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때 안에 들어와 있는가?

조회 수 355 추천 수 3 2009.11.11 19: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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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3-6)


하나님은 때가 차매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인류 구속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 전과 후로 인류 역사는 완전히 둘로 나눠졌습니다. 주전(主前)에는 모든 인간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참 진리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죄에 빠져 우상을 숭배하느라 참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배반,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들을 선정해 구원해 주시고 그들로 당신의 인류 구속의 뜻을 점차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 구주를 대망하는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공의를 실현하였습니다. 죄에 빠져 신음하던 인간에게 참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그 진리를 깨달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주후(主後)는 누구라도 진심으로 겸비하여 주를 찾고 찾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범위가 특별한 소수의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자나 종, 헬라인이나 유대인, 남종이나 여종, 아무 차별 없이 광범위하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이 하나님은 왜 꼭 때가 찬 후에야 예수님을 보냈는지 의아심과 불만을 갖습니다. 그보다 더 일찍 왔더라면 우리 선조들이 더 많이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러면 하나님도 더 흡족해 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모두가 절대적으로 선하고 완전합니다. 단 한 치의 오류나 착오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일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방법과 때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 때에 그런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그 배경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 말고도 그분만의 온전하고도 신비한 이유가 수없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분과 그분의 일을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분의 선하심과 공정하심과 완전하심을 찾지도 못하고 그분의 어떤 은혜도 은혜답게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바람대로 BC 1000 년쯤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아마 구원 받은 자의 숫자는 기존의 역사보다 많아졌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완악함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인간은 또 다시 왜 그보다 천년 쯤 더 십자가를 당길 수 없었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져 나가다 보면,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기분과 요구대로 다 맞춰주다 보면, 아담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구원해 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담이 아예 타락할 수 없도록 자유의지를 주지 말았어야 한다고까지 억지를 부리게 댑니다. 인간을 동물로 만들든지 아니면 완전한 성자 즉 하나님처럼 만들지 않았다고 불평 부리는데 인간이 하나님 되겠다고 덤비는 꼴입니다. 실제로 아담이 타락한 내용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것이 바로 원죄의 본질이자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마저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 옷으로는 죄로 인한 두려움과 수치를 결코 없앨, 아니 제대로 숨길 수도 없었습니다. 나아가 함께 타락한 피조세계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짐승을 잡아, 다른 생명을 죽여 그 피 값으로 인간의 죄를 사해 살려주시고 그 구원의 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타락해버린 인간이 같이 타락한 세상에 살더라도 하나님은 지켜 보호해 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담의 타락 현장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 있었습니다. 단지 인간이 스스로 미혹되어 그 십자가를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전에 분명한 말씀으로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밝혀 주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사단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확실히 선포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원리는 태초부터 영원토록 단 한 번의 변화나 가감이나 취소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작이요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단지 그 은혜를 드러내는 방법과 때만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때와 방법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게끔 모든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당신께서만 주관하십니다.

그런 때가 완벽하게 찼으므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이 율법 아래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완벽한 구원입니다. 죄에 찌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선 단 한마디의 의심, 불평, 불만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에 찌들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생각을 할지라도 그분의 때는 찼고 완벽했습니다. 십자가가 헬라인에게 미련하고 유대인에게 거리낌이 되든 말든 하나님에게는 완전합니다. 인간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구원의 길은 그것뿐입니다. 다른 길은 절대로 영원토록 없습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이미 믿게 된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아니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꽉 찬 때에 꽉 찬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가만 두었으면 사단의 노예로 묶여 그대로 진노의 불 못에 영원토록 빠질 자를 예수님께서 건져서 빛의 영역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평생을 다해 찬양을 해도 못 다 갚을 은혜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가 속해서 누리고 있는 때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꽉 찼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유대인이 아닌 자로선 구약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너무나 큰 다행입니다. 인간이 걱정하고 불평하는 그대로 구원의 찬스는 너무나 희박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의 솔직한 실체를 따져 보면 절대 구원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후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 태어났으며, 그것도 한창 신학적인 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인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 태어나지 않은 것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비교적 보수 복음주의노선을 지향하는 한국 교회에서 구원의 진리를 배우게 된 것도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정한 은혜 안에 이미 들어 왔고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성공은 없습니다.

역사상으로 따져도 오늘날의 우리만큼 크게 성공한 자는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같은 믿음의 위인보다 우리가 더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제가 임의로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히11:13)만 한 자들이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보았고 이미 소지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들처럼 순교와 환난의 와중에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때와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의심, 불평, 불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눈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내 속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거나 내 죄악과 욕심에 완전히 눌려버린 것은 아닐까요? 신약 성도는 주님의 꽉 찬 때에 꽉 찬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만 우리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비워서 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런 바탕 위에 채워질 것도 그분의 신령한 하늘의 복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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