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23:15(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평신도인 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목회자로 부름 받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감사하도록 만드는 곳이 바로 마태복음 23장입니다. 이곳에서 경계 받는 이들은 분명 교회의 지도자들이고, 그 요구받는 내용들은 제 영성과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열거하시고 나서 이에 실패할 경우의 보응을 읽는 순간, 저의 감사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보지 못하리라.”(23:39b).
정말로 마태복음 23장은 목회자들의 생명줄과 같습니다. 항상 읽고 묵상하며 그 뜻을 되새기면서 목회자 사명의 막중함을 다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목회자들은 이곳을 설교하면서도 몽땅 평신도에게 덮어씌우려고만 하는 현실을 잘 압니다. 너무 서글픕니다).
오늘날 ‘방송’의 위력을 모르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와 천주교도 TV와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들보다 더 여러 개의 방송망을 보유하고 있어, 숫자 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가끔 기독교 TV 및 라디오 방송을 청취(시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자주 보았으나, 요즘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서 정말로 가끔만 볼 뿐입니다. 반대로 천주교나 불교 방송도 가끔 보고 듣습니다(역시 가끔입니다).
이처럼 천주교나 불교 방송을 종종 보면서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기독교 방송의 허망함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 방송의 순기능을 모르지 않습니다. 영상이나 전파를 통해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긍정적 효과를 증거하는 간증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역기능 또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듯싶습니다.
혹 불교나 천주교 방송을 청취해 보신 분들이 계신다면 쉽게 동의되실 것입니다. 이들 방송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 집니다. 특히 불교방송은 더욱 그런데, 간간이 교리 설명을 들어보면 너무나 논리적이어서 저절로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진리성과 연계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 방송도 상당히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반면, 기독교 방송은 매우 격한 감정을 수반합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나와서 수많은 설교들을 하는데, 어찌 그리 공허하게 들리는지, 너무나 착잡합니다. 온통 성경말씀으로 도배를 하기는 하는데, 왜 그리 생뚱맞게 들리는지요(골수분자 예수쟁이의 느낌이 이럴진대 타 종교인들이나 불신자들의 느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설교(간증 포함) 내용과 설교하는 당사자의 알려진 삶이 일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협화의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마23:3절의 말씀처럼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그대로 노정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15절)입니다.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 먼저, “외식”이란 헬라어 ‘휘포크리테스’(hupokrites)로서 ‘탈이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가면 배우’를 뜻하며, ‘외식하는 자, 가장하는 자’로 확장됩니다. 이 의미가 더 확장되어 ‘겉모양을 꾸며서 실제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로 전의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위선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뜻입니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신약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장로를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현대교회는 위상이 비정상적으로 격상된 목회자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는 지도자들의 활동목적을 말합니다. 이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전도활동을 전개합니다. 여기서 “교인”(프로세뤼토스=proselutos)은 ‘개종자/회심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인데 유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개종 후, 율법사들로부터 표면적 사상(유대율법)을 주입 당해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다운 개종자로 양성된다는 뜻입니다.
○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는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전도행위를 표현합니다. 이들은 대충 다니지 않습니다. 뚜렷한 목적과 열정으로 전도 대상자를 찾아 온 세상을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닙니다(마치 오늘날의 노방전도나 축호전도와 비슷합니다).
○ “생기면”(when he is made)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찌릅니다. 어렵게 한 명을 개종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의 효과가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만, 여기서는 축복받을 일이 아니라 저주의 전주곡이기에 가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 “너희보다”는 응당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스스로 최고의 신앙인이라 자부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자칭 신앙인’이 된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 “배나 더 지옥 자식”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단어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오류를 그대로 지적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 “지옥”(게엔나=geenna)은 히브리어로 ‘게힌놈’(Ge-Hinnom)인데 이는 ‘힌놈의 아들’의 의미로서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이라고도 합니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달리 말해, ‘죽음 이후의 벌 받는 곳’으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 “자식”(휘오스=uihos)은, ‘어린 아이, 아들’의 뜻이지만 ‘망아지’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우리나라의 ‘망아지 같다.’는 속어는 ‘쓸 곳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나 망아지처럼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무용지물 신자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 15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유대교인들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최선을 다해 전도하고 어렵게 한 명 얻으면 그를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다운 개종자로 만들지만, 쓸데없고 해로운 지옥 자식을 키워낼 뿐이다.》
○ 이렇게 요약된 내용에 대한 성경의 엄한 평가입니다. 15절 첫 단어는 “화 있을찐저”입니다. 최선의 전도활동에 대한 평가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 “화 있을찐저”의 원어는 ‘우아이’(ouai)(woe)로서 일차적 의미는 ‘아! 우!’라는 감탄사로 쓰이지만, ‘저주, 재앙’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어상으로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재앙’의 의미로 받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 마태복음 23장에는 일곱 가지 화(七禍)가 나옵니다(일부 사본은 14절의 누락된 화까지 합쳐서 8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양한 종교 활동의 결과가 어김없이 저주나 재앙의 한 축(7화의 한 가지)을 형성한다는 것이 23장의 설명입니다.
- 이러한 저주의 경계는 최종적으로 39절의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지옥으로 직행한다는 뜻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오늘날 전도의 사명을 모르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를 지상명령(至上命令=기독교 최고의 가치=마28:19-20)으로 여기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전도만 하면 된다는 사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전도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방송(TV 및 라디오)입니다.
이제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을 최대로 활용하여, 전도만 하자는 생각이 무척 성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비성경적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단상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애써 전도한 교인이 우리(나)보다 더 몹쓸 종교인이 된다면 감히 전도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지만 전도는 성도의 기본 사명입니다. 따라서 결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이처럼 생각해 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절의 “천국 문을 닫는” 죄악과 15절의 “배나 지옥 자식 만드는” 죄악은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전도 못지않은 ‘바른 양육’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외, 인간 측면에서의 바른 양육의 필수 선행조건은 ‘바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본(本)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의 요점은, ‘바로 서 있는 자의 바른 양육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전도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와 양육의 가치 비중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일 것입니다. ♣