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조회 수 204 추천 수 0 2017.09.15 13:46:39

“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출애굽기 강해 (27)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29-36)

 

여호와를 보고도 살아난 애굽?

 

구약성경 전부가 그러하지만 특별히 출애굽기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가장 잘 예표 한다. 예표(豫表)란 출애굽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적 진리가 나중에 십자가에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하나님의 영적 진리가 무엇인가? 아무래도 “하나님의 긍휼”이라는데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전체에서도 하나님의 최고 긍휼이 베풀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드디어 구원을 받았고 그것도 애굽의 금은보화까지 취하는(35,36절) 풍성한 은혜를 입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긍휼(mercy)의 뜻이 무엇인가?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그것을 보상할 어떤 조건, 자격, 공로 하나 없이도 그 벌을 면제 받는 것이다. 그럼 출애굽 사건 특별히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애굽 둘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는가?

 

신학적으로 따지면 둘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다 받은 셈이다. 출애굽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자 때늦은 감마저 있다. 출애굽 사건 자체만 따로 떼어서 보면 벌을 마땅히 받았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기에 애굽이 받은 긍휼이 훨씬 더 크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백 년 넘게 학대했다. 하나님 당신을 멸시하며 아홉 번이나 완악하게 거역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치명적인 심판은 유보했다.

 

인내의 한계가 이른 열 번째는 모든 장자를 죽이는 엄청난 벌을 내렸다. 한 집도 빠지지 않고 큰 곡성이 울렸다.(30절)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심판이 내려진 이날 저녁에야말로 이전의 아홉 번 재앙 때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긍휼이 애굽에 아낌없이 부어졌다. 인간이 감히 받을 수 없고 감당도 할 수 없는 그런 긍휼이었다.

 

지금 여호와께서 직접 심판의 칼을 휘둘렀다. 죄인은 물론 모든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소멸하는 진노의 불이 애굽 전역을 휩쓸었고 고센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문에 양의 피를 바르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고 문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만 그랬다.

 

그럼 그날 밤에 집 밖으로 나간 사람이 애굽의 장자만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차남이나 다른 형제들만 집 안에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 집 밖에 있던 애굽의 장남이 아닌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를 보고도 살아남았다는 뜻인가?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물론 그럴 수는 절대로 없다.

 

밤중에 은밀히 행하시는 하나님

 

애굽은 심판이 그날 밤에 임한다는 사실도 예고 받지 못했다. 모세가 바로에게 그 날짜는 지정하지 않고 한밤중에 장자가 죽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만 했다. 그러나 이날 밤 애굽은 이스라엘이 평소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집에서 어린 양을 잡아 죽였다. 초저녁이나 오후 늦게 일시에 양의 울음소리가 고센 땅을 뒤덮었다.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발랐다. 그 모습이 굉장히 황급했지만 다른 한 편 엄숙하고 경건했다. 그 후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부 애굽 사람들에겐 오늘 저녁이 장자가 죽는 심판의 날인가 덜컥 두려움이 덜컥 생겼을 것이다. 일부는 설마 애굽 전국의 장자와 생축의 초태생을 어떻게 일시에 정확하게 죽일 수 있을지 의심했을 것이다. 일부는 모세가 아홉 번 경고한대로 재앙이 일어났다는 점을 잘 알기에 자기들도 문을 잠그고 조용히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큰 일이 있을 때에 꼭 만용을 부리는 자들이 나온다.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겠다거나 히브리 신이 세면 얼마나 세나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끝까지 호기를 부리며 밖에서 서성거리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 29절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밤중에” 심판하셨다고 한다. 영어로 midnight으로 번역되어 있듯이 히브리 원어에 “절반으로 나눈다.”는 뜻이 있다. 밤 12시를 말한다. 그럼 지금 어떤 상황인가?

