교회 신자들이 있다.”

그는 이어서 결론적으로 이러한 ‘Insider Movement’들은 모두가 다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으로만 불리기를 원하는 기독교는 성공적으로 이런 내부(inside) 상황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선교사들의 교회 개척도 결코 ‘체제내부자운동’(insider movement)이 아니다. 이 운동의 경우에 따라 세례를 주기도 하고 아예 없기도 하는데, 나는 가끔 선교사들에게 ‘세례가 없는 예수신자’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우리는 그들이 따르는 실천들이나 그들이 반영하는 아이디어를 모두 지지하고 있지 않다. 성경의 힘은 실로 비밀히 타오르는 불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번역되지 않는다”(“Christian does not translate” F. Decker, United Methodist) 글에서 어차피 불완전한 인간사회에 혼합주의(syncretism)란 당연한 것임으로 교회 지도자나 선교사들은 더 이상 혼합주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랄프 윈터와 그의 팀은 세계선교를 위한 새로운 선교 이슈를 생산하려고 이른바, ‘Insider movement' 논의를 한창 띄우고 있는 것 같다. 선교의 상황화를 강조한 나머지 마치 예수 신앙을 문화적 야합의 한 부류로 몰고가는 인상이 짙다. 예수 신앙이 그 문화를 변혁하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혼합, 통합 내지는 포용한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이다.

그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예수가 아닌 보편적인 예수, 상대적인 예수, 가짜 예수, 사이비 이단에서 말하는 예수든 상관없이 예수 이름만 들먹거린다면 ‘Insider Movement’라는 하나의 거대한 선교의 불꽃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봐주자는 논지로 들린다.

‘오직 예수’라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배타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Christianus)라는 별명은 때때로 죽음의 대명사로 자처해왔다. 복음이 어떤 이질적인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한 문화권에 들어가 토착화 내지는 수용 과정에서 형태의 변질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상 앞에서 마리아 찬송과 기도를 하고 불상 앞에 절을 하고 모스크에서 함께 절하면서 예수 믿는 신자라고 자처하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거짓 선교이며 타협이다. 개혁자들이 외치던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예수 믿음, 오직 은혜 같은 복음의 핵심 요소가 변질된다면 분명히 혼합주의요 영적 간음 행위이다.

오늘날 서구의 기독교가 죽어가고 아주 배타적인 이슬람이 그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바로 혼합주의 때문이 아닌가? 한국에서도 최근에 군 입영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신앙양심 문제로 기꺼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배타적인 여호와의증인이 법의 판결에서 승소하는 모습을 보며 정작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랄프가 말하는 ‘Insider movement’ 같은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선교를 함에 있어서 아마 다른 종교와 갈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며, 선교사가 구태여 개종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선교를 그렇게 강조할 필요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편적인 예수, 상대적인 예수, 변질된 에큐메니칼 복음이라는 잡초가 온 세상을 뒤덮어 과연 성경적인 바른 선교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선교를 빙자하여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체성을 깨뜨리고 성경의 독특한 가르침을 모두 양보하면서 엄청난 선교운동이 이방인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양 분별없이 떠벌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적인 바르고 순수한 선교를 약화,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선교지를 교란시키고 세계복음화를 막으려는 사탄의 계산된 고도의 책략으로 세계선교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차제에 에큐메니칼운동과 로마카톨릭은 성경적 선교개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그 대신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화인류학적, 심리학적인 그럴 듯한 옷을 입혔다. 즉 인간화, 교회가 아닌 세상,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 죄의 회개가 아닌 용서와 화해 등으로 대처하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랄프 윈터의 ‘내부자 운동’을 비판한다 (2)
혼합주의나 옅은 믿음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합리화시키는 운동

요즘 국내외 선교 일각에서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내부자 운동의 정의에서부터 일관된 초점이 없고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 전방개척선교단체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다른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내부에 머무른 채 예수께 향하는 운동’이라고 애매하게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내부자 운동이란 자신이 속한 종교·세계관·관습· 이방문화를 떠나지 않고도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운동으로 이해한다.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은 기존의 자기 종교적인 표현들을 계속 사용하고 그들의 사원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성경적인 모델로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거론한다.

죄에 대한 신양 양심의 가책은 정상적인 신앙의 발로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왕상 5장 18~19절)

하나님의 특별한 만져주심을 체험한 나아만의 신앙 양심은 즉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고백과 동시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당해야 하는 고난이 그를 압박해옴을 고백하고 상담을 요청한다.

곧 18절에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거듭난 자라면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 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인이요 용서를 구하는 것이 거듭난 자의 바른 자세이다.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멀리 선교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도 ‘오직 한 가지 일’이라는 이름표을 단 많은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는 현실적인 신앙문제이다. 특히 주초문제, 주일성수문제로 직장에서 갈등하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미신행위들, 명절 때 가족의 제사 지내는 문제로 갈등하는 신자들의 상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제 때 한국교회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교묘히 죄를 정당화시켰다. 그렇다면 신사참배도 한국판 내부자 운동으로 볼 때 잘 되었던 내부자 운동으로 볼 것인가?

