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조회 수 1807 추천 수 86 2004.07.20 18:04:52

마태복음 강해 (110) 7/18/0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평상복 입고 선서한 국회의원

한국의 한 젊은 국회의원이 당선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선서를 하는 날 캐쥬얼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아마 본인으로선 격식을 파기하고 대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순수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캐쥬얼(casual)과 정장(formal)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 것 같다. Formal하다는 것이 단순히 넥타이 매고 양복 입었는가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정장(正裝)이라는 뜻 그대로 때와 장소와 신분과 하는 일에 맞게 옷을 입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운동화 신고 반 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라도 시합에 맞는 복장이면 정장이지 캐쥬얼이 아니다.

국회의원 선서가 ‘에헴!’하고 점잖을 빼는 동료 의원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주인으로 자기를 뽑아준 국민들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며 헌신할 것을 약속하는 예식이다. 그런 장소에 아무 일 하지 않고 놀러 갈 때나 입는 옷을 하고 나타나선 안 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시에 통용되는 온갖 격식을 파괴했다. 요즘 사람이 생각해도 혁신적일 정도로 개혁을 이뤄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과거에 지은 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해 주신다. 신자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하게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 신자는 자유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신자가 성경적인 자유의 정확한 의미는 모른 채 그 국회의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동이나 형식을 무조건 평가절하 하여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교회 행사에 예사로 빠지고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 심지어 세상의 죄악과 시험에 빠져도 예수님이 다 용서해 주실 것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식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때와 장소와 사람과 상황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정확하게 파악해 그 모든 것에 100% 딱 맞아 떨어지게 행동하셨다. 역설적으로 따져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Formal한 분이었다. 가장 형식을 잘 지킨 분이었고 나아가 잘못된 형식을 제대로 된 형식으로 바꾼 분이셨다.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

본문에서도 요한의 제자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금식은 요식적 종교행위에 불과하니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형식을 파괴한 것이 맞다. 예수님은 대신에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때가 되면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확한 때에 Formal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금식의 때는 틀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청바지를 놀러 갈 때 입지 누구처럼 국회의원 선서할 때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Formal의 반대어가 Casual이 아니다. 캐쥬얼의 의미가 ‘우연히 일어나는’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듯이 그 국회의원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격식을 파한 것이 아니라 격식을 더럽힌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부치지 못한다는 비유도 무슨 뜻인가? 당시는 직조 기술이 원시적이었고 모든 옷이 100% 자연 섬유이다 보니 한 번 빨면 대폭 줄었고 여러 번 빨아야 더 이상 줄지 않게 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부치면 세탁을 한 번만 해도 그 조각이 확 줄면서 주위의 낡은 천을 끌어 당겨 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째지게 한다.

또 양 같은 짐승을 통째로 가죽을 벗겨 목 부분은 주둥이로 쓰게 놔두고 나머지 부분은 다시 꿰매어 술이나 물을 보관하는 통으로 사용했다. 새 부대는 가죽이 완전히 마르기 전이라 신축성이 있지만 가죽이 오래되면 딱딱하게 굳듯이 낡은 부대는 더 이상 줄거나 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낡은 부대에 발효가 덜된 새 술을 담으면 계속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가스가 차고 그 팽창력을 가죽이 감당해 내지 못해 터진다.  

예수님은 지금 헌 옷과 헌 부대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니 갖다 버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헌 옷은 헌 베 조각으로 깁고 헌 부대에는 오랜 포도주를 담아라고 했다. 대신 새 술은 새 부대에 생베 조각은 새 옷에 부치라고 했다. 그래야 부대와 그 속에 담긴 술 둘 다 보존된다고 한다. 옷이나 부대 같은 형식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말이다. 내용을 제대로 보관, 전달, 실현하려면 그에 맞는 적절한 형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한의 제자들의 불만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갖고 예수님을 걸고 넘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자기들 스승인 요한이 헤롯 왕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혔다. 유대인들은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으로 비상사태나 슬픈 일이 생기면 금식을 했다. 누가 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과 침례 요한은 친척 간이었다. 요한과 예수님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요한의 제자들로선 같은 하나님의 종일 뿐 아니라 친척 관계에 있는 자가 어찌 이런 슬프고 급한 일에 금식으로 동참하지 않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들 같이 경건한 유대인들은 화, 목요일을 지정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또 속죄일이나 부림절 전날 같이 이스라엘 전 백성이 공식적으로 금식하는 날도 있다. 14절 처음에 ‘그 때에’라고 기록되었듯이 아마 예수님이 제자들과 식사하며 교제한 날이 바로 이 공식적인 금식일에 해당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왜 너희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고 함께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하는 날을 무시하느냐라고 따진 것이다.

