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요6:9)

▣ 들어가기

▲ 어린 시절, 흥부 부부가 박을 타고 거기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대목에서, 엄청난 흥분에 압도되어 정신없이 박수치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 그리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에서 “열려라 참깨”라는 비밀열쇠를 알아내어 막대한 보물창고의 문이 열렸을 때 함성 지르던 기억도 날 것입니다.

▲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지 권선징악의 교훈만 아니라, ‘풍성한 보상’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인공들의 공로나 공적에 비해 보상되는 재물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오늘날의 복권과 같다 하겠습니다.

▲ 그렇다면 천지문물의 창조주요 소유주이실 뿐 아니라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눅6:3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이런 보상을 해 주신 사례가 없는지 궁금해 질 것입니다.  

▲ 성경을 열심히 찾아 봤더니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오기는 하는데, 위 동화에 비해 너무 초라한 것 같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쫀쫀해도 너무 쫀쫀해서 상대가 안 될 듯싶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들로도 떡을 만드실 수 있는(비록 예수님은 거절하셨지만=마4:3)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것 같습니다. ‘기왕 이적을 베푸실 바에야 차고 넘치도록 풍성히 하시면 안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 얼핏 보기에 인간들의 보상에 비해 형편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경에 기록된 쫀쫀한 이적들

▲ 일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적 가운데, 무척 쫀쫀하다는 생각이 드는 곳을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1곳씩만 살펴보겠습니다.  

▲ 먼저 구약에서,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은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 왕상 17장은 아합 왕을 징계하기 위한 3년 반의 가뭄이 시작될 때의 이야기입니다. 장기간의 가뭄(기근)을 극복하도록 엘리야를 이끄신 하나님의 계획도 그리 풍성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까마귀로 하여금 고기를 물어다 엘리야를 먹이시고, 가뭄이 더 심해지자 시돈 지방의 사르밧으로 보내어 과부의 시중을 받게 하십니다.

  ○ 과부는 엘리야에게 “식량이 다 떨어져서 마지막 떡을 하나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힙니다.

  ○ 이에 대한 엘리야 선지자의 처방이 참으로 희극적입니다.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것은 아주 점잖게 표현한 말이고, 실제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네가 죽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고, 내 배 고픈 것이 더 큰 일이니 우선 내 떡 먼저 만들어라.’

  ○ 물론 그렇게 하면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다는 예언의 말씀이 뒤따르지만, 당시 과부에게 이런 말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맘씨 좋은 과부라서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삼년 내내 가루와 기름이 끊이지 않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 문제는, 기왕이면 쌀도 주시고 고기도 주시고 갖은 양념 다 주시지, 겨우 가루와 기름밖에 안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쫀쫀하다는 생각이 아니 드십니까? 좀 더 화끈하게 풍성히 주시면 안 되었을까요?

▲ 크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라 생각되신다면 신약 한 곳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 구약시대야 어리석은 시기였으므로 그럴 것이고, 좀 더 깨인 신약시대로 오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가 될 만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전히 쫀쫀하신 것 같기만 합니다.

  ○ 오늘 본문입니다. 유명한 오병이어 이적이지요. 4복음서 모두가 다룰 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은 조금 무성의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요한 사도는 아주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여 지극히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병이어의 촉매가 바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 오병이어 -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 분량에 불과한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 이적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밥을 싸가지고 집회에 참석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겨우 어린아이 한 사람의 도시락으로는 수천 명에게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반응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합니다. 마14:17절의 “뿐”(only)라는 단어가 그 증거입니다.

  ○ 이 아이는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식사를 내어 놓았을까요? 이것저것 따져보고(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하여)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5천명이 충분히 나눠 먹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어 놓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추측컨대 얼떨결에 내놓았거나 아니면 망설이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내놓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만약 조금의 망설임이라도 있었다면 이는 ‘어린아이의 손을 비틀어 밥을 빼앗은’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제자들(어른들)이 자기 밥을 빼앗아 예수님께 가져가는 바로 그 순간에 느꼈을 아이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 혼자 먹으면 그런대로 배부를 수 있는 도시락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심사는 아무리 줄잡아도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 아무튼, 기왕 이렇게 된 것, 주님께서 인심 좀 쓰셔서 더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그 조악한 보리떡(옛날 보리개떡 먹어보신 분들은 보리떡이 결코 부자들의 음식이 아님을 금방 눈치 채실 것입니다) 대신 영양가 있는 쌀떡을 주실 수 없으셨을까요? 물고기도 갈릴리 바다에서 무진장 잡히는 싸구려 고기랍니다. 맛도 별로 없고 그저 천민들이 마지못해 먹는 그런 반찬입니다.

  ○ 기왕 이적을 베푸실 바에야, 이 가난한 백성들이 평생 먹어보지 못한 기름진 음식 한 끼 먹이는 것이 주님께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를 남겨 주실 바에야, 최고급 요리로 배불려 주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신약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씀씀이는 나아졌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약과 동일하게 쫀쫀하다는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 삼박자 축복은 없다!

▲ 우리 인간들은 모든 일을 인간 위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땅찜(고향 사투리로서 ‘짐작’이라는 뜻입니다)도 못하면서 알량한 인간의 추론을 진리인양 착각하며 목청을 높이곤 합니다.

▲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삼박자 축복’으로 재미 톡톡히 보신 분(J 목사)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온통 축복의 종교인양 “복! 복! 복!”만 외침으로써 세계 최대의 교회를 만들었고 주일 헌금만도 수억 원이 넘는다는 풍문이 파다합니다(제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풍문’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지금도 J 목사님이 쓴 ‘삼박자 축복과 오중복음’이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 좋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복을 노래하는 것이야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을 인간의 복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내지 기복주의적 사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J 목사님은 “만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못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므로 성도는 모두 잘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럴듯하지요?