 

용감무쌍하게 밖에서 얼쩡거리던 애굽 사람들도 몇 시간이나 기다려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들 포기하고 집에 들어가 잠에 떨어질 시간이다. 본문 30절에 바로와 애굽사람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도 무교병을 구을 여유마저 없었으니 끼니도 거른 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지쳐 떨어졌거나 여전히 주님의 심판을 잠잠히 기다렸을 시간이다. 한마디로 온 천하가 정말 개도 짖지 않을 정도로 고요에 잠겨있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애굽인들도 당신의 실체를 보고 소멸되지 않게끔 즉, 장남이 아닌 자들이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더러 피의 제사를 드리게 해서 두려워서라도 밖에 못나가게 사전에 배려한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성경은 여호와가 심판했다고(29절) 선언한다. 성부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서 직접 강림하셨는지 여부는 신학적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다. 그러나 죽음으로 심판하는 그분의 권세는 분명 당신께서 나왔고 정확하게 집안에 있는 애굽의 장자들에게 미쳤다. 설령 하나님의 실체가 하늘 보좌를 떠나지 않았다 해도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의 죽을병을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 낫게 했듯이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애굽을 건너 띈 죽음의 권세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모세와 아론조차 집밖에 나가면 심판을 받기에 집안에 꼼짝 않고 있으면서 양의 피로만 구원 받았다. 그런데 애굽은 양의 피의 공로에 힘입지 않고 죽음의 심판이 애굽의 장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건너뛴 셈 아닌가? 애굽이야말로 유월절 제사를 지내야 할 판이다. 이 얼마나 큰 긍휼인가?

 

하나님은 애굽에게 장자 죽음의 심판을 미리 경고했다. 그것도 모세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인데 감히 바로 왕에게 심히 분노할 정도로 엄숙하고 진지하게 경고했다. 당일 저녁에도 최소 여섯 시간의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도 주었다. 애굽은 모세가 경고한 대로 아홉 재앙이 일어남을 보았다. 더 중요하게는 모세의 말 한마디로 죽기 직전에 재앙이 멈췄다.

 

이날 밤 상황을 상상해보라. 이스라엘의 모든 집들에 양의 울음소리가 진동을 했다. 그 집 문의 가로 세로에 양의 피를 발랐다.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문밖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집안의 개도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섬뜩했겠는가?

 

그럼 당장 바로의 궁으로 몰려가 이스라엘을 풀어주라고 시위해야 하지 않는가? 거리가 멀고 고대에 왕에게 감히 그럴 수 없다 치자. 그럼 틀림없이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를 이용해 고센 땅의 상황은 보고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애굽은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다.

 

사람은 두들겨 맞고도, 아니 어리석다 못해 죽음을 당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서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져 함께 멸망해도 모른다. 아니 죽었으니 이미 알아도 늦다. 사람들이 말로 알아먹을 수준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도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은 애굽에게 반나절 동안 회개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허락했다.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할 바를 다했다. 열 번이나 거역한 애굽이 도무지 감당 못할 긍휼이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를 바르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출애굽을 허용했어야 했다.

 

그럼 장자의 심판은 절대 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재물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며 양쪽 모두에게 아무런 희생 없이 순순하게 출애굽이 이뤄졌을 것이다. 지금 애굽이 일방적으로 당한 모습은 추호도 없다. 이스라엘만 편해하는 배탁적인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애굽에 더 많은 긍휼을 베풀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가 애굽에 복을 주실 것이며 나아가 “나의 백성 애굽”이라고까지 선포했다.(사19:18-25) 스가랴 선지자도 초막절에 애굽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함께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예언했다.(슥14:9)

 

물론 그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자 궁극적으로는 재림하셔서 이 땅과 만백성의 구원을 완성시킬 날이다. 그러나 애굽을 치실 것이지만 치시고 고치실 것이라고 했다.(사19:22)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이 직접 애굽을 치신 날이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 예언은 오늘 본문의 출애굽 당일 사건을 포함한 말씀이다.

 

애굽의 장자는 어쩔 수 없이 심판을 하셨다. 순전히 애굽의 자기를 높이려는 헛된 자존심 때문이다. 스스로 멸망을 고집한 영적으로 너무나 어리석은 탓이다. 미혹한 영에 사로잡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던 그 죄악을 하나님이 심판한 것이다. 그러나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칠 것이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로만 구원 받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하도록 했다. 정말 약속대로 장자 외에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했다.

 

비록 그들이 회개는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여호와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최고의 신이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 혼자서 계획 주도 열매 맺으신다. 인간이 아무리 거역해도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신다. 신자는 그 자격 조건 의로움에 너무나도 보잘 것 없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또 그 영광에 동참해서 누릴 수 있도록 부름 받은 자다.

 

가룟 유다는 책임이 없지 않는가?

