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를 당해라

조회 수 4267 추천 수 395 2005.09.12 19: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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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2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0-12)

자동차에 붙은 물고기

예수 믿는 표시로 많은 신자들이 자동차에 물고기 모양의 마크를 달고 다닌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받아 들여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간혹 물고기 안에 Jesus 혹은 Darwin이라고 적힌 두 종류를 볼 수 있는데 진화나 창조가 맞다는 표시도 아니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제국은 지역적으로 광대하고 인종과 문화가 다양해 정치적으로 통일 시킬 이데올로기가 필요 했다. 그래서 각 식민지의 고유 종교들은 인정해 주는 대신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자들은 반드시 황제를 신으로 숭배토록 했다. 일년에 일회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에서 제사 지냈다는 증명서를 신분증처럼 소지하고 다녀야 했고,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나 어떤 모임이든 인사말로 “가이사는 나의 주(主)입니다”라고 고백하도록 했다.  

반면에 신자로선 십계명의 첫째 가고 가장 중요한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를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나 인간을 주로 섬길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기들의 주님이 그러했듯이 로마에 대한 반역 죄인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고 순교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핍박가운데도 그들끼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서로 나누었다. 또 지하동굴에서 비밀리에 예배 볼 때에 이 고백의 각 단어의 헬라어 이니셜을 딴 ‘익투스(fish)’라는 단어로 신자임을 드러내는 일종의 암호로 사용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이 익투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예수를 믿는 믿음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로마 당국은 각 식민지 국민들에게 자기들 고유의 종교를 믿는 자유를 인정해 주었다. 말하자면 기독교를 믿되 황제도 믿어라고 요구했는데 형식적으로 말로만 시인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따로 믿어도 봐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지만 유독 예수 믿는 신자만은 입술로도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날 신자가 자동차에 물고기 표시를 다는 뜻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과 삶의 주인입니다”라는 고백이다. 풀어서 말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른 어떤 것 심지어 내 생명과도 바꾸지 않겠으며, 예수님이 죽어라고 하면 언제든지 죽겠습니다”라는 표시다. 과연 신자들이 그런 헌신을 바탕으로 실제로 그렇게 살면서 그 표시를 달고 다니는 것일까?

한국인들의 신앙 생활

예수님은 신자가 누리는 마지막 8번째 복은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최후에 받는 복이란 신자가 긍극적으로 도착되어야 할 목표요, 그래서 반드시 받아야만 할 복이요, 더 이상 받을 다른 복이 없는 최고 최상의 복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 증거이기도 하다. 역으로 말하면 핍박을 받지 않으면 성숙한 신자가 아니라는 뜻이요, 최고 최상의 복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 솔직히 어떠한가? 현재 핍박을 받는 복을 누리고 있는가? 이슬람의 선교사로 간다면 모를까 완전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된 21세기의 미국에서 예수 믿는 것으로 핍박 받는다고 하니 우습게 들리는가? 그렇다고 신자 모두가 선교사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도 아닐 테고… 그럼 질문을 한 번 바꿔 보자. 핍박을 받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은 확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소원은 하는가? 이 부분에도 자신이 없는가? 그럼 예수님이 거짓말 내지는 헛소리를 했다는 말인가? 신자가 그렇게 살기는커녕 마음에도 와 닿지 않는 말씀을 하신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한국 신자들은 거의가 신앙 생활을 세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해서 한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다. 주일 날 교회 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구역예배와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하며, 집에서도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을 열심히 갖는다. 둘째는 예수를 ‘증거하는 생활’로 전도폭발이나 사영리를 이용한 전도 훈련 등을 받아 노방 혹은 개인 전도에 열심을 낸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신자답게 ‘실천하는 생활’로 식사 때마다 기도를 간절히 하고 집안에 성구나 그림을 걸고 찬양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는다. 신자들끼리 모여 거룩하고 고상하게 교제를 나눈다. 조금이라도 세속적 사건이나 유흥의 냄새가 나면 마치 징그러운 것을 본 양 소스라친다.