▲ J 목사님의 생각이 얼마나 짧은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 인물 중에 부유하게 산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게 산 성도들도 많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엘리사는 본래 부자였으나 하나님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극빈자가 되고 말았습니다)도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말할 필요가 없고, 사도 바울도 가난했습니다. J 목사님의 지론대로라면 엘리야/엘리사/나사로/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나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엉터리로 믿었기에 그처럼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 하지만,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꼭 백만장자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희 씨 정도 살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억 원 이상의 재산이 참 믿음의 기준이 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 중에서 구원 얻을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J 목사님의 사고는 편협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인기 대중가요 중에 ‘네박자 꿍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속한 유행가라고 폄하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가사를 조용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제법 그럴듯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J 목사님이 쓴 신앙관련 서적이 오히려 대중가요보다 통이 작다는 느낌(삼박자는 네박자보다 작으므로)은 저 혼자만의 오해인가요? 제발 그렇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과 부가 밀접한 관계를 지니지 않는다는 진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빈부가 참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일 수 없습니다. 믿는 자가 못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부와 참 신앙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마19:24). 주님의 이 반어적인 강조의 의미를 깊이 숙고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도 이를 다시 보충해 주셨습니다(약2:3).

▲ ‘잘 믿은 대가로서의 삼박자 축복은 없다.’는 진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성도의 빈부는 일종의 일반은혜일 뿐, 믿음의 척도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기초적인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그래도 넘치는 축복 - 그 출발점은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사탕(도시락)이었다!

▲ 삼박자 축복이라는 헛다리짚은 목사님의 오해는 상당수의 성도들도 피하기 쉽지 않은 우리 신앙의 허상이라 할 것입니다. 즉, 우리 신앙을 이 세상 자랑(부귀)과 결부시키려는 인간의 고질적인 욕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일부 성도들의 오해를 정당화하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어찌 보면 쫀쫀하다싶을 정도로 통이 크시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가루와 기름, 어린아이의 보리떡과 물고기가 고작일 뿐입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정도의 은혜만 내리실 뿐입니다.

▲ 그러나 이제 다시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위의 2가지 예에서 비록 진수성찬을 받지는 못했으나, 필요한 기간 동안 먹고 사는데 완전히 충분한 음식을 공짜로 얻었다는 진리입니다. 정말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출16:18). 굶거나 영양실조에 걸린 백성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필요한 수준에서 완성됩니다. 필요한 기간에 필요한 양으로 한정됩니다. 이러한 지혜를 이해해야만 엉뚱한 삼박자 축복 등의 오해에 현혹되어 쓸데없는 헛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 자, 이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는 부분을 다룰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준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나 오병이어 이적에서, 이적을 촉발시키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루와 기름 그리고 보리떡과 물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 이것들의 분량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적은 양입니다. 한 두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에도 충분치 못한 보잘것없는 소량입니다. 그래도 이 소량이 그 본래의 소유자에게는 무척 소중합니다.

▲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아주 적은 양을 지닌 과부와 어린아이에게서 그 소유를 빼앗으십니다. 포기케 만드십니다. 그리고 난 후에야 다시 채워주십니다. 수십배 수백배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수십배 수백배가 세상 기준에 따른 셈은 아닙니다. 원 소유주들(과부와 아이)에게는 이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은 정도의 미미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덕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봅니다. 과부의 덕을 엘리야가 보았고, 어린아이의 덕을 5천 명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

▣ 나가기.

▲ 주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늘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려야 하는 성도들에게는, 차라리 흥부처럼 박 씨라도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생길만 합니다. 삼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부추기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상고해본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다지 통이 크신 분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표 나지 않은 정도의 조금만 해결해 주시는 분 같습니다.

▲ 맞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결코 복권이나 빠찡코 등을 통해 대박을 터뜨려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아주 작은 분량에 만족할 줄 아는 슬기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조금 주신다면 그게 바로 내게 필요한 적정량인 것입니다. 지금 나의 경제상황이 내게는 가장 적합한 것일 수 있습니다. 꼭 백만장자가 되어야 올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런데, 출발점은 언제나 작은 포기로부터 입니다. 과부와 아이의 포기가 엄청난 주변의 얻음으로 변화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께서는 오늘도 ‘아주 작은 내 것을 포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서 사탕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더 풍성한 선물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 비밀을 깨우친다면 우리는 좀 더 평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신앙의 물질관에 대해 제대로 짚어봤으면 합니다.  ♣

김문수

2007.04.21 12:14:59
*.74.198.47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누가복음 21장


하나님 !!!!!!!!!!!!!!!!!!!!!!!!!!!!!!!!!!!!!!!!!!!!!!!!!!!!!!!!!!!!!!!!!!!!!!!!
긍휼을!!!!!! 은혜를 !!!!!!!!!!!!!!! 마라나타 !!!!!!!!!!!!!!!!!!!!!!!!!!

순태 형님 !!!!!!
필승 !!!!!!!!!!!!!!!!!!!!!!!

성민기

2007.08.03 04:23:27
*.170.5.247

공의의 하나님은 그사람이 가진 분량 만큼만 믿음을 주심을 알게한 글입니다.
평소 저의 마음을 읽은것 같읍니다.
십자가에 온전히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육신을 죽여야만,
그리고
죽었다고 믿는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이
나의 거듭난 생명이된 참 성도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읍니다.
믿음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확인 해주신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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