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을 만나 보았는가?

조회 수 3620 추천 수 374 2005.08.15 17: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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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42) 팔복강해(1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마음의 눈으로 보다

몰몬교의 초창기에 이런 웃지 못할 코메디 같은 사건이 있었다. 몰몬경은 그 창시자 죠셉 스미스가 100% 소설처럼 지어낸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떤 핑계를 대었는가 하면 꿈에 나타난 천사로부터 뉴욕 근교의 어떤 농장에 가보라는 계시를 받고 찾아 갔더니 황금판에 고대 이집트어로 쓰여져 있는 경을 발견했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몰몬경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떨어트려 주었으니 진짜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몰몬경의 서두에 보면 그 황금판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증인들(Eyewitness)의 이름을 열거해 놓았다. 그런데 당시의 기자나 학자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그 증인들에게 “황금판이 어떤 모양이더냐? 종이가 아니라 황금판에 경의 내용을 다 적어 놓았으면 그 부피나 크기가 엄청났을 텐데 얼마만 했느냐? 이집트어가 어떤 모양과 크기로 적혀 있더냐?” 등등 계속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 한명이 드디어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집요한 추궁에 못 견디었던지, “내 육안(肉眼)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고 대답했다. 결국 직접 보지는 못했다는 것을 실토한 셈일 뿐 아니라 그런 황금판이 없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당연히 그 사람의 이름은 증인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예수님은 신자가 누릴 8복 가운데 6번째 복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았는가? 혹시라도 육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 마음이 아직 청결하지 못해 하얗게 되도록 하이타이로 세탁 중인가? 혹은 이제 겨우 세탁을 해 볼까 마음만 먹은 단계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우리는 물질계 안에서 육신 상태로 있고 하나님은 영으로 물질계 밖에 있기 때문 만은 아니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을 보려고 하니 괘씸해서 안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티끌 같이 적은 더러움과도 공존할 수 없다. 마치 중력이 무한대인 블랙홀의 어떤 중력을 가진 물체라도 접근하기만 하면 흡수해서 소멸시켜버리듯이, 무한대를 넘어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그분을 볼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순간적으로 소멸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노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며 두려움 없이 내 뱉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인지 모른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신자는 죽은 후 천국에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신자들이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그분의 실체를 보면 죽는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기도를 간절히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환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다는 뜻인가?

그런데 만약 하나님을 보는 것이 그런 직통 계시를 뜻한다면 특수한 경우에 특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특수한 뜻이 있을 때만 그 분을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수님은 팔복 강화로 특수 귀족 신자 층을 만들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신자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동양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나무, 물, 돌, 짐승에도 하나님의 신이 깃들여 있거나, 하나님의 실체가 따로 없고 사람의 마음 먹기에 따라 달렸다거나, 사람 안에 우주 전부가 있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고 하는 뜻은 더더구나 아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를 알아 보기 전에 먼저 하나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본다’는 의미 자체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본다’는 것과 ‘보이는’ 것을 분간하지 않고 뭉뚱그려 같은 의미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 전부를 다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일반인이 밤하늘의 별들을 아무리 쳐다 보아도 그저 “야 참! 별이 너무나 많고 정말 아름답구나” 정도로 그친다. 한 2-3분만 쳐다보고 있으면 목이 아프고 어지럽다. 반면에 천문학자가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여기는 곰자리, 저기는 황소자리, 거기서 남쪽으로 몇 십만 광년이 떨어진 곳에 지금 블랙홀이 별들을 삼키고 있구나”하고 온갖 신기한 현상과 움직임을 상세하게 구별해 가면서 보므로 보면 볼수록 재미 있고 신날 것이다. 밤새도록 봐도 목이 아프기는커녕 지겹지도 않다. 일반인에게는 밤하늘이 보였고 천문학자는 밤하늘을 보았다.