그런데 신앙 생활의 거의 모든 포커스를 그 중에서도 첫번 째 믿음 생활에만 둔다. 둘째 증거 생활, 셋째 실천 생활은 조금 등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강해야  힘든 일을 이겨내고 주위에 전도도 잘 할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선 믿음을 키워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것도 예배, 성경공부, 기도 모임에 얼마나 성실히 출석했느냐에 따라 비례해서 생각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신자가 핍박을 받는 문제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 생활이 방해 받는 것에 한정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 가는 아내를 두들겨 팬다든지, 시부모가 예수 믿는 며느리 때문에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다고 구박하는 것들이 핍박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나아가 남편이나 시부모로부터 받는 박해를 마치 초대 교회 신자들이 카타쿰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것에 견주기도 한다. 남편과 시부모는 로마 제국으로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가 되고 자신은 거룩한 순교자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은 흔히 생각하듯 세상 사람이 예수를 믿고 증거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제 3의 핍박

한국인들이 거의 무시하고 있는 제 3의 핍박, 신자라면 누구나 겪고 겪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핍박은 따로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방해와 억압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 속세를 등지고 수도원에 가서 세상 사람들과 상대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힘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녹아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알아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삶의 목표와 기준으로 삼은 자다.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이 이것이 맞다고 하면 신자는 아니다 이것은 틀렸고 저것이 맞다고 하며 항상 정 반대의 길을 가니까 서로 충돌하여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은 신자를 불신자가 볼 때에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또 그에 따라 신자가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핍박의 시작이자 본질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을 말해 핍박하는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신자가 이상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가 항상 갖는 불만은 “그렇게도 열심히 믿었는데 왜 내 모양은 아직도 이 꼴이지?”이다. 여전히 세상과 같은 방향을 가고 있으면서 조금 뒤친 것만이 안타깝다. 그렇다면 성경공부와 새벽기도에 아무리 열심히 참석해도 예수 믿어 바뀐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심하게 말해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니다. 신자가 바뀐 것이 없으면 세상은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대신에 조롱만 한다. 예수 믿어도 별 수 없고 우리 보다 돈을 더 밝히면서 비겁하게 스스로 노력할 생각하지 않고 절대자의 힘을 빌리려 한다고 말이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의 본질은 세상에서 유턴(U-turn)한 것이다. 더럽고 추한 죄악과 눌리고 매인 흑암의 세력에서 뿐 아니라 허망하고 아무 의미와 가치 없는 사고와 말과 행동으로부터도 완전히 등을 들리는 것이다. 대신에 의와 생명과 은혜가 넘치며 평강과 자유함이 충만한 하나님의 빛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삶이란 출퇴근 때에 서울 지하철역 계단에서 모든 사람이 밑으로 내려가는데 혼자서 거슬러 올라 오는 것과 같다. 내려 오는 사람은 그 방향이 맞다고 최소한 틀린 것은 아니라고 고집하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분명히 확신한다면 다른 쪽으로 아무리 많이 가더라도 함께 갈래야 갈 수가 없다. 다 같이 휩쓸려 내려 가는 것은 너무 쉽고 편하지만 역으로 거슬러 올라 갈 때는 반드시 강한 반발력이 생겨 힘이 들게 마련이다.

만약 미국 영주권을 준다면?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핍박 받은 일차적인 이유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그것을 전파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활발하게 전도하기 보다는 믿는 자들끼리 모여 예배 보는 단계였다. 단지 로마 황제에 대한 예배 증명서, 요즘식으로 말하면 신분증이 없는 불법체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미국처럼 불법이 탄로나 국외 추방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투옥되고 모든 부분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오늘날의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의 동상을 만들어 세운 성전에서 그에게 일년에 한 번 절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영주권 내지 시민권을 주고 그에 따른 모든 혜택을 받도록 해 주겠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종교적 절개를 지켰다는 정도가 아니다. 당시 로마황제 숭배 예식에는 꼭 술, 음식, 여자가 나오는 음란 파티가 따랐다. 말하자면 영주권은 포기해도 그런 짓은 죽어도 못한다는 것이다.

