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빨 성령집회가 이해 안 됩니다.

조회 수 702 추천 수 5 2013.11.12 00:44:22
금이빨 성령집회가 이해 안 됩니다. (성령질문 2/5)

[질문]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분별이 힘듭니다. 이 홈페이지의 글들도 읽고 성경도 찾고 여러 책들을 참조하며 목회자들에게도 많이 묻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 때마다 납득할 수 있게 가르쳐주셔서 한 계단 씩 신앙이 자라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한번은 성령집회로 유명한(?) 교회의 매주 열리는 성령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정말로 알고 싶은 마음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로선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사역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로 다리 길이를 맞추고, 금이빨로 바꾸고, 쓰러지고, 소리 지르는 등 알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났습니다.

성령 치유 집회를 처음 참석한 것도 아닌지라 대부분의 성령 집회가 성경 말씀보다 간증들만 쭉~ 늘어놓다가 안수해주고 마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중간에 나오려다 겨우 참고 팔짱을 끼고 앉아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이게 멉니까? 이런 방법밖에 없습니까? 구원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라면 납득이 가지만 지금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꼭 필요한 사역입니까? 생명(영생)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런 방법으로라도 저들을 위로하시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도무지 말씀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든 사람들이니 그렇게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로하심을 경험케 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었는데 과연 제 생각이 맞는 것일까요?

[답변]  

성령 은사의 역할


문제가 복잡할수록 간단하고도 단순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신앙의 질문들은 오직 성경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질문하신 주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성령의 역할”과 “성령의 은사의 역할”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표현한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나 누구나 보고 들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개인의 내면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여 그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버리고 거룩하게 변화되는 일은 성령의 은사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신자 개인의 변화만을 위한 것이라면 구태여 겉으로 나타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데는 신자 개인의 변화와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유익’(有益)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사람이 대상이라는 것을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만 해당된다면 유익보다는 성장, 성숙 등의 단어가 더 적합하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헬라어 ‘유익’도 ‘함께’ 옮기고 돕고 모인다는 뜻입니다.(요11:50, 행20:20 참조).      

바울이 성령의 은사 중에 ‘믿음’(고전12:9)도 포함시켰지만 이는 신자 개인의 성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떠한 시험과 유혹은 물론 핍박마저 이겨내는, 예컨대 기꺼이 감사함으로 순교하는 그런 굳건한 믿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승리를 남들이 보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본이 되어 함께 복음의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그런 믿음입니다. 성경에 열거된 성령의 은사(고전12:8-10, 롬12:6-8) 모두가 다른 이의 유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다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신자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이 신자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신자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기겁하고 기독교를 이상한 사교(邪敎, cult)취급할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란 고전 12:12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에 대해 설명한 대로 교회 내의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성도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 사랑이 역사하여 그 나라와 의가 확장되어지는 모습으로만 실현되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겉으로 초자연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다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당도 병을 고치거나 맨발로 작두를 타는 등의 초자연적 능력을 나타내며, 타종교에서도 기도하여 병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을 감언이설로 시험한 사탄은 허풍쟁이가 아니라 장담한  그대로 시행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마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비난했지 않습니까?

성령의 역할

문제는 흔히 행해지는 성령치유집회에서 비록 온전히 납득이 안 되지만 초자연적 현상 즉, “겉으로 나타남”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참가자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감동을 받으니까 즉, “다른 이에게 유익”을 끼친 것 같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수긍할 수 없는데 결과적으로는 성령이 역사한 것 같으니 판단하기 애매해집니다. 그럼 “성령의 은사의 역할”을 말하는 성경구절만으로는 판단이 안 되기에, “성령의 역할”을 말하는 성경도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이 성령 은사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성령의 역할을 확고히 전제한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가장 기본 역할인데, 특별히 바로 그것이 가장 “신령한 것”(고전12:1)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령의 역할은 불신자에게, 신자 개인에게,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게 각기 달라집니다. 쉽게 설명하면 불신자에게는 믿음을 갖게 하고, 신자 개인에게는 믿음을 성숙시키며, 교회에선 은사자가 아닌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고 실제 삶에서 그분을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의 역할”은 이중에서 주로 세 번째에 해당되지만, 겉으로 드러났다 뿐이지 성령의 첫째 목적은 당연히 최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교인들로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은사집회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확장되는 모습이 결여 부족한 대신에 초자연적 능력만 드러나거나 강조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이 빠진 성령 집회