이처럼 보고 있는 대상물이 무엇인지 정확한 지식을 갖고 보아야 ‘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단지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천체 물리학자가 아니고 망원경이 없어도 아이들과 함께 교과서에서 배운 북극성과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들을 찾는 놀이를 하면서 밤 하늘을 보면 당연히 재미 있어진다. 반면에 구체적으로 정리된 생각 없이 어떤 대상을 아무리 오래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그것은 보이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이곳 LA에 멕시칸 TV 방송이 많은데 스페인 말을 한 마디도 모르고 봐 보아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고 파란 것은 하늘이라는 정도 밖에 모른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동일한 이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그 분을 보지 못한다. 그랜드 케년에 가본 경험이 있는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장엄 하고 웅대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어떤 완악한 불신자도 “뭔가 조물주는 있는 것 같아. 이것이 그냥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그치고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그 웅장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이 어렴풋하게 보여진 것이지 불신자 본인이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있는 것 같아!” 만으로는 신자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신자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바라본 자다. 단지 보여지기만 한 하나님을 수동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아무리 많이 보아도 여전히 그는 불신자일 뿐이다. 그럼 결국 성경 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라고 독려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볼 수 있다고 해 놓고 또 이제 보아야 알 수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멕시칸 TV를 보려면 아무리 스페인어를 몰라도 일단은 채널을 맞추고 보아야 하듯이 하나님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분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내 삶 속에 임재 해 있다는 인식이 가장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불신자라도 “누군들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아서 안 믿나? 믿어져야 믿지!”라고 반문하는 데 있다. 그들도 힘든 시련이 그치지 않을 때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고 인도 받고 싶어 한다. 심령 속에 까닭 모르게 불쑥불쑥 솟구치는 초조, 짜증, 두려움, 눌림, 분노를 없애고 사기, 거짓, 위선, 음란, 탐욕, 죄악들을 깨끗이 씻고 싶은 소원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저히 믿기지 않으니 믿을 수 있는 좋은 길이 없는가 하소연 한다.

그런데 사실은 불신자가 그런 질문을 하면 정답이 이미 다 밝혀진 셈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 인생, 존재  속에 모순과 왜곡을 발견하여 현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뒤틀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여 갈등하고 고민하는 순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직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왜 늦게 목사가 되었는가?

모든 이의 인생은 단 하나 예외 없이 시련과 환난이 그치지 않는 힘든 길이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이룰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조금만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면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의해 자기 인생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때때로 든다. 또 이상하게 세월이 갈수록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다.

살다 보면 제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무엇인가? 당장에 돈이 없고 병 들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월척이 넘는 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반쯤 올라 왔는데 낚시줄이 끊어져 바로 눈 앞에서 그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 같은 경우다. 이젠 드디어 내 팔자가 형통하나 보다 싶은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뒤집어져 수포로 돌아가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발생할 확률이 거의 없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엉뚱한 사태로 일이 꼬여버리고 방향이 전혀 반대로 틀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로선 가장 큰 힘이 되어 철석같이 믿고 있고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부분에서 어이없게도 망하는 데도 실패의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금이 부족했는가, 권력자에게 미처 부탁하지 못했는가, 정보 수집을 등한히 했는가, 세밀하게 일의 진행상황을 확인하지 못했는가, 모든 정성을 쏟아 부어 넣지 못했는가 등등 실패의 원인을 자기 쪽에서 찾아 내어 고친 후에 재시도한다. 그래서 어쩌다 성공하면 온 천하가 자기 손으로 떡 주무르듯 할 수 있으리라 기고만장 한다.

그러나 한두 번의 성공으로 인생 전체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실패가 결정적인 순간에 반복해서 일어난다. 나중에는 “어디 돈 많은 과부 없나? 내 친구가 청와대 높은 자리에 있는데 한 건만 눈 찔끔 감고 봐달라고 청탁을 넣어봐? 마지막 남은 이 돈으로 몽땅 슈퍼 로토를 사서 대박을 기대해 봐?” 온갖 말도 안 되는 수단을 다 강구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판단하지 그런 실패의 배경에 있는 진짜 실체는 알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장 자랑했던 부분에서 실패했는데도 여전히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자신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다.  

제가 40살이 넘어 미국으로 이민 왔고 또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 어떤 계기로 목사가 되었는지 묻는다. 그렇게 묻는 사람의 의도는 뻔하다. 무엇인가 드라마틱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의 길로 들어설 리가 없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요셉처럼 꿈에 그분의 비전을 보았거나 하다 못해 큰 병에 걸려 기적적으로 낫지 않았나 해서 물어 보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직접 보았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저도 극적인 체험을 간증 하자면 책으로 써도 모자랄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결 같은 제 대답은 “다른 길로 가려니까 자꾸 하나님이 막더라”는 것이다. 계획과 예상 밖의 장애가 나타나 이리 가도 넘어지고 저리 가도 엎어졌다. 그런 나로선 결국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 길로 이끄셨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하고 또 그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다.  

