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조회 수 2131 추천 수 104 2004.10.19 05:37:44

마태복음 강해 (123) 10/17/04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과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있는가?

신자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 거하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시련과 핍박을 겪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그 이유로 세가지를 제시하고 계신다. 오늘은 그 3번째 이유를 알아 볼 차례로 30절에 설명된 대로 하나님이 신자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신자 곁에서 항상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진심으로 그 질문이 믿어지는지 속으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을 믿는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하나님의 세신바 됨을 믿는가? 그래서 여러분이 현재 겪고 있는 시련과 핍박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핍박에서 건져 줄 능력을 갖고 있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문제를 염려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데도 지금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인가 믿지 않는 것인가?

분명히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있는데도 그 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현재 겪고 있는 시련과 핍박이 주는 현실적인 고통이 싫고 두렵기 때문이다. 고통을 좋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예수님 마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그 고통의 차원과 크기가 전혀 다르지만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괴로워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고통이 싫다는 말은 당장 그 고통에서 해결되고 싶다는 뜻과 같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절대 고통만은 없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요구를 하나님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고 보호하신다는 차원과는 다른 문제다. 신자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므로 무엇이든지 요구해도 된다는 것과도 관계 없다.  

세상은 온갖 죄악과 부정과 사기와 흑암의 세력이 판치는 곳이다. 진리가 없고 거짓 뿐이며 사망으로 향해 달려 가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에는 절대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 또 신자가 겪는 고통 중에는 자신의 고집, 탐욕, 잘못, 부주의, 나태, 죄악으로 인한 것도 많이 있다. 그런 고통까지 하나님더러 무조건 설거지 하듯이 뒤처리를 부탁하는 것은 사실 낯 간지러운 일이다. 그렇게 요구조차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매번 그렇게만 요구한다면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신자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데도 두려워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신자들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너무 잘 믿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전지전능 하심만을 믿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내 고통을 아실 텐데.. 또 얼마든지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을 텐데… 도대체 이 고통이 왜 안 끝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처음에 일부러 한 가지 질문을 빠트린 것이 있는데 지금 한 번 물어 보자.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힘든 문제를 해결해 줄 의사가 있음을 100% 확신하는가? 100%가 아니면 몇 % 정도 확신하는가? 만약 20% 밖에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실현될 부분이 그 정도 뿐이라는 뜻이다. 그 나머지 80%는 신자 개인의 욕심, 고집, 체면, 위신, 자존심에 걸린 문제다. 사실은 그 20%도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할 것 없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한 부분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그 뜻이 다른 모든 것을 우선하지 않으며 또 완벽하게 그 전부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법이란 없다.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

참으로 인간은 어리석기가 끝이 없는 존재다. 아이큐가 200이 넘어도 신령한 문제 하나님과 연관 된 일에는 제대로 작동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내 고통을 알고 또 해결해 줄 능력이 있는데도 그렇게 안 해주신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왜 안 해주실까 그 이유를 파고 들어야 한다. 내게 혹시 잘못이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파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백이면 백 다 당장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시는가 봐, 미워하시는 모양이다라고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사탕 하나 때문에 토라지는 한두 살 백이 어린 아이와 같다.

그럼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질문 해보자.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하고 미워하시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하시는데 왜 믿고 기도하는가? 그런 마음이 드는데도 기도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었던 하나님에게 잘 보여 내 욕심을 이뤄보자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신자가 된 후에도 아직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 있다는 증거다.

여러분의 소망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나 봐”라고 밖에 생각 못하는 그것이 죄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더 인격적이며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이로 바꾸려는 생각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현재 잘못되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의 책임마저 하나님에게 묻고 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수준에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해결해 줄 능력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자가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내가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분명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정말 당당하게 요구할 자신이 없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대신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옳은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 정말 자기가 요구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당신만의 더 큰 영광으로 합력하여 이끄시고 말 것이라는 소망을 키워 나가야 한다. 또 그런 소망을 키우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에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것을 알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거나, 뜻을 안다면 그 뜻이 이뤄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두 가지 뿐이다. 한두 번 기도하고 마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 소원을 한번 열거해 본 것일 뿐이다.  
        
참새보다 더 귀한 인간

본문 30절에서 예수님이 신자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는 말씀을 단순히 전지전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선 안 된다. 29절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것을 대조해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런 비교의 바탕 아래 30절을 해석 해야 한다.

앗사리온은 로마시대에 통용되는 화폐 중에 가장 작은 단위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데 그것의 1/16이다. 요즘 시간당 최저 임금을 $6로 잡으면 $6 X 8 시간 = $48이 되는데 그것의 1/16인 $3로서 치킨 몇 조각 사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셈이다. 금전적 가치로 따져 정말 형편 없는 참새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30절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너희에게는’이다. 참새와 비교해 너희는 다른 존재로서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을 흔히들 참새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데 신자인 너희는 더욱 사랑하셔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라고 해석한다. 이는 바른 해석이 아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완전한 해석은 아니다. 하나님이 참새마저 사랑하신다면 하물며 신자일까 보냐라고만 생각하니까 자꾸만 왜 이런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외면하고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가 의심과 불평밖에 생기지 않는다.  