 

간혹 신자들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파는 역할로 뽑혔고 예수님도 그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유다만 억울한 것 아닌가, 죄는 몰라도 그에게 책임은 없는 것 아닌가 의아해 하는 자들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밤에 어떻게 했는가? 이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했고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주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그라고 했다.(마26:13) 유다가 그 때에 분명히 빵 그릇에 함께 손을 넣었다. 주님이 유다라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다 밝혀진 셈이다.

 

유다는 그래서 “내니이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즉, “네가 바로 그다!”라고 답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다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더 중요하게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라는 신호였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마지막까지 유다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평소에 주님은 유다에게 개인적으로 따로 더 긍휼을 베풀었을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을 때도 유다는 노골적으로 스승에게 불만을 터트렸으나 야단치지 않으셨다. 말하자면 그 때도 그를 배려하여 네가 제발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경고의 신호를 은연중에 보낸 셈이다.

 

그럼에도 유다는 결국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길을 박차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대제사장에게 겨우 은 삼십 냥을 받으러 갔다. 출애굽 당일 날 애굽의 바로와 백성들과 가룟 유다 사이에 단 한 치의 다른 모습이 없다.

 

그런데 더 놀랍고 이해가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유다의 이름만 거명하지 않았을 뿐 유다가 배반할 것이라는 것은 다 밝혀졌다. 그럼 예수님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열한 제자들이 스승을 팔지 못하도록 유다를 묶어서 감금하던지 최소한 야단치며 추궁은 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왜 그런지 아는가?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마26:22) ‘각각’이라고 했으니 전부를 말한다. 놀랍지 않는가?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명의 제자들도 모두 예수를 팔 계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했다는 것이다. “심히 근심”할 정도라면 상당히 고민도 했다는 뜻이다. 모두가 양심에 찔려 유다를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아니 안한 것이다.

 

예수님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그날 밤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가지 또 다시 유다가 밀고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로마를 물리쳐 주지 않는 한 계속 배반할 것이다. 유다는 물론 나머지 열한 명의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존재임이 더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노예 살이 중에도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젊었을 때 즉,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할 때에 애굽과 동침하였고 그 때부터 행음을 저질렀다고 선언했다.(겔23:8)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삼게 해준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만 겨우 붙들고 있었다. 어쩌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자기들 선조들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어 약속을 받았다는, 도무지 언제 실현될지 모르지만, 사실만 겨우 알고 있었을 수 있다.

대신에 애굽의 우상 숭배에 적극 참여한 것 같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했다. 고대에 고기는 귀한 것이라 우상 신전에 먼저 바쳐지고 그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나눠 먹는다.

 

그 후에 남는 것이 시장에 나오는데 여전히 비싸서 돈이 많아야 사먹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노예인데 그만큼 돈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겨우 본문 출애굽 때에서야 은금 재물이 생겼다. 이로부터 약 1,500년 후의 고린도에서도 사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바울 사도가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거기다 모세가 하나님께 거룩한 율법을 받으러 40일 간 금식하며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데 그 사이를 못 참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춤추며 음란하게 우상을 경배했다. 하나님이 이날 저녁 애굽의 금은을 이스라엘더러 취하게 한 것에 참으로 심각한 의미들이 많다.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따져보겠지만, 하나님이 출애굽 때에 주신 바로 그 금이다. 하나님의 금을 사용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출애굽의 그 큰 이적을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변심하고 하나님을 배역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고 치울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백 년 동안 이스라엘의 뼈 속까지 스며든 우상 숭배의 DNA가 작동한 것이다.

 

이번에는 출애굽 저녁에 양의 피를 바르고 집안에서 꽁꽁 숨어 있는 이스라엘이나 마지막 날 밤에 예수님을 팔려고 마음먹은 열한 명의 제자들이나 단 하나 다를 바 없다. 어린 양의 피가 아니면 모두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하나님의 애통하심을 헤아릴 수 있는가?

 

하늘에서 하나님이 출애굽 당일에 이 땅을 굽어 살피실 때나,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애굽과 가룟 유다를 바라보며 분노와 탄식을 했겠는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오히려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백 년의 연단을 겪었다. 예수님의 열한 명의 제자들은 삼년의 공사역을 주님과 함께 하면서 직접 가르침과 긍휼을 받았고 수많은 기적도 보았다. 믿음의 결실이 양쪽 다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영적으로 시체이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더 화를 내고 진노의 불을 쏟아 부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정확히 말해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지 않고 다 진멸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더 예뻐서 구원해준 것도 아니요, 애굽이 더 미워서 구원 밖으로 밀어낸 것도 아니다.

