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신자들

조회 수 74 추천 수 0 2017.11.16 08:38:34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신자들

출애굽기 강해(3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17:1-7)

 

모세의 특이한 반응

 

이번 주에 마침 때 맞춰서 미국 TV의 Travel channel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남미의 파나마의 유명 관광지로 양쪽으로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이었다. 그 절벽 바위 곳곳의 벌어진 틈새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강물이 되어 흘렀다. 바위 뒤의 땅의 지하수들이 새어나온 것이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낸 사건이 실제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모세처럼 바위를 친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물질계를 조성한 후에 첫날에 빛이 있으라고 명령했다. 하늘의 별들을 제 자리에 위치시킨 것이다. 둘째 날에는 땅에서 물과 육지를 나눴다. 물이 흘러가는 길과 모이는 장소를 구획정리 것이다.

 

모세가 바위를 치자 물이 쏟아진 것은 하나님만은 광야에 지하수가 어디로 흐르는지 아시므로 그곳과 연결되는 반석에 파이프를 꽂아 분수 공사한 정도밖에 안 된다. 만약 그런 수맥(水脈)과 상관없다면 마른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는 분이 바위 안에 생수 합성 공장을 차린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창조주 그분에겐 여반장(如反掌),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출애굽기를 강해해 오면서 하나님의 능력보다 그분의 오묘한 섭리 안에 숨겨진 그분의 더 풍성한 은혜에 주목하라고 내내 강조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더니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들은 모세와 다투었다. 단순히 물을 달라고 말로 요구한 것이 아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들이 조금만 더 있으면 돌을 들어 칠 것 같다고 호소했다.(4절) 거의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는 뜻이다.

 

그에 대한 모세의 반응이 특이하다.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고 한 후에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모세는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함이라고 야단쳤다.(16:8) 그럼 지금도 너희가 나와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런데 하나님과 연결해선 ‘다툼’ 대신에 ‘시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다툴 수 없기에 일부러 부드럽게 표현했는가? 이들의 선조인 야곱은 사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이겼다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창32:28) 마침 본문 1절도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칭한다.

 

모세로선 얼마든지 여호와와 다투지 말라고 야단 칠 수 있다. 나아가 그 반대로 너희가 나와 다투지 말고 너희 선조 야곱처럼 하나님과 다투어 이기라고 즉, 밤새 그분께 울부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으라고 말할 수 있다.

 

모세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말한 까닭은 실은 지금 시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명령으로 르비딤에 왔더니 물이 없었다. 그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얼마나 잘 인내하며 기도하는지, 당신의 기적을 소망하며 잠잠히 기다리는지 테스트 중인 것 아닌가?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신자가 성경 특별히 구약을 읽으면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잘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지금 본문 사건만 해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또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난을 허용해 눈물로 기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게 한 후에 겨우겨우 해결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편해졌다 싶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크고 복잡한 고난을 겪게 한다.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억울하게 손해 핍박을 받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 이제 저도 믿음의 담력이 어지간히 생겼으니 더 이상 저를 연단 시험하지 말아달라는 간구가 절로 나온다. 간혹 이 문제만 해결해주면 이렇게 저렇게 더욱 헌신하겠다는 작정 내지 서원은 한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을 시험할 의사는 우리에게 추호도 없다.

 

이스라엘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동행했다. 물은 3일만 마시지 못하면 죽기에 물이 떨어지면 물 달라고 불평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 반복되었기에 불평의 강도도 심해질 수 있다.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모세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야단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이스라엘은 사백 년간 애굽 노예로 있으면서 무슨 일이든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패배 의식에 젖어 지레 겁부터 먹는 습성이 철저히 몸에 배여 있었다. 모세로선 지금 자기 동족의 그런 노예근성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했던 것이다.

 

모세는 비록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지난 80년간 노예로 지내지 않고 자유의 몸이었다. 자유가 얼마나 좋고 귀한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도 그 귀한 은혜를 맘껏 누리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난 것이다.

 

마라의 쓴 물과 만나 사건 때에는 각기 처음 겪는 일이어서 원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장막 주위의 온 사방에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의 증거인 만나가 눈처럼 쌓여 있다. 또 욕심을 내어 많이 거두면 이튿날 자동으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매일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다시 1절을 자세히 보라. 르비딤에 장막을 쳤더니 마실 물이 없다고 했다. 르비딤 그 장소 주변에 연못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소지하고 있는 가죽부대에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곳에 도착했더니 물이 없어서 모세를 치려했다. 그럼 바로 하나님께 돌을 들어 치려한 셈이다. 하나님을 시험한 정도가 아니다. 죽어 마땅한 너무나 사악한 죄를 범한 것이다. 모세가 시험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의 분노를 누르고 또 억누른 너무나 절제한 표현이었을 뿐이다.

