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조회 수 4161 추천 수 341 2005.09.19 17: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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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2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0-12)

야당 당수의 절규

한국의 유신독재 시절에 야당 당수가 국회에서 제명되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닭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비록 닭이 목이 꺾여 새벽을 알려주는 울음 소리를 못 내더라도 시간 되면 새벽은 어김없이 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독재 권력의 서슬이 시퍼래도 민주화라는 시대적 대세는 거슬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은 이교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다 순교 당하는 것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자는 선교에 종사하는 극히 일부에게 해당되지만 후자는 모든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평생을 두고 이겨나가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 싸움은 신자가 일부러 싸우러 갈 필요가 전혀 없다. 참 신자라면 삶 전체에서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 바로 그 싸움이다. 세상이 신자에 대해 반응하고 대우하는 모습은 신자를 항상 왕따시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럼 신자가 그런 세상의 핍박을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왕따 당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삶에서 드러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가? 아니면 지금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이 세상 사람이 가는 길과 같아서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가? 말하자면 예수 믿는 일로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괜히 그런 질문으로 신앙 양심에 찔리기만 하는가?

그렇다면 범위를 좀 넓혀 시련, 환난, 억울한 일, 상처까지 핍박에 포함시켜서 한 마디로 세상살이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믿음으로 이기는가? 죄송하지만 저는 이런 대답에는 전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일반적인 대답이라 신앙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모르거나 실제로 구체적인 삶에서 믿음으로 이겨본 체험이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이 입장이 곤란한 경우를 모면하기 위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어떤 상황에도 정답이 되는 ‘믿음’을 들먹인다.

그럼 핍박을 이기려면 인내해야 하는가? 이것도 또 너무 100 % 맞는 정답이라 인정해 줄 수 없다. 이는 마치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대책으로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됩시다”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문제를 한 번 더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분열이 없어지는 것이며 그 반대로 분열이 있으면 하나가 못 된다. 왜 하나가 안 되느냐 그 원인과 대책은 따지지 않고 분열하지 않으면 하나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신자에게 핍박이 닥쳤을 때에 인내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인내 외의 대안은 세가지 뿐이다.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을 따라 열심히 살든지, 자포자기하며 그저 되는대로 살든지, 아예 세상을 하직하고 자살해야 한다. 신자로선 이 셋 중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다. 그래서 핍박이 닥치면 타협이나 굴복대신에 일단 인내해야 한다. 또 어떤 면에선 누구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믿음과 큰 상관 없이 잘 참아낸다. 문제는 인내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잘 인내하느냐이다.

인내에 대한 오해

신자가 핍박과 시련에 대해 인내하는 모습은 백이면 백이 다 “닭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식이다. 시간이 지나면, 끝까지 참아 내기만 하면, 믿음으로 잘 견디기만 하면, 새벽기도에 열심히 출석해서 울부짖기만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를 허락하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만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붙들고 있다. 손에 땀과 피가 날 정도로 잘 붙드느냐에 따라 믿음의 실력도 달라진다.

물론 이것도 분명히 믿음의 일종이며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백번 낫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인내하는 것만이 전부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곰처럼 성격이 무디거나, 의지력이 아주 강한 사람들에게만 복을 주신다는 뜻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신자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가지게 된 배경은 목사님들이 어떤 핍박이 닥쳐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면 최종 승리는 신자의 몫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뒷받침 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로마서 8:28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신자들은 어떻게 하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으로 나타날 때까지만 참기로 한다. 또 환난이 끝나고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셔야만 그제서야 선이 실현된 것 인양 생각한다.

솔직히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라. 신앙 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참아내었더니 합력하여 선이 되었던 체험을 얼마나 했는가? 한 달에 한 번, 일년에 한 번, 몇 년에 한 번인가? 또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살아갈 동안 얼마나 많이 겪을 것 같은가? 반면에 몇 년이 넘도록 어쩌면 수십 년 동안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는 일은 혹시 없는가? 그럼 그런 일은 언제 합력이 되어 선이 되는가? 죽을 때 까지 계속해 기도하며 참아내기만 하면 되는가? 도대체 신앙 생활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라면 너무 가난하고 초라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네델란드 출신의 코리텐 붐 여사가 이차 대전 때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경험을 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언니 벳시와 함께 체포되어 최고로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갇혔다. 코리는 두렵고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언니 벳시는 전혀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며 감사했다. 시설은 형편 없고 난방도 안 되는 좁은 감방에 사람은 많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너무 불편하고 짜증이 절로 나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언니는 걱정도 안 돼? 이런 일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더니,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며 “암! 그렇고 말고”라고 대답했다. 과연 며칠도 안 지나 언니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난방이 안 되는 추운 겨울 밤인데도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춥지 않고 또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다 보니 빈대 벼룩이 들끓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또 “이런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까?”라고 물었더니 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니 빈대 벼룩마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언니는 너무 위선적인 신앙이 아닌가?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니 억지로 감사한 척 가장하는가?”라는 의아심이 들었다.

