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변형사건의 의미=일상의 중요성

조회 수 1685 추천 수 108 2008.03.29 02:05:15
♣ 마17:1-20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2절)


◉ 주님의 변형기사는 기독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입니다. 신앙 차원에서의 해석은 목사님들의 가르침을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설교 본분으로는 물론 보충설명을 위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 원하는 이유는, 사실 본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상당한 혼동(착각 내지 오해)을 초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 제가 가지고 있는 의구심의 핵심은 「변형사건을 일상(日常)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또는 비상(非常)으로 해석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의 ‘일상과 비상’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라기보다 개인적 의미로 사용했음을 말씀드립니다. 즉, ‘일상’이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반복적 일반 사건’을, ‘비상’이란 ‘특정인의 비반복 특이 사건’을 뜻합니다.

◉ 위와 같은 개인적 의미를 적용할 때, 주님의 변형사건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비상’ 사건입니다. 주님께만 해당되는 비반복적 사건인 것이지요.

  ○ 사실 성경에는 각종 기적과 이적과 기사와 표적 등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악과 취식 사건, 홍해 사건, 반석 사건, 요단강 사건,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 예레미야의 오지병 사건은 물론이요, 주님의 치유 및 십자가 사건, 베드로와 바울의 소생 사건 등등도 모두 해당됩니다. 모두가 ‘비상’ 사건들인 것입니다.

  ○ 원론적으로 성경의 비상사건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현된 비반복적 일회용 사건’입니다. 홍해가 두 번 갈라질 수 없으며, 주님께서 두 번 십자가 지실 수 없으십니다! 너무나 명백한 논리입니다.

  ○ 따라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비상’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비상’의 가장 큰 특징인 ‘비반복성’을 철저히 적용해야 합니다. 일단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의 비반복성을 인식하고 해석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 그런데, 만약 성경을 오직 ‘비상’ 개념만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전형적인 역사(과거를 단순하게 기록해 놓은 것)와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성경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실제로 필요한 요령 중에는 ‘비상과 일상의 화합’을 읽어낼 줄 아는 슬기도 포함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비상사건들(기적과 이사 등)이 어떻게 오늘의 나와 연계되는가?’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비특성 가운데는 ‘비상이 다시 일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 이상과 같은 관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구절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새로이 살펴보겠습니다.

◉ 변형사건을 기술한 오늘 본문은 3단계로 구분됩니다. 변화산 위에서의 사건(1-8절)과 하산 도중의 대화(9-13절)와 산 아래에서의 치유 사건(14-20절)입니다.

  ○ 먼저 변화산 위에서의 일입니다.

    -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불명확합니다. 1절에는 그냥 “높은 산”으로 기술되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도 일치되지 않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스라엘 영토 밖의 헤르몬 산이라 하고, 혹자는 갈릴리 호수 서남방에 위치한 다볼 산이라고 합니다만, 확증된 이론(주장)은 아닙니다.

    - “변형되다.”라는 헬라어의 의미도 따져 봐야 합니다. 영어로는 ‘was transfigured'이고, 헬라어로는 ‘메타모르포우’(metamorphoo)를 어근으로 하는 ‘메타모르포세’ (metamorphose)가 사용되었습니다. 의미는 ‘변화를 받다. 변화되다.’입니다. 헬라어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직설법/과거/수동태/단수/3인칭’으로서, 영어와 마찬가지로 ‘수동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변형사건은 주님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의한 피동적 사건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 왜 이점을 지적하느냐 하면, 우리 기독신앙은 ‘능동’(쟁취)이 아닌 ‘수동 내지 피동’(은혜)에 기초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하겠습니다>. (‘변형되다’라는 단어는 롬12:2, 고후3:18절 등 여러 번 사용됩니다).    

    - 한편, 같은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눅9:29절은 ‘메타모르포세’가 아닌 ‘헤테론’(heteron =  어근은 heteros)을 사용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다른/상이한/다음날/이웃’ 등입니다.  

    -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변형되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무슨 말씀들을 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해 토의하셨을 것이라고 합디다만, 어디까지나 선한(?) 추정에 불과합니다. 또 이런 저런 설명들을 듣게 되는 데, 딱히 증명되는 설교들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선한 추정 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방할 것입니다.  

    - 다음은 변화사건에 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입니다. 먼저, 놀라운 이적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이해)입니다(4절). 성급한 베드로가 “초막” 신앙을 고백합니다. ‘여기(이 현상)가 좋으니 여기서 살자.’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가 결정할 문제이니 예수의 말을 따르라.’고 하십니다(5절). 주님은 ‘겁내지 말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7절).

