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되 가장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

출애굽기 강해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6:1-9)

 

하나님의 너무나 확실한 보증

 

모세가 출애굽을 요청하자 바로는 콧방귀도 안 뀌고 히브리인들의 노역만 강화시켰다. 하루 작업 할당 양을 채우지 못하자 형벌을 가했고 그런 육신적 고통이 심해지자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도 뒷전이고 바로와 한통속이 되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심판해달라는 저주의 신탁까지 했다.

 

모세는 그래서 주여 어찌하여 이런 지경이 되게 이끄셨는지 두 번이나 하나님께 하소연했다.(출5:22) 본문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 먼저 출애굽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재확인한 것은 당연했다.(1절) 그렇다고 떨기나무 불꽃에서 첫 대면한 이후로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약속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우선 1절 후반부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내보내리라’고 온건한 표현을 한 것과 다르다. 쫓아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과 급히 서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 쫓아내면 안 될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바로가 계속 완악하게 항거할수록 하나님이 내린 재앙도 더 강력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버티다간 우리가 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무리 자기들을 부강케 만든 공짜 노동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까워도 제발 빨리 나가달라고 부탁하고 재촉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참 대단한 말씀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1절 전반에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애굽이 인간사회에선 최고 강대국이지만 당신의 권능과는 도무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며 엄격히 말해 하나님에 대한 불경과 모독을 넘어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고 계시를 받고 있고 그분의 이름으로 이적을 실현할 수 있는 권능의 통로인 그분의 지팡이를 쥐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처음 대면할 때부터 나중에 시내 산에서 당신께 경배 드리게 될 것이라고 더 확실한 보장을 받았다. 그런 모세 너마저 흔들리고 불안해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하나님의 질책의 뜻이 분명히 있다. 또 실존하지도 않은 상상 속의 산물일 뿐인 애굽 신들이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자 유일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겨룰 수는 절대 없다.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다. 모세더러 그런 애굽인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모세는 지금 바로와 동족들과 한 번의 탐색전을 겨우 마쳤다. 사전에 충분히 예상했던 그대로 사태가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게 두 번이나 읍소했다. 하나님의 종이지만 한 인간으로써 연약한데다 마음의 상처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고난 실패 상처 억울함을 첫 대면하자마자 즉, 그런 일들이 생기자마자 하나님에게 두 번이 아니라 매일 어서 빨리 구출해내라고 떼쓰기 바쁘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자연히 그런 기도를 하게 되더라도 기억할 것은 모세에게 주신 바로 이 말씀이다. “이제 내가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세상의 죄악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행하는 일을 보라.”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나중에는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를 찾아와 네가 믿는 하나님께 제라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까지 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약속하셨는가?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겠다고 했다. 그에게 직접 복을 부어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너를 축복하는 자 내가 아닌 그를 하나님이 축복하겠고, 너를 저주하는 자 내가 아닌 그를 하나님이 저주하겠다고 했다. 쉽게 말해 네 외부의 사람이나 환경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 앞에 여호와 이름을 아는 자답게 서기만 하라는 것이다.

 

내 쪽의 종교적 경건 열심 신실함을 증가시키는 만큼 하나님이 반대급부로 내 쪽에 뭔가 좋은 일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 아님을 제발 아셔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복을 안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광대하신 사랑과 권능의 바다 안에 들어와 푹 잠겨 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 있는 일을 찾아서 그에 동참하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분이 이루실 결과를 벅찬 가슴 떨림으로 소망하고 기대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답변 중에 정작 깊이 따져봐야 할 말씀은 3절이다. 방금까지 살펴본 1절의 의미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여기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모세의 출애굽 이전에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역사했지만 출애굽 이후로는 여호와로 사역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백 년간 노예 살이 시킨 것도 전능의 하나님이었다는 뜻이다. 이제 바로가 황급하게 히브리인들을 쫓아내게 하려면 더더욱 전능의 하나님으로 역사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 스스로 모순되는 말씀을 한 것 아닌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인식과 상충되는 것 아닌가?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3:14에서 이미 배운 대로 모세에게 처음 가르쳐주었다.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그 문자적인 뜻은 “내다! 내라니까”이다. 사물의 이름은 예컨대 자동차(自動車) 스스로 굴러가는 탈 것이라는 의미처럼 그 특성을 드러낸다. 사람의 이름은 제 경우 넓은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라는 뜻인데 부모가 당신들의 소망을 담아서 지어주고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기능을 갖는다. 무슨 이름이든 인간사회의 교통에 필요해서 인간이 붙인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시작한 이후로 항상 그렇다.

 

하나님은 구태여 다른 존재와 구별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름이라도 당신의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기록된 이름 전부가 유대인들이 그분의 간섭과 인도를 받은 체험에 비추어 붙여서 그분의 일부 특성을 드러낸다.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내용이 다양했으니까 그 이름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에벤에셀’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는 모든 것을 예비해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등등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에서 하늘의 하늘이라도 여호와를 용납하지 못하고 당신께서 이 전에 이름을 두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다.(왕상8:26-30)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하게 잘 지어도 그분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한다.