또 다시 빈대 벼룩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아무리 밤늦게 찬양하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해도 간수들이 금지하지 않고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혹시 빈대 벼룩이 옮을까 봐 겁을 내었던 것이다. 당시 나찌 독일은 성경을 압수해 불 태웠고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신자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런데 그 감옥 안에서는 마음 놓고 말씀 전하며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생긴 것이다. 바로 그곳이 교회이자 천국이 되었다.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의 죄성

어떤 핍박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이 선으로 바꿔 주실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선 안 된다. 그 속을 뒤집어 보면 신자 스스로 인식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믿음과는 거리가 먼 죄성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저 핍박하는 놈들, 나한테 상처 주는 꼴 보기 싫은 놈들, 하나님 꼭 혼을 내 주십시오”라는 못된 복수심리다.

나는 전혀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큰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은가?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따져 보아도 신자가 승리하면 불신자는 반드시 패배하게 마련이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만, 그것도 한 일이라고는 기를 쓰고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불평 불만을 터뜨리며 기도한 것 뿐인 자에게 복을 주시겠는가?

하나님은 신자보다 불신자를 향해서 더 안타깝고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지금도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신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으로  목자의 품 안에 안겨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자들이 왜 이런 부분에 자신이 없고 당당하지 못한가? 환난을 참기만 하겠다면 하나님을 신자에게 항상 힘든 일로 평생 훈련만 시키는 분으로 격하시키는 셈이다.

물론 모든 신자가 아직은 천국의 영화를 얻을만한 자격이 전혀 안 된다. 여전히 죄성은 펄펄 살아 있고 또 많은 죄를 범하기 때문에 때로는 연단과 징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를 향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렘29:11)을 갖고 계신다. 평생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만 시키는 분이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참아내기만 하려는 생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현재는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자기 욕심, 계획, 일정 대로 떼를 쓰고 그대로 응답되어야 만 선이라고 생각한다. 은연중에 “하나님이 내 뜻대로 응답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합격선에 들도록 참아내어야지”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선과 영광은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언제나 필연코 드러난다. 신자에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사건 가운데 당신의 인자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요컨대 지독한 환난의 와중에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그 선을 유보했다가 신자의 인내가 당신의 시험에 합격하는 일정 시점에 이르러야 한꺼번에 부어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왜 이렇게 되지 못하는가?

우리가 만약 악명 높은 독일군 수용소에 갇혔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제발 이런 곳에서 하루 속히 해방시켜 달라고 기를 쓰고 기도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연합군 탱크가 진격해 와서 독일군들을 다 사형시키고 해방해 주어야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해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다고는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쟁 통에 재산, 직장, 주위 가까운 사람들 몽땅 잃었으니 그 부분에 대한 원통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합군 정부가 훈장과 포상금을 지급해주어 형편이 이전과 더 나아지거나 최소한 같아져야 비로소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졌다고 인정한다.  

환난이 끝날 때까지는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 뿐이지 하나님의 선은 찾아 볼래야  없다. 기껏 수용소에서도 온갖 어려움을 참고 믿음으로 승리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런 축복을 주셨다는 간증이나 하고 다닌다. 말하자면 나는 독일놈들이 내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는 자랑이다.

벳시는 수용소 안의 힘든 일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만들고 있다고 감사함으로 확신했고 또 실제로 그 선을 발견하여서 주님을 위해 더 큰 영광으로 바꾸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핍박을 어떻게 이기라고 하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있던 하나님의 품 안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확신하여 그분의 선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빈대 벼룩이 없고 난방 시설이 된 수용소로 옮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추운 날씨와 비좁은 감방과 많은 사람과 빈대와 벼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물론 빈대와 벼룩은 쉽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는 없다. 따갑고 쓰리고 불편하여 당연히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참으면서 헛웃음을 지으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핍박은 현실적으로 그것이 끝나지 않는 한 웃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답게 살면 자연적으로 따라 오는 결과가 핍박이므로 오히려 그것이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신자답게 살고 있는지 자신부터 점검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핍박이란 신자가 자원해서 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에 대해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는 사람이 있는가? 가기 싫은데도 하나님이 명령한다고 억지로 가서 일부러 순교하는 선교사는 없는 법이다.  

사업가는 돈을 버는 재미로 산다. 그들은 돈 버는 일이 힘들지만 끝까지 참아 내어야 그 때가서 돈이 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하지는 않는다. 열심히 일하여 계속해서 한 푼 두 푼 모이는 재미를 즐기며 일한다. 그러면서도 주위에서 사업이 어떤가 물어오면 “그저 그래. 맨 날 적자였다가 이제 겨우 살아 남을 정도야”라고 엄살을 피운다. 혹시라도 남이 돈 많은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빌려 달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금고에 돈이 쌓여 갈수록 표정 관리에 더 조심을 하지만 자기 혼자 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신자는 왜 이렇게 되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의와 공평과 정직과 거룩으로 서로 사랑하며 신령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신나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을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 가는 것이 정말 귀하고 귀해 아무도 그 기쁨을 막을 수 없어야 한다. 그래서 너무 감사가 넘치고 자유함으로 사니까 불신자들이 시샘이 나고 다른 성도들 조차 혹시 시험에 들까 염려 되어 표정을 관리하며 일부러라도 약간 힘든 척 겸손해 하는 신자는 왜 나오지 못하는가 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핍박 가운데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신자가 세상 사는 재미로 이 땅을 살려면 죽을 때까지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을 사는 재미로 이 땅을 살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을 그 환난 가운데도 기쁘고 즐거워 할 일이 반드시 있다.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 주님은 당신만의 선하신 뜻으로 함께 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생수의 강으로 인도하여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