 

이날 밤 하늘에 계셔야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고센 땅에 강림하신 목적은 딱 하나다.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당신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피조물로 둘 다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둘 다 연약하고 초라하고 무능하고 어리석고 거기다 완악하기까지 해서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지 않으면 허망하고 갈급하게 그 인생이 끝날 것을 아셨다.

 

그래서 애굽에게 마지막까지 반나절이라는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애굽은 그마저 걷어 차버렸다. 또 이스라엘의 경우 문에 피를 바른 것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는 신호의 역할이 결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피 없이도 당신의 백성을 못 알아볼 리 없지 않는가? 출애굽 이후에도 유월절 피의 제사를 계속해서 드리며 그 구원을 회상 감사하라는 것이 피를 바르게 하는 주목적이었다.

 

그러니까 성경도 12장에 순서를 뒤바꾸어서 그 규례부터 먼저 나온다. 노예 살이로 핍박당하면서도 그 지배민족의 우상숭배에 적극 참여한 그런 배역 가운데도 하나님이 오직 당신의 긍휼로 구원해주신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당신께만 절대적으로 겸손하고도 순전한 믿음으로 경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애굽으로 되돌려보내 달라고 징징거렸다. 사백 년을 연단시킨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은 혼자서 쓸쓸히 당신의 언약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출애굽 자체가 그런 것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메시아를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보낼 때와 여건을 마련하고 계시는 중이다.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도움도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오직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 십자가를 향해 이끌고 가는 중이다. 만물이 그에게(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로(예수로) 말미암아, 그를(예수를) 위해 창조하셨던 그 뜻을 실현하시는 중이다.(골1:16) 어떤 인간도 예수님 없이 아무 소망도 없음을 인류 역사 속에 개입하여 당신께서 증명하는 중이다.

 

은 삼십 냥에 예수를 파는 목사

 

지금 고대 애굽과 이스라엘이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솔직히 예수님을 팔아버릴 마음을 먹은 적이 없는가? 저부터도 부끄러워서 도무지 설교할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맡겨준 사명 때문에 수치를 무릅쓰고 설교할 뿐이다.

 

성육신한 예수님을 파는 것이 가룟 유다에게 지어진 숙명이라고만 간주해선 안 된다. 오래 숙고 모의 결단한 그의 전적인 죄이자 책임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은 삼십 냥에 흔들리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자의로 반복한다. 세상의 형통과 안락이 하나님을 경배 감사하는 일보다 앞선 적이 훨씬 많다. 유다는 그래도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할 생각이라도 했고, 또 자기 잘못을 깨닫고 죽음으로 스스로자기 죄 값이라도 갚았지 않는가?

 

물론 우리에게 예수님을 위해 살고 싶은 열정 최소한 소망은 있다. 자꾸 나태하고 넘어져서 그 실천이 더딜 뿐이다. 그 마음을 하나님은 보고 있고 잘 아신다. 그러니까 지금껏 큰 징계 없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솔직히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본문 29절처럼 하나님은 한 밤 중에 당신의 긍휼을 베풀기 때문이다.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고 보고 들을 수 없는 모습으로 그분의 권능과 은혜가 은밀하게 우리에게 역사를 한다. 우리는 따로 양의 피를 문에 바를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다. 출애굽 당일의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완벽하게 보장하셨다. 천지가 뒤집어져도 절대로 변경 취소가 없다.

 

눈에 안 보이게 은밀한 긍휼이란 무슨 뜻인가? 너무 정밀하고 신묘막측하고 광대해서 우리의 이성과 상상의 범위를 넘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게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금방 메인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워지고 어느 샌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을 추고 있거나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금만 안락하면 나태해지고 조금만 힘들면 그저 아우성밖에 칠 줄 모른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녀도 이렇다. 이 얼마나 가난한 신앙인가? 이 얼마나 애통할 일인가? 얼마나 어리석고도 무지한가? 너무나 부끄럽지 않는가?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말고 과연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정확히 말해 우리의 비참함 가난함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 사망의 몸에서 곤고한 심령을 구해줄 이는 예수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를 비하할 뜻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이미 되어 있다. 우리의 너무나 가난함과 비천함에 대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긍휼이 얼마나 차고도 넘치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최소한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8/2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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