그 두 가지 의문에 대해 예수님은 15절에 혼인 잔치 비유로 동시에 대답하셨다.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를 보통 7일간 신랑 집에 모여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이는 데 이 때는 공식적인 금식일이라도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혼인 잔치 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그 잔치는 끝이 나고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이제 곧 스승이 죽게 되어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가며 스승과 더 즐겁게 지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부조 봉투 내어 식사 대접 받고 답례품 받아가는 일반 하객을 뜻하지 않는다. 원어적으로 신랑의 친구나 가까운 친척으로 7일간의 혼인 잔치 내내 함께 거하면서 혼인 절차에 차질이 없도록 돌보는 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구태여 그런 표현을 쓴 이유는 지금 제자들이 식사하는 것이 너희들 눈에는 단순히 그저 먹고 마시며 금식 규정을 어긴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함에 100% 딱 맞아 떨어지는 형식이 식사인데 그 일은 바로 신랑 되시는 구세주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일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땅에서도 사는 물고기

어떤 사업가가 물 밖에서도 살 수 있는 물고기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유전 공학자들을 연구하도록 했다. 아주 튼튼한 연어를 골라 잡종 교배를 시키고 홀몬 주사를 주입하는 등 온갖 실험 끝에 뭍에서 살 수 있는 고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업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물고기가 물에 살고자 하는 본성이 계속 살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기질을 아예 없애 달라고 재차 연구진에 주문했다. 또 다시 수 많은 연구를 거쳐 말하자면 정말 물에 젖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그 본성이 없어진 물고기를 개발했다.

드디어 만족한 사업가가 어느 날 그 물고기를 데리고 외출했다. 그런데 고기가 그만 길 가에 있는 호수에 우연히 빠져버렸다. 물고기는 물에 안 젖으려고 눈을 감고 아가미를 벌리지 않고 지느러미도 몸에 꽉 부치며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꾸 물 밑으로 가라앉아 내려 갔고 숨이 가빠졌다. 숨을 안 쉬고는 죽으니까 시험 삼아 눈을 살짝 뜨고 아가미를 한 번 움직여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고 도리어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래서 마음껏 물 속을 헤집고 다니며 다시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헤롤드 브레드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인간의 구원을 비유해 지어낸 우화다.  

예수를 믿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또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종교적 행위인 기도, 말씀, 금식 등을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인가? 모든 종교에 통용되는 이 원칙이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인간을 참 인간답게 회복시켜 주신 데서 출발한다. 물에 살아야 할 물고기가 땅에서 잘못 살고 있듯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 할 인간이 사탄의 종으로 사로 잡혀 사망과 죄악에 눌려 있었다. 그런 우리를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과 형상으로 되돌려 놓아 주셨고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다리가 달리지 않은 물고기가 땅에서 기어 다니려면 비록 살 수는 있도록 개조되었다 해도 얼마나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울 것인가? 하나님을 부인, 외면하면서 세상의 쾌락과 죄악에 탐닉하면서 오직 출세와 성공만을 목표로 사는 인생의 모습이다.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을 지키는 것에 온갖 신경을 쓰다 보니 참 사랑과 진정한 신뢰의 관계를 아무와도 맺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전의 모든 인간은 불안과 고통 가운데 부자연스러운 절뚝발이 병신 같은 모습이다. 꼭 양복을 입고 달리기 시합을 하는 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품 안으로 되돌아 오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무 편하고 신나고 충만하고 재미있다. 십자가 복음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완성시켰다. 형식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격식을 지키게 한 것이다. 인간이 꼭 있어야 할 신분, 소속,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사탄의 울타리에서 우리를 들어 내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옮기셨다. 신자란 인간으로서 정말 인간다워야 할 인간 즉 100% Formal한 인간이 된 자다. 신자만이 품위 있고 고상하며 격식을 완전히 갖출 수 있는 인간이다. 한 마디로 짐승 같이 살던 자를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신 것이다.  

금식은 언제 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요한의 제자들이 두 가지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근거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한 것 같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예수님이 혼인 잔치 비유로 그들의 주장을 역으로 반박했고 되물었다.  

첫째, 그들은 지정된 금식일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이니라.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0,19)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열심, 정성, 희생, 수고, 봉사, 구제, 선행 심지어 믿음의 양까지 말하자면 얼마나 자주 오래 금식을 했느냐 같은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축복의 양과 질이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각자에게 꼭 맞는 뜻과 계획을 영원 전부터 갖고 계시며 그것을 완전히 이루시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는 은혜를 하늘 창고에 넘치도록 쌓아 놓고 계신다. 물고기는 땅으로 나가지 않고 물 속에 있기만 하면  된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잠겨 마음껏 호흡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로 들어와 잠기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과 식사하며 교제하는 제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물을 만난 물고기였다. 이 땅에서 하나님 당신을 직접 대면하고 천국의 신령한 축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또 곧 그 신랑이 떠나면 온 천하를 다니며 땅 끝까지 그 축복과 기쁨을 전할 사도로서 준비하고 훈련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훈련이 성경을 배우고 열심히 금식 기도하는 요즘 식의 제자 훈련이 아니라 식사로 교제하는 방식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물고기가 물에서 잘 헤엄치도록 물로 되돌아 오게 하는 것이지 땅에 기어 다니는데 익숙해진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물을 잊어버린 물고기에게 물이 얼마나 좋고 편한지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르치는 사람이 물 속에 충분히 잠겨 보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 주님과 교제해 보아야 그 교제가 얼마나 좋은지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할 수 있다. 은혜를 충분히 받은 자라야 은혜의 참 모습과 의미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식사 교제를 통해 당신의 비유대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둘째,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 느끼는 심정과 고통을 주님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분명 슬프고 위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 과연 무엇인가? 죄악으로 부패되고 왜곡된 이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하기 전에는 세상에서 의인의 억울한 죽음은 계속 될 것이며 신자가 고통을 겪는 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일로 슬퍼하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힘들 수 밖에 없다. 마치 땅에 올라와 뒤뚱거리며 기어 다니는 물고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이 땅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십자가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뿐이다.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런 일에 슬퍼하기 보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기고 영혼이 메마르며 성령 안에서 호흡이 중단되는 것을 가장 슬퍼해야 한다. 인간에게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가 끝나는 것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 없다. 바로 그 때야 말로 신자들이 금식해야 하는 바른 때다.  