성경에서 핍박을 신자답게 승리하는 가장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바벨론 방백들이 다리오왕의 총애를 받는 유대인 다니엘을 시기하여 왕을 설득해 왕 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집어 넣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그 때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는가?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그 조서가 이미 발효된 줄 알았다. 하나님께 매일 경배해야 하는 자기는 이제 곧 잡혀가 사자 굴에 던지워져 죽게 될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평상시대로 자기 집으로 돌아 갔다. 왕에게 나아가 변명하거나 법령의 부당함을 호소하거나 유대인 포로들을 규합해서 항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열린 창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그러나 일부러 창문을 열어 놓고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너희 이방인들은 잘 보아라! 나를 얼마든지 잡아가라. 나는 너희의 핍박을 이길 자신이 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큰 소리 친 것이 아니다. ‘열린 창’이라는 것은 항상 열려져 있었다는 뜻이다.

나아가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남들 다 자는 밤에 창문을 닫아 걸고 살짝 숨어서 아주 작은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고 기도의 횟수도 줄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 위기라 기도 횟수와 시간을 늘이며 이전보다 더 간절하게 울부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자기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데 한치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기 우편에 좌정해 있는 여호와만 바라보고 전혀 요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매일 세 번씩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 기도와 경배와 감사는 그의 생활 그 자체였다. 기쁘다고 더 감사하고, 힘이 든다고 더 기도를 늘리지 않았다. 우상을 경배하는 이방의 땅에서 그는 한 날 한 시도 조국과 그 성전에 좌정해 있을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권능을 느끼며 그 분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항상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만이 자기 생의 재미이자 삶의 전부였기에 그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었다. 다리오 왕의 조서도, 사자굴의 위협도 그 기쁨을 줄일 수 없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일로 인해 핍박이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과도 절대 교제할 수 없었기에 그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레 핍박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 생명과 맞바꾸더라도 그 기쁨을 잃기 싫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선 왜 그렇게 많이 찬양하고 말씀 보는데도 감사와 기쁨이 없는가? 왜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평강이 없는가? 핍박이 아닌 것을 핍박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신자라면 정작 받아야 할 핍박을 소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환난 때에 참아 내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신다 해놓고 왜 이리 새벽이 올 때가 멀었는가 의심하고 불평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자가 힘들고 어려운 것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아시는 데 무엇을 염려하는가? 나아가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을 계획하셨고 또 그 일에만 있는 선이 바로 지금 더 크고 최종적인 선을 향해 합력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신자란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승리하고 있는 자이지 최후에 보장된 승리만 바라 보는 자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자가 패배자이고 자신들이 승리자인 양 보일지 몰라도 언제나 그 정반대임을 확신하는 자가 신자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믿음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핍박 중에 기도하면서 참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축복은 절대 못 누린다. 핍박이 끝난 후가 아니라 핍박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발견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한다. 그래서 평상시엔 도저히 알 수 없고 오직 핍박과 환난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은혜 때문에 오히려 핍박을 즐겨야 한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한 밤중에 발에 착고가 차인 채로 하나님을 찬양 했다.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착고가 풀리며 옥문이 열렸다. 그들이 간절히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착고가 풀리는 응답을 받고서 찬양한 것이 아니었다. 감옥에 갇힌 핍박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분명히 있음을 믿었다. 아마도 감옥 속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을 것이다. 그랬더니 진짜 그 감옥의 간수와 가족들이 다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행16:19-40) 감옥에 갇힌 것이 바울에게는 핍박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합력하여 선이 이뤄졌던 것이다.

신자에게는 최후의 승리만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이 승리의 순간이다. 그 사실을 자꾸 잊어먹으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 조차 힘이 빠진 것으로 착각한다. 그저 하나님께 떼 쓰는 데만 익숙해 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재미 있고 권능이 넘치는 일인 줄 아는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큼이다.

김순희

2011.02.09 12:48:45
*.174.67.195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최종적인 선으로 향해 합력하고 있는 중임을
철저히 믿고 모든 상황이 뒤틀리고 어그러지고 시리고 아파도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빚어가시는 우리 모두를 향하신 뜻인 것을 잊지
않고 기뻐해야함을 배웁니다. 감사 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05 17:19:08
*.14.99.253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강한 팔이 우리를 붙드시고 계신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찌 기쁘지 아니하고 또 환난이건 뭐건간에 그 무엇이 두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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