또 당시 로마 제국은 전쟁 포로나 식민지 백성을 노예로 삼아 모든 일상적인 일을 감당하도록 했다. 노예가 없으면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로마 시민 한 명이 평균 4명의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종이나 노예)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함이 없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엡6:9)는 말씀 그대로 실천했다. 노예나 주인에게나 상전은 오직 하나님 뿐이므로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했다. 노예를 쓰지도 않고 쓰던 노예를 풀어 주었으며 예배에도 같이 참석했고 심지어 로마 법으로 절대 금지되었던 결혼까지 했다.  

이 일도 요즘식으로 비유해보자. LA 자바 시장의 봉제 공장에 불법체류자 멕시칸을 시간당 최저 임금의 몇 배를 주며, 의료 보험과 산재 보험을 들어주고 때때로 보너스를 지급하며, 영주권까지 회사에서 신청해준 셈이다. 그렇게 해서 회사가 경쟁에서 살아 남겠는가? 혹시라도 동기부여가 되어 생산성과 품질이 향상되어 채산성에 차질이 없다 쳐도 동업자들로부터 완전히 왕따를 당한다. 아마도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고 고발 하던지 조직 폭력배를 동원해 공장 시설부터 다 부셔버릴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를 믿거나 증거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예수 믿는 자답게 살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다. 로마 사람들이 신자로부터 지하 동굴 예배에 같이 참석하여 예수 믿으라고 요청 받은 것이 아니다. 비밀 첩보원들이 접선하듯이 물고기 그림을 내보이면서 신자들끼리만 모여 조용히 예배를 드렸다. 대신에 신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들의 삶과 존재와 인생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와 빛을 발했다.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로선 신자들이 비추는 그 빛이 싫어서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오늘 날의 신자도 과연 그렇게 하고 있고 또 동일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4:1-4)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음란과 술 취함과 무법한 (황제의)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초대 교회 신자들을 저희가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다. 저희들로선 그런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정상이었다는 것이다. “저 놈들 좀 이상한 것 아닌가? 황제에게 절만 한 번 하면 술, 여자, 영주권 다 주는데…”    

신자는 세상에선 전혀 죄가 안 되며 심지어 남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제도, 관습, 유행, 풍조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 죄가 되면 절대 범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도 아무 보는 사람이 없어도 그래야 한다.

물론 신자도 이전에는 잘 몰라서 그런 일에 탐닉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진정으로 구주로 영접하면 도덕적 죄책감이 들기 전에 그 모든 것들이 추악해 보이며 죄악의 냄새가 나서 저절로 역겨워진다. 또 그 속에 사단의 거짓, 미혹, 사기, 궤휼이 숨겨져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세상은 신자를 이상하게 보지만 신자 또한 세상을 이상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갑자기 거룩해지고 고상해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영혼이 깨끗이 씻긴 후 성령님이 내주하기 때문에 신자가 더럽고 추한 것에 가까이 가면 성령님이 역겨워 하는 감정이 우리 영혼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대신에 자꾸 빛과 거룩과 생명이 넘치는 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준다. 그래서 죄악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옛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제발 저들도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 오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소크라테스의 친구 가운데 그 사상과 철학의 수준이 그에 뒤지지 않는 알키비아테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무절제한 생활을 하며 쾌락에만 탐닉했다. 어느날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나는 자네가 너무 싫네. 자네와 함께 있으면 내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워지네”라고 실토했다. 소크라테스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니었지만 비유컨대 신자는 불신자들 앞에 그런 존재로 서 있어야 한다.