내 삶이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인생이 내 계획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나 외의 어떤 다른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인생의 실질적인 주인은 나인가 그 힘인가? 너무나 간단한 이치 아닌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기 노력으로 이루려고 고집해 보지만 그 삶 앞에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참담한 실패뿐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특별히 심오하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 전부를 다 동원하고 처갓집 돈까지 몽땅 끌어 넣어 이번에야 말로 틀림 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죽기살기로 매여 달렸던 일이 실패로 돌아 갔을 때에, “아무래도 이것이 아닌 것 같아”라고 잠시 멈추어 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처럼 자신의 준비 부족이거나 재수가 나쁜 것으로 치지 않고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생을 재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간혹 형통한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낭패와 상처가 따라 다녔던 내 인생의 행로가  우연이나 재수가 단순히 교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성공과 실패의 구체적인 원인과 경과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미리 정해진 것 같은 일정한 흐름에 따라 한쪽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되어진 모든 일들에 간섭하고 계셨고 또 실제로 당신을 보이셨는데 자기는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주의 종으로 쓰시고자 어느 날 부흥회나 기도원에서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불을 받는 체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이 아니다. 저는 40년간 온갖 실패를 겪었지만 “내가 겨우 이런 사람 밖에 안 되는가? 내가 누군데? 나는 이 모습으로 실패할 수는 없어. 나는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어!”라는 고집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하나님이란 존재는 알 수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고, 솔직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오직 내 눈에 보이는 것 밖에 보지 못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개 눈에는 똥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 한적도 없이 오직 돈 벌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하나님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아주 가끔은 그것도 큰 실패를 겪어야 어떤 심술 궂은 신이 일부러 나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밀어 넣었구나라고 불평할 정도의 영적 수준밖에 안 되었다.  

희로애락이 번갈아 일어나는 인생살이에서 사건 하나하나마다 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갈지 아무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한두 번은 손과 발이 묶이고 사방으로 완전히 막혀 아무 대책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뭔가 이게 아닌데라고 진정으로 고민하면 지금 겪고 있는 일과는 별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인생 전체를 큰 물줄기에 따라 끌고 가는 어떤 힘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 힘이 무엇인지 또 최종 목적지는 어딘지 모르지만 지금의 실패와 그 목적지가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는다.  

그래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그 힘이 이끄는 방향을 바꿀 수 없었는데도 자꾸 거역하려 했던 것이 지난 모든 실패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또 앞으로도 혹시 그 흐름을 거역하려 들면 틀림 없이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나를 붙들고 있는 그 힘을 아무래도 거역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내 힘을 포기하고 그 힘에 자기 인생을 의탁하고 싶은 소원이 생긴다. 여전히 어떤 일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 방향은 모르지만 자기의 인생과 존재와 삶 전체를 그 힘이 이끌고 가주기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참으로 이상하고도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그 때까지 나를 묶고 못살게 굴던 불안, 염려, 초조, 짜증, 분노 등이 그치고 자기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진다. 팔자 소관이라고 생각해 자포자기 하거나, 단순히 생각을 바꿔먹는 것과는 다르다. 분명히 나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제 삼의 존재가 있음을 믿고 그 분께 자기 인생을 내어 맡겼기 때문에 내 속에서부터 나의 지정의로 이뤄진 평강이 아님을 본인도 확실히 안다.

말하자면 거룩하고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가 내 곁에 오셔서 나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 보고 계시고 나를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흔들릴 수 없는 확신으로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주관적 생각의 영역 안이 아니라 내 몸 밖에 분명히 실재(實在)하는 객관적 제 3의 실체가 내 곁에 임재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래야 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비록 육안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 것도 아니다. 한 죄인의 영에 하나님의 광채가 비춰져 영안(靈眼)이 열렸기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게 됨으로써 보이는 그분을 불신자 시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며 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분을 두 눈을 뜨고 똑 바로 본 것이다.

하나님을 본 결과는?

