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성숙의 참 모습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42:8,9)
요셉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트려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20여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그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참으로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는 첫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 즉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그 때쯤은 형들과의 원한 관계는 까마득한 과거지사로 돌리고 새로운 삶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형들이 곡식을 사러 자기 앞에 나타났습니다. 고생이라고는 못해 본 철부지 17세 소년을 고립무원의 이방 땅에 노예로 팔아 버린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간 겪었던 온갖 고생과 수모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형들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또 그런 환난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형들은 그에게 원수이자 은인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감정도 틀림없이 미움과 반가움이 반반씩 섞였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잊고 있던 부모와 친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올랐을 것입니다. 또 이 형들에 대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당혹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형들은 바로 눈앞에 선 자가 자기들이 죽이려 했던 배 다른 동생이라고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자기들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해 절하더라는 아주 건방지고 몹쓸 꿈의 주인공일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곡식을 사기 위해서 그 꿈 꾼 자에게 실제로 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잘 흥정해서 곡식을 많이 사갈 생각밖에 못하고 있었지만 요셉은 그 꿈이 심지어 문자적으로도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지난 모든 애증은 일순간 사라지고 갑자기 하나님의 너무나도 오묘한 섭리를 확인하고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렵고도 떨렸을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절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요셉은 속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에게 보인 첫 반응이 전혀 의외입니다. 겉으로는 감정의 동요를 전혀 나타내지 않고 아주 냉정하게 정탐꾼으로 몰아갑니다. 형들로선 갑자기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곡식을 사러온 외국인을, 그것도 열 명이나 무리지어 나타난 자들을 대뜸 스파이로 취급한다는 것은 도무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요셉이 처한 그런 복잡 미묘한 상황과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엄청난 비약입니다.
요셉이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비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의 안부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로 대놓고 물으면 자기 정체에 대해 형들의 의심을 살 수 있고 또 어쩌면 그들이 정직하게 이야기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의 신상에 관해서 제대로 조사하려면 정탐꾼으로 몰아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일국의 총리 앞에서 그것도 기근을 면하려 곡식을 사러 온 주제에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요셉으로선 형들을 외모로는 알아봤지만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아가 자기를 죽였으면 어쩌면 엄마가 같은 베냐민도 후환이 두려워 없앴을지 모른다는 염려까지 한 것입니다. 부모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 모든 궁금증과 염려가 단번에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13절)
요셉의 지혜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도저히 감정의 흐름이 통제되지 않고 또 형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요셉 스스로 조금이라도 당황했거나 혹은 시간을 지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가뜩이나 부친 야곱을 닮아 술수에 능한 형들이 또 다시 이상야릇한 대응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로 지금 도대체 어떤 영문인지 전혀 눈치도 못 채게 했습니다.
당연히 분노를 사게 되리라는 것도 모르고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를 자랑했을 만큼 아주 어리석었거나 시건방졌던 요셉이 이렇게까지 변했습니다. 지난 세월의 온갖 풍상이 그를 형들의 머리가 될 만큼 성숙시켰습니다. 정말로 고난 가운데 주의 율례를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의 총리가 될 만큼 영민하고 그릇이 아주 커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심어준 지혜였습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현실적으로 노련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 당혹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는 순간 ‘헉!’하고 숨이 막혀 일순간 할 말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항상 해왔던 습관대로 속으로 하나님께 순간적인 기도를 드린 후 금방 냉정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고는 이런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오래 궁리한 후가 아닌, 이런 반응은 나올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졌던 순간 이후로 여호와 하나님을 놓은 적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묵상하며 그분이 주신 지혜대로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 처의 사건에서 보듯이 그분의 뜻에 위배되면 절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성경이 없었기에 오직 기도하며 범사에 대응했습니다. 기도로서 일을 시작하고 기도로서 일을 마쳤습니다. 온전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모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목적도 사실은 요셉 같은 자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자가 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세상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라도 그래야 합니다. 또 바로 그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세상 처세술에서 앞서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지혜롭고도 온유한 모습으로 대하여 선한 결과를 도출해 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매번 영적으로 신령해지고 성령의 외적 은사를 통해 초자연적 체험이나 이적을 드러내는 것만 목표해선 안 됩니다. 기도와 말씀 자체가 목표가 되어선 더더욱 안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봤으면 반드시 그로 인해 세상과 사람 앞에 열매 맺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선하고 의로운 영향력을 주위에 끼쳐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요컨대 기도하고 말씀 본 시간과 노력의 많고 적음으로 믿음이 판결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실제로 빛과 소금으로 살았던 시간과 노력만 따지십니다. 그것도 한 알의 밀알로 정말로 썩어 죽었는지 여부를 살피시면서 말입니다. 다른 말로 기도의 응답은 내가 소원한 일이 이뤄지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살릴 수 있는 지혜로 말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목적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어야 한다면 믿음이 자신의 문제 해결이나 성숙에 그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연히 하나님의 일에만 사용됩니다. 신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케 해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분의 역사는 신자 개인의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자신의 상태와 처한 상황이 어찌 되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즉 자기 뜻이 아닌 그분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뤄지도록 소원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지혜는 채워지기는커녕 평생을 두고도 단순히 도덕적 수양이나 무조건 “비나이다!, 비나이다!” 식의 기도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7/9/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