본문에서 '너희'는 분명히 예수님이 최초 전도 여행을 보낸 제자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신자다. 참새가 너희와 대조된 것은 단순히 동물이 아니라 신자가 아닌 모든 피조세계 특별히 불신자를 지칭한다. 너희를 핍박하는 세상과 사람들의 궁극적 운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핍박 중에 있더라도 너희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지만 저들의 머리털은 세신바 되지 않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털이 세신 바 되었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보통 성인의 경우 하루 머리카락이 50개 가량 빠지지만 젊었을 때는 그 비슷한 숫자가 다시 난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면 그 밸런스가 맞지 않아 점차 머리 숯이 적어지게 된다.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는 것은 하루에 몇 가닥 빠지고 또 몇 가닥이 새로 나는 것까지 세밀하게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와 일 대 일의 개인적인 관계 아래 한시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 보호하시며 일거수 일투족과 우리의 심중까지 꿰뚫어 보고 계신다. 그러나 단지 지켜주고 알고 계시는 것만이 아니다. 신자의 경우 누구는 머리가 몇 가닥인데 하루에 몇 개 빠지고 또 누구는 언제 이마가 몇 센티 벗겨질 것이라는 것까지 다 주관하고 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유의 세밀하고도 영원한 계획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이 땅 전체를 운행하시되 신자 각자에게 마련해 놓은 계획을 통해 당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을 실현시킨다는 말이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지 않았고 단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을 것인가만 결정해 놓았을 뿐이다. 그들 일생에 걸친 별다른 계획이 없어 하나님을 모른 채 지내도록 방임해 두실 뿐이다. 아무리 불신자가 형통해 보여도 결코 저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욕심, 고집, 완악, 죄악, 감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다 보니 럭비공처럼 향방 없이 이쪽 저쪽으로 튀어 다니다 결국은 허공만 치다가 끝나는 인생이다.

반면에 신자는 자기 생각과 욕심으로 제 멋대로 살도록 하나님 당신께서 더 이상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너희를 통해 이 땅에 빛을 비추겠다. 너희는 이 더럽고 추한 세상을 깨끗케 만들 주역이다. 눌리고 메이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하늘에서 오는 위로와 안식과 평강을 선사해라. 그래서 눈물과 한숨과 탄식과 분노와 저주만이 설쳐대는 곳을 기쁨과 환희와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바꾸어라. 죽기 살기로 잘 먹기 위해 경쟁하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섬기며 함께 거룩해지는 공동체로 변화시켜라.”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를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귀한’ 존재(31절)라고 표현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더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고 시련과 핍박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영혼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복음은 사망의 아비 사탄이 설치는 세상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신자가 겪는 시련과 핍박도 하나님이 이땅을 다스리는 계획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너희는 머리털이 언제 몇 개 빠지고 또 몇 개 날 것까지 계획 되어 있으니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의 본질

인간이 갖는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 흉측하고 기괴하며 징그럽고 무시무시하여 소름 끼치는 것인가? 이제 곧 할로윈데이가 다가올 텐데 유령의 집 같은 데 가면 왜 무서워지는가? 귀신으로 분장한 그 모습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 나올지 몰라 더 무섭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거나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떤 과정과 결과로 진행되어질지 모를 때에 두렵게 된다.

하나님이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된 신자의 인생은 불신자와 참새와는 완전히 다르다. 형통, 권세, 재물, 건강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인생이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 중에 있어 영원하고도 고귀한 일에 쓰임 받기 때문이다. 신자의 영혼육 전 존재와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까지 그 분의 손안에 세밀하게 붙잡혀 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당신의 계획 하심에서 벗어난 것이 없기에 일생을 마칠 때까지 보호와 인도는 당연히 따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천국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신자란 자기가 가고 있는 방향과 과정 뿐 아니라 그 결과도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현재의 고난을 없애려고 애쓰는 노력이나 힘이 아니다. 비록 힘든 고난이 앞을 가로 막더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아래 자기의 전 인생과 삶을 아무 두려움 없이 내어 맡기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쁨으로 자기 일생을 그 분 뜻대로 헌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럼에도 신자가 실제의 삶에서 계속해서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인식과 감각이 전혀 없이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에서 믿음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그런데 신자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존재성과 그 분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처음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한 말에 주목해야 한다. 신자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바른 믿음이 아니며 기도 응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란 당연히 신자 각자에게 갖고 계신 당신의 계획이다. 그 계획에 맞게 살고 또 그 뜻에 맞추어 기도하여야 바른 믿음이다. 물론 그 계획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까지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에게 하나님이 그런 계획이 없는 양 의식도 못한 채 인생을 자기 뜻대로 마음 놓고 꾸려 가서는 안 된다. 지금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요 진리라는 확신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가 어떤 처지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간에 한시도 떨어짐 없이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지만 최소한 기도한 후에는 염려 불안이 없어야 한다.  