“이게 멉니까? 이런 방법밖에 없습니까? 구원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라면 납득이 가지만 지금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꼭 필요한 사역입니까? 생명(영생)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질문자께서 성령 집회 내내 하나님께 묻고 또 물은 질문입니다. 전도하려고 집회에 초대된 불신자들이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일이나, 이미 구원 받은 자가 예수를 따르는 삶과,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따졌습니다. 질문자께선 이미 정답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리 길이를 맞추고, 멀쩡한 이빨을 금이빨로 바꾸는 것은 복음, 구원, 영생, 성장과 아무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질병을 치유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불치병, 불구자, 고질병, 같이 삶에 지대한 고통을 주는 병들을 주로 치유해주었습니다. 다리 길이나 이빨은 그런 차원의 질병이 아닙니다. 단지 조금 불편하거나, 사실은 불편도 전혀 느낄 수 없는 누구나 한두 개 쯤 갖고 있는 신체상의 결점일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일반적 질병도 많이 고쳐주셨겠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릴 때는 오히려 그 자리를 피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병을 고치거나, 현실의 형통을 주려는 뜻이 전혀 아니었지 않습니까? 만약에 정말로 하나님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가 불쌍해서 고쳐주시는 성령집회라면 불치병과 중병부터 고치거나, 최소한 집회마다 여러 종류의 병을 다 고쳐주어야 합니다. 극히 일부의 같은 병을 가진 환자만 고치거나 동일한 능력만 나타나면 치유가 아니라 그 기원이 누가 되었던 단지 능력과시일 뿐입니다.    

질문자께선 성령집회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빠져 있기에 납득이 안 되었던 것이고 또 그래서 아주 정확하게 이해한 것입니다. 질문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여 조명해주신 것입니다. 또 평소에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고도 신비롭지 않습니까? 성령 집회에 은혜 받으러 와선 도무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 같다고 오히려 성령의 깨우침을 주셨고 또 하나님께 자꾸 대드는(?) 질문을 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이, 그 은사가 실현되는 것도 당연히 포함하여, 신자로 항상 또 반드시 도착시키는 자리는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좇아 이 땅의 삶에서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세상 멸시와 핍박만 따르는 좁고 협착한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 생명(구원), 그 생명의 성장(성화), 그 생명의 영원한 완성(영화)을 이끄시는 성령님만이 성도에게 당신이 주시는 은사가 없다고 혹은 아니라고 깨우쳐줄 수 있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가 없으면 참 위로가 아니다.

혹시라도 질문자가 가졌던 의심과 불만을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혹은 불충이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비난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질문자 개인의 형통과 안위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불만이나 의심이었다면 불신앙입니다. 모든 따짐이 하나님 나라를 온전한 모습으로 확충시켜야만 한다는 소원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심은 질문자께서 하신 대로 하나님께 온전한 답을 얻을 때까지 따지고 또 따져야 합니다.

문제는 질문자도 의아했듯이 하나님께 대들어서 얻었던 답,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라도 성도들을 위로하실 수 있겠다.”고 여긴 것이 과연 옳은가 여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위로는 그와는 다릅니다. 반드시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과 화해된 데서 오는 위로여야만 합니다. 단순히 감정이 뜨거워진다고 위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인간의 감정적 충만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오해합니다.

우주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분만이 온전한 진선미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것, 추한 것, 모순 된 것, 불합리한 것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선 선한 것 외에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옵니다. 그분의 거룩하시고 온전한 성품이 당신께서 다스리는 모든 부분에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에 인간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은혜가 절정으로 또 완성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 - 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직접 가르친 내용입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요14:17)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영이 와서 하시는 일은 한마디로 “죄에 대한 심판”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 죄는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성령이 첫째로 하는 일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대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은혜만 의지하여 자신의 지난 모든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과 온전한 화해가 이뤄집니다. 단순히 교리만 믿어서가 아니라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자복하여 주님의 미쁘신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도록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다면 그 분으로부터 오는 온전한 위로 또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화목제도 반드시 번제와 함께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속죄제를 드려서 정결하게 되어야 비로소 그분과 화목하게 됩니다. 은혜란 도무지 용서 받을 자격과 조건이 없는 자가 받는 하나님의 용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입은 자라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내세울 것이 도무지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도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긍휼만 필요한 불쌍한 자임을 깨달았기에 다른 이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모든 과정은 예수 믿은 후에도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롬7,8장).  

고난 중에 임하는 성령의 참 위로.