제 힘만 가지고 세상을 이겨보려 했던 한 죄인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면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분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죄인은 기도하지 못한다. 도덕적인 죄 때문이 아니다. 사단이 그를 묶고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본 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가 좀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당장 힘든 문제부터 해결해 달라고 매어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현실적 요구의 바탕에도 항상 “하나님 정말 살아 계셔서 저를 알고 있고 또 제 인생을 주관하신다면 제 모든 슬픔과 고민을 아시고 내 한숨을 들었지요? 이 곤고한 삶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심령 깊숙한 곳에 텅 빈 공간을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습니까?”라고 근본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믿음은 있다.

때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 자기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것을 기도할 때도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현실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열매들이 하나씩 맺히기 시작한다. 거창한 대박이거나 자기가 기도한 대로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기도의 응답 가운데 하나님 당신만의 어떤 일관된 의도가 드러나 선하고 공평하고 의롭지 않은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더 이상 일부러 골탕을 먹이는 심술궂은 신의 장난, 조종, 속임수는 없어진다.  

나아가 지난 세월 동안에 힘들었던 상처와 실패와 좌절과 분노 그 모든 것들마저 그 때 당시로선 나에게 가장 최선이었고 또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열매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심지어 세상과 사람 앞에서 낭패 당했던 일들이 하나님 안에선 오히려 그럴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결국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 만이 나의 주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고백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에서 새어 나오게 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온갖 실패를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왜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가? 분명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 않는가? 성경 공부를 안 해서, 하나님 보여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마음이 여전히 교만해서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 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도저히 감당 못할 큰 실패를 겪게 되면 자연히 많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으려 하고 또 어떤 모습이었던 하나님 믿게 해달라고 기도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을 보려는 이유가 오직 당장에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일만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의 존재, 삶, 인생 전부를 하나님 뜻 안에서 재조명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 벌거벗은 인격이 그 인격 전부를 걸고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의 실체를 보고자 간절히 소원하지 않는 한 그분을 절대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자 해야지 단순히 호기심이나, 종교적 열심이나, 현실적 필요로 하나님을 찾으면 그분은 베일 속에 더욱 감추신다. 하나님 앞에는 한 번도 진심으로 엎드린 적이 없으면서 오히려 세상에서 힘이 모자라 항복했던 일을 들고 나와 엎드린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말로는 “나도 하나님 믿고 싶다. 믿어져야 믿지?”라고 하지만 그들의 속뜻은 바로 지금 이 고통 받는 문제만 해결해 주면 믿는 것을 한번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해결해 놓은 것이 화끈하게 마음에 드는가 검사해 보아 내 마음에 믿어지는지 안 되는지 그 때 가서 보자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은 있는 것 같기는 해 그러니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해치워서 뭔가 보여주어야 믿을 것 아닌가”라고 하는 자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사실은 신자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 당신을 보기를 소원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하나님 당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 능력만 빌리려는 자에게는 하나님쪽에서 도리어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신자가 분명히 주인과 종, 왕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로 서 있지 않고는 어떤 것도 둘 사이에 진척되는 일은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말이 괜한 말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진정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어 본 자라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 두 말이 상이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육신의 몸을 가진 인간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자는 그분이 살아 계셔서 자기 곁에 항상 임재 해 있으며 자기를 알아 그분의 계획과 뜻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럼 신자 곁에 계신 것을 확신한다는 것이 바로 그 분을 보았다는 말이지 않는가? 더 이상 무엇을 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신자도 불신자처럼 그분 대신 그분의 능력을 보고 싶다는 뜻임에 틀림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하나님을 보았는가? 그래서 지금도 보고 있는가? 보이는 하나님을 그저 바라 보고 있는가?

김순희

2011.02.02 13:22:26
*.174.67.195

하나님의 모습을 그렇게 그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 긴 회초리 하나 들고서 교실을 왔다 갔다 하며
누가 컨닝하나 눈을 부라리며 우릴 감독하시는 그런 분으로... 환난에 환난이 겹쳐 숨도 쉴 수 없을
때 혹여 내가 컨닝을 해서 화가 나셨나?? 그럼 어떻게 화를 풀어 드리지?? 그리고 가끔은 도대체
컨닝한 적 없는데 왜 심술을 부리시나?? ㅋㅋ 매일 그런 모습으로 기도한답시고 앉아 기도시간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겸허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말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그 분의 이름을 빌려 원하는 것을
챙기려 하는 것인지를 살펴야함을 배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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