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를 점령하지 말라.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요셉은 아주 똑똑한 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나면서부터 그랬을 것입니다. 우선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사실을 그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늘그막에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편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형제간의 갈등과 분쟁이 각자의 인생에 얼마나 심각하고 나쁜 결과를 낳는지 뼈저리게 체험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을 총애한 것은 아무리 노년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점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요셉이 외국인 노예로서, 그것도 갓 20세 전후의 젊은이로서 바로의 시위대장의 가정 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해서만은 그렇게 큰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아주 총명해 이방의 언어, 문화, 관습, 제도, 법률 등을 단시일 내에 완전히 습득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일을 맡을 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진심을 떠보면서 친동생 및 아비 야곱과 상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용의주도하며 지혜로운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불행하게도 많은 신자들이 매사를 날 것으로 삼키려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실력은 쌓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통째로 이뤄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신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으되 아직 천국에 완전히 입성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해 있지 않지만 세상 속에서 세속의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바꿔 말해 자기 하는 일이 하나님이 맡기신 천직이자 소명임을 확신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간에 꼭 필요한 자이자 그 일에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가능한 자기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단 그 실력이 자기 자랑과 치장으로 가지 않고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한 실력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무조건 믿음으로 밀고나가지 말고 본인의 실력을 최고로 쌓으라고 해놓고 이젠 또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면 서로 모순되는 말인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말한 대로 애굽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 스스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경주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며 그렇게 했을 것도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하자면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시험점수만 잘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선 안 됩니다. 반면에 자기가 공부한 내용들이 잘 생각나고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기도하며 시험을 쳐야 합니다. 간혹 시험 전날 피치 못할 바쁜 일이 있어서 아무 준비도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시험을 쳤더니 마침 잘 아는 내용만 나와서 평소보다 점수가 더 높았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는 내용이란 다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이미 열심히 공부했던 부분이며, 또 어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것도 평소 때는 성실히 공부하던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노력도 안 하고 대박의 기적을 노리는 자는 아무리 울며불며 뜨겁게 기도해도 결코 돌봐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천직과 소명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가만있는데도 하나님이 대박을 터트려 준다면 일방적인 관계만 형성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서로 교제 동행하는 상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기도가 교제이면서 동행이 될 수도 있지만 거의 교제에 국한 됩니다. 동행은 사실 실제적인 삶에서 일어납니다. 교제와 관계없는 동행이 있을 수 없지만 동행과 동떨어진 교제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둘이 일치 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자를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신 것이지 자신의 종으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자의 종이 되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기도만 하여 대박을 이루려는 것은 일방적 관계일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리려는 꼴이 되는데 그 기도를 들어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가만 놔두었다가는 신자가 믿음을 포기하거나, 사단에게 완전히 넘어가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할 것 같은 지경에 처해 있을 때라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봐주실 수 있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사실은 그 전에 신자로선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와 병행하여 자신의 지혜를 최대한 동원해 현실적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말은 실력을 쌓아나갈 때부터,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결심하고 자신의 지혜를 동원할 때부터, 완전히 결말이 날 때까지 하나님의 인도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가 갖고 있는 지혜, 은사, 재능 모두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잘 활용해야 함도 당연히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분의 인도와 뜻에 맞도록 거룩하게 사용할, 정확하게는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요셉의 경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 절실한 지경이었습니다. 사방천지가 꽉 막힌 곳에 어린 청년이 완전 맨 주먹으로 부딪혀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돌봐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큰 잘못도 없는데 형제들에 의해 강제로 노예로 팔려 온 처지였으니 말입니다. 요셉 본인도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겠습니까? 본문이 그가 가정총무를 맡은 때부터, 다른 말로 맡자마자,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매사에 복을 부어주었다고 표현한 그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외국의 총리가 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케 한 하나님의 신묘한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그일 하나 만으로 단숨에 총리로 발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요셉의 전력(前歷)을 자세히 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위대장의 가정총무로 그 집을 크게 융성케 했던 일과 감옥에서 간수장을 대신해 아주 공평정대하게 사무 처리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인품과 믿음에 대한 관련자들의 증언도 참고했을 것입니다.
결국 보디발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린 것은 그를 애굽 총리로 삼으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예비 과정이었습니다. 가정총무를 맡자마자 범사에 형통하지 않고 실수연발이었다면 꿈 해몽으로 감옥에서 풀리는 등 상응한 보상을 받았을지언정 총리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대박의 은혜를 입은 것은 오히려 그분께 기도는커녕 전혀 믿음도 없었던 보디발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히 요셉 때문에 횡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크게 드러난 배경에는 당연히 요셉의 온전한 성실 정직 헌신이 그의 믿음과 함께 작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 전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도 아무리 쉬지 말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런 형통이 이뤄졌을 리는 만무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요셉은 램프를 가진 주인이고 하나님은 연기 속에 나타나는 거인에 불과해집니다. 신자가 일방적으로 그분의 능력만 얻어내려 기도, 아니 기대조차 해선 안 됩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 내용을 듣지도 않고 해몽케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너무 관심의 초점을 두어선 안 됩니다. 그 일은 한갓 죄수의 신분인 외국인 노예더러 바로와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만든 통로였을 뿐입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요셉을 총리로 만들 계획을 당신의 일정대로 착착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정작 당사자 요셉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범사에 기도하면서 자기 실력을 쌓아갔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흔히들 신자는 자기 실력을 쌓아서 고지를 점령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무래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신자가 최선을 다해 실력을 쌓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을 더 증거하려고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자가 정해 놓은 계획에 하나님을 배우로 동원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정한 드라마의 내용이 선하고 경건해도 그래선 안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드라마에 배우로 출연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께서 당신을 증거할 뿐입니다. 고지라야 하나님이 더 증거 잘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주로 신자가 십자가에서 먼저 죽는 모습으로 당신을 증거하십니다.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고생케 했다가 총리로 올렸듯이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신자를 고지에 앉히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트리기도 합니다.
혹시 신자를 고지에 올리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전에 완전히 바닥에서 죽도록 고생을 시킨 후에야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지 않고 신자가 자기 실력을 쌓아 고지를 점령하면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압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해도 자칫 자기는 믿음이 좋아서, 그럴 만큼 의롭고 자격이 되어서라고 착각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랑이 앞서게 됩니다. 요셉도 열심히 기도했지만 총리가 될 계획은, 아니 꿈도 꾸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이 세우셨지 않습니까?
나아가 신자 스스로 고지를 점령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가 겪는 범사에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고지를 점령케 하는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고지에 올리면 두렵고 떨림으로 따라서 올라갈 뿐이며, 바닥으로 떨어트려도 기꺼이 떨어질 뿐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께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주관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며 영향도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소망을 크게 잡지 말라거나 그래선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자기 앞에 놓인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신자가 점령해야 할 고지입니다. 그 고지를 외면하고 멀리 동떨어진 고지를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예 처음부터 엉뚱한 고지를 정해 놓고 믿음으로 대박을 이루려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신자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를 위하다면” 자칫 그분이 인간의 종도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므로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신자를 향해 세우신 계획대로 당신의 주권으로 신자를 이끌어 갈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범사에서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위함” 속에 속해 들어서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에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겸비함과 경외함으로 그분의 역사가 아닌 그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천직과 소명을 이루고저 최고의 현실적 실력을, 단 선하고 거룩한 실력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점령하고자 하는 고지가 멀리 있는 에베레스트입니까? 집 마당에 있는 작은 동산부터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당신을 위함이 작은 동산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6/1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