성령 집회에서 울고 쓰러지고 소리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그 집회의 주된 흐름이 신령한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해 참가자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면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심지어 죄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이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끝까지 품어주시는 그 크고도 신비한 은혜를 체험한다면 감격하지 않을 신자는 없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구약시대에 함께 모여 울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도덕적 영적으로 타락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징벌로 외적의 침입을 받는 국가적 비상시기에 모두 옷을 찢고 금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또는 홍해의 기적으로 출애굽의 은혜를 맛보았을 때,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요시야 왕이 거룩한 율법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부흥집회 때 등에 모두가 춤을 추고 찬양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씻는 성령의 죄 씻음의 은혜가 갈급해서 간구하려고, 또는 그런 용서의 은혜를 모두가 풍성히 체험했기에 감사하려고 모인 집회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백성들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모습으로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집회도 초자연적 능력을 체험하거나 어떤 위로만 받으려는 집회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이후는 이스라엘 구약 시대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나, 개인에게 일시적으로 부어지던 성령의 은사가 이제는 예수를 믿는 자 모두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신자가 언제 어떤 형편에 있던지, 심지어 죄에 찌든 모습이라도 이제는 개인적인 회개와 용서와 위로가 가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의 지성소 사죄 즉, 단체로 받는 용서나 위로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죄 사함의 전제 조건이 변경 취소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경로가 성령의 간섭과 인도임도 동일합니다. 단지 공동체적 용납에서 신자 개인의 용서로 바뀐 것뿐입니다.  혼자서라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성령의 간구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온전히 받아 누리며 동행하는 온전한 위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신자의 위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신분으로 이미 바뀌었고 또 장차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광의 자리로 이끄신다는 소망이 있기에 어떤 시험과 고난 가운데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난이 끝나야 위로 받는 불신자나 타 종교인과 달리 환난 중에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초자연적 은사를 맛보아서가 아니라 신자 개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복음 안에 담대하게 붙어있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참된 위로는 예수에게서 시작하여 예수를 통해 누리고 예수로 인해 완성됩니다. 십자가가 빠진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위로가 아닙니다.

최대한 양보하여도...

성령집회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최후 항변(?)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렇게라도 확신케 하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믿게 한 후에 말씀으로 양육시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목적이라면 완전히 불신자만 초청하는 전도 집회여야 합니다. 또 전도 집회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살아 역사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풀어서 우선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는 그 복음을 보증하는 보조 수단에 그쳐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처럼 불치병이나 고질병 혹은 고통이 너무 심한 병들이 치유되어져야 합니다. 신기한 능력보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더 안타까이 여긴다는 그분의 사랑이 보여져야 합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조금 불편한 것이나 고칠 필요가 없는 것을 그것도 매 집회마다 똑같이 되풀이해선 신기한 매직 쇼를 한 것에 불과하지 복음과는 무관합니다. 거기다 불신자가 금 이빨로 바뀌는 것을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도 황금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잘 믿으면 그런 복을 주는가보다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선교지에선 고통이 심하고 병원에서 인간이 손을 놓은 병들의 초자연적 치유가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현지 주술사와의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들로 사탄에게 미혹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고통과 영적 갈급함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 긍휼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려는 뜻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목적과 열매가 질문하신 집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현재 열리는 집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은 자들의 중심입니다. 문제는 그런 집회를 통해 하나님을 믿거나 위로를 받은 자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믿으려 하거나 그것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며, 또 그렇게 오래 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구출해주지 않는지 의심과 불만만 생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또 전능하심을 보이는 집회를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더러 자꾸 친 아버지인 증거를 내놓으라고 떼쓰는 꼴입니다. 또 그런 집회에서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위로만 받았기에 힘들 때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사탕을 달라는데도 안 주면 친 아버지가 아니고 나도 주어온 자식인가 의심하는 셈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로마서에서 바울이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라고 권면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어떤 중한 환난에도 (믿음의) 인내를, 인내는 연단(믿음의 성숙)을, 연단은 소망(천국의 영광)을 이룸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된 약속만 붙들고 살게 됩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기독교의 기적은 단순히 하나님이 초자연적 능력을 겉으로 나타내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한마디로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은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마6:32) 이방인도 알고 믿고 간구합니다. 실제로 그들도 이름만 다르지 같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강변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런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며 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교회가 행하는 어떤 집회라도 예수 복음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참석해 본 그 집회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참석한 것도 아니고 이미 질문자도 정답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 최대한 양보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믿음의 신자라면 말씀과 기도에 개인적으로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기에 구태여 그런 집회로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빛 안에만 거하면 어둠이 틈을 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0/29/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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