초신자라 할 수 있는 나아만 장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저질러온 죄와 앞으로 다가올 죄악의 압력 즉, 이렇게 하자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고, 저렇게 하자니 세상의 주인을 거역하게 되는 상황이었다(세상의 왕을 기쁘시게 할거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행 4:19)).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데 문화적·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대해 정직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아마도 첩첩 산중으로 꽉 막혀 숨막힐 듯한 상황 속에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며 죄의 고통과 현실의 암담함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고 아파했을 그의 모습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평안히 가라는 의미는 ‘내부자 운동’과 별개이다

나아만의 두 번째 요구는 우리가 다루는 유대교가 아닌 다른 종교 가운데에 머무른 채, 내부자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성경적 모델이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접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자신이 앗시리아에 돌아가면 자신의 왕을 따라 림몬의 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절할 것인데, 그것을 용서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엘리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안히 가라”(Go in peace)고 한 것이 사죄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참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되었지만, 극단적인 현실 상황이나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부득이 자신이 처한 종교생활과 관습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진솔한 고뇌를 발견한다.

나아만이 처한 상황은 죤트라비스의 ‘C1 to C6 spectrum’의 분류를 적용한다면, C4(무슬림 권에서 예수신자로 무슬림으로 보지 않음) 단계를 지나 C5(자신들을 무슬림인데 예수를 믿는 신자, 또는 선교사가 전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무슬림이 되는 경우) 상황이라 할 만하다.

신앙을 고백한 순간부터 신앙은 성장하고, 성장에 따른 열매가 있기 마련이다. 나아만은 어떤 면에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태어난 신자라 할 수 있다. 감당할 만한 실력도 없는 어린 신자에게 술과 담배를 당장 끊어라, 주일 성수하는 직장으로 옮겨라 혹은 찬양대·주일학교 교사 등 봉사를 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평안히 가라”는 인사는 이방종교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겨도 괜찮다는 이른바 내부자 운동을 허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인사는 신앙의 난제여서 대답하기 곤란하니 그냥 가라는 뜻인지, 하나님이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실 것이니 염려 말라는 뜻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축복의 인사 한마디로 대답을 대신하며 떠나보내야만 하는 나아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야는 마치 어린 교인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목자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엘리야의 심정이 어린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간혹 신앙생활 출발부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을 각오를 하는 신자들도 있지만, 어린아이의 특권인양 똥오줌을 아무데나 싸는 사람들도 있다. 어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에게는 걱정거리가 되기도 한다. 부모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행동을 한시적(限時的)으로 는 용인하지만, 성장을 해도 계속 그런 철없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마침내 그를 낳은 부모에게 짐이 되고 말 것이다.

나아만의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언급에서 보면(눅 4:27), 특별 섭리로 부름 받은 그는 이방종교의 틀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C5를 지나 C6(핍박 받는 지하신자 또는 순교자)에 이르는 신앙인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순조롭게 피하는 길을 만났든지, 아니면 다니엘처럼 불같은 시험을 통과했을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신앙이 성장해서 ‘보이는’ 왕보다는 ‘보이지 아니하는’ 왕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교회운동은 거추장스런 서구풍(form)이 아니라 성경에서 출발했다

이런 관점에서, 랄프 윈터가 주창하는 내부자 운동을 말할 때 소위 무슬림 예수신자·힌두 예수신자·부다 예수신자·카톨릭 예수신자·정교회 예수신자·몰몬교 예수신자·여호와의증인 예수신자 등으로 불리는 사례들 속에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배격해야만 하는 신앙 양심의 가책을 떠올리지 않는 데 큰 문제가 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항간에 북한의 봉수교회의 진위(眞僞)가 논의된 바 있었다. 김 씨를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런 교회도 중요한 내부자 운동이라고 관련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편 관제된 봉수교회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로 들어간 지하교인들, 순교자들과 같은 질과 레벨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울부짖는 기도를 하나님 외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마 봉수교회 교인들은 지하교인들을 보고 “당신들은 땅속에서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들은 마음에도 없는 절을 하며 신앙을 지키느라고 당신들보다 맘고생이 더 심했다”고 큰소리칠지도 모르는 현실을 일제시대를 지나온 한국교회는 이미 경험했다.

G. Cowin(SIM-USA)은 ‘전방개척선교’(Mission Frontiers,vol.28,No.1)의 지상논쟁에서 내부자 운동의 어떤 내용들이 분명히 크게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랄프 윈터의 이 운동을 신랄하게 공박하였다(Some of content seemed highly misleading or clearly wrong on the subject of Insider Movements). 또한 그는 오늘날 선교 필드 경험이 많은 선교 지도자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무슬림·힌두교·불교인이라고 실제로 응답할 수 있다는 이 발상을 거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내부자 운동은 기본적으로 모슬렘권 선교필드에 초점이 맞춰진 맞춤전략의 하나로 계발된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짓밟으면서까지 선교의 상황화를 추구한다면 본질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이 윈터 자신도 우려했듯이, 혼합주의나 옅은 믿음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합리화시킴으로,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순교신앙을 욕되게 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이단까지 정통성을 부여해줄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극히 위험하고 비복음적·비신학적 사상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2000년간 진행되어온 교회운동이 마치 거추장스런 서구풍(Western Form)인양 동일시함으로 현대 선교 필드의 여기저기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서구(미국)선교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엿보인다. 하지만 내부자 운동 같은 “교회 없는 기독교”(Churchless Christianity) 운동이 새로운 대안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떠벌리는 것은 선교 전략에 크게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마침내 세계선교의 역량을 무력화시키고 말 것이다.

쌀로별

2011.03.03 17:46:56
*.234.16.126

본문도 댓글로 붙여주신 기사도 모두 중요하네요... 저와 같은 궁금함을 가진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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