 

바로 네가 죽어 마땅한 자다.

 

사무엘하 11-12장은 잘 아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유부녀와 통간한 것도 모자라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의 최고 일선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어 전사한 것처럼 즉, 완전범죄로 가장하여 살인까지 했다. 율법으로는 간음과 살인, 돌에 쳐 죽임을 당해야 하는 큰 죄를 두 번이나 범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송하는 다윗이 그랬다.

 

그 후에도 뻔뻔하게도 공개적으로 밧세바를 후궁으로 취해들이고 그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다. 성경은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선언한다.(삼하11:27) 인간 사회에선 공범인 요압만 끝까지 입을 다물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당신의 백성들 이백만 중에 누가 만나를 욕심내었는지 정확히 알아서 썩게 만드는 여호와의 눈을 속일 수는 결코 없다.

 

하나님은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을 어떻게 책망했는가? 모든 것을 가진 부자가 가난한 자의 유일한 재산이자 생의 기쁨인 암양 새끼 한 마리가 탐이 나서 힘으로 빼앗았다는 비유를 들었다. 다윗은 그런 나쁜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분노했고 나단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자가 바로 다윗 당신이라고 선포했다.(삼하12:5)

 

무슨 뜻인가? 모든 것을 다 갖추고도 딱 하나 없어서 조금 불편하거나 계속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눈이 뒤집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딱히 그것이 없어도 흡족하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 특별히 거룩하게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그런다. 단지 자기 기분에 안 찬다는 한 가지 이유로 끝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 덤빈다. 거룩한 일은 죽기 살기로 추구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서 말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사백 년 만에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와 마라의 쓴물과 만나까지 단지 수치로만 따져도 열 세 번이나 천지가 뒤집히고도 남을 기적을 맛보았다. 지금도 밤낮으로 구름과 불기둥으로 사막의 극심한 온도 차이에서 보호 인도 받고 있는 중이다. 비록 물이 생존에 필수적이긴 해도 먹을 것이 있고 동물의 젖을 받을 수 있다. 딱 하나 없는 것, 아니 부족하자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 죽일 듯 덤벼들었다.

하나님 쪽의 불합리한 점

 

지금껏 출애굽기를 배워오면서 하나님 쪽에 뭔가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요소 하나가 있는데 눈치 챌 수 있는가? 우리가 봐도 너무나 한심하고 비겁하고 불경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한 번도 책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요구대로 순순히 다 들어주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스라엘이 노예근성을 아직 버리지 못했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그들의 심령을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 세척 작업 중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다윗이 사방 대적을 다 파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굳건히 세운 후로는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로선 어느 정도 노예근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까닭이다.

 

그런데 노예근성을 버렸음에도 다윗처럼 딱 하나 부족한 것 때문에 나태에 빠져 간음 살인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선 무조건적인 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죄만 지으면 당장 벌을 주는 냉혹하고 잔인한 하나님이 절대 아니다. 그 정반대다. 당신의 백성의 죄악과 배교를 참고 또 참아주신다. 출애굽에서 엄청난 기적을 베풀었기에 여호와만한 신이 없다고 이해해선 안 된다. 이처럼 완악하고 치사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품어주신 긍휼을 가진 신은 세상 어떤 종교에도 없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을 우린 기껏 어떻게 이해하는가? 병 주고 약을 주는 하나님으로만 여긴다. 사실상 우리 수준이나 본문의 이스라엘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솔직히 저부터도 조금만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면, 정확히 말해 부족할 것이 예상되면 발을 동동 구르며 염려 불평에 사로잡힌다.

 

“하나님 제가 대박 같은 축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힘든 일만 빨리 해결해주세요. 왜 자꾸 병 주고 약 주십니까?” 라는 생각이 되풀이 든다. 모세가 이스라엘더러 하나님이 너희를 시험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 주고 약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게 병 주고 약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소를 잃어도 좋은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우리는 위급한 일이 생기면 오직 그것만 붙들고 간절히 뜨겁게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인내하여서 해결 받는다. 또 다시 환난이 생기면 동일한 패턴을 되풀이 한다. 물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주 선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또 그것이 가장 확실학고 빠르고 완전한 해결책이다.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난이 닥친 것은 소를 잃은 것이다. 고난이 해결되면 소를 되찾은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은 그것뿐이다. 이스라엘이 마라의 쓴물을 원망하자 단물로 바꿔주었다.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지금 물이 부족해 서로 다투자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이스라엘과 저희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인가? 바로 외양간 고치는 일이다.