 

심지어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일 될 수 있다. 기도 중에 중병이 기적으로 나은 경험이 있다면 치유하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초점이 모일 수 있다. 그래서 자칫 병원은 멀리하고 모든 병을 기도로 고치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코끼리의 코 하나만 만져도 그렇게 크다면 이것이 어느 부분인가, 이게 전부인가, 전부가 아니라면 코끼리 전체는 얼마나 클까 어떤 모습일까 알아보려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병이 낫는 이적은 하나님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분이 신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라는 점을 제대로 알게 해주려는 뜻이다. 그런데도 계속 병 낫기만 요구하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가 의외로 많으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역사하는 모습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당신의 모든 권능과 은혜로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베푸신다. 본문에서 모세 이전에 권능의 하나님으로 역사하다 앞으로는 여호와로 사역한다고 해서 당신의 행하심과 그 목적에 변화가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이름은 인간의 체험이 반영된다고 했듯이 히브리인들더러 당신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는 정확하게 말해 더 업그레이드 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사백 년간 종살이 할 때는 필연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만 소망할 수밖에 없다. 어서 빨리 노예 생활이 종식되어 애굽에서 나가게 되길 간절히 빌고 또 빌게 된다. 하나님도 그런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신다. 그러나 이제부턴 신앙의 목표와 기도하는 동기를 하나님의 나라 건설로 바꾸라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낸다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눈에 안 보이는 그분의 거룩하고 은혜가 풍성한 나라가 고센 땅 위에 항상 세워져서 모두를 당신의 백성들을 은혜로 감싸고 있었다.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선 모든 열방이 보고 알 수 있고 그들도 여호와의 이름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건설에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한마디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경 쓰지 말라 앞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사역하겠다고 했다. 이 말씀 자체에 출애굽은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출애굽은 이미 확정된 사실로 바로가 너희를 쫓아낼 것이다. 이후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역사하는 의미를 잘 깨달아 그에 적절하게 반응하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문자적 의미는 ‘내다’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본문 5절이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가? “이제”이다. 1절에서 이제로 시작해서 4절까지 당신의 언약을 재확인한 것을 5절에서 다시 더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겠다는 뜻이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듣고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첫째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이 잊고 있다가 당신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기억한 것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히브리인들더러 하나님은 언약을 오차 하나 없이 반드시 실현하시는 여호와임을 절대로 한 시라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6-8절에서 다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을 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절대 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100%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특별히 신음 중에 기억하라고 했다. 고난이 닥칠 때에 전능의 하나님보다는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고 반드시 신실히 지키는 하나님을 더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응답을 그대로 동족에게 전했더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9절) 모세의 지도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기는커녕 수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마음의 상함으로 그랬다고 한다. 애굽을 그 자리에서 무너뜨리거나 바로를 즉사 내지 불구로 만들어 단번에 항복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끈한 불 쇼를 보이지 않았고 전능한 모습은 전혀 없이 문전 박대를 당하니까 사백 년간 기다린 하나님이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 낙심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해소될 수 없었다. 바꿔 말해 여호와 하나님 즉,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니 여전히 립 서비스만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이전처럼 계속해서 전능하신 하나님만 소망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내 능력만 믿지 말고 내 약속을 믿으라고 강조했다. 내 능력만 믿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마음이 상하게 될 것이다. 믿음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노역도 더 강화 즉, 현실 여건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고난 중에 당신의 능력보다 약속을 더 강조하는 하나님이 정말로 하나님다우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무지(無知)

 

정식으로 조사는 안 했지만 아마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장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그 전능의 뜻도 잘 모를 정도로 영적으로 너무 어리석다.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여 순식간에 뚝딱뚝딱 해결하는 것만 전능이라고 여긴다.

 

무술의 최고수는 싸움을 잘 하지 않고 가능한 피한다. 자기 힘대로 하면 상대가 크게 다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상대라도 제압할 실력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도 무술 백단 아니 천단의 능력이 있는데 왜 그 자리에서 바로를 박살내지 않느냐는 것이다.

 

유치원 동생이 대학생 형의 책상에 놓여 있는 신기한 글로 적힌 미적분 문제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형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몰라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최선을 다해 가르쳐도 동생은 알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성도 당연히 모든 것을 아시나 우리에게 가르쳐줘도 모르는 일들이 더 많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만이라도 알자고 따지는 욥에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계에 관한 백 개가량의 질문을 던졌다. 욥이 아무 대답을 못했는데도 하나님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에 욥으로부터 주는 무소불능하고 못 이룰 것이 하나 없는데 무지한 말로 따진 내가 잘못했다는 실토를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귀로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욥42:5) 오늘 본문 1절처럼 이제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잠잠히 보는 그 믿음에 욥도 도달한 것이다. 성경 전체에 최악의 고난을 겪는 욥이 아직 그 고난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분의 전지성에 전혀 하자가 없듯이 그분의 전능성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당신의 뜻에 따라 일부러 하지 않아도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되 당신의 뜻에 따라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함과 행하지 않음을 결정 시행할 수 있어야 전능한 것이다. 인간에겐 전혀 불가능한 일이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다. 또 그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뜻이라고 출애굽기 3:14에서 이미 밝혀놓았다. 능력을 자꾸만 힘(power)의 차원으로만 접근하는데 의지(will)의 차원에서 이해 적용해야 한다. 행하고 싶을 때 행하고 행하지 않아야 할 때에 행하지 않을 수 있어야 전능이다. 인간은 정반대이다. 반드시 행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 즉, 하나님께 순종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받았는데 행하지 않는다. 또 행하지 않고 행해선 안 되는 일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는 일은 자기도 모르게 행하지 않는가?