믿음의 본질

따라서 믿음이란 어떤 상황과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지고의 선이며 절대 공평하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런 바탕 위에 현실의 삶에서 아무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물론 사업이 형통하고 건강에 아무 문제 없고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착하게 자라 주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까지 다 포함된다. 갑자기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병이나 사고로 죽었을 때,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전혀 예상치도 않던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직장에서 해고 당해 당장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때, 마음을 완전히 갈갈이 찢어 놓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변심했을 때,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 없고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자녀가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도 반항하며 마약에 손대고 가출 했을 때, 마지막 가진 것 전부 다 끌어 모아 투자한 사업이 외부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쫄딱 망했을 때, 심지어 매사가 별다른 걱정 없이 잘 풀려 나가지만 까닭 모르게 고독과 방황과 허무함이 자신을 완전히 옭아매어 도저히 삶의 의욕과 기쁨이 없을 때.. 등등이다.

바로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며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시며 그 분이 기어이 영광된 계획 가운데로 나를 인도하시고야 말 것이라는 것에 흔들림 없는 것이 참 믿음이다.  

18세기 영국에 윌리암 카우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극심한 정신적인 허무와 공허에 계속 번민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자살하기로 마음 먹었다. 템즈 강에 빠질 생각으로 이륜마차를 불렀다. 그런데 너무 짙은 안개가 끼어 한치 앞도 안 보일 지경이라 마부가 길을 잃어버렸다. 조급해진 그는 마차에서 내려 자기 발로 찾아가기로 했지만 그 역시 길을 잃고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창을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 집 문 앞에 되돌아와 있었다. 그 때 문득 하나님이 자기를 택했고 사랑하시며 심지어 자기 심중 깊숙이 자살하고자 하는 그 갈등과 번민마저 알고 계셔서 짙은 안개를 보내어 자살을 막고  집으로 되돌려 놓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후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되었다.    

믿음이란 아무리 사방이 막혀 완전한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더라도 하나님이 지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신자 자신이 알기에 마음 한 편으로 든든하게 여기는 것이다. 나아가 그 막힌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으로 인도해 가고 있는 과정임을 믿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위인들이 선택된 이유가 성경 많이 보고 기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완전히 100%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온전하다, 선하다, 나를 통해 이루실 계획이 있음을 확신한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그 믿음과 자기의 모든 것을 그 계획과 맞바꾼 자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모든 믿는 자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의 자손을 하늘의 뭇별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자기 의지력을 동원해 으샤으샤 하고 믿은 것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믿었는가? 100세에 난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아무 주저나 의심 없이 그대로 순종했다. 백세에 난 아들이라면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다 그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나면 자손을 뭇별 같게 해주신다는 약속이 어떻게 달성되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뒤집을 수 있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신 셈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옳고 선하시다는 것에 흔들림이 없었고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 올려 놓고 칼을 들어 직접 찌르려 했다.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고 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하나님이 미리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놓은 한 숫양이 뒤에 있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으니 두려워 말라고 했으면 그 다음에는 열심을 다해 믿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말이 따라 나와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 대신에 왜 사람 앞에 예수님 당신을 시인하라고 하셨을까? 식사할 때마다 기도하고 어디 가나 찬송 부르며 박수치고 아파트 현관 문에 무슨 교회 교인이라고 문패를 붙이라는 말인가? 사람들 보는 데서 그런 종교적 의식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사람이 아무리 핍박하고 시험과 유혹으로 넘어뜨리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이 영원한 진리임을 실제의 삶에서 선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옳고 선하니 그 분만 믿고 따르며 그렇게 살아라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돌아가는 형편이 심지어 성경의 약속과도 달라 보이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지만 그런 때도 성경 말씀은 무조건 옳으니 그 진리만 붙들고 살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신자를 볼 때에 “도대체 저 사람은 이해가 안 돼,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저런 형편임에도 안정을 잃지 않고 담담할 수 있지? 담담한 정도가 아니라 더 기뻐하고 감사하니 어디 외계에서 왔는가봐. 아무리 봐도 나 보다 더 형편이 안 좋은데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으니 말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불신자들이 신자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실제 사는 모습 가운데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구태여 신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또 힘든 일만 생기면 당장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시련과 핍박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 발견까지 못 해도 된다. 최소한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히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영광된 계획 아래 자신의 일생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당신의 선하심과 옳으심이 신자에게도 동반될 때만 그 능력을 발휘하신다. 또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를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로 찾지 않으면 상이 돌아오지 않음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신자는 세상의 시련과 핍박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고 뜻을 알았다면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는 한 두려움을 없앨 길은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자신의 일생도 그 완전함 속에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항상 두려울 뿐이다.    


날마다순종

2020.10.03 17:35:52
*.14.99.253

영원불변 절대 선하시며 옳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쁘시니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이에 순종하기를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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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47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890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1] 운영자 2004-08-17 2251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199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58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441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1] 운영자 2004-07-2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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