 

속담의 원래 뜻은 오히려 소를 잃고 못 찾았어도 외양간은 고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 번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신자들도 세상적인 일에는 그렇게 잘한다. 그런데 왜 유독 하나님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이게 과연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매일 만나와 반석에서 생수만 달라고 한다. 하나님이 수호신이자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아니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지 않는가? 지금도 그런 은혜 가운데 살고 있지 않는가? 새로이 문제와 고난이 생겨도 아무리 크고 해결책이 없어보여도 하나님보다 더 클 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 새로운 문제 딱하나 때문에 다른 모든 일에는 관심도 없다.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하나만 떠올려도 하나님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서 나의 기대 예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풍성하고 거룩한 결과를 이룬다는 진리를 알 수 있다. 결국은 나의 유익이 됨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감사가 절로 나오며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과거의 그런 은혜 체험이 믿음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자가 정작 다투어야 할 대상인 세상의 죄악과 사탄의 세력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백번 양보해도 새로운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담대함, 실감나게 말해서 뻔뻔함 하나는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부족한 먹을 것을 주시면서 마실 것은 주시지 않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이런 간단한 생각조차 못한다. 죄로 타락한 결과 이성마저 왜곡 파괴된 모습으로 작용한 것이다.

 

고상하고 경건해야 할 믿음을 뻔뻔해야 한다는 단어를 사용해 죄송하다. 그러나 가장 순전하고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특별히 우리가 도무지 이해도 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에서도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면에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결국은 이루시고야 말 그분만의 선한 열매를 소망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

 

간음과 살인을 범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보다 더 신령하거나 경건했는가? 아니다. 딱 하나 그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것뿐이다. 나단의 책망을 듣자 곧바로 성전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여호와께만 범죄 했다고 통회 자복했다. 저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실토했다.

 

특별히 이제부턴 하나 혹은 조금 부족해서 불편한 것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최고 부자의 자리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리로 내려갔다. 정확히 말해 그 전부를 하나님이 주신 그분의 소유임을 인정했다. 그 심령이 최고로 가난한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멸시치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대적이 자기를 비방 멸시해도 왕인데도 절대 다투지 않았고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처분에 일임했다. 대신에 그들 앞에 스스로 낮아져 겸손히 대했고 오직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소명 실현에만 충실했다.

 

당신께 죽일 듯이 덤벼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모세더러 장로들을 데리고 백성 앞을 지나라고 했다. 장로들을 당신께서 지금 행하실 일의 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모세에게 나일 강을 쳤던 바로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했다. 나일 강을 피로 바꿨던 그 사건과 지금 반석을 치는 사건을 서로 비교해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의미였다.

 

나일 강의 물은 애굽의 생명의 젓줄이자 풍요를 갖다 주는 원천이다. 불신 세상에도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실 것은 공급해주는 은총을 베푸신다. 그것을 쳐서 피로 바꾸었다. 피도 생명을 의미하는데 피가 쏟아지면 바로 죽음이다.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지금 반석은 완전 무생물로 죽음을 상징한다. 똑같은 지팡이로 쳐서 물이 터져 나와 이백만의 생명을 구원하는 젓줄이 되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생명을 죽음으로 또 죽음을 생명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만이 구원과 심판의 주관자시라는 것이다.

 

그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본문 식으로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지 아닌지 여부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주는 분 정도로 인식하는지 아니면 그분을 더 깊이 이해하는지 여부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신앙을 전문용어로 치면 일종의 변형된 기복신앙이다. 계속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주었다가 안 주었다 하면서 광야를 방황하게 했듯이 그런 인생으로 지샌다. 하나님을 병 주고 약 주는 분으로 밖에 인식을 못하니까 계속해서 그렇게 신자를 대하는 것이다. 아니 신자가 그렇게 밖에 알지 못한 채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본문 사건의 결론인 7절이 어떻게 선언하는가?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칭하면서 야곱과는 정반대의 뜻으로 하나님과 다퉜다고 한다. 하나님마저 돌을 들어 치려했다. 거기다 여호와를 시험했다고 한다. 그 시험의 정의가 하나님이 물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 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의심했다고 즉, 의심을 두고 시험했다고 말한다. 딱 하나 부족한 것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매일 만나를 먹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가시적 모습으로 바로 곁에 임해 있기에 사실상 매일 그분을 눈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하나님은 안 보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있다. 지신들의 뜻과 계획을 고집한 것이다.

