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중신아비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조회 수 1290 추천 수 86 2007.05.19 12:39:21
♣ 고전3: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현대교회의 난맥상을 진단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지적되곤 합니다. 교회 외적으로는 사회적/윤리적 환경 등도 고려될 것이고, 교회 내적으로는 성도들의 인식과 이해 등도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의 지적과 같이, 저 또한 목회자의 책임을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현실교회에 있어서 목회자로 인해 촉발되는 난맥상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바른 위상을 찾지 못하고 교회의 난맥상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자로 작용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든지, 자질이 부족하다든지, 신앙관도 바르고 자질도 괜찮은데 욕심에 사로잡혔다든지 등의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목사관의 오해를 주요 원인으로 꼽습니다. 현대교회의 목사 직분은 지나치게 과평가된 면이 있습니다. 솔직히 구약의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과 신약의 사도와 감독과 장로 등 성경에 나오는 모든 리더십의 총체가 바로 목사인 것처럼 심히 왜곡되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 지적하듯이 이러한 오해는 천주교의 사제론에 사로잡힌 착각일 뿐입니다. 목사는 이처럼 교회의 독단적 리더십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수 리더십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제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라고 여겨집니다.

본문에 ‘사역자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또 ‘거룩히 구별된 특등성도인 목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지레짐작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역자는 헬라어 디아코노이(diakonoi)로서 그냥 ‘집사들’(deacons=servants)을 의미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히려 “믿게 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위상을 정확히 지적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전혀 모르는 신랑과 신부를 서로 소개시켜주고 결혼에 이르도록 다리 놓아 주는  중신아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단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결혼이 진행될 즈음이 되면, 묘하게 그 중요한 중신아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서로를 연결시켜준 중요 인물임에도 그 어느 곳에서든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찾으려 하는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신아비는 단지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입니다. 소개 이후까지 관여하려고 한다면 웃음거리밖에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랑과 신부가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도 중신아비랍시고 이런 저런 간섭을 하려 한다면 이는 가장 볼썽사나운 꼴불견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은 자로서 예수님을 소개할 책임을 진 사람이기에 중요합니다. 하지만 목사의 직무(예수님 소개)가 아무리 중요해도, 적절한 시기에 빠져 줘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예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가꾸어 나가는데도 목사가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신아비가 부부의 살림살이에까지 관여할 수 없듯이, 목사도 주님과 성도 개개인의 교제에 관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사가 주님과 성도의 교제에 간섭한다면 이는 성령님의 능력을 인정치 않는 망발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능력이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아무 제한없이 그 성도를 주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양육하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여, 언제까지나 목사가 끼어들려 해서는 아니 됩니다.

현실교회 난맥상의 상당부분은 목사들이 중신아비의 역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함으로써 촉발되는 것들입니다. 빠져야 할 시기에 빠지지 않고, 잔치가 끝날 때까지 주요 인사로 대접받겠다는 허무한 욕심의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0세가 넘도록 담임목사 하겠다는 사람, 자식에게 대물림하면서도 얼굴색 무변인 사람, 수억 원을 넘어 수십억 원 대의 연봉을 챙기는 사람, 목사에게 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 하는 것이라며 엉뚱한 설레발치는 사람, 평신도가 감히 목사에게 대꾸한다고 게거품 무는 사람 등, 한도 끝도 없습니다.

목사 스스로가 중신아비임을 자각하고 성령님과 성도 각자에게 맡기는 당당함을 보일 때, 현실교회의 굴곡된 모습들은 보다 쉽게 회복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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