만병통치약인 금식 처방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는 주로 언제 금식하는가? 오랫동안 기도해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응답이 없는 문제를 빨리 결말을 알든지 해결 받으려 할 때다. 또 갑자기 슬프고 위급한 문제가 생기면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권한다. 마치 금식을 아주 고 단위의 강력 마이신으로 만병통치약처럼 소개한다. 이천년이 지나도 요한의 제자들의 수준에서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물론 그럴 때에 금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쟁취하려는 목적만으로는 어떠한 신앙 행위를 해도 여전히 청바지 입고 국회의원 선서하는 꼴이다. 그런 의미의 금식과 기도에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격식을 아주 따지시는 너무나 Formal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신자로서 올바른 신분과 소속과 위치에서 기도하길 원하신다.  

신자란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 온 자다. 신자 만이 유일하게 인간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 와 있고 꼭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자다. 그럼에도 예수를 알기 전의 습관, 태도, 생각으로 돌아가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부친 것처럼 삶이 뒤엉키고 불편해진다. 죄와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빠지면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은 것처럼 그 인생의 울타리가 터지게 된다.

특별히 신자가 금식하고 기도해야 복을 받으려니 믿는 것이야 말로 반드시 새 형식으로 바꿔야 할 낡은 형식이다. 기도와 금식을 얼마 동안 어디에서 누구랑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입으로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마음은 옛 율법 아래 있다. 그야 말로 생베 조각을 헌 옷에 부친 꼴이다.

신자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도와 금식을 통해 삶과 인생의 그런 뒤틀림과 터짐이 내 도덕적 수준이 낮거나 의지력이 약해 착하게 살려고 노력을 적게 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신에 주님과의 교제에 어딘 가 무엇인가 금이 가 있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하고 금식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겠거니 생각이 든 것이 사탄이 다시 우리를 넘어뜨리려 건 수작에 우리가 잠시 동안 넘어 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과의 혼인 잔치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포도주가 바로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이 주님과 교제하는 기도와 금식인 것이다.  

기도와 금식이 세상에서 신자가 남들보다 뒤쳐져 있는 것을 앞에 세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우리는 뒤에 쳐지고 남을 앞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의 세상적 삶은 힘들고 지친 모습 가운데 있을 것이지만 주님의 인자가 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다.  또 그 고백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고 나아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모든 과정이 기도이자 금식이다.  

기독교에서 신자에게 요구하는 모든 영적 훈련은 절대 내 기분 내키는 대로 걸치는 캐쥬얼이 아니다.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입는 가장 격식에 맞는 정장이다. 그 옷을 벗으면 세상과 사람 앞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지며 이 고된 세상을 이겨낼 위로와 힘조차 잃어버린다.

여러분은 주님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 받은 신자인가? 주일 날 적당하게 헌금하고 예배 보는 것으로 모든 신앙 생활을 때우듯 부조 봉투만 놓고 가는 일반 하객인가? 아니면 잔칫집 문 밖에서 멀뚱하게 구경만 하는 남의 동네 사람인가? 진정으로 슬퍼할 일을 슬퍼하며 진정으로 기뻐할 것 기뻐하여   철저하게 격식을 갖춘 신자가 되기를 혼인 잔치에 신랑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사라의 웃음

2011.09.12 10: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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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뭍에 살다가 다시 제 곳, 물에 들어가니 처음에 어색하고 곧 죽을 것 같았는데 막상 숨을 쉬고
보니 그렇게나 좋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하며 감탄하며 또 헤엄치고,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와
또 감격하며 헤엄치고... 바로 신자의 모습이네요.
그런데 그 물을 떠났을 때, 숨이 막혀오고, 괴로와 신음하며 아파 고통스러워질 때 금식하며 기도함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네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 살짝 물에서 뭍으로 올라와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참 어려운 우리의 미련스럼을 애통하며 하는 기도가 바로 금식기도가 되어야함을 너무도
소상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말씀이 어~~쩌~~면! 하는 감탄이 늘 터져나오니... 늘 감사하여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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