    - 이런 줄거리입니다. 제자들은 ‘좋은 곳(변화산 위)에서 우리끼리 살자.’고 (건의)했고, 하나님은 ‘예수가 결정하는 대로 하라.’고 (결정권을 위임)하셨으며, 주님은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결단)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좋은 곳’(변화산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나쁜 곳’(변화산 아래)에서의 삶을 위해 일어나서 내려가되 결코 겁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 위와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 산 위에서의 사건에 이어, 하산 하면서의 대화도 조금은 동문서답 같아 보입니다. 오늘 묵상과 관련하여 간략히 요약만 하겠습니다.

    - 변형사건을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까지는 비밀에 붙여두라는 주님의 당부에 대해 제자들은 ‘엘리야의 선행(先行)’ 문제를 묻고, 주님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 수행자임을 암시해 주십니다(13절).

    - 이 대화의 핵심은 12절에 있습니다. 엘리야로서의 사명을 띤 세례 요한이 참수형 당한 것처럼, 주님도 죽임 당하신다는 내용입니다.

    - 함축적으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 산 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영생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산과정은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 산 아래에서의 사건 전개입니다.

    - 간질병자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축사사역 실패를 주님께 하소연하고 주님의 꾸중과 치유 행위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제자들이 주님께 ‘왜 자신들은 이런 일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주님은 ‘적은 믿음’ 때문이라고 답하십니다(20절).

    ※ 참고로 20절도 아주 엉뚱하게 해석하는 대표적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도 옮기고 못 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기왕 하나님을 믿는다면 겨자씨 정도가 아니라 살구씨나 타조알 정도의 믿음으로 무엇이든 다 하자.’는 논리를 폅니다. 단 한 마디로 정리하지요. 아브라함과 다윗과 사도들을 포함한 그 어느 성경 위인도 ‘산은커녕 작은 언덕빼기 하나 옮긴 자가 없었다.’는 성경적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지녔던 성도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산 옮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때 접할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오늘의 주제와 거리가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 아무 희망도 없는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행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왕을 찾아 유다의 독립운동을 건의하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을 만나 종교개혁방안을 제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병자를 고치셨을 뿐입니다. 산에 오르시기 전에도 늘 하셨던 일상사였습니다! 변형체험의 흔적은 눈 닦고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일상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변형사건의 3단계 진행의 개략적인 내용을 짚어 봤습니다. 큰 흐름으로 다시 정리해 봐야 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본문을 보면 전혀 새로운 교훈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교훈입니다.

◉ 변화산 위는 영원한 삶을 사는 ‘좋은 곳’(조금 비약한다면 천국의 모형)을 상징합니다. 내려오는 과정은 ‘스스로 좋은 것의 포기’를 상징합니다. 단순 ‘포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장 악한 상황인 ‘죽음’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는 ‘현실의 삶’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뒤엉킨 홍진(紅塵) 세상입니다.

  ○ 놀랍게도 변형사건은 우리 기독신앙의 대요(大要)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좋은 분’(하나님)을 바라보되, ‘자아포기’(죽음)의 자세로, ‘현실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오랫동안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뒤틀린 신앙관을 지니고 신앙생활 해 왔습니다. 즉, 오직 위만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으로 신자의 임무가 완성되는 것처럼 배웠습니다. 천국만 가면 그만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능력을 행하기만 하면 금방 ‘하나님의 사람 내지 역사’로 규정해 버립니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설교들과 간증들이 거의 모두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일수록 겉보기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은혜로워 보일 것입니다.

  ○ 하지만 기독신앙은 ‘위의 좋은 것’을 지향하지만, 현재는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아래의 좋지 않은 것’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 참고로 21절은 ‘없음’ 표시가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성경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의 각주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본에 이 구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누락된 구절을 근거로, ‘기도와 금식’만 제대로 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또 다른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 일쑤입니다. 기도와 금식이 우리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나, 만능은 아닙니다. 정말로 성경을 깊이 읽는다면, 우리 신앙의 요체는 바로 ‘삶’에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 변화산에서의 변형사건이 이런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면 성경의 다른 곳을 통해서 이를 증거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이를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다르기에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당시 최고의 문명세계였던 갈데아 우르를 떠났던 사건이 그랬고, 주님께서 천국을 버리고 이 땅 오셨던 성육신 사건이 그랬고, 안전하고 아늑한 교회를 떠나 세상 끝으로 가야했던 제자들의 사명이 그랬습니다. 그래도 가장 이해하기 쉬운 구절 하나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양과 염소의 분별 기준을 알려주신 마25:31-46절입니다.