외눈박이 원숭이 우화를 잘 알지 않는가? 외눈박이끼리 모여 살 때는 자기들이 병신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어느날 두눈박이 원숭이 한 마리가 출현하자 오히려 두눈박이를 이상하다고 몰아세우며 한쪽 눈을 없애려 하고 정 말을 안 들으면 죽여버린다. 원숭이 이야기가 아니라 원숭이에게서 진화(?)한 인간의 이야기다. 진화를 믿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가장 절친한 친구의 잘 나가는 꼴마저 속이시려 잘 못 본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다르다. 외눈박이 동네에서 얼마든지 홀로 살아가는 두눈박이여야 한다. 그래서 “두 눈이 맞다. 절대로 외눈은 병신이다”라고 외쳐야 한다. 한 쪽 눈이 상하든 심지어 그 일로 목숨이 날아가도 우리는 인간이지 원숭이가 아니라고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선언해야 한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네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오늘날 진화를 신봉하는 많은 서구인들에게 간음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신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 죄를 범했으니 그럴 때는 차라리 눈을 빼어야 한다. 문자적으로 인두로 눈을 지지라는 것이 아니다. 간음을 죄로 여기기 않는 사람들 앞에 지옥 불에 떨어지는 죄라고 선포하고 또 그렇게 살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되돌아 오는 모든 불이익과 박해를 감수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핍박의 본질이다.    

신앙 생활에서 믿음, 증거, 실천 생활이 별도로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하나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예배, 기도, 전도 뿐 아니라 사업, 공부, 직장,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참 생명이 드러나야 한다.

물 한 잔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수임을 확신하고 진정으로 감사함으로 마셔야 한다. 라면 한 그릇을 먹더라도 신자니까 식사 기도를 했느냐 따지기에 앞서 정말 맛있게 먹고 그 식사 가운데 진정으로 화목하는 말들이 오가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동차에다 물고기 표시를 달고 다니는 것으로 신자 된 표시로 삼지 말고 그것을 부쳤으면, 아니 부쳤거나 안 부쳤거나 간에 교통 법규 위반은 절대 하지 않고 남들에게 양보하는 운전을 해야 한다.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거나 등한시 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한 것으로 신자가 해야 할 일을 다한 양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한국 신자식으로 하면 첫번째 예수를 믿는 일만 한 셈이다.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를 자기 생활에 실천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신자가 기도하지 않고 성경 보지 않고도 신자답게 살 수 있으리라고 절대 기대해선 안 될 뿐 아니라 현실적 환난과 시련에서 구원 받으리라고 꿈도 꾸어선 안 된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서만 역사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나는 아직 하나님보다 세상에 속했다고 생각한다면 기도와 말씀에 등한해도 된다. 어차피 하나님과 관계 없으니 그렇게 해도 아무런 능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하고 성경 보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은 세상에서 왕따 당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최후, 최고의 복 이외에 신자가 목적지로 삼아야 할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는 세상에서 핍박 대신 대접 받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 보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핍박은 이슬람 선교사 같은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모두에게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세상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어깨끼리 조금 부딪히는 정도를 두고 핍박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껏 세상 사람과 부딪히는 것을 슬쩍슬쩍 피해가며 서로 피해 주지 않는 것으로 신자가 할 일을 다한 양 착각해선 안 된다. 그들과 가는 방향이 정 반대여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어차피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고 핍박이 자동적으로 따라 와야 한다.  

차에 물고기 표시를 달고 예수를 주라 고백한 자는 자기 삶의 전부를 온전히 예수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형통케 해 주시는가? 아니다. 이전에는 세상과 죄악과 사단이 자기와 그럴 수 없이 친했던 동업자요 협조자였던 것이 이제는 훼방자요 핍박자임을 똑똑하게 알게 해주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세상의 방해와 핍박이 오히려 주님 안에서는 얼마나 큰 축복인 줄 온전히 깨닫게 해 준다.  

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지하 동굴에 물고기를 암호로 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모였는가? 생명보다 주의 인자가 더 좋음을 날마다 체험하고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예수님의 7가지 복을 다 누린 후 8번째 복마저 차지하지 못한 자들이 없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신자만의 비밀을 알았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라는 증거를 지녔는가? 가장 성숙한 신자의 표시가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핍박이 정말 좋은가?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가?”(행5:41)


김순희

2011.02.07 13: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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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정말 대단했군요. 그런데 요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는데 이런 핍박과 고통을 달게 받겠다고 깊이 생각하고 외치는 구호인지, 그저
멋스럼을 위해서 외치는 구호인지...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온통 삶으로 해야함을,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은
대접 받으려 하는 일이 아니고 세상에서 왕따 당하려 하는 일인 것을 이 시간 또
배웁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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