 

신자들이 문제와 고난을 두고 오래 동안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된다. 마치 하나님이 침묵 외면 거절 심지어 더 큰 고난을 겹치게 해서 벌을 주시는 것 같아도 그 모든 것들이 그분의 전능성 안에 포함된다. 무엇보다 인간의 죄를 일일이 벌을 주어야만 당신의 공의가 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그분 전능성의 더 정확한 의미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까지 막는 자가 있다고 했다.(살후2:7) 자세한 주해가 필요한 말씀이지만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도록 허용하셨다. 단 비밀스럽게 활동하도록 했다. 신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에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공의가 있다는 뜻이다. 단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신자의 멸망함이 절대로 없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다 그분의 전능성에서 이뤄진다. 또 그 모든 일들이 동시에 완전하고도 충족되게 행하신다는 면에서 그분은 전능한 것이다.

 

우리 모두 공중권세 잡은 자 사탄의 노예로 묶인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엡2:10) 특별히 허물로 이미 죽었던 자였다.(1절) 당신의 공의로 따지면 도무지 살 수 없는 자다. 그런데도 당신의 공의를 당신 스스로 무너뜨리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했다. 바로 이런 면이 그분 전능성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의(義) 중의 의가 되게 했다.

 

하나님 전능성의 절정이자 완성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백 년간이나 애굽의 노예살이 시켰다. 당신의 심정은 너무 안타까웠다. 히브리인들이 노역으로 신음할 때에 하늘에서 당신도 함께 신음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도무지 허용될 일이 아니다. 공의로 따져도 의인이 악인에게, 최소한 무죄한 자가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백 년간이나 당신의 공의와 사랑 둘 다 깨트렸고 바로 이것이 그분만의 전능성이다. 당신의 백성들은 이미 당신을 알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애굽과 가나안 족속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최소한 열방들에게 당신의 당신 되심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완벽하게 드러내려 하신 것이다.

 

본문대로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더 심한 노역을 시키게 한 것도 그분이 전능하시기에 가능하다. 모세의 응답을 듣고도 그들이 아직 수긍하지 않는 것도, 그럼에도 벌을 내리지 않는 것 모두가 그분만의 전능성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제발 너희 방식으로 전능을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컨대 전능하신 하나님만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지 않는 능력은 폭력 독선 강제가 된다. 바로와 다를 바 없다. 언약에 근거한 능력만이 참 권능으로 신자에게 유익이 되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오늘날 신자에겐 성경의 기록된 전부가 절대적 사실이요 그 예언도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다. 실감나는 예로 새벽기도 가는 권사님이 교통사고로, 그것도 음주 운전자에게 치여 죽는 것이다. 십년을 연애하여 결혼한 젊은 부부의 그 사랑의 결실로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나자마자 죽던지 불구아이가 태어나도 하나님의 전능성에 전혀 하자가 없다. 목사로서 종교적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추측으로 빈말을 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아무 죄 없이 선행만 베푸셨는데 인류 역사상 최고로 억울하고 최고로 고통스럽고 최고로 수치스런 죽음으로 내몰았지 않는가? 당신의 백성들은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길 바랐다. 로마를 물리치는 것은 당신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요,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베푸는 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둘을 다 거역한 것이다. 나아가 주님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시고 골고다 십자가로 올라가셨다. 이젠 공의와 사랑은 물론 당신의 전능성마저 거역했다.

 

그럼으로써 본문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창3:15에 약속하신 원시복음을 완벽하게 실현한 것이다. 나아가 선악과 금령에서부터 계시된 대로 이 땅에서 인간은 하나님, 특별히 예수 십자가 사랑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음을 선포하고 또 그 은혜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십자가야말로 당신의 전능성의 절정이자 완성이었다.

 

신자는 예수 십자가로만 모든 삶을 영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국 땅 미국의 한 시골 주에서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 그 동안 교회 문제로 많은 상처와 억울함을 겪게 한 것 등등 우리 중에 아무도 계획은커녕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분의 전지전능하심 안에서 이뤄진 일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로 일부러 고생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의 전지전능성은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너무나 광대하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신앙 자세는 욥처럼 하나님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분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욥이 고백한 대로, 본문 1절의 선포대로 이제부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잠잠히 지켜보겠노라는 한마디다. 최소한 그분의 전지전능성에 더 이상 시비 걸지는 말아야 한다.

 

6/2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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