  ○ 주님께서 복받을 자들과 저주받을 자들을 분별하신 근거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주린 자와 목마른 자와 나그네 된 자와 벗은 자와 병든 자와 갇힌 자의 필요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즉, ‘약자(弱者=아랫것들)에게 어떤 처우를 했는가?’에 따라 복과 화가 결정되었습니다.  

  ○ 의인과 악인 공히 주님의 판결에 놀랍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감하기도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주 타당한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사회적 및 종교적 약자를 주님 본체로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고발이요 작금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약자 대접’은 인간들의 가치 항목에는 아예 포함되지 않습니다.

  ○ 의인과 악인 모두 주님께 하는 일이라는 의식 없이 행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기독신앙의 숨겨진 원리를 도출해 내어야 합니다! ‘기독신앙은 분명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인간을 위하는 모습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십니다! 성전도 필요 없고(아무리 큰 예배당이라 한들 하나님의 일부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돈도 필요 없고(십일조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맹종도 불필요합니다(인간보다 훨씬 순종 잘하는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의인이든 악인이든, 전혀 생각지 못한 기준을 가지고 판정하시자, 모두 놀랍니다! 우리도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견지해 왔던 기독신앙을 냉철하게 해부하여 그 비성경적 오해를 걷어 내야만 합니다.

  ○ 우리는 권세자에게 복종하고, 목사에게 순종하며, 다스리는 자를 공경하라는 구절들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소위 ‘가진 자들에게 맹종하는 것이 성경의 본래 뜻’인 것처럼 오해해 왔습니다. 이는 욕심을 지닌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인데, 지도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 만약 기독교가 이런 것이라면 이는 천주교/유대교/회교와 같고 불교 등 세상종교와도 같다는 뜻이 됩니다. ‘위를 지향하는 종교’(상향성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보다 뛰어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옳다.’라는 종교적 도그마(교리)에 발목 잡혀 버립니다(요즘 기승부리는 긍정신학, 축복신학, 방언신학 등도 이에 해당됩니다).

  ○ 성경 전체에 걸쳐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인간 강자에 대한 맹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약자에 대한 섬김을 통해 천국을 완성하시겠다는 계획)을 여기 저기 담아 놓으셨건만, 인간의 사상에 물든 우리 영성이 이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역시 가르치는 자인 목사들의 잘못이 너무 너무 큽니다).

◉ 서두에서 ‘비반복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상과 반복성을 특징으로 하는 일상’을 언급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변형사건(마17:2)은 비상사건입니다. 반복될 수 없는 이적입니다. 하지만 이 이적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인 것이지요. 어제와 같고 내일도 같을 그런 삶의 현상들과의 접촉인 것입니다. 이 일상의 중요성을 양과 염소의 구분사건(마25:31-46)에 비추어 검토해 봤습니다. 성경에 무수히 기록된 각종 기사와 표적들은 단순한 비반복적 비상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반복적 일상사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영적 원리를 보여주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들어왔던 설교와 다를 지라도,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래의 뜻에 더 가까이 간 교훈일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어폐가 있는 표현입니다만 그냥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뜻을 받으면 무난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물 흘리는 자/눌린 자들(힘없고 불쌍한 아랫것들)을 주님처럼 섬기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나보다 잘난 자에게 굴종하는 아부신앙을 벗어버리고, 나보다 못한 약자를 주님처럼 진심으로 섬기는 참 신앙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참 기독신앙은 성육신(하향성, 종의식, 포기)의 정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

조재춘

2008.03.31 06:37:45
*.29.165.87

‘좋은 분’(하나님)을 바라보되, ‘자아포기’(죽음)의 자세로, ‘현실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멘!!!
아하!!~~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삶임을 고백합니다.

믿지않는 부모의 핍박이 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그 부모를 공경하고 품고 주님이 교회를 사랑한것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나의 순종이 십자가입니다.

archmi

2008.04.02 11:52:46
*.230.0.93

아멘.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힘 없이는 나 보다 낮은 자를 긍휼이 여기며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저희에겐 없습니다.
세상의 불의와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께 배운 사랑을 이곳에 실천하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천국으로 가는 삶 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러 하셨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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