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를 두들겨 잡아라.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1-13)
성경은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타락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합니다. 또 그 본성은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추해지고 교묘해집니다. 믿음이 좋다고 크게 예외가 아닙니다. 연륜이 쌓일수록 내가 정말 이상적인 인간에 다가가고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나는 아직도 왜 이 모양 이 꼴이지?”라는 한탄이 더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직도”라는 말은 그동안 숱한 노력을 했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고 때로는 더 악화되는 것 같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면책당한 사건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며 교제하다가 유대인들이 다가오자 슬며시 자리를 떠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심을 염려한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는 아주 꺼려합니다. 이방인들이 레위기 11장에 규정된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이유 외에 식사 전에 이방인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손으로 혹시 음식을 먹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철저한 배타의식과 자기민족을 향한 과도한 선민의식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과 식사 교제한다는 것은 복음 이전에는 사회 관습상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아주 죄악 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살아 있되 그 대부분의 형식이 폐기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공적은 전혀 소용없이 오직 그분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정결례 외에도 이방인과의 사이에 쌓였던 장벽도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방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에도 할례, 부정한 음식 등 유대인이 여전히 지키고 있던 계명은 요구하지 않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초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는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에 얼마든지 용납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 결의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또 그 훨씬 이전에 고넬료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방인을 외적 조건에 전혀 구애받지 말고 구원의 은혜 안으로 인도하라고 그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총회결의와 십자가 복음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했습니다.
분명 그의 믿음에 큰 변함이 없었을 텐데 왜 이런 치사한 짓을 했을까요? 이전에 자기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비겁하게 사람들 눈치 보느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습성이 되살아 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입은 후로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하고 관원들에 온갖 곤욕을 치르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전혀 흔들림 없이 넉넉히 승리했던 그야말로 믿음의 사도였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반드시 성경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1:9)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과 직접 연관이 없는데다 주로 이방지역에서 선교했기에 사실상 비주류였습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베드로는 수제자, 요한은 사랑받은 제자였기에 그 총회에서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기둥역할을 한 주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혹시라도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지도적 지위가 흔들릴까 염려한 것입니다.
물론 그로선 할례자의 사도이기에 유대인 사회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다는 선한 뜻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구태여 “야고보에서 온 어떤 이들이 ... 오매” 그 자리를 피했다고 기술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 교단 총회에서 파견된 감독들이 오자 평소와 달리 그 사람들 기분을 맞추어 주는 행동으로 돌변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저지른 잘못은 한 마디로 자신의 처지만 먼저 염려한 것입니다.
그의 외식은 당장에 온전한 진리로 성숙되지 못한 바나바 같은 자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를 스스로 무효화 시키고 나아가 율법을 지키길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정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기둥인 그를 모든 사람 앞에 정말 창피를 느낄 정도로 심하게 야단쳤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체면을 생각하다가 오히려 더 구겼습니다. 오직 복음에 살고 죽는 바울이 성령의 인도에 따르니까 진리는 온전히 전해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진리 앞에 굴복시키는 권능도 따랐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 자리를 지나쳤다면 초대교회 내에서조차 복음은 온전한 복음으로서의 권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불신자들로부터는 자기들도 율법 앞에 복음이 무릎 꿇어 놓고는 우리더러 율법 대신에 복음 앞에 항복하라고 요구한다고 조롱받을 뻔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야단친 그대로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절)
이런 엄청난 잘못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습니까? 베드로가 자신의 신분, 위치, 특권을 유지하려 한 것에서입니다. 잠시 동안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심지어 믿음이 좋은 자마저, 그 타락한 본성이 더 추하고 교묘해진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흉악하고 더러운 죄를 더 짓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아를 부인하지 못하고 더 치장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면에서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인생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를 점했거나 자기의 것을 많이 쌓아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정리할 시점이 다가올수록 세상에서 어떤 열매를 거두고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어집니다. 당연히 자신을 앞세우고 자기 고집과 편견이 더 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르고 옳은지도 잘 아니까 아주 교묘하게 그 목적을 달성하려 덤빕니다.
한 마디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제치고 스스로 높아지고 싶은 본성이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이고 또 죽여도 여전히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놀이 공원에 가면 두더지를 망치로 두드려 잡는 게임기계가 있습니다. 한 곳을 두드리면 다른 곳에서 고개를 쳐드는데 언제 어느 곳에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아주 재빠른 순발력이 요구되는 게임입니다. 신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자아가 바로 그 두더지 같습니다.
그 게임에선 순발력이 요구되지만 신앙 여정에선 정반대입니다. 베드로가 순간적 기지를 발동했다가 오히려 더 큰 곤욕을 치렀지 않습니까? 오직 끈기와 인내만 요구됩니다. 매일, 아니 매 순간순간마다 결단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여 죄악과 사단을 물리쳐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잠시 두더지를 놓쳤듯이 우리 같은 범인이 자기 속에 숨겨진 두더지를 두드려 잡으려면 그길 외에 따로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그 길을 따를 형편이 안 되거나, 항상 두더지가 튀어나온 뒤에야 깨닫는다면 또 길은 하나뿐입니다. 눈 딱 감고 예수님 말씀처럼 남들이 다 가는 크고 넓은 길 말고 좁고 협착한 길을 택하는 수말입니다.
5/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