 

소을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은 일들만 잔뜩 기록해 놓은 성경책이 있다. 바로 사사기다. 그 결론이 뭐라고 말하는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고 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는가? 아니다.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엄연히 계셨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보고 싶었던 것만 보려했다는 것이다.

 

본문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실존(實存) 자체를 의심한 것은 아니다. 다시 7절을 보시면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의심”했다. 다른 곳에는 다 계신 것 같은데 우리에게만 안 계신 것 아닌가라는 뜻이다. 그분이 애굽으로 돌아가셨는가? 애굽의 우상 신들이 힘이 더 센 것은 아닌가? 왜 우리에게 물도 주지 않는가? 애굽에선 목이 마르고 굶어 죽는 지경까지는 이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는 의심이다. 왜 우리 뜻대로 해주지 않는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이 간단한 문제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는가? 내가 그처럼 기도 봉사 많이 했는데도 왜 만나를 주시지 않는가? 말하자면 하나님을 병 주고 약 주는 분이라고 여기고 외양간을 고칠 생각을 않는 것이 바로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분이 허락하신 것 같은 고난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시킨 이 세상에선 변수가 아니라 절대적 상수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에게도 평생토록 닥치게 마련이다. 믿음이 고난을 없애는 실력이 결코 아니다. 고난을 대하는 나의 인식 태도 자세를 바꾸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자 핵심이다.

 

하나님의 궁극적 해결책은?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을 한마디도 야단치지 않으신 하나님이 결국은 어떻게 했는가? 우는 것밖에 못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조차 의심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더 이상 그런 의심을 하지 않게 해주셨다. 당신을 그런 방식으로 시험하지 말고 제발 이젠 외양간을 고치라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짜 뜻은 무엇인가? 단 하나 부족해서 하나님마저 돌로 치려는 인간 본성을 인간 스스로는 절대 바꿀 수 없음을 그분만은 아신다. 하나님과 다투어 이긴 이스라엘의 후손더러 돌을 들어 당신을 진짜로 한 번 쳐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음흉한지,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완전히 발가벗겨서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인간의 죄악이 갈 데까지 간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다. 더 이상 타락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는 데까지 타락해보라는 것이다. 그 방식 외에는 인간이 자신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단 선지자의 비유대로 죽어 마땅한 자가 과연 십자가에 달린 예수인지, 십자가 밑에 있는 자들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야말로 그런 자라는 고백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 죄인의 심령과 골수와 관절을 십자가로 찔러 쪼개어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다투며 돌을 던지려 했던 저를, 죽어 마땅한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이렇게까지 사랑해주시는지요?”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끔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였는가? 십자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쳤다. 정말로 주먹으로 주님을 돌로 들어 쳤던 자들이다. 거기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소만 찾으면 그만이고 외양간을 고칠 생각도 않는다. 계속해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눈물짓게 만들고 있다.

 

정말로 진지하게 따져 보라. 이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소망이 과연 있는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생각이 실제로 드는가? 예수 십자가 밖에 있던 내 존재, 삶, 인생 전부가 철두철미한 실패를 넘어서 완전한 죽음이었다고 절감하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분은 때려죽여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아닌가? 언제 어디서나 특별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에서도 그분은 절대적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선하신 분임을 아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내주해 계신다.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한가? 그분만으로 갖출 대로 다 갖춘 최고 부자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 이제 외양간 고치는 일만 남았다. 당장 거룩해지라는 거창한 요구가 아니다. 새로운 고난이 닥치면 정말로 뻔뻔해지기만이라도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제발 일상적인 일에 염려 불안 의심하지 말라. 가정, 교회,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궁극적인 주님의 선을 소망함으로써 그저 방방 뛰는 것 하나만이라도 이젠 그만 두어야 한다.

 

1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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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master 2017-11-11 82
98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master 2017-11-11 108
97 당신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가? master 2017-10-28 80
96 열방의 웃음거리가 된 유다. master 2017-10-25 47
95 심판의 궁극적 목적 master 2017-10-25 208
94 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master 2017-09-15 204
93 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master 2017-08-03 208
92 차별과 구별을 분별해야 신자다. master 2017-07-19 3798
91 하나님께 맡길 것은 문제와 고난이 아니다. master 2017-07-08 159
90 가장 좋아하되 가장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 master 2017-06-30 366
89 당신의 종을 죽이려는 하나님 master 2017-06-10 149
88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master 2017-06-10 631
87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master 2017-04-28 2320
86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master 2017-04-08 113
85